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가면고 - 작가와 함께 대화로 읽는 소설
최인훈.이태동 지음 / 지식더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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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입하기 전까지 많이 망설였던 책이다.

 

왜냐하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크리스마스 캐럴/가면고" 책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읽은 소설이고, 또 내용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책도 집에 있는데 굳이 산 이유는, 바로 최인훈과의 대담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소설가 중에서 단 한 명만 고르라는 무리한 질문이 따른다면 나는 조금 고민은 하겠지만, 거의 주저 없이 최인훈을 선택할 것이다. 최근에 나온 '바다의 편지'를 제외하고는 그의 소설은 다 읽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그의 "광장"부터 시작하여, "총독의 소리" "태풍" 등등.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그의 전집을 모두 읽고 참 대단한 작가구나 했었는데... 그 때 이 "가면고"도 읽었는데...

 

그런데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가면고"가 그렇게 난해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너무도 난해해서 인기가 없는 작품 운운해서, 정말 그런가 하고 다시 읽고, 또 작가의 대담에서도 그런 말을 하나 하는 것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소장하기로 결심한 책.

 

나는 난해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작가가 난해하게 썼다고 하고, 평론가들도 난해하다고 하면 내 소설읽기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찾아보니, 그렇지 않다.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 별로 어렵지 않은 소설을 어렵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도 든다.

 

이태동 : "선생님께서 이 작품을 저와의 '대담 시리즈'를 위한 텍스트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가장 아끼는 작품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너무나 난해한 작품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입니까?" 

최인훈 : "같은 주제를 번복한 형식이 주제 전달에 흥미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우선 저는 이 작품을 난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제 의견이긴 하지만 "가면고"는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94-195쪽

 

이거다. 이 소설에 대해 비평가들의 평론을 읽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소설은 모두가 자신의 이해에 맞게 읽을 수밖에 없고, 어떤 소설도 결국 자기 것으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인훈이 말한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말은, 읽는 사람에 따라 계속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고,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또 언제 어디서 읽느냐에 따라 같은 사람에게도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말로 받아들이면 된다.

 

재미있는 소설은 언제 읽어도 새로운 맛이 나는데, 이 "가면고"도 그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가면고" 한자어로 보면 가면에 대한 고찰인데, 가면은 결국 무엇인가? 우리의 얼굴이다. 그런데 얼굴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우리의 정신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뭐 전후세대의 방황, 이런 말들을 신경쓰지 말자. 오직 얼굴, 그리고 우리의 정신에만 집중하자. 우리는 자신만의 얼굴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만의 얼굴은 자신의 내적 영혼이 밖으로 표현되는 형식이다.

 

정신의 형식이 바로 얼굴인 것이고, 그 얼굴을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바로 가면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얼굴이라고 하지 않고 가면이라고 한 이유는 변화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고정된 것이 아닌, 자신의 행동, 노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뜻에서 가면이라는 말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가면을 쓰느냐에 따라 자신이 달라지는데, 가면을 쓰는 것보다는 가면을 내면에서부터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이 소설이 말해주고 있지 않나 싶다.

 

즉, 자신의 얼굴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 소설을 읽어도 된다는 얘기다.

 

외부의 화려함, 언뜻 보면 좋아보임, 겉으로만 꾸밈 등이 아닌, 내부로부터 흘러나오는 내용들이 얼굴이라는 형식 속에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 소설 속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다문고(多聞苦) 왕자는 상징적이다. 많이 듣는 고통은 결국 외부로 시선이 향해 있다는 얘기다. 그런 그가 외부의 탈이 아닌 자신의 내적 성찰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얼굴을 갖게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럼 현실에서 주인공인 민이 만나는 두 여자를 생각해 보자. 물론 작품에는 세 여자가 등장한다. 가슴 가운데 기미가 있는 여자, 미라, 정임. 첫여자를 제외하고, 그가 깊이 사귄다고 할 수 있는 미라와 정임은 민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미라는 화가이고 정임은 무용수다. 그들은 둘 다 예술을 하는데, 예술은 표현을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표현을 하는 행위에서도 미술은 매개를 필요로 한다. 즉 몸과 정신 사이에 그림이라는 매개가 개입한다.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한 번 굴절되어 나타나게 되니, 이 과정에서 왜곡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정신과 얼굴의 일치를 추구하는 민이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무용은 자신의 몸으로 정신을 표현하는 행위다. 몸으로 표현하는데 중간 매개항이 없다. 오직 자신의 몸으로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중간에 왜곡될 가능성이 없다.

