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들이 일부러 난폭하게 너와 부딪칠 때 그건 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야
소말리아 내전에서 죽은 오십만 명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거야, 난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 나라에서 성공하겠지, 여유가 없으니 열심히 일해야 할 거야, 구직 시장에 나갔을 때 힘들 거라는 거 알아, 하지만 너도 알잖아, 야즈? 난 희생자가 아니야, 절대 나를 희생자로 대하지 마, 우리 엄만 날 희생자로 키우지 않았어.     p.91

 

캐럴은 홍콩에 본사를 둔 새 고객과 이른 아침 회의를 하려는 참이다. 그녀는 명문대를 거쳐 현재 투자 은행의 부사장으로 탄탄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어린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새로운 고객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을 편견으로 가득 찬 시선으로 대하는 것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그녀는 빈민 지역에서 중등학교를 나왔고, 열세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간 파티에서 집단 강간을 당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 시간이 멈춰 버렸고, 캐럴은 그 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에게도, 엄마에게도,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 같았고, 공부니 학교니 다 상관없다는 생각에 점점 삐뚤어져 갔다. 하지만 그 일 이후 일 년이 되던 날, 미혼모로 살고 있는 자신의 미래, 엄마처럼 형편없는 저임금 일을 하며 생활에 허덕이며 살고 있는 미래를 본다. 그리고 절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버미는 부자들이 다니는 유명 대학에 딸인 캐럴이 진학했을 때, 그리고 졸업식에서 학위 받는 모습을 지켜볼 때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마침내 해낸 딸이 대견했고, 자랑스러웠다. 그녀는 캐럴이 졸업 후 자신의 진정한 문화로 돌아와 훌륭한 나이지리아인 남편을 얻기를 바랬다. 하지만 딸은 투자은행에 좋은 일자리를 얻은 후 백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통보한다. 엄마에게 한 번도 소개한 적 없는, 사귄 지 오래된 영국인 남자 친구가 있었다는 것도 몰랐던 버미는 분노에 휩싸인다. 그리고 캐럴이 열세 살 무렵 학교를 빼먹고 성적이 곤두박질 쳤던 시절만큼이나 속수무책이라고 느낀다. 버미는 물론 딸이 그 당시에 집단 강간을 당했던 일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왜 딸이 성공에 집착하는 지도, 왜 나이지리아인과 결혼할 생각이 없는 지도 말이다.

 

이 작품의 각 장은 이렇게 딸인 캐럴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나면 엄마 버미와 친구 라티샤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캐럴의 학교 교장 셜리와 그녀의 엄마, 동료 교사의 삶이 교차되면서 펼쳐지고 있다. 완전히 다른 열두 여성의 삶은 그렇게 각자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연결되어 있고, 어떤 순간에는 서로 교차되고, 결국 오케스트라 화음처럼 어우러진다. 그렇게 이들의 이야기는 억압과 편견에 맞서 살아온, 지금도 뜨겁게 살고 있는 우리 여성들의 삶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들이 겪는 일들이 절대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 전에도 겪은 적 있었고, 앞으로도 겪을 일이며, 지금 현재 지구 상의 어느 곳에서 벌어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우리를 공감하게 만들고, 함께 연대하게 만든다.

 

 

그녀는 노력했다, 혼자 먹을거리를 행복하게 사러 가고, 혼자 잠자리에 행복하게 들고, 옆자리가 빈 침대에서 행복하게 일어나고, 건설 현장 노동자들이 더는 그녀 뒤에 대고 휘파람을 불지 않는 걸 행복하게 여기려 했다(생각해보니 예전엔 그들이 그러는 걸 싫어했다)
거울 속 중년의 몸을 바라보며 얼굴 주름을 당기지 않으려 했다, 여성의 모습은 모두 각기 다른 형태와 크기로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는가?
퍼넬러피는 자신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싶었다     p.413~414

 

이 작품은 브리티시북어워드를 비롯해 영국의 주요 문학상을 석권하며 문학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2019 부커상 수상작이다. 흑인 여성 최초의 부커상 수상이자 마거릿 애트우드와의 공동수상이라는 점도 화제였다. 무엇보다 백여 년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혈연 혹은 친분으로 이어진 열두 여성의 삶을 담고 있는 독특한 방식의 여성 서사를 록산 게이부터 버락 오바마까지 저명한 인사들이 앞다투어 추천했다. 작가인 버나딘 에바리스토는 '문학에 흑인 영국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게 불만스러워서 열두 명의 흑인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작품에는 백인 학생들 가운데 유일한 흑인으로 보낸 학창 시절과 획일적인 모습을 강요하는 학교와 달리 다양성을 존중하는 예술의 세계에 매혹되고, 연극 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최초의 흑인 여성 극단을 경영하는 제작자이자 배우로 살아온 저자의 삶들이 반영되어 있다.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이유로 활동에 제약이 생기자, 현실에 불만을 품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했던 경험이 있기에 만들어낼 수 있는 여성 서사와 그걸 바탕으로 구축된 캐릭터들의 힘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감동을 안겨주는 드라마로 완성된다.

 

무려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이 소설은 형식적인 면에서도 대단히 독특한 시도를 하고 있다. 전체 문장이 운문의 형태를 띠는 산문으로, 문장 부호 사용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은 문장들이 대부분인데, 덕분에 문장이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느낌도 들 것이다. 마치 물이 흐르듯이 천천히 문장들이 인물과 이야기 속으로 스며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시제와 문장부호, 띄어쓰기 모두 일반적인 책들과 달라서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독특한 구조가 눈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점점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고, 시공간을 초월해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게 된다. 영국에서 흑인 여성으로 산다는 것, 그리고 성소수자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고, 사는 동안 절대 알 수도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 두툼한 책을 다 읽고 나니 그들의 삶을 경험해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내 삶으로부터 멀어져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인물들도,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도 현실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열두 명의 여성 캐릭터들은 각기 다른 열두 색깔의 삶을 살아내고 있지만 그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방식은 우리가 세상과 나누는 대화의 일부이기도 하다. 마침표 대신 수많은 쉼표와 행갈이로 문장과 문장이 흘러가는 독특한 소설 체험을 해보고 싶다면, 살아 숨 쉬는 압도적인 서사의 힘을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