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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ㅣ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0년 11월
평점 :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닥을 만나면 바닥에 주저앉는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일일이 예를 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바닥에 직면했다. 그럴 때마다 "내 인생이 바닥에 굴러떨어졌구나!"하고 한탄하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왜 내 인생에 바닥이 존재하는가, 소리 없이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인생은 결국 바닥에 굴러떨어지는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거였다. 바닥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바닥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거였다. p.58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로 너무도 유명한 정호승 시인은 올해로 등단 47주년을 맞았다. 전 세대에게 널리 사랑 받는 시를 써 교과서에도 시가 실려 있는 국민 시인이기도 한 그는 그 동안 천 편이 넘는 시를 발표해왔다. 이번 책은 60편의 시와 산문이 어우러진 '시 산문집'으로 시의 배경이 되거나 계기가 된 이야기들을 그 시와 함께 한자리에 한 몸으로 모아놓았다. '시와 산문은 한 몸'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오늘을 있게 한 순간들을 그가 직접 가려 뽑은 시와 그 시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책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사진부터 군 복무하던 시절, 부모님과의 한때, 존경하는 스승님과 찍은 사진 등 시인이 소중히 간직해온 20여 컷의 사진도 함께 수록되어 있어 그야말로 인생이 시가 되어 맺히는 모든 순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공들인 언어는 마치 선물과도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시를 소리 내어 외우면서 낸 몸의 자양분을 얻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책에는 훌훌 넘겨 가며 가볍게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언어들이 가득하다.
시인은 등단해서 지금까지 출간한 12권의 신작시집 속 1천 편 정도의 시 중에서 '내 인생에 큰 힘과 용기를 주는, 내 인생을 위로하고 위안해주는 단 한 편의 시'로 <산산조각>을 꼽는다고 말한다. 지금도 하루하루의 삶에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에 부딪치게 되면 "오늘도 산산조각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오늘도 산산조각으로 살아가면 되지 뭐!"하고 생각한다고. 그러면 놀랍게도 그토록 자신을 힘들게 하던 고통이 다소 가라앉아 덜 고통스러워진다고 말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에게도 그런 시가 한 편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학교에서 누군가 시켜서 뭔가를 외웠던 시절 이후로, 어른이 되어 무언가를 외워야 할 일이란 좀처럼 없지 않은가. 그런데 시를 외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시를 암기해서, 그 시를 내 안에 지니고 다닐 수 있게 된다면, 살면서 어떤 순간에든 그 시를 꺼내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힘들 때나 기쁠 때, 혹은 절망하고, 지쳤을 때 위로가 되고, 나에게 힘이 되어줄 그런 시 말이다.
인생은 슬프다. 인생이 슬프기 때문에 시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 슬프지 않은 인생은 없다. 슬픈 인생 중에서도 노인들의 인생은 더 슬프다. 떠나야 할 때에 떠난 노인들보다 떠나야 할 때에 떠나지 못한 노인들의 인생은 더욱 슬프다. 노인들의 슬픔은 관념이 아니라 구체다. '사람은 늙으면 적당한 때에 떠나야 한다'는 말은 관념의 소산이 아니라 구체의 소산이다. 태어나는 일에는 순서가 있지만 죽는 일에는 순서가 없어 노인들의 고통은 구체적이다. 그 고통의 구체성은 마음보다 육체가 먼저 허물어지는 일에서부터 비롯된다. p.494
'죽은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신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누룩>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뭉클해졌다. 죽마고우라는 말에 걸 맞는,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들이 내게도 몇 있지만, 사실 나이를 먹을 수록 만나는 친구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다. 시인의 말처럼 '나이가 든다는 것은 진정한 친구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이러다가 나중에는 만날 친구가 한 명도 없게 될 까봐 두렵다'는 식의 생각을 나도 요즘은 자주 하게 된다. 물론 친구가 많은 것보다 중요한 것은 단 한 사람이라도 서로 진실하게 대하고 신뢰하며 사랑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만나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그만큼 그리운 사람은 더 늘어나게 되는 것이 어쩌면 인생사의 또 다른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다들 살기 바빠서, 매일의 반복되는 일상을 쫓아가느라 그나마 덜 중요해진 우정은 점차 소홀히 대하게 되니 말이다. 우정을 유지하는데는 인내와 정성, 시간이 필요하다. 가만히 놔두어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죽은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신다
죽어서 사는 일도 두렵다고
살아 있을 때 단 한번이라도
남을 위해 누룩이 되어본 적 있느냐고
죽은 친구들이 술 취해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주변을 돌아보고, 무슨 이야기든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사람,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늘 든든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돌아보자. 무엇보다도 상대에게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야 진정한 친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심금을 울리는 주옥 같은 시들과 산문들은 시인의 삶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까지를 모두 담고 있어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들까지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그의 인생 자체가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가 시가 되어 맺힌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순서대로 시를 먼저 읽고 산문을 읽어도 좋고, 산문을 먼저 읽고 시를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손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어디든 펼쳐서 읽어도 좋다. 누구라도 외로워지는 이 계절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책이기도 하다. 외로워도 외롭지 않을 수 있도록 이 책이 도와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