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닥을 만나면 바닥에 주저앉는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일일이 예를 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바닥에 직면했다. 그럴 때마다 "내 인생이 바닥에 굴러떨어졌구나!"하고 한탄하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왜 내 인생에 바닥이 존재하는가, 소리 없이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인생은 결국 바닥에 굴러떨어지는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거였다. 바닥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바닥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거였다.    p.58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로 너무도 유명한 정호승 시인은 올해로 등단 47주년을 맞았다. 전 세대에게 널리 사랑 받는 시를 써 교과서에도 시가 실려 있는 국민 시인이기도 한 그는 그 동안 천 편이 넘는 시를 발표해왔다. 이번 책은 60편의 시와 산문이 어우러진 '시 산문집'으로 시의 배경이 되거나 계기가 된 이야기들을 그 시와 함께 한자리에 한 몸으로 모아놓았다. '시와 산문은 한 몸'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오늘을 있게 한 순간들을 그가 직접 가려 뽑은 시와 그 시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책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사진부터 군 복무하던 시절, 부모님과의 한때, 존경하는 스승님과 찍은 사진 등 시인이 소중히 간직해온 20여 컷의 사진도 함께 수록되어 있어 그야말로 인생이 시가 되어 맺히는 모든 순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공들인 언어는 마치 선물과도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시를 소리 내어 외우면서 낸 몸의 자양분을 얻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책에는 훌훌 넘겨 가며 가볍게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언어들이 가득하다.

 

시인은 등단해서 지금까지 출간한 12권의 신작시집 속 1천 편 정도의 시 중에서 '내 인생에 큰 힘과 용기를 주는, 내 인생을 위로하고 위안해주는 단 한 편의 시'로 <산산조각>을 꼽는다고 말한다. 지금도 하루하루의 삶에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에 부딪치게 되면 "오늘도 산산조각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오늘도 산산조각으로 살아가면 되지 뭐!"하고 생각한다고. 그러면 놀랍게도 그토록 자신을 힘들게 하던 고통이 다소 가라앉아 덜 고통스러워진다고 말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에게도 그런 시가 한 편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학교에서 누군가 시켜서 뭔가를 외웠던 시절 이후로, 어른이 되어 무언가를 외워야 할 일이란 좀처럼 없지 않은가. 그런데 시를 외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시를 암기해서, 그 시를 내 안에 지니고 다닐 수 있게 된다면, 살면서 어떤 순간에든 그 시를 꺼내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힘들 때나 기쁠 때, 혹은 절망하고, 지쳤을 때 위로가 되고, 나에게 힘이 되어줄 그런 시 말이다.

 

 

인생은 슬프다. 인생이 슬프기 때문에 시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 슬프지 않은 인생은 없다. 슬픈 인생 중에서도 노인들의 인생은 더 슬프다. 떠나야 할 때에 떠난 노인들보다 떠나야 할 때에 떠나지 못한 노인들의 인생은 더욱 슬프다. 노인들의 슬픔은 관념이 아니라 구체다. '사람은 늙으면 적당한 때에 떠나야 한다'는 말은 관념의 소산이 아니라 구체의 소산이다. 태어나는 일에는 순서가 있지만 죽는 일에는 순서가 없어 노인들의 고통은 구체적이다. 그 고통의 구체성은 마음보다 육체가 먼저 허물어지는 일에서부터 비롯된다.     p.494

 

