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미트리스
앨런 글린 지음, 이은선 옮김 / 스크린셀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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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마치 한 편의 박진감 넘치는 영화를 본 것 같았다.

  이 소설은 읽기 시작한 때부터 다 읽을 때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름 그대로 영화로 만들어진 멋진 소설들을 펴내는 스크린셀러의 지난 번 책들에 퍽 만족하던 차라 이 책을 선택하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웨이백>이 그랬고, <미스터 버터플라이>가 그랬다. 소설의 두께는 518쪽으로 나같은 사람의 흥미를 끌기에 아주 알맞았다. 결코 단순하지 않을 사건과 분명 매력적일 등장 인물이 꽤 긴 시간 동안 나와 함께 할 것이 확실하니 말이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표지를 자세히 보니 영화의 장면이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라서 웃음이 나왔다. 주인공의 표정과 그 뒤에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의 모습이 책을 읽으면서 연상했던 그대로였다.

  소설은 역행적 구성을 하고 있다. 주인공 에디가 낯선 버몬트의 한 모텔방에서 지난 일을 반추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니 우리는 그의 삶이 구렁텅이에 처박혀서 곧 모든 게 산산조각이 날 운명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시작하는 것이다.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혹시나 에디가 더 나은 선택을 해서 그의 운명이 바뀌지는 않을까 기대를 걸곤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평범하다 못해 비루하기 짝이 없던 에디 스피놀라의 삶이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만큼 화려함의 정점을 찍고서 이렇게 급전직하하게 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모든 일은 2월의 어느 화요일 오후 4시쯤, 뉴욕의 12번 가와 5번 가가 만나는 모퉁이를 200미터 남겨두고 전처의 오빠인 버넌 갠트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에디의 삶에서 가장 근사하고 똑똑한 여자였던 멜리사의 오빠인 그는 마약 딜러였고, 그들은 10년만에 만난 것이다. 버넌은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었고, 에디는 스스로가 좀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만남 이후로 에디의 삶은 급속도로 달라졌다. 모든 일은 너무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에디는 버넌에게 얻은 약을 하나 먹고 너무도 다른 세상을 경험했다. 그 약은 에디를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 약 MDT-48은 예상대로 중독성이 강했고, 부작용도 너무 심했다.

  인간의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에디는 약의 효과를 느끼면 느낄수록 더 많은 약을 원했다. MDT-48은 자신의 삶을 더욱 파괴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현재의 고통과 욕망을 못 이기고 파멸로 치닫는다. 더 예버지고 싶고, 더 똑똑해지고 싶은 인간 욕망의 자화상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순간의 강렬한 욕망은 더 먼 미래를 보는 눈을 가린다.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커피를 지나치게 마시고 라면과 술을 장바구니에 넣는 나의 모습을 잠깐 떠올렸다. 실제 영화처럼 박진감이 있고 빠른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주인공 에디의 너무도 인간다운 연약하고 다정한 마음씨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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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예보
차인표 지음 / 해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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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에는 여러 스타일의 배우들이 있다.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 외모는 출중하지 않아도 뛰어난 연기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 여러 가지 재능과 끼가 많아서 그 인기가 외국에서까지 높아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우쭐해지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는 평소의 품행과 삶이 바람직하여 공인으로서도 한 개인으로서도 그를 생각하면 흐뭇해지는 사람도 있다. 