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정기석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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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스위스에서는 전국민에세 기본소득을 주자는 법안을 두고 국민투표를 했는데, 부결되었다. 76.7%가 반대해 부결되었다고 한다. (43쪽)

 

'현상 유지'를 선택한 스위스 국민들이 반대한 이유는 높게 책정된 기본소득 금액, 재원 마련의 불확실성 등이었다. 무엇보다 사회보장 제도를 기본소득제로 대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문제도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43쪽)고 한다. 여기에 아마 놀고 먹는 베짱이들이 많아질 거라는 생각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베짱이들이 내내 놀지는 않는다. 또 이들의 놀이가 우리들 삶을 더 풍요롭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일은 아직은 이른가 보다. 그렇다면 범위를 좁히자. 마을 단위로 할 수도 있고, 직업 단위로 할 수도 있다. 아니면 연령 단위로 할 수도 있고.

 

전체에게 기본소득을 주자는 제도는 부결되었지만 일부에게 기본소득을 주자는 주장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고 또 실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청년배당이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기본소득제가 실시되고 있기도 하다. 이것을 좀더 확대하면 이 책 제목처럼 된다.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우리들 삶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농민들이다. 가장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농민들이 쌀값을 인상하라고 시위도 하고 그랬는데...

 

농민들의 한 해 소득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 소득에 비해 한참 모자란다. 또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기도 힘들다. 이들은 농업 외 소득으로 자신들의 생계를 지탱하고 있다. 생활이 아니라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농민들이 많다.

 

그러니 젊은이들을 농촌을 떠나게 된다. 농촌에는 노인들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 인구의 고령화 현상도 심각하지만 농촌은 이미 그 임계점을 넘어섰다. 환갑이면 청년회에 들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수입은 적고 나이는 많아지고 편의시설은 부족한 곳이 바로 농촌이다. 이런 농촌에서 그래도 먹을거리를 생산해내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 덕에 먹고 사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당연히 그들도 잘 먹고 살 수 있도록 우리가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 중 가장 기본이 기본소득이다. 처음부터 모든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주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조세저항부터 시작해서, 많은 반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순서를 밟아가면 된다. 어차피 예산은 실행할 의지가 있으면 마련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3단계를 제시하는데... 대략 이야기하면 병역특례를 비롯한 처음 농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 하위 30%와 만 65이상 노인에 대한 지원 -> 농민 전체에 기본소득. (137쪽 표 참조)이런 단계들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구체적인 정책 대안이 아니라, 농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지니는 일이기 때문이다.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당연하게 여겨지면 그때부터 제도를, 구체적인 시행 방안을 찾아도 늦지 않는다. 아니, 지금 기본소득에 관해서는 상당히 많은 논의가 되어 있으니, 공감대만 형성된다면 시행은 금방 일어날 수 있다.

 

농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주어야 하는 이유는 농민들이 있어야 우리들이 살기 때문이다. 우리들을 살게 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존재가 농민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라지면 우리들 삶도 힘들어진다.

 

그들만 좋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좋게 하자는 것이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주자는 주장인 것이다. 바로 내가 잘살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잘살아야 한다는 것.

 

너무 힘들면 이것부터 실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병역특례로 농촌에서 일하는 방법은 지금도 있다고 하니, 이제 실시할 '대체복무'를 농촌에서 하게 하는 것은 어떨까? 이들이 2년반이나 3년 농촌에 머무르면서 노인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 농촌에 사람도 있게 되고, 이들과 함께 할 사람들도 농촌에 머무를 수밖에 없으니 농촌에 소비도 조장이 될 것이고, 또 이들 중에 농사의 중요성을 깨닫는 사람이 있으면 - 대체복무자들은 양심에 따라서 폭력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니, 이들은 천성적으로 농업에 매우 친숙할 테다 - 농민으로 머무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대체복무를 교도소에서 하게 한다던데, 그보다 더 비폭력적이고 생산적인 곳이 바로 농촌 아닌가 하는 생각, 또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이 필요하고, 이것에 더해서 다른 것도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 이 책에 그런 것들이 나와 있으니 이를 더 구체적으로 실행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그냥 웃으며 지나칠 수 없는 주장이다. 많이 생각해 봐야 한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잘 읽었다. 기본소득은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정치권에서 계속 쟁점이 될 것이다. 쟁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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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9 1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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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9 16: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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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적, 정의를 훔치다 - 박홍규의 세계 의적 이야기
박홍규 지음 / 돌베개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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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들이 창궐하는 시대는 어지러운 시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대다.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고 맹자가 말했다던가. 적어도 먹고 살 수 있어야 다른 맘을 품지 않는다.