 

정신과 얼굴이 일치할 가능성이 많다. 이러니 민이 누구를 선택할지는 이미 이들의 직업에서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 이 소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이다.

 

현대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정신을 겹겹으로 가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중국의 예술인 '변검'처럼 수많은 가면들을 지니고 때에 따라 계속 가면을 바꿔가고 있지 않나?

 

맨얼굴로 살기 힘든 세상이 되지 않았나? 이런 때 정신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길 원하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을텐데...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얼굴에서 내면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고도 있다.

 

내면과 얼굴이 일치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자연스레 지니게 된다. 지금 우리가 갖지 못한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가면이 아닌, 자신의 행동과 내면에서 우러나와 만들어진 얼굴이기 때문이다.

 

비록 수많은 가면들을 지니고 사는 현대인들이지만, 이들 역시 본능적으로 영혼이 얼굴을 만든 사람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존중한다.

 

이 소설은 그래서 현대에도 의미가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는 내적 영혼이 얼굴을 만들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깥에서 오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서만 올 수 있음을... 그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람임을 이 소설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다시 읽어도, 다시 샀어도 후회되지 않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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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전환 - 21세기 노동해방과 녹색전환을 위한 적록동맹 프로젝트
김현우 지음 / 나름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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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전환"

 

전환이 필요한 때임은 확실한데, 어떤 전환을 이루어야 하느냐에서 "정의로운" 전환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말이 우리나라보다는 외국에서 먼저 쓰였고, 영어로는 'just trasition'이라고 하는데, 이 개념이 어렵다면 조금 쉽게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결합하는 일이라고 보면 된다.

 

예전에 "녹색은 적색이다"라는 책도 있었고, "녹색희망"이라는 책도 있어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그리고 환경운동이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함을 주장하기도 했었는데, 이 '정의로운 전환'은 이를 현실에 맞게 구체화시킨 운동이라고 보면 된다.

 

하여 사회를 위협하는 일자리를 그냥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자리를 사회에 유용한 일자리로 전환하는 노력을 하고, 그렇게 하자는 운동, 이것이 바로 '정의로운 전환'이다.

 

자동차가 배출하는 배기가스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니 자동차 산업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겐 자신들의 생계가 걸린 문제이니, 자동차 노조에서 자동차 산업을 폐기하자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 적용될 수 있는 '정의로운 전환'은 무엇인가? 

 

다양한 방법들이 있겠지만, 이를 친환경적인 산업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자동차 기술이 다른 교통 관련 기술에도 쓰일 수 있으므로, 이들의 기술을 친환경 분야의 기술로 전환하게 하여 고용과 환경을 함께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정의로운 전환'이다.

 

이러한 '정의로운 전환'이 우리나라에서 언제 시도가 된 적이 있었나? 적어도 전환까지는 안 갔더라도 함께 할 수 있음을 보여준, 그래서 '정의로운 전환'의 단초를 보여준 일이 바로 밀양의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에 영남권 건설 노동자들이 밀양 송전탑 공사 협조 거부 의사를 밝힌 적이 있고, 반대 운동에 함께 했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노동자와 송전탑' 참조)

 