'죽은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신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누룩>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뭉클해졌다. 죽마고우라는 말에 걸 맞는,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들이 내게도 몇 있지만, 사실 나이를 먹을 수록 만나는 친구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다. 시인의 말처럼 '나이가 든다는 것은 진정한 친구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이러다가 나중에는 만날 친구가 한 명도 없게 될 까봐 두렵다'는 식의 생각을 나도 요즘은 자주 하게 된다. 물론 친구가 많은 것보다 중요한 것은 단 한 사람이라도 서로 진실하게 대하고 신뢰하며 사랑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만나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그만큼 그리운 사람은 더 늘어나게 되는 것이 어쩌면 인생사의 또 다른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다들 살기 바빠서, 매일의 반복되는 일상을 쫓아가느라 그나마 덜 중요해진 우정은 점차 소홀히 대하게 되니 말이다. 우정을 유지하는데는 인내와 정성, 시간이 필요하다. 가만히 놔두어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죽은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신다
죽어서 사는 일도 두렵다고
살아 있을 때 단 한번이라도
남을 위해 누룩이 되어본 적 있느냐고
죽은 친구들이 술 취해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주변을 돌아보고, 무슨 이야기든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사람,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늘 든든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돌아보자. 무엇보다도 상대에게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야 진정한 친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심금을 울리는 주옥 같은 시들과 산문들은 시인의 삶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까지를 모두 담고 있어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들까지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그의 인생 자체가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가 시가 되어 맺힌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순서대로 시를 먼저 읽고 산문을 읽어도 좋고, 산문을 먼저 읽고 시를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손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어디든 펼쳐서 읽어도 좋다. 누구라도 외로워지는 이 계절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책이기도 하다. 외로워도 외롭지 않을 수 있도록 이 책이 도와줄 테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실에 갇힌 남자 스토리콜렉터 8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남자가 살해당했다.
마치 지독히 재미없는 농담의 첫마디 같군. 말기 암인, 어차피 며칠이나 몇 주 있으면 죽을 남자가, 총탄에 의해 남은 길을 서둘러 가게 되다니.
데커는 메릴 호킨스의 방 벽에 몸을 기댄 채, 2인조 감식반이 전문적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p.37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괴물이라 불린 남자>, <죽음을 선택한 남자>, <폴른:저주받은 자들의 도시>에 이은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 그 다섯 번째 작품이다. 에이머스 데커, 195센티키터, 몸무게는 135킬로그램에서 180킬로그램 사이를 오가는 거한. 대학 4년 내내 미식축구 선수였고 내셔널 풋볼 리그에 진출했으나, 첫번째 출전한 경기에서 사고로 선수로서의 경력은 끝났다. 경찰로서 20년 근무했지만, 어느 날 오랜 잠복근무 끝에 귀가했다가 아내, 처남, 그리고 딸이 잔혹하게 살해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후 노숙자 보호소를 거쳐 사설 탐정으로 잡다한 일을 하며 밑바닥으로 추락한 삶을 살았지만, 결국 사건 해결에 활약을 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FBI 미제 수사 팀에서 일하게 된다.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전작에서 데커는 수사 과정에서 화염일 피하다 머리에 부상을 입었고, 자신의 완벽한 기억력과 공감각 능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데커는 미식축구 경기 중에 사고를 당했고, 잠깐 동안 죽었다 살아난 댓가로 과잉기억증후군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됐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과잉기억증후군이란 사실 아무 것도 잊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떤 기억을 찾으려고 할 때 머릿속의 영상 저장 장치를 켜면, 마치 녹화된 비디오 카메라를 돌려 보기라도 하듯이 눈 앞에서 그 형상들이 보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지나간다. 거기에 더해 숫자와 색깔이 연결됐고, 시간도 그림처럼 눈에 보이는 공감각 능력도 가지고 있다. 색깔들이 불쑥 불쑥 생각 속으로 끼어들고 사람이나 사물을 색깔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가 하는 수사란 일반적인 범죄 수사의 패턴과는 조금 다를 수밖에 없고, 그것이 이 시리즈 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이기도 했다. 그런데, 매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바로 그 능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면 어떨까.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던 그 완벽한 기억력도 전적으로 믿을 수 없게 된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신작은 앞으로 이어질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기점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데커는 거리 맞은편에 세워둔 차에 앉아서 옛집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지금 데커의 마음속보다는 밤의 어둠이 차라리 더 밝을 것이다.
데커는 자신에게 과거에 살든가 현재에 살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종용했지만, 둘 다 불가능했다.
어느 쪽을 택해야 하지? 이렇게 어려운 결정일 리가 없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어려운 거지?      p.411

 

데커는 딸인 몰리의 열네번째 생일을 맞아 고향인 벌링턴을 찾는다. 케이크도, 선물도 없었다. 그의 딸은 4년 전 끔찍한 사건으로 살해당했으니 말이다. 데커는 언젠가 땅 밑에 누워 있는 가족에게 자신도 합류하게 될 그날까지 매년 딸의 생일마다 이곳을 찾을 계획이었다. 무덤을 돌아보는 데커에게 한 늙은 남자가 다가온다. 그의 이름은 메릴 호킨스, 데커가 벌링턴 경찰서 강력반 신참일 때 첫 살인 사건을 맡아 체포했던 남자이다. 두 아이를 포함해 네 사람을 살해한 죄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던 그는 자신이 말기 암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출소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데커가 틀렸다고, 자신은 무죄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이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라고 하던 호킨스는 얼마 뒤 이마 중앙에 총알이 박힌 채로 발견된다. 말기 암이라 어차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남자가 살해 당한 이유는 뭘까. 과연 완벽한 기억력의 소유자 데커가 실수를 저질렀던 것일까. 만약 무고한 남자가 유죄 판결을 받도록 하는데 자신이 한몫을 했다면, 반드시 그걸 바로잡아야 다고 데커는 생각한다. 그리고 13년전의 사건을 재수사하면서 데커의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던 의심은 점점 더 호킨스가 무죄라는 확신으로 바뀌게 된다.