배우 차인표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원어민 영어와 잘생긴 외모, 그리고 근사한 매너로 여성 팬들을 사로잡은 그는 외국의 팬들까지도 우리나라로 초청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상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입 밖으로 쉽게 말 꺼내기 어려운 입양에도 앞장 서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실천하는 그를 보면서 참 근사하게 나이를 먹어가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그의 연기 역시 그 깊이가 더해가는 것이 보이고 그 삶의 깊이가 연기와 함께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삶을 성의있게 아름답게 가꿀 줄 아는 그가 참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책을 펴냈다고 했을 때, 사실 좀 우려되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물론 다른 여러 유명인들처럼 자신의 인기를 이용하여 책을 팔아보려는 얄팍한 상술을 부릴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혹시나 그의 작품이 함량 미달이어서 그의 인품에 호감을 갖고 있던 내가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그로 인해서 그에게 팬들이 등을 돌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도 오지랖 넓게 했다. 그런 소심한 마음에서 그의 첫 작품 <잘 가요 언덕>도 읽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인터뷰에서 그가 했다는 말, "이젠 작가로 불리고 싶어요."라는 말을 듣고 차인표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에 대해서 다른 시선으로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의 마음과 이름을 걸고 있다면 어느 정도는 그와 그의 작품을 믿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오늘예보>는 우리들의 인생을 예보하는 악명 높은 DJ데블의 멘트로 시작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 작은 희망들을 무참하게 밟아버리는 그의 예보를 실제로 당사자가 듣는다면 세상 살 맛이 딱 떨어지게 생겼다. "저 태양이 떠올랐기 때문에 여러분은 죽음에 하루 더 가까워 진 것(프롤로그 7쪽)"이라는 DJ데블의 대사는 어쩌면 그리도 콕 찍어서 미운 말만 하는 지 아주 얄미웠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앞으로의 소설 전개도 이런 식이라면 재미있겠다 싶었다. DJ데블은 우리 모두의 인생을 예보했지만, 특히 세 사람의 삶을 관심있게 바라본다. 한 사람은 오늘을 죽을 날로 정한 40대 중반의 나고단씨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너무 작은 키로 놀림을 받았지만, 열심히 살았다. 밤업소에서 웨이터 일을 하면서 열심히 돈을 모으고 괜찮은 아가씨랑 살림도 차렸다. 아이는 안 생겼지만, 재미나게 살아가던 어느 날 모든 것이 다 헛것이라는 깨달음을 몸과 마음으로 얻어야 했고, 긴 시간 이리저리 치이던 그는 드디어 오늘을 죽을 날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성산대교에선 반포대교로 가라고 하고, 기어이 자리를 정했더니 촬영에 방해된다고 비키란다. 심지어 자기를 CG로 지워버린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는 “지우지 마, CG로 지우지 말라고 난 아직 살아있어. 너희들이랑 똑같이 살아서 숨 쉬고 있다고…….”(본문 80쪽)라고 외친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괴로움과 외로움을 처절하게 외친다. 또 한 사람은 이보출씨이다. 사업을 한답시고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온통 빌리고 갚지 못해서 사기꾼이 되어버린 이보출씨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보조출연자로 일하고 있다. 이 일도 지원자는 많고 수요는 적어서 눈치 잘 보고 줄도 잘 서야한다. 누나에게 맡긴 아들 태평이와 함께 살 방을 구하기 위한 이보출씨의 분투기는 정말 눈물겹다. 그는 반장의 눈에 들어서 다음번 작품에 함께 끼고 싶어서 온갖 어려운 일도 참고 또 참는다. “단 한 번도 진정 허리 굽혀 일하느라 땀을 흘려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 알았더라면, 나는 아주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본문118쪽)라는 말을 되뇌이면서 이리저리 땀나게 뛰는 이보출씨의 아들 사랑은 정말 눈물겹다. 또 그런 이보출에게 돈을 사기 당하고 눈에 넣어도 안 아까운 딸 봉봉이의 골수 이식만을 기다리는 박대수도 캄캄하다. 어린 시절 싸움에 우연히 휘말렸다가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박대수씨에게 봉봉이는 새로운 삶을 결심하게 한 삶의 중심이다. 그런 봉봉이가 병에 걸렸는데, 김밥집 차리려고 모아둔 돈 9천만 원을 이보출이 떼어 먹은 것이다. 이보출이 빌려간 돈을 받는다고 해서 봉봉이가 나을 것도 아니건만 그는 오로지 이보출 잡기에 전력한다. 사실 그것말고는 할 일이 없기도 했다. 그야말로 세상의 변두리에서 전전긍긍하는 그들의 삶은 눈물겹기 짝이 없다. 마치 인생의 낙오자 같은 그들에게 정녕 이 세상은 차갑기만 한 것일까? 어디 하나 벗어날 구멍조차 보이지 않는 그들의 삶에도 좋은 날이 있을까? 작가 차인표가 바라보는 세상이 어떤지 이 부분에서 드러난다. 그는 나고단의 삶도, 이보출의 아들 태평이도, 박대수의 딸 봉봉이도 외면하지 않는다. 그가 평소에 어떤 삶을 지향하는지가 소설의 말미에 잘 드러나는 것이다. 차갑고 우울하고 이기적이기만 한 이 세상을 작가는 따뜻하게 보고 싶은 모양이다.

어떤 이는 이 작품이 소설의 완성도 면에 있어서는 좀 부족하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소설을 써 보진 않았지만, 글을 깨친 그 순간부터 소설과 함께 숨쉬고 살아온 그러나 결국엔 비전문가인 나의 눈에도 아쉽고 어색한 점들이 들어온다. 구성은 어색하고, 사건은 우연이 일어나며 인물들은 어딘지 작위적이다. 그러나, 문장이 다소 서툴고 읽기에 매끄럽지 않더라도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만큼은 명확하다.그가 바라는 세상은 한 마디로 '사랑'이다. 사람들이 서로 믿을 수 있는 세상, 타인의 행복을 나의 행복으로 삼을 수 있는 여유를 그는 소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의 바람대로 이 세상이 더욱 따뜻해지고,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원한다.
