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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뉴욕
이숙명 지음 / 시공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여기저기 돌아다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다른 사람의 여행기로 대리 만족을 하는 것을 가장 큰 호사로 삼는다. 덕분에 뮌헨에 가면 뭘 먹어야할 지, 런던까지는 어떤 교통편을 이용할 지, 산토리니의 숙박료가 언제 쯤 가장 비싼 지도 안다. 벨기에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도시도 알고, 이스탄불에 가면 모스크와 성당이 나란히 있다는 것도 안다. 게다가 뉴욕이라면 뭐, 관계된 책들만 해도 읽은 것이 수십 권이고,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 어쩌면 우리 동네보다 더 많이 돌아다녔을 지 모른다. 심지어 맨해튼의 지도까지 머릿 속에 그릴 수 있다. 물론 이론으로는 그렇단 말이다.
여행이라는 것이 매력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휙 다녀온다는 것이다. 다들 알만한 곳에 가서 사진을 찍고, 관광객을 상대로 급히 만들어 놓은 천편일률적인 음식을 먹고, 심지어 똑같은 물건을 사 들고 들어온다는 게 심히 못마땅하다. 내가 무거운 물건을 들고 걷는 것을 딱 질색으로 한다는 것을 일단 빼놓고 보면 말이다. 내 생각에 멋진 여행이란 한 곳에 오래 머물면서 한가롭게 공원을 산책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동네 빵집에서 크루아상을 사 먹는 것이다. 이왕이면 동네 사람과 눈도 맞추고 싶다.
그러니 이 책 <어쨌거나 뉴욕>은 참 근사한 책이다. 지은이는 연속되는 야근과 지겨운 인터뷰와 해도해도 끝이 안 보이는 일을 집어 치우고 스스로에게 긴 휴가를 주기로 한다. 7년이나 일을 했으니 쉴 만도 하다는 거이다. 난, 20년이나 일을 했는데 ......
그리고 찾아간 뉴욕에서 집을 구하다가 프랑스 여자에게 사기를 당해 미국 경찰의 도움을 받고 재판정에서 증언을 하기도 한다. 물론 돈도 날렸다. 할 수 없이 뉴욕에서 일을 하는 후배의 집에서 빌붙어 지낸다. 지은이 표현대로 '섹스 앤 더 시티'를 꿈꿨으나 '프렌즈'가 된 것이다. 뉴욕에서 옷을 사서 인터넷으로 장사를 하는 L과 함께 온 뉴욕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는 바람에 늘 후줄근한 청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다니지만, 각종 매장의 정보를 꿰게 되고, 심심할 때면 뉴욕 탐정 놀이도 한다. 그저 아무나 찍어서 미행하기다. 그러다가 뉴욕 토박이 고등학생들이 가는 만화가게도 들어가 보고 근사한 악기 상점에서 기타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몇 달 후에는 다른 뉴요커들처럼 살 집을 구하느라 전전긍긍하면서 돌아다닌다. 뉴욕이라는 데는 우리나라 서울보다도 더 집을 구하기가 힘들다더니 지은이의 고생을 보니 이해가 된다. 생각 외로 다정하고 친절한 뉴욕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외국인인데다가 영어가 시원찮아서 사기도 당하면서도 그는 '어쨌거나 뉴욕'을 외친다. 다른 어떤 곳보다 쉬고 산책하고 구경하고 놀고 수다 떨기에 좋다는 말이다.
어떤 경우, 책을 잘못 선택히면 여행기가 아니라, 쇼핑기거나 제 자랑인 경우가 있다. 간혹은 문장이 너무 유치하고 수준 미달인 경우도 있고, 그저 문장을 예쁘게만 쓰려고 한 경우도 있으며, 이국의 삶을 들여다 보고 온 것이 아니라 한인 민박집과 한국 동행인에 대한 스트레스 넋두리인 경우도 많았다.
이 책은 그렇지 않다. 기자답게 그의 글은 재밌고 위트가 있다. 사는 얘기를 진솔하게 풀어놓아 공감이 가고, 낯선 곳에서 당차게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흔적이 역력히 드러난다. 자신의 성격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유머러스한 표현들과 뉴요커들 앞에서도 당당한 자기 표현들이 매력적이다. 그의 표현들에 대한 공감으로 읽는 내내 킥킥 거릴 수 있었다. 지금은 또 어디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지 모르지만, 또 다른 그의 글이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