 

출간되는 족족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고, 80개국 45개 언어로 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1억 1천만 부가 팔린 작가. 출간 수익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범죄 소설 작가'인 데이비드 발다치의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는 올해 여섯 번째 작품인 <Walk The Wire>까지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도 매년 한 권씩 꾸준히 나오고 있으니, 여섯 번째 작품도 빨리 만나 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매끈하게 잘 빠진 스릴러를 만나 보고 싶다면, 대중성과 작품의 완성도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범죄 소설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거듭되는 반전과 탄탄한 구성, 그리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매력적인 캐릭터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재미를 선사할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깥은 불타는 늪 / 정신병원에 갇힘 알마 인코그니타
김사과 지음 / 알마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관을 사랑할 수는 없다. 당연하다. 도대체 어떤 제정신인 양반이 도서관에 애정을 쏟는단 말인가? 주식시장에 도서관 지수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정말이지 오리무중이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과 사랑에 빠진 대학원생들이 죄다 돌아버렸다는 것쯤은 나 같은 얼치기도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니까 비극은 맨해튼에 불시착한 지 얼마 안 된 내가 글을 쓸 장소로 도서관을 선택하면서 시작되었다. 모든 비극은 그렇게 사소하게, 하지만 제삼자가 봤을 때 덜컥 어머나, 어쩌다가 쟤는?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선명한 오류로부터 발생한다.     p.30

 

이 책은 팬데믹 이전 뉴욕의 풍경들을 담고 있다. 김사과 작가는 자본의 최정점에 선 도시 뉴욕에서 살았던 시간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기존 그녀의 독특한 작품들을 기억한다면, 이 책 또한 평범한 여행 에세이처럼 흘러가지 않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오래 전에 읽었던 김사과의 소설 <천국에서>라는 작품이 문득 떠올랐다. 그 소설에서 보여졌던 세련되고 근사한 힙스터들의 세계란 공연과 파티와 마약으로 이어지는 뉴욕의 문화를 경험하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맨해튼의 로어이스트사이드에 있는 오층짜리 아파트에서 매력적인 뉴요커들과 힙해 보이지만 속은 텅 비어있는 몇 달을 보낸 후 다시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온 평범한 여대생이 주인공이었다. 뉴욕에 갔다 온 뒤로 그녀는 모든 것이 시시하게 느껴졌고, 서울의 모든 것이 하나같이 덜 떨어지게 느껴졌다. 주인공과 등장인물은 비 호감이고, 그다지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부분도 없었지만, 인물들의 이야기 사이사이 작가가 짚어내고 있는 현대 사회에 대한 덤덤한 말투의 비판과 세태에 대한 건조한 문체는 매우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뉴욕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김사과의 소설을 읽었기에, 시제로 뉴욕에서의 삶을 작가가 어떻게 경험했는지 매우 궁금해졌다. 힘의 완벽한 쇼케이스 장소인 뉴욕, 그곳에서는 사방이 90도 수직으로 꺾이는 미친 방식의 산책이 가능하다고 한다.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한 대낮의 뉴욕공립도서관, 패션 잡지를 한 장 한 장 찢어 만든 것 같은 거리 풍경, 직접 가보는 것보다 구글맵에서 실체를 더 잘 볼 수 있는 곳, 음식이 아니라 분위기를 파는 레스토랑 등 이 책에는 우리가 알고 있던 뉴욕과 알지 못했던 뉴욕의 모습들이 모두 담겨 있었다. 뉴욕의 소비문화와 미국의 정치를 비롯해 사회과학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김사과 작가 특유의 날카롭고 예민한 시선으로 읽어내는 뉴욕의 풍경들은 놀랍기도 했고, 흥미롭기도 했다. 급기야 '뉴욕은 뉴욕 행세를 하는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문장에 이르면, 그야말로 실체가 없다는 이 도시에 대해 더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직 뉴욕에 가보지 못했기에 낯설고 생소한 도시의 풍경들이 급기야 그리워진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할 것이다.