[출처] 오늘예보 - 오늘의 인생을 알려드립니다.|작성자 에코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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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버스괴담
이재익 지음 / 황소북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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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어린 시절에는 텔레비전보다는 라디오를 많이 들었다. 조용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다정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하루를 정돈하게 하는 한밤의 라디오는 우리반 아이들이 거의 모두 들었다. 전날 밤 라디오에서 나온 재미난 사연은 다음 날 우리반 아이들의 중심 화제가 되었고, 서로 자기의 사연이 라디오에서 나오게 하려고 예쁘게 엽서를 꾸며서 보내느라 경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방송국에서는 ‘예쁜 엽서 전시회’를 열어 청취자들의 정성에 보답하기도 했다. 그런 우리 세대에게 매일 오후 2시에서 4시까지 전국 방방곡곡에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두 시 탈출 컬투쇼’는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하도 시끄러워서 일부러 듣지 않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그 솔직함과 유머러스함에 점점 매료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세상에 어찌나 웃기고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은지, 그들은 다들 어디 그렇게 숨어 있다가 이제사 나와서 세상을 즐겁게 해주는 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프로그램의 프로듀서가 소설을 냈다고 하자 괜시리 거부감이 느껴졌다. 이름 좀 알려지면 너도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책을 내는 행태와 그 책의 허술함에 실망을 한 기억에 유명 인사의 책에 시큰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점점 고정적인 독자층을 형성해 나갔고, 인터넷 서점에 연재가 되기도 했다. 또한 우연히 읽게 된 소설 <서울대 야구부의 영광>은 어렵지 않으면서도 흥미롭게 읽혔다. 또 다른 그의 책은 어떨까 궁금하던 차에 이 책 <심야버스 괴담>을 만나게 되었다.
  한밤의 버스에서 일어나는 괴기한 사건은 어떤 것일까? 그들은 왜 그 깊은 밤에 버스를 탔는지, 그 버스는 왜 괴기한 사건에 말려들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사건을 작가는 어떻게 풀어가는 지 궁금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작가에 대해서 나름의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 또한 있었다.
  소설의 줄거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때는 1999년,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의 일이다. 시간은 자정을 향하고 있고 공간은 분당에서 서울 양재동으로 가는 2002번 심야시외버스였다. 여자 친구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던 준호는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한참 속도를 올려서 달리고 있는 버스가 이상하게 흔들렸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허름한 옷차림의 사내가 버스 운전사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이미 술에 취한 듯 보이는 그는 세상을 향한 불만을 버스운전사에게 퍼 붓고 있었고, 승객들은 그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버스의 승객은 준호와 술에 만취해서 잠이 든 중년 사내, 아주머니와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여성, 그리고 긴 생머리의 아가씨 미나 뿐이었다. 서로 실랑이 끝에 버스는 급정거를 하고 난동을 부리던 아저씨는 밑에 깔리면서 숨을 거두었다. 승객과 버스 기사는 두려움에 떨면서 앞일을 논의하지만, 결국 그들은 또 다른 죽음을 불러오고 만다. 만취한 중년남자와 다투던 버스 기사가 뒤로 넘어지면서 뾰족한 돌에 뒤통수를 찧고 말았던 것이다. 더욱 혼란에 빠진 그들은 이 일을 비밀로 하기로 하고 뿔뿔이 흩어진다. 각자 두려움과 죄책감에 떨던 그들은 하나하나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사고가 난 그날 밤을 미나와 함께한 준호는 미나와 함께 그 불안을 헤쳐 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준호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소설의 말미에서 준호는 현실의 사람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도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걸음을 옮긴다. 준호가 가는 곳은 어디일까? 우리가 산다고 생각하는 여기는 또 어디일까? 현실과 환상, 혹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모호해 지는 순간이었다.
  이 작가의 책에 대한 나름의 판단은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지난 번 읽은 소설과는 다른 장르와 문체, 그리고 전개 방법이 많이 낯설고 불편했다. 어딘지 조금 서툴고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사건의 필연성이라든가, 인물의 성격 묘사 등이 조금 부족하다고 느낀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습작해 놓은 작품이 많은 지 요즘 이재익 작가의 작품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다른 책들도 더 읽어봐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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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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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 며칠간의 시간들은 마치 내가 로스앤젤러스의 한 법정에서 '할러' 변호사의 재판을 방청하거나 '할러'의 근사한 야경을 함께 보거나, 혹은 '할러'의 링컨을 함께 타고 다닌 듯한 기분이었다. 자그만치 468쪽이나 되는 이 소설은 마치 화면으로 보듯이 생생한 묘사로 잠시라도 눈을 떼면 궁금해지게 했고, 혹시나 복잡한 진행을 놓치지나 않았나 다시 읽기 시작할 때마다 앞장을 들춰보게 만들었다.