건설 노동자들은 송전탑을 건설해야 하지만, 그 송전탑이 환경에도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은 건설 협조 거부 표시를 한 것이다. 이렇게 서로 함께 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원자력 발전, 즉 핵발전에서도 마찬가지다. 핵발전노조는 그들의 기술이 재생에너지 기술로 전환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전환이 가능함을 보여주어야 하고, 환경 운동도 마찬가지로 "핵발전 폐기하라"에서 한 단계 나아가 핵발전을 폐기하고, 이런 발전으로 전환하면 노동자도 좋고, 시민들도 좋고, 자연에도 좋은 방법이 있음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 사례들은 이미 외국에서도 많이 나와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이것은 노동자들과 환경 단체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 될 일이고, 그래서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진 이들간의 만남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도 나오는데 누군가 그랬다고 한다. 노동운동 단체와 환경운동 단체에서 한 명씩이라도 서로 사람을 파견보내 인턴 근무를 하게 하자고. 돈이야 각 단체에서 대면 되니, 이렇게 인적 교류가 이루어지면 자연스레 내용 교류도 이루어지고 대안을 함께 마련해 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이 책 244쪽부터 248쪽 참조)

 

이것이야말로 노동운동이나 환경운동 단체의 지도부가 먼저 해야할 일 아니겠냐고. 지도부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급급하는 것이 아니라 당면문제부터 먼 과제까지 내다보고 대책을 세우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도부가 힘든 것이기도 하겠고.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에 지은이가 한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좋은 말은 역시 입에 쓰다. 그러나 현실을 직면하게 한다.

 

이제는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함께 가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그러니 이 책에서 말걸기를 시도한 지은이의 말에 적극 응답해야 한다.

 

'... 민주성과 계급성을 잃지 않고 조직을 잘 지켜온 노동조합들이 지역사회 실천과 녹색전환에서도 앞장서고 있다. 이미 코앞으로 다가온 미래를 선취하지 않는다면 궁색하고 외로운 방어 투쟁으로 끊임없이 후퇴하고 말 것이다. 후퇴가 아닌 공세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면 이제 거기에는 노동과 산업 자체의 전환, 우리의 살림살이와 유대 방식의 전환을 위한 모색이 함께해야 한다. ... 이 책은 그런 기대를 담아 적색과 녹색, 녹색과 적색의 씨앗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말 걸기다.'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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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학교다 - 함께 돌보고 배우는 교육공동체 박원순의 희망 찾기 2
박원순 지음 / 검둥소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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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를 키우는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공동체가 교육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이겠다.

 

그런데 근대화 되면서 마을은 학교에 교육의 자리를 넘겨주고 뒤로 물러나 버리고 만다. 공동체가 해체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면서, 학교는 마을에서 독립하여 교육에 관해서는 전권을 휘두르게 된다. 마을과 교류없이, 교감없이.

 

현대에 들어와서 마을은 교육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가령 비행청소년(이 말이 적당한가? 담배 피고, 남녀가 몰려다니고, 함께 술 마시는 아이들... 한 때의 방황 또는 마음과 몸을 둘 데 없는 아이들을 우선은 이렇게 말하자)이 있다고 하면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타이르려 하지 않는다.

 

우선 학교에 전화를 한다. 이 동네에 이런 아이들이 있는데, 학교에서 지도하라고, 그렇게 해도 되지 않으면 경찰서에 전화를 한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은 학교에 그들에 대한 처벌은 경찰에 넘기고 마을은 아이들의 교육과는 관계가 없다는 듯이 존재한다.

 

이게 현실의 모습이다. 바람직한가? 이렇게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마을이 교육에서 멀어졌기에 아이들과 어떻게 관계맺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관계맺기의 실패가 두려움으로, 교육의 두려움이 포기로 나타나고, 이러한 포기가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생활하는데 장애로 작용하게 된다.

 

도시라면 어디에서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시골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요즘은 마을이 제 역할을 못한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마을로 대표되는 공동체는 해체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없는가? 다시 마을이 교육으로 돌아올 방법은 없는가? 아니다. 있다. 학교 자체의 교육으로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기에 학교에서 마을에 손을 내밀고 있다.

 

2015년인 지금 학교는 지역사회에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고 있다. 함께 하자고, 이건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래서 지역사회에서도 학교 교육에 적극 참여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렇게 된 것은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현 서울시장인 박원순이 시장이 되기 전 희망을 찾는 여행을 했다. 그는 희망을 마을에서 찾았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공동체라고 하겠다.