 

 

뉴욕에 산다는 것은 완벽하게 순수한 고통 속에서 현실에 대한 믿음을, 믿음에 기반한 현실을 완전히 포기하는 과정이다. 그 결과 뉴욕의 삶에 적응한 인간은 지구 최강의 관념론자로 탈바꿈하게 된다. 일종의 도인이 되는 것이다. 눈앞에 빤히 보이는 것들을 득도한 도사처럼 먼 배경으로서 관조할 것.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파괴시키는 전방위적인 공격을 너털웃음 지으며 바라볼 것. 그 결과 뉴요커들은 굉장히 특이한 초자아의 소유자가 된다... 총체적으로 장대한 파라노이아로 이루어진 가장 보통의 삶을 이 미친 도시는 당신에게 선사한다.        p.99

 

평범한 뉴요커로 보인다는 것은 광량과 온도, 습도와 풍향에 의해 매 순간 요동치는 뉴욕의 패션 법칙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작가의 말은 뉴욕을 단순히 패션의 도시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더 리얼하게 뉴욕을 체감하게 만들어 준다. 공원에 들어앉은 유기농 장터, 그 옆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여 햇살을 쬐는 시민들, 공원을 등지고 들어선 고급 콘도들이 선전하는 최신식 마약중독자 라이프 스타일, 그 모든 것이 함께 공존하는, 해독 불가능한 넌센스라니.. 김사과 작가의 사유는 특별하다. 광증과 망상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단단한 문장으로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며 날것 그대로의 뉴욕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문제적 작가라는 말이 잘 어울릴 정도로 범상치 않은 작품을 써온 작가답게, 오직 김사과만의 문체로 풀어내는 뉴욕의 풍경들이 너무 인상적인 에세이였다. 여타의 여행 에세이에서 보아온 평범한 감상을 예상했다면 조금 당황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에세이라기보다는 인문학 통찰이 돋보이는 담론집에 가까우니 말이다. 그런데 평범한 여행 에세이보다 더 재미있게 읽히는 글이었고, 내가 마치 뉴욕이라는 도시에 있는 듯한 기분 마저 들게 하는 공간감이 인상적이었다. 뉴욕에서는 다섯 애비뉴 정도를 가로지르는 것은 장난일 정도로 도무지 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는 사실과 반대로 뉴욕에 있으면 집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다고, 도무지 움직이지 않고 집에 틀어박힌 채 온라인 쇼핑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 이상하지만 완벽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뉴욕이라는 도시를 설명해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라이프스타일, 음악, 패션, 음식, 문화 등 뉴욕이 모든 것을 날것의 스타일로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 보자. 지금껏 만나보지 못했던 색다른 경험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본이 없는 완벽한 인공의 세계' 뉴욕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렉스 - 위기의 팀을 빠르게 혁신하는 유연함의 기술
제프리 헐 지음, 조성숙 옮김 / 갤리온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최소한 역할 하나는 수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필요할 때마다 순식간에 역할을 전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전가지의 역할을 그대로 유지한 채 새로운 회의나 대화를 성급하게 시작한다. 심리학자 타티아나가 지적한 것처럼, 유능한 리더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아를 다 꿰며 그 상황에 어울리는 자아를 능동적으로 선택한다. 우리는 사생활에서는 이런 역할 전환을 꽤 잘하는 편인다.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을 때면 우리는 어느새 비밀을 나누고 조언하는 상담자가 된다. 하지만 직장에서는 이런 카멜레온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p.90

 

가끔 보는 티비 예능 프로그램 중에 '대한민국 보스들의 자발적 자아성찰'이라는 컨셉으로 각 분야의 사장 혹은 리더들이 출연해 이야기를 나누는 방송이 있다. 대부분 리더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 팀원들이 생각하는 리더의 모습에는 괴리감이 있었다. 리더 스스로는 자신이 유연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알고 보니 팀원들에게 그는 권위적인 리더였다든가 하는 식이다. 게다가 어떤 팀원에게는 리더가 독단적이었지만, 또 어떤 팀원에게는 우유부단하다고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는 리더의 자질 문제이기도 하지만, 팀원들 각자의 개성도, 성격도 다르고 각자가 원하는 것도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체 리더에게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 걸까.