 

도적들도 마찬가지다. 박지원이 쓴 '허생전'애서 도둑의 무리들이 왜 허생을 따라 무인도로 갔겠는가. 그들에겐 최소한 먹고 살 것들이 있으면 되었는데, 그나마도 없어서 도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살게 해주겠다는 데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도적이 단지 경제적인 면에서만 나올까? 그렇지 않다. 먹을 것이 해결되어도 자유롭지 못하면 불만이 쌓이게 된다. 차별을 받다보면 당연히 반항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래서 반항하는 사람을 도적이라 부르기가 그렇다면 이들을 반항아, 혁명가로 부를 수도 있다.

 

도적에서 혁명가까지의 거리가 그리 길지 않다. 그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양민과 도적이 동전의 앞뒤 면처럼 붙어 있다고 봐야 한다. 양민에서 도적이 되고, 도적에서 혁명가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그 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의적이 무엇인가 부터 시작하여 세계 곳곳에서 활동했던 의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이들이 의적의 요건에 부족해서 의적이라 부르면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의적이란 민중들의 마음에 그렇게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야기한다.

 

사실 관계를 떠나 민중들이 의적이라고 생각하면 그는 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민중들이 자신들이 억압받고 있는 현실에서 자신들의 바람을 대신 실현해주는 존재로 의적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적에 관해서 역사적 사실 어쩌구 저쩌구 하기보다는 민중들이 어떻게 그들을 의적으로 인정했으며,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우린 의적하면 홍길동을 떠올리는데, 홍길동은 나중에 자신이 왕이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홍길동이 실존인물인지 아닌지, 진정 의로운 활동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역사에 달랑 한 문장으로 나온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민중들은 그를 의적으로 기억한다. 그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가 의적이다.

 

영국의 로빈 후드처럼 알고 있던 존재도 있지만, 시칠리아 의적이라고 하는 '살바토레 줄리아노', 멕시코의 '판초 비야', 헝가리의 '로자 산도르'는 처음 듣는 이름이다. 물론 이 책에 나온 더 많은 인물들을 처음 만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왜 이들이 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지를 당시 사회 현실과 관련지어 이야기해주고 있기 때문에 읽으면서 많은 사실을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의적이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여전히 힘든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적이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생활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경제와 정치 또 다른 분야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 세상이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의적을 꿈꾸게 될 것이라는 것, 이 책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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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30 09: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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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30 1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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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이슬람 - 오해와 편견에 갇힌 16억 문명의 진실 주니어 인문과학 캠프 2
하룬 시디퀴 지음, 김수안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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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널리 퍼진 종교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종교가 바로 이슬람 아닌가 한다.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라는 말도 있고, 전쟁을 추구하는 잔학한 종교라는 말도 있다.

 

어느 것이 옳을까? 옳고 그름을 떠나 이슬람은 우리에게 과격한 종교로 인식되어 왔다. 9.11테러부터 시작하여 사람을 참수하여 죽이는 장면을 공개하는 행위까지, 테러 또는 폭력, 또 여성에 대한 극단적 차별을 하는 종교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하긴 얼마 전까지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성이 운전을 하면 범죄라고 처벌을 받았다고 하니, 여성 인권이 잘 보장되지 않는 나라가 이슬람을 주요 종교로 믿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이슬람을 바로 보고 싶어도 별다른 자료를 만나지 못했다. 그냥 언론에 나오는 것만으로 이슬람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었는데...

 

이희수 교수나 몇몇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슬람을 바로 볼 수 있는 계기가 생기기도 했는데, 이 책은 이슬람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런 오해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반박하고 있다.

 

이슬람은 테러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 여성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인정이 주요 교리인 종교라는 것.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 자신의 이익보다는 남에게 베풂을 더 강조하는 종교라는 것.

 

이들이 테러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니 테러로 인해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바로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

 

서양인의 비뚤어진 시각이 이슬람을 왜곡하고, 또 그들을 차별하기 때문에 그들이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것. 지금은 그렇게밖에는 저항할 수 없지만, 그런 저항방법에 대해서 이슬람 신자들이 모두 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극단적인 테러를 반대하는 이슬람 신자들이 많다는 것. 그런 것들에 대해서 알게 되면 이슬람을 이상한 종교로 보는 시각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슬람 역시 종교라는 것, 종교는 본래 인간에게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생긴 것이라는 것. 기독교도 불교도, 그리고 이슬람도 마찬가지라는 것.