 

공동체가 유지되는 가장 기초는 함께 삶이다. 함께 삶에는 함께 앎이 따른다. 함께 알기 위해서는 함께 가르쳐야 한다.

 

생활과 교육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교사라는 직업이 따로 있어서 전문적인 교육을 한다고 하지만, 교사는 학교에만 존재해서는 안된다. 배움이 있는 곳에는 교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 배우고자 하는 곳에는 늘 가르치는 사람이 존재한다.

 

다만, 찾지 않았을 뿐이다. 찾지 않았기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마을이 교육에 참여하는, 학교와 마을이 함께 하는 곳들을 찾아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 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이 책은 2010년에 발간되었다. 하여 한 달이 멀다하고 급속도로 변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참으로 먼 옛날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 먼 옛이야기는 아니다. 다른 것은 다 빨리 빨리 변하고 있지만, 지나치게 느린 속도를 지닌 곳이 바로 학교이기 때문이다. 이미 5년 전에도 마을과 학교가 하나되는 이런 활동들이, 이런 장소들이 존재했음에도 얼마나 확대되었느냐 하면 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오히려 줄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많은 공동체가 생겼어야 했는데, 공동체들이 사라지고, 학교가 더욱 비대해지는 현상이 지금까지 계속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귀하다. 우리에게 학교와 마을이 함께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 그런 움직임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고, 미래형이라는 것을 이 책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과 학교가 함께 갈 때 아이들은 길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교육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지금 제도권 교육에서 마을에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이런 활동들이 있었기에 가능함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이미 유명해진 풀무학교로부터 시작한다. 풀무학교는 학교와 마을이 하나가 되어 교육을 해나가는 전범이라고도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아예 마을공동체가 되어 생산과 소비, 교육이 함께 되어가고 있느니, 풀무학교로부터 시작한 것은 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풀무학교에서 시작하여 '대안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이제는 공교육에서 달라진 초등학교를 소개하고 있다. 아이들의 심성이 형성되는 초등학교 시기에 마을과 하나되는 학교들을 소개함으로써 우리 교육에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도권 교육에 이어서 학교 밖에서, 그러나 마을 안에서 활동하는 청소년 교육공동체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청소년뿐만이 아니라 어른과도 연결된 명실상부하게 마을공동체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 공동체들은 지금까지도 제 역할을 다하고 있기에, 앞으로 통섭의 시대, 융합의 시대에 마을과 학교가 함께 가려는 노력을 할 때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에 가망이 없다고 할 때 박원순은 교육에도 분명 희망이 있다고, 그런 희망이 바로 우리 눈 앞에 있다고 그 희망들을 찾아 보여주고 있다. 5년 전 일이다.

 

그리고 이런 희망을 보여준 지 5년... 우리 교육은 과연 얼마나 앞으로 나아갔는가? 우리는 지금 어느 자리에 서 있는가? 학교가 과연 마을 속으로 들어갔는가? 마을이 학교 안으로 들어왔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

 

교육혁신지구 등등의 말로 마을과 학교가 하나가 되려는 노력을 지금은 하고 있다. 물론 이런 흐름을 이 책에서 사교육걱정없는 세상의 송인수가 말했듯이 정치권에만 맡겨서는 안된다. 정치권이 움직일 수 있도록 시민들이, 바로 우리들이 힘을 발휘해야만 한다.

 

좋은 때 아니던가. 교육이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때는 지났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하는 지금이. 이미 우리는 마을이 학교가 되고, 학교가 마을이 된 사례들을 몇년 전부터 만나지 않았던가. 이제는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자신의 마을에서 실천하면 된다.

 

그러면 된다.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그런 희망이 바로 길이다. 우리 교육이 가야 할 길. 그 길에 우리 아이들은 행복은 웃음을 지으며 다니게 될 것이다. 아이들의 웃음은 또 우리들을 모두 웃게 할 것이다.