 

20년간 각계 최고경영자에게 리더십 전략을 코칭한 경영자 코치이자 하버드메디컬스쿨 심리학과 교수진 제프리 헐 박사는 '2021년 새로운 리더십'의 기준을 이렇게 제시한다. '일하는 방식이 바뀌고 팀원의 세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리더는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플렉스(FLEX) 리더십'이란 때로는 권위적으로 때로는 개방적으로 상대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변화형 리더십을 말한다. 그는 '알파형 리더'와 '베타형 리더'라는 상반된 리더의 상을 제시하며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변신형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인생사의 덧없음을 확연하게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삶이 한순간에 깨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매사에 감사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준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데이브는 원래의 알파형 모드로 돌아왔지만 나는 영원히 바뀌었다. 제프의 죽음도 한 원인이었고, 독불장군 리더의 베일 속을 들여다보면서 얻은 통찰도 한 원인이었다. 그 후 나는 마음을 드러내고 취약성을 내보이면서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는 의뢰인들을 수백 명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리더만이 모두를 움직이게 만들 힘을 얻는다.      p.199~200

 

밀레니얼 세대가 원하는 보스는 권위를 앞세우는 알파형 보스가 아니라 베타형 보스이다. 목표를 중시하고 명령과 권위를 중시하는 알파형 리더십에 비해 베타형 리더십은 성장을 지향하고 과정을 중시한다.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 고압적으로 아래를 굽어보며 명령하는 알파형 리더에 비해 베타형 리더는 꼭대기가 아니어도 언제 어디서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언제라도 협력하고 나누고 교류하기를 원하고, 끊임없이 성장하려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알파형 리더가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각각의 리더에 맞춰 '유연함의 기술'에 대해서 알려 준다. 알파형 리더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지만, 모두가 베타형 리더가 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한테 맞는 리더십 전략을 선택하면 된다고, 리더십 스타일에 주력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접근법을 바꾸는 '유연함'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니 말이다.

 

이 책에는 리더십 에너지 자가평가 항목도 수록되어 있다. 결과에 따라 자신이 이성형 리더인지, 감성형 리더인지, 행동형 리더인지 파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어느 리더십 유형인지를 파악하게 되면,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 그에 맞는 대안을 더 정확히 알게 된다. 제프리 헐 박사는 경영자 코치로서 각계의 일터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례들을 직접 코칭한 결과를 바탕으로, 리더의 유형에 따른 섬세한 솔루션을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조직 생활에서 한번쯤은 마주쳤을 매우 익숙한 상황들이 사례로 소개되고 있어, 각 부서의 팀장부터 한 회사의 최고경영자에 이르기까지 바로 현장에 적용해서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신은 어떤 리더인지, 나의 리더십 성향을 알아보고 싶다면, 그리고 현장의 리더로서 위기를 겪고 있다면 이 책이 명쾌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 같다. 오늘날 리더십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을 만나 보자. 지금은 알파형 리더십과 베타형 리더십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이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들이 일부러 난폭하게 너와 부딪칠 때 그건 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야
소말리아 내전에서 죽은 오십만 명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거야, 난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 나라에서 성공하겠지, 여유가 없으니 열심히 일해야 할 거야, 구직 시장에 나갔을 때 힘들 거라는 거 알아, 하지만 너도 알잖아, 야즈? 난 희생자가 아니야, 절대 나를 희생자로 대하지 마, 우리 엄만 날 희생자로 키우지 않았어.     p.91

 

캐럴은 홍콩에 본사를 둔 새 고객과 이른 아침 회의를 하려는 참이다. 그녀는 명문대를 거쳐 현재 투자 은행의 부사장으로 탄탄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어린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새로운 고객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을 편견으로 가득 찬 시선으로 대하는 것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그녀는 빈민 지역에서 중등학교를 나왔고, 열세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간 파티에서 집단 강간을 당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 시간이 멈춰 버렸고, 캐럴은 그 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에게도, 엄마에게도,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 같았고, 공부니 학교니 다 상관없다는 생각에 점점 삐뚤어져 갔다. 하지만 그 일 이후 일 년이 되던 날, 미혼모로 살고 있는 자신의 미래, 엄마처럼 형편없는 저임금 일을 하며 생활에 허덕이며 살고 있는 미래를 본다. 그리고 절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버미는 부자들이 다니는 유명 대학에 딸인 캐럴이 진학했을 때, 그리고 졸업식에서 학위 받는 모습을 지켜볼 때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마침내 해낸 딸이 대견했고, 자랑스러웠다. 그녀는 캐럴이 졸업 후 자신의 진정한 문화로 돌아와 훌륭한 나이지리아인 남편을 얻기를 바랬다. 하지만 딸은 투자은행에 좋은 일자리를 얻은 후 백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통보한다. 엄마에게 한 번도 소개한 적 없는, 사귄 지 오래된 영국인 남자 친구가 있었다는 것도 몰랐던 버미는 분노에 휩싸인다. 그리고 캐럴이 열세 살 무렵 학교를 빼먹고 성적이 곤두박질 쳤던 시절만큼이나 속수무책이라고 느낀다. 버미는 물론 딸이 그 당시에 집단 강간을 당했던 일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왜 딸이 성공에 집착하는 지도, 왜 나이지리아인과 결혼할 생각이 없는 지도 말이다.