 

이 책에서 이 글귀를 읽고 이래야 한다고, 이렇게만 한다면 세상에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성서를 믿는 사람(유대인과 기독교도)과 논쟁하지 말되, 논쟁해야 한다면 매우 공손하게 말하라.

만일 알라가 뜻하셨다면, 인류를 한 나라로 만드셨을 것이니라. 하지만 인류는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느니라. (178쪽)

 

다양성,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인식하고 함께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이슬람은 차별을 받고 있다. 그만큼 이슬람에 대한 시각이 많이 왜곡되어 있다. 그런 왜곡된 시각에서 벗어나 이슬람을 이슬람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평화가 오지 않을까 한다.

 

이슬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은 다양한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읽으면서 다른 종교에 대한 편견을 떨쳐 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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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7 08: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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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7 09: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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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만난 역사 창비청소년문고 16
김대현.신지영 지음 / 창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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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를 바꾼 재판들이 있다. 그 재판을 통해 구시대에서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가 된 사건들이 있는데... 반대로 구시대가 너무도 강고해 새로운 시대가 재판이라는 틀을 통해 거꾸러지는 모습을 보이는 사건들도 있고.

 

유명한 재판, 중요한 재판들을 보면 역사를 알 수가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재미도 있고. 이 책은 이러한 재판을 통하여 역사의 흐름을 짚어주고 있다.

 

중세부터 시작하는데, 중세를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 그것은 바로 지동설이다. 한 시대를 다른 시대의 사고로 넘어가게 만드는 전환,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한다.

 

이미 다른 사고가 생겼고, 그것이 대세로 자리를 잡아가는 전환이 되는 것이다. 중세에서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지동설이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는데, 이런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화형을 당한 사람이 있다.

 

재판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여러 방법이 있는데, 중세에는 주로 거열형이나 화형이 주된 사형방법이었다니, 사형 방법 변천사도 인권의 발전과 더불어 함께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주장이 다르다고 화형에 처하는 시대. 야만의 시대라고 해야 한다. 그것도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인간 중심이 아닌 신 중심, 그런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은 용납되지 못하던 시대에 감히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 조르다노 부르노. 이 사람으로부터 이 책은 시작한다. 지금은 지동설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에 지동설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이단으로 몰려 종교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로 유명해진 갈릴레이도 종교 재판에서는 자기 주장을 부인하지 않았던가. 죽음에 맞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브루노는 그래서 더 중요하다. 비록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에 가려 잊혀져 가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이렇게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넘어갈 때 권력을 쥔 자들이 나오는데 이들이 바로 절대군주다. 유럽에 나타나는 절대군주들. 이들 역시 재판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신의 몰락, 그리고 절대군주의 몰락은 민권이 신장됨을 보여준다. 소수 권력자들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국민들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전환되는 것을 왕에 대한 재판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찰스1세, 루이16세, 니콜라이2세 등의 몰락은 절대왕정의 몰락을 의미하고, 주권에 대한 개념이 변해가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사이에 여성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게 하는 재판이 하나 있다. '올랭프 드 주구'라는 여성. 프랑스 혁명 당시 여자도 남자와 같은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여인. 결국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여인.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여성에게 있다면 자유 발언을 할 권리 또한 있다는 이 여성에 대한 재판은 여성의 권리가 한참을 지나야만 획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국민국가 시대, 민족 개념이 형성되고 각 국가끼리 경쟁을 하던 시대로 접어들면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전쟁은 내부를 단결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반대로 내부 경쟁자를 제거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나고, 2차 대전때는 숄 남매의 저항이,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 냉전체제에서는 찰리 채플린이 탄압을 받는 그런 상황.

 

여기에 체 게바라와 아히히만 재판까지 현대사를 아우르는 재판들이 나온다. 때로는 공개 재판으로 때로는 비밀 재판으로 이루어진 이런 법정의 역사를 통해서 세계사의 흐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재판을 통해서 우리 현대사를 읽어갈 수 있지 않나? 찰리 채플린 이야기에서 극단적인 반공주의 매카시즘을 읽어낸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조봉암 재판, 통혁당 재판,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판' 등을 통해서 극단적 반공주의를 읽어낼 수가 있다.

 

여기에 '박근혜 탄핵'이라는 재판을 통해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어떻게 성숙되어 가는지를 살펴볼 수도 있으니, 법정은 단지 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역할도 한다.