 

그런 희망, 길... 아이들의 행복은 웃음, 어른들의 행복은 웃음. 우리 사회의 행복이다. 이게 우리 교육이 나아갈 길이다.

 

그 오래된 미래(참 이 말 좋은 말이다). 이 책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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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슬픈 배따라기를 남겨둘 뿐 우리학교 작가탐구클럽
류한형 지음 / 우리학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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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작가 탐구 클럽 시리즈를 계속 읽고 있는 중.

 

학생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작가를 알아야 한다는 기획 취지에 따라 작가 탐구 시리즈를 내고 있다.

 

지금까지는 백석, 김소월, 이태준, 이상, 김동인 이렇게 다섯 명의 작가를 탐구했는데, 책 표지에 보면 윤동주가 곧 나올 예정이고, 또 다른 작가들도 계속해서 탐구할 예정이라고 한다.

 

작가에 대해서 알려주는 일, 필요한 일이다. 적어도 문화 강국을 표방한다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들에 대해서는 좀 알아야 하지 않겠나.

 

우리나라가 미술이나 음악 분야에서도 뛰어난 사람이 많겠지만, 우리나라 문학을 일구어낸 사람들에 대해서도 역시 잘 알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런 책은 반갑다.

 

그만큼 작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경우도 많고 학교 생활을 하면서 그냥 이름만 들어보고 끝난 경우도 많으니, 학생을 대상으로 했다고 하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무방한 책들이다.

 

김동인 하면 어떤 소설이 떠오를까?

 

내가 학교 다닐 때 김동인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한 다섯은 되는데, "감자, 배따라기, 광화사, 광염소나타, 붉은산" 이렇게 기본으로 그의 소설을 읽고 배우고 했다.

 

여기에 개인적으로 "젊은 그들"이라는 작품을 어렸을 때 읽고 그 활극에 재미를 붙이기도 했는데, 나중에 '태형'이란 작품을 알게 되었고, 역시 어렸을 때 '김연실전'을 읽고 일제시대 신여성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지니기도 했었는데...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김동인이었다. 그는 내 학창시절만 해도 우리나라 근대 소설가 중 최고였다. 늘 최고의 자리에서 그의 작품을 논하였고, 그가 한국의 '오스카 와일드'라고 불릴 정도로 유미주의자였다고 하니, 소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소설의 구조를 이야기할 때 그를 언급하지 않고는 넘어가지 않았다.

 

이런 김동인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책이 이 책이다. 그의 개인사와 문학관을 종합하여 작품과 연결하여 설명을 해주고 있는 책.

 

아마도 중학생들이 읽으면 생소한 어휘들 때문에 조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솔직히 이런 책을 읽을 때는 상당한 배경지식을 요구한다. '카프'라든가, 신경향파, 유미주의 등등) 고등학생쯤 되면 쉽게 읽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문학을 아름다움에서 접근한 사람, 우리나라 소설에서 과거형이라든지, 인칭대명사가 자연스럽게 쓰이게 만든 사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오만했던 사람.

 

그런 그에 대한 책. 읽어가면서 우리나라 근대소설의 초창기에 이런 작가가 있었음을, 그는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소설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음을 알아가도록 하자.

 

지금은 많이 평가절하되고 있지만, 그래도 김동인은 무시할 수 없는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적어도 그의 작품 '광염소나타'를 통해서는 천재와 보통사람의 관계를 고민할 수 있으니, 과연 천재 한 명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누군가의 말로 영재교육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그것이 옳은가 하는 토론 거리로 이 책이 유용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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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퀴스 선생님의 위대한 수업 - 평범한 아이를 특별한 아이로 바꾸는 기적의 교육법
레이프 에스퀴스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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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육이 잘돌아가고 있을까?

 

답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별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미국 대통령인 오바마까지도 한국 교육을 본받자고(이 사람 참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인종문제로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갔으니, 그런 나라를 교육이 잘되고 있는 나라라고 하기엔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무시할 수 없는 나라다. 50개 주에서 자기들만의 법이 있어서 나름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고, 그런 자치들이 무서운 힘으로 작용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교육 문제도 마찬가지다. 문제도 많지만 해결책도 많고, 문제 교사도 많지만 좋은 교사도 많은 그야말로 다양성이 살아 있는 나라다.