 

이 작품의 각 장은 이렇게 딸인 캐럴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나면 엄마 버미와 친구 라티샤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캐럴의 학교 교장 셜리와 그녀의 엄마, 동료 교사의 삶이 교차되면서 펼쳐지고 있다. 완전히 다른 열두 여성의 삶은 그렇게 각자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연결되어 있고, 어떤 순간에는 서로 교차되고, 결국 오케스트라 화음처럼 어우러진다. 그렇게 이들의 이야기는 억압과 편견에 맞서 살아온, 지금도 뜨겁게 살고 있는 우리 여성들의 삶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들이 겪는 일들이 절대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 전에도 겪은 적 있었고, 앞으로도 겪을 일이며, 지금 현재 지구 상의 어느 곳에서 벌어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우리를 공감하게 만들고, 함께 연대하게 만든다.

 

 

그녀는 노력했다, 혼자 먹을거리를 행복하게 사러 가고, 혼자 잠자리에 행복하게 들고, 옆자리가 빈 침대에서 행복하게 일어나고, 건설 현장 노동자들이 더는 그녀 뒤에 대고 휘파람을 불지 않는 걸 행복하게 여기려 했다(생각해보니 예전엔 그들이 그러는 걸 싫어했다)
거울 속 중년의 몸을 바라보며 얼굴 주름을 당기지 않으려 했다, 여성의 모습은 모두 각기 다른 형태와 크기로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는가?
퍼넬러피는 자신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싶었다     p.413~414

 

이 작품은 브리티시북어워드를 비롯해 영국의 주요 문학상을 석권하며 문학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2019 부커상 수상작이다. 흑인 여성 최초의 부커상 수상이자 마거릿 애트우드와의 공동수상이라는 점도 화제였다. 무엇보다 백여 년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혈연 혹은 친분으로 이어진 열두 여성의 삶을 담고 있는 독특한 방식의 여성 서사를 록산 게이부터 버락 오바마까지 저명한 인사들이 앞다투어 추천했다. 작가인 버나딘 에바리스토는 '문학에 흑인 영국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게 불만스러워서 열두 명의 흑인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작품에는 백인 학생들 가운데 유일한 흑인으로 보낸 학창 시절과 획일적인 모습을 강요하는 학교와 달리 다양성을 존중하는 예술의 세계에 매혹되고, 연극 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최초의 흑인 여성 극단을 경영하는 제작자이자 배우로 살아온 저자의 삶들이 반영되어 있다.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이유로 활동에 제약이 생기자, 현실에 불만을 품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했던 경험이 있기에 만들어낼 수 있는 여성 서사와 그걸 바탕으로 구축된 캐릭터들의 힘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감동을 안겨주는 드라마로 완성된다.

 

무려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이 소설은 형식적인 면에서도 대단히 독특한 시도를 하고 있다. 전체 문장이 운문의 형태를 띠는 산문으로, 문장 부호 사용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은 문장들이 대부분인데, 덕분에 문장이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느낌도 들 것이다. 마치 물이 흐르듯이 천천히 문장들이 인물과 이야기 속으로 스며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시제와 문장부호, 띄어쓰기 모두 일반적인 책들과 달라서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독특한 구조가 눈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점점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고, 시공간을 초월해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게 된다. 영국에서 흑인 여성으로 산다는 것, 그리고 성소수자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고, 사는 동안 절대 알 수도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 두툼한 책을 다 읽고 나니 그들의 삶을 경험해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내 삶으로부터 멀어져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인물들도,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도 현실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열두 명의 여성 캐릭터들은 각기 다른 열두 색깔의 삶을 살아내고 있지만 그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방식은 우리가 세상과 나누는 대화의 일부이기도 하다. 마침표 대신 수많은 쉼표와 행갈이로 문장과 문장이 흘러가는 독특한 소설 체험을 해보고 싶다면, 살아 숨 쉬는 압도적인 서사의 힘을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