 사실 소설의 줄거리는 그다지 복잡할 것이 없었다. '할러'는 자신의 의뢰인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재판의 절차와 관습을 잘 알았고, 어떤 방법으로 그 재판을 이길 수 있는지도 정확하게 알았다. 그런 그에게 일을 맡기는 사람들은 '할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아는 돈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죄가 있을 수도 있었고 아닐 가능성도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법의 그물에서 빼내 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할러'에게 그날 아침 대박 사건이 들어왔다. 보석 전문가 페르난도가 중개한 그 의뢰인 '루이스 룰레'는 누가 봐도 '무죄'로 보였다. 연약하고 겁에 질린 그는 전날밤 매춘 여성을 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들어왔지만, 자신은 무엇인가에 얻어맞고 쓰러져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며 누군가가 누명을 씌운 것이라는 주장을 반복한다. 그의 무죄를 확신하고 가볍게 그러나 수임료는 무겁게 재판을 준비하던 '할러'는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루이스 룰레'의 정체에 의심을 품은 '할러'는 조사관이자 친구인 '라울'에게 은밀한 조사를 지시하지만, '라울'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존 그리샴에 빠져서 그의 소설들을 엄청나게 읽어대던 시절이 떠오르는 소설이었다. 긴 분량과 개성있고 흥미로운 인물들이 엮어가는 복잡한 사건들이 단 한 순간도 딴 생각을 허락하지 않아 읽는 내내 영화를 보듯 마음을 졸였다. 이 더운 여름 한동안 열대야를 잊게할 충분한 능력을 보여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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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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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환영’이 ‘幻影(환영: 사상(寫像)이나 감각의 착오로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로 보이는 환각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의 제목으로는 그 쪽이 더 적당하다는 편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 소설 제목은 歡迎(환영 : 오는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반갑게 맞음)인 모양이다. 주인공 윤영이 늘 넘나드는 시의 경계에는 ‘안녕히 가세요.’, ‘어서 오세요’의 입간판이 세워져있기 때문이다.
  윤영의 삶은 항상 윤영을 속인다. 어느 시인은 ‘삶이 그대롤 속일 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했지만, 윤영은 너무나 슬프고 화가 난다. 항상 시험 준비를 하는 남편과 갓 태어난 아기와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 윤영은 신새벽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옥탑방을 나선다.. 학벌도 변변치 않은 윤영은 집안조차 그녀의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등골을 빼먹었다. 똑똑하기로 유명해서 집안의 기둥이자 동네를 살려줄 인재였던 여동생은 사기꾼이 되어서 윤영의 마지막 희망마저 빼앗아 갔다. 엄마나 남동생 준영조차 윤영에게 손을 내밀 뿐이다. 고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비좁은 고시원에서 겨우겨우 살아가던 윤영은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는 그와 외롭고 서러운 처지를 공유하다가 덜컥 아기를 갖고 이 옥탑방으로 살림을 합쳐 나왔다. 그러나 아기를 낳고 보니 둘이 살 때와는 달리 돈이 이만저만 드는 것이 아니다. 어서 빨리 남편이 시험에 합격하여 번듯한 직장에서 월급을 받아다 주기를 고대하며 윤영은 당분간만 교외의 식당으로 일을 나가기로 한다. 윤영의 하루 일당으로도 한 번 사 먹어보지 못할 백숙을 하루 종일 나르고 손님들의 시중을 들면서도 남편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 고통에서 가족들을 구해주기를 바라지만, 정작 남편은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하는데 재미를 들인 모양인지 아침에 펼쳐져 있던 책은 밤에도 그 페이지이기 일쑤이고 집안은 반짝반짝 윤이 나고 아이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다. 왕백숙집의 장사 정체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윤영은 갈등에 빠진다. 윤리라든가 도덕보다는 당장 오늘 먹을 밥과 납부할 공과금이 급한 윤영에게 동생은 또다시 연락해서 돈을 요구하고 늘 이번만이라고 다짐하지만 윤영의 굴레는 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영을 늘 환영하는 것은 강가의 표지판뿐이다. 처절하게 외로운 윤영에게 오히려 하나의 위안일 것인지 윤영을 유린하는 자들의 악마의 미소인지 모를 일이다.
  표지의 애매한 사진이 소설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물가의 식당은 늘 짙은 물안개를 피워서 윤영의 현실 감각들을 무디게 하지만, 사람과 삶에 염증을 느낄 때면 그 물비린내는 더욱 심하게 윤영을 감싸곤 하는 것이다. 불편한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지만, 천태만상의 인간들이 보여주는 추악한 욕망의 덩어리들이 난무하고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한 육체를 가진 짐승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다지 탐탁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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