 

이래서 문제가 많음에도 미국이 아직도 세계 최강대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 교육에 대한 책을 읽으면 미국 교육이 지닌 문제점을 잘 알 수 있는데, 이들도 역시 교육당국의 압력이 너무 세고, 또 표준화시험이라는 것을 실시함으로써 학생들을 시험에 종속시키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런 상태에서는 사람다운 공부, 원리를 알고 즐기는 공부를 할 수가 없는데, 이런 현실에서도 교사들에 의해서 제대로 된 공부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우리나라 역시 교사들의 자율권보다는 교육당국의 힘이 너무 커서 거기에 종속되고, 또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입시에 아이들이 찌들리고 있는데, 이를 이겨나가는 것은 결국 교사들의 노력이라는 점을 미국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미국 초등학교 5학년이 대상이긴 하지만 레이프 에스퀴스 선생님이 한 교육은 단지 초등학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모든 교육에 적용이 가능하다.

 

그는 읽기, 쓰기, 수학, 역사·지리, 과학, 음악·미술, 체육, 경제 시간으로 나누어 자신이 한 활동을 안내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면 되는데, 에스퀴스 선생님은(이 책에서 아이들에게 그는 레이프 선생님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다음부터는 레이프 선생님은 으로 하겠다.) 자신이 중심이 아닌 아이들이 중심이 되는 수업을 하고 있다.

 

레이프 선생은 아이들이 독서를 좋아하게 만들고(그래서 그는 꼭 아이들이 읽어야 할 책을 모두 미리 읽어본다), 글쓰기를 꼭 하게 만들며, (이 반 학생들은 한 학년이 끝나갈 때 이미 한 작품집을 가지게 된다), 수학을 문제풀이 중심이 아닌 원리를 깨우치는 쪽으로 활동을 통한, 또 고민과 협동을 통한 공부를 하며, 역사와 지리를 알아야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미국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역사와 지리도 공부하며,(그것도 암기식이 아닌, 영화와 이야기가 결합되고 학교 행사와도 결합하여 진행된다), 성적으로 인해 자칫 소홀하기 쉬운 음악,미술,체육이 생활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인식하고 아이들이 반드시 참여하게 하며(그러나 즐겁게), 한 학기 동안 반을 살아있는 경제체험을 하도록 운영을 하고 있다.

 

이렇게 8교시로 나누어 자신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레이프 선생은 시험을 중시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반드시 알고 넘어가게 한다는 점에서 그는 아이들의 성적에도 신경을 쓴다.

 

다만 이것이 주가 아니라 어떻게 공부해야 하느냐, 왜 공부하느냐는 것이 주가 되고, 공부는 그 사람이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라는 생각을 견지하고 실천하고 있다.

 

즉, 시험 성적을 올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서 사회에서 바른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자라나게 가르치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목표이고, 그의 학생들은 이미 훌륭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한껏 부럽기만 한 그의 교실이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그는 무한정의 노력을 한다. 주말도 반납하고, 자신의 돈도 학생들을 위해 쓰고, 아마도 그가 사명감이 없었다면, 또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해가는데서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교육을 위해 자신 개인의 생활을 희생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면서, 아이들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약속은 꼭 지키는 모습을 보이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참여하는 수업을 할까를 고민하는 그런 교사.

 

읽으면서 부러웠고, 또 부끄러웠다. 우리에게도 이런 교사들이 많이 있을텐데, 자꾸만 외국에서 사례를 찾는 것은 아닌가 하고.

 

외국의 사례에는 감탄하면서 우리나라의 사례에는 시기와 질투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어찌됐건 우리나라 교육이 여기까지 온 것은 교사들의 힘일텐데... 우리나라 교사들에게도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그들의 교육활동을 지지하고 지원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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