 

역사를 학자들만이 공부하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바로 역사임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법정에서 만난 역사], 그런 재판 기록들을 보면서 구시대에서 새로운 시대로 넘어갈 때 재판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힘과 힘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앞을 보는 능력을 키워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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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의 용기 - 클로뎃 콜빈, 정의 없는 세상에 맞서다 생각하는 돌 1
필립 후즈 지음, 김민석 옮김, 엄기호 해제 / 돌베개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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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파크스'만 알고 있었다. 로자 파크스와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이들이 버스에서 백인과 흑인의 좌석이 구분되어 있고, 심지어 백인이 타면 흑인이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법을 폐기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만 알고 있었다.

 

큰일(?)이 터지기 전에 작은일(?)들이 여러 번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로자 파크스의 거부가 어느 날 갑자기 터져 나온 일이 아니라는 사실. 킹 목사가 버스 보이콧 운동을 하는 것이 즉흥적으로 떠오른 저항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로자 파크스 이전에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로자 파크스에 이르러 흑백차별을 거부하는 운동으로 발전하게 될 수 있었다는 것.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사실이다.

 

흑인 소녀, 클로뎃 콜빈. 학교에 다니면서 흑백차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미국 헌법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소녀. 어른들이 집에서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직접 행동으로 나서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던 소녀.

 

어느 날,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라는 백인 운전사의 명령(?)을 거부하고 경찰에게 끌려간 소녀. 소년원이 아닌 성인 감옥으로 끌려가고, 끌려가는 도중에 수갑까지 채워진 소녀.

 

이 소녀에게 주어진 죄명에 굴복하지 않고 싸워나가는 소녀. 그러나 당시 판사는 - 당연히 판사는 백인이다 - 소녀가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것은 헌법에 견주어 불법이 아니라고 판결을 하지만 끌려가면서 경찰에게 상해를 입혔다고, 폭행죄로 유죄를 선고한다.

 

유죄. 고등학교 3학년인 학생에게 죄인 낙인을 찍어버리는 백인 판사. 여기에 흑인 어른들 역시 이 사건을 공론화 해서 흑백차별 운동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아직 어린아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힘든 클로뎃이라는 생각으로 어른들 역시 소극적이다. 다만, 이 일로 클로뎃은 로자 파크스를 만나 함께 일을 하기도 한다.

 

로자 파크스가 어느 날 갑자기 자리 양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그녀는 흑인 인권, 흑인 권리를 위해 일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클로뎃은 처음에 영웅에서 점차 문제아로 낙인찍히게 된다. 머리를 백인처럼 펴지 않고 다닌다든지, 또 실수로 임신을 하게 되니, 이런 개인적인 행동으로 클로뎃은 흑인 민권 운동에서 멀어지게 된다.

 

뜻하지 않은 임신과 출산, 학교에서 제적... 버스에서 자리 양보를 하지 않은 행동으로 인해 클로뎃의 인생은 엄청난 시련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클로뎃.

 

버스 좌석 구분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소송을 할 때 클로뎃은 소송인 중 한명으로 그 재판에 참여하게 된다. 목숨을 걸고 참여하는 재판. 미국 백인우월주의자들, 일명 KKK단들은 폭력으로 흑인들을 위협하니 말이다.

 

이 재판에서 흑인들은 역사적인 승리를 하게 된다. 차별이 심했던 남부 앨라바마 주에서도 드디어 흑백 차별이 법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지만, 클로뎃은 곧 잊혀지고 많다. 사생활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때나 지금이나 청소년들이 한 실수를 받아들이는 어른 사회는 드무니, 클로뎃 역시 이제는 생계를 걱정해야 할 때가 된 것.

 

여러 일을 겪으며 잊혀져 가던 클로뎃을 한 기자가 찾아낸다. 그리고 한 작가에 의해 클로뎃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

 

로자 파크스가 한 일이 클로뎃을 부각시킴으로써 낮아지지는 않는다. 로자 파크스는 사회에 충분히 파급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하지만 클로뎃이 한 일이 묻혀서는 안 된다. 클로뎃이 한 행동은 다음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거부를 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서 특정한 사람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음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는 시발점은 어른들에게서가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있었음을, 우리나라 4.19도 역시 고등학생들의 시위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이런 청소년들, 사회 문제에 무지한 것이 아니라 이들도 어른들 만큼 어쩌면 어른들보다 더 민감하게 사회 문제를 느끼고 생각하고 있음을, 이 책 클로뎃 콜빈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이것이 클로뎃 콜빈을 기억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청소년들을 어리다고 또 그들의 행동을 어른의 잣대로만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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