<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은 죽기 얼마 전 마지막 글을 남겼다
야성을 송두리째 잃고 본능과 상상력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감히 창조할 자신이 없던 생산적 요소를 찾아 이 길 저 길을 헤매고 다녔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혼자 있으면 소심해지고 당혹감에 빠지는 무질서한 군중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독은 아무에게나 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고독을 견디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기 위해선 끈기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내게는 하나 같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무도 내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난 아는 게 별로 없다고!
하지만 조금을 알아도 그것이 나만의 지식이란 사실이 내게는 소중하다.
그 조금을 갈고 닦으면 거기서 위대한 무언가가 생겨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1903. 4)
고갱은 4월 중순 작품들을 볼라르에게 보냈다. 잠을 청하기 위해 약을 먹고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8일 동안 집에 혼자 있었는데 4월 30일 갑자기 어지러운 경련을 견딜 수 없어 이웃이 들을 수 있도록 커다란 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그는 이웃에게 목사 베르니에르를 불러달라고 청했다.
베르니에르가 달려와 보니 고갱이 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고갱은 밤낮을 구별하지 못한 채 헛소리만 질렀는데 동맥이 터진 것이었다.
고갱을 도와 ‘쾌락의 집’을 지은 이웃의 티오카는 매일 눈여겨보았는데 그가 밤낮으로 헛소리를 하자 5월 8일 아침 베르니에르에게 연락하여 와서 고갱을 보라고 했다.
티오카는 그날 아침 늦게 고갱에게 갔고 고갱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
주교 마틴이 장례식을 집도했다.
고갱은 마틴을 미워한 적이 있는데 이유는 고갱이 교회의 전속학교 여학생들에게 추파를 던진다고 마틴이 비난했기 때문이다.
마틴은 간소하게 장례식을 마친 후 교인들에게 주보를 나눠주었는데 주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아무런 흥미 있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갱이라고 하는 사람의 급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예술가이며 신의 적이고,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고갱의 유해는 그곳 가톨릭 공동묘지로 옮겨졌으며 십자가 아래 묻혔다.
주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는데 고갱이 묘비를 가질 만한 인물도 못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묘비912가 세워진 것은 20년 후였다.
행정사무관은 고갱의 유작들을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에서 경매를 통해 처분했다.
경매를 담당한 공무원은 화가 한 사람을 고용해 유작을 분류했는데 화가는 유작 대부분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도로 꺼내 경매에서 처분했다.
그 화가의 말로는 작품 대부분이 대가의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춘화와도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행자와 그곳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 그리고 파리에서 서둘러 온 친구와 화상들이 경매에 참여해 작품을 헐값에 구입했다.
그때 유작들이 모두 팔렸으므로 1965년 고갱이 거주한 적도 없는 파페아리에 고갱 박물관이 건립되었을 때 작품은 없고 사진들만 전시해야 했다.
고갱의 타계소식이 파리 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가 위대한 화가임을 알아본 볼라르는 그동안 구입해온 약 100점의 작품과 드로잉을 1903년 자신의 화랑에서 소개했다.
그는 투자면에서 고갱의 작품을 사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몇 년 전부터 다른 화상들이 소유한 고갱의 작품을 구입해왔다.
볼라르는 1906년 그해 창설된 가을전 Salon d’Automne을 통해 고갱을 회고전을 개최하면서, 무려 227점을 소개했다.
1906~7년에 베를린과 비엔나에서 회고전이 개최되었고 1908년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고갱은 먼저 타계한 반 고흐와 함께 후기인상주의의 대가 한 쌍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고갱이 대중은 자기에게 빚이 없지만 화가들이 자기에게 빚이 있다고 주장한 이유는 창작을 위한 예술가의 자유를 자신이 한껏 확장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원시적인 순진한 표현, 유연한 선의 사용, 밝은 색의 사용, 색들의 대비, 이차원적 화법, 추상에 대한 탐험 등은 그가 확장시킨 예술가의 자유에 대한 구체적인 것들이었다.
20세기 미술의 쌍둥이 아버지라 불리는 마티스와 피카소는 자신들이 원시주의를 20세기 미술에 소개했다고 내세웠지만 원시주의를 먼저 유럽에 소개한 사람은 고갱이었다.
훗날 『태고의 존재』, 『묘석』, 『르네레』 등의 저서를 남긴 빅토르 세갈렌은 스물다섯 살 때 해군 군의관의 신분으로 고갱이 사망한 이듬해 아투오나에 찾아가 고갱의 ‘쾌락의 집’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글을 통해서 고갱이 마르키즈 군도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장-폴 고갱은 괴물이었다.
다시 말하면 대부분의 인간을 묘사하는 데 충분한 그 어떤 도덕적·지적·사회적 범주에도 끼워 넣을 수 없는 그런 인간이었다.
범속한 무리에게는 판단이 곧 규정을 의미한다.
당신은 존경받는 사업가이거나, 청렴결백한 공직자이거나, 재능 있는 화가이거나, 가난하지만 정직한 보통 사람이거나, 양가집 규수다. 당신은 ‘예술가’일 수도, 심지어는 ‘위대한 예술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까다롭다.
조금이라도 다르게 되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범주화에 필요한 상투적 문구가 바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갱은 괴물이었다.
철저하고 오만한 괴물이었다.
한 가지 면에서만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신체 에너지는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맴돈다.
일상의 나머지 부분(집안 일, 의례적인 방문, 의무감)에서 그들은 전통적이며 평범하다.
이는 기질의 문제, 육체적인 타성의 문제다.
탁월한 재능을 겸비한 격정적인 작가가 왜소한 교회 관리인처럼 생겼을 수 있다.
천재가 반드시 빈틈없고 정확한 사람처럼 보이라는 법은 없다.
고갱은 이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말년의 그는 야심에 차 있으면서도 고통스러워하는 영혼으로 보였다.
그의 가슴은 올바름을 좇았지만 아무런 보답이 없었다.
그는 본인들이 마다하는데도 약자를 도우려고 했다.
도도했지만 남들의 의견과 판단에 어린애처럼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그는 원시적이었으며 거칠었다.
매사에 변덕스러웠으며 극단적이었다. …
고갱은 문둥병으로 죽지 않았다.
여하튼 그가 걸린 수많은 병명을 일일이 거론한다는 건 부질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는 단순히 병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병은 내면의 갈등과 패배감으로 악화되었던 것이다.
어린애 같은 갈등은 사소한 분쟁에 휘말린 이 숭고한 투사를 갉아먹었으며, 소송에서의 패배는 영광으로부터의 추락처럼 이 순수한 예술가가 감내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이제 섬의 황량한 심장부로 이어지는 웅장한 계곡은 저승사자의 길처럼 보인다.
부서진 축대 위의 키 작은 판잣집들은 자신들의 토착신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이제 인간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구름 한 점 없는 어느 서늘한 아침, 고갱도 그곳에서 죽었다.
고갱과 가까웠던 티오카라는 친구가 향기로운 꽃송이를 고갱의 머리에 두른 후 관습을 따라 고인의 몸을 모노이 기름으로 닦아낸 다음 구슬프게 뇌까렸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