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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4월
평점 :
형사의 방문을 받아본 사람은 인생의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배우게 될 것이다. 즉, 불행이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모르는 곳에서 제멋대로 자라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 말이다. 행복은 그 반대다. 행복은 베란다에 있는 작고 예쁜 꽃이다. 또는 한 쌍의 카나리아다. 눈앞에서 조금씩 성장해간다. (115쪽)
어느 시대건 선생이나 형사라는 권력의 앞잡이는 힘이 세다. 그들을 두들겨 패보아야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 쪽이다.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다. (중략) 지겨운 사람들에게 나의 웃음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싸움을, 나는 죽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253쪽)
정말 유명한 소설인데 이제야 읽었다. 대학 시절 일본 문학 서가에서 여러 번 마주쳤는데 왠지 모르게 손이 안 가서 안 읽고 있다가, 작년에 개정판이 나온 걸 보고 '이젠 제발 읽으라는 계시인가' 싶었다. 그래서 읽었고, 역시나 너무 좋았다. 이천 년대 소설이 아닌 건 알았지만, 무려 1987년에 발표된 작품이라니. 1987년이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발표된 해인가...
이야기는 1952년생인 작가의 고교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고 비틀즈가 전 세계를 휩쓸었던 1969년. 나가사키 현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겐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은 안 하는 문제아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노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겐은 어느 날 친구들 앞에서 '바리케이드 봉쇄를 하자'고 말한다.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인데 친구들이 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면서 일이 커진다. 설상가상으로 이 계획이 교내에서 제일 예쁜 여학생 '레이디 제인'의 귀에 들어간다. 이 일이 성공하면 '레이디 제인'과 사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꿈에 부풀어, 겐은 점점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데...
혈기왕성한 십 대 청소년의 유쾌한 모험담처럼 읽히지만, 동급생이었던 여학생이 미군 병사의 정부가 된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당시 나가사키 미군 기지 근처의 상황이라든가, 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교사들이 걸핏하면 학생들을 폭행했던 학교 현장 등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이 이어지는 사회 소설로도 읽힌다. 요즘은 이런 일이 없겠지만, 그때보다 학생들의 현실이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바리케이드 봉쇄도 그렇고 페스티벌도 그렇고, 겐이 한 일들을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일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친구들과 계획을 세우고 역할을 분담하고, 연극 대본을 쓰고 영화를 찍는 모습은 참 즐거워 보였다. 이렇게 십 대 시절을 보내면 왜 안 될까. 내가 다시 십 대 시절을 보낼 수 있다면, 일 년 내내 하루 종일 교실에서 공부만 하는 것보다는 친구들과 연극도 해보고 영화도 찍어보는 편을 택할 것 같다. 작가의 말대로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인데, 즐겁게 살지 않는 죄를 짓는 사람들이 (나를 포함해)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