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불타는 늪 / 정신병원에 갇힘 알마 인코그니타
김사과 지음 / 알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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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을 사랑할 수는 없다. 당연하다. 도대체 어떤 제정신인 양반이 도서관에 애정을 쏟는단 말인가? 주식시장에 도서관 지수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정말이지 오리무중이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과 사랑에 빠진 대학원생들이 죄다 돌아버렸다는 것쯤은 나 같은 얼치기도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니까 비극은 맨해튼에 불시착한 지 얼마 안 된 내가 글을 쓸 장소로 도서관을 선택하면서 시작되었다. 모든 비극은 그렇게 사소하게, 하지만 제삼자가 봤을 때 덜컥 어머나, 어쩌다가 쟤는?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선명한 오류로부터 발생한다.     p.30

 

이 책은 팬데믹 이전 뉴욕의 풍경들을 담고 있다. 김사과 작가는 자본의 최정점에 선 도시 뉴욕에서 살았던 시간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기존 그녀의 독특한 작품들을 기억한다면, 이 책 또한 평범한 여행 에세이처럼 흘러가지 않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오래 전에 읽었던 김사과의 소설 <천국에서>라는 작품이 문득 떠올랐다. 그 소설에서 보여졌던 세련되고 근사한 힙스터들의 세계란 공연과 파티와 마약으로 이어지는 뉴욕의 문화를 경험하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맨해튼의 로어이스트사이드에 있는 오층짜리 아파트에서 매력적인 뉴요커들과 힙해 보이지만 속은 텅 비어있는 몇 달을 보낸 후 다시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온 평범한 여대생이 주인공이었다. 뉴욕에 갔다 온 뒤로 그녀는 모든 것이 시시하게 느껴졌고, 서울의 모든 것이 하나같이 덜 떨어지게 느껴졌다. 주인공과 등장인물은 비 호감이고, 그다지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부분도 없었지만, 인물들의 이야기 사이사이 작가가 짚어내고 있는 현대 사회에 대한 덤덤한 말투의 비판과 세태에 대한 건조한 문체는 매우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뉴욕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김사과의 소설을 읽었기에, 시제로 뉴욕에서의 삶을 작가가 어떻게 경험했는지 매우 궁금해졌다. 힘의 완벽한 쇼케이스 장소인 뉴욕, 그곳에서는 사방이 90도 수직으로 꺾이는 미친 방식의 산책이 가능하다고 한다.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한 대낮의 뉴욕공립도서관, 패션 잡지를 한 장 한 장 찢어 만든 것 같은 거리 풍경, 직접 가보는 것보다 구글맵에서 실체를 더 잘 볼 수 있는 곳, 음식이 아니라 분위기를 파는 레스토랑 등 이 책에는 우리가 알고 있던 뉴욕과 알지 못했던 뉴욕의 모습들이 모두 담겨 있었다. 뉴욕의 소비문화와 미국의 정치를 비롯해 사회과학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김사과 작가 특유의 날카롭고 예민한 시선으로 읽어내는 뉴욕의 풍경들은 놀랍기도 했고, 흥미롭기도 했다. 급기야 '뉴욕은 뉴욕 행세를 하는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문장에 이르면, 그야말로 실체가 없다는 이 도시에 대해 더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직 뉴욕에 가보지 못했기에 낯설고 생소한 도시의 풍경들이 급기야 그리워진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할 것이다.

 

 

뉴욕에 산다는 것은 완벽하게 순수한 고통 속에서 현실에 대한 믿음을, 믿음에 기반한 현실을 완전히 포기하는 과정이다. 그 결과 뉴욕의 삶에 적응한 인간은 지구 최강의 관념론자로 탈바꿈하게 된다. 일종의 도인이 되는 것이다. 눈앞에 빤히 보이는 것들을 득도한 도사처럼 먼 배경으로서 관조할 것.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파괴시키는 전방위적인 공격을 너털웃음 지으며 바라볼 것. 그 결과 뉴요커들은 굉장히 특이한 초자아의 소유자가 된다... 총체적으로 장대한 파라노이아로 이루어진 가장 보통의 삶을 이 미친 도시는 당신에게 선사한다.        p.99

 

평범한 뉴요커로 보인다는 것은 광량과 온도, 습도와 풍향에 의해 매 순간 요동치는 뉴욕의 패션 법칙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작가의 말은 뉴욕을 단순히 패션의 도시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더 리얼하게 뉴욕을 체감하게 만들어 준다. 공원에 들어앉은 유기농 장터, 그 옆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여 햇살을 쬐는 시민들, 공원을 등지고 들어선 고급 콘도들이 선전하는 최신식 마약중독자 라이프 스타일, 그 모든 것이 함께 공존하는, 해독 불가능한 넌센스라니.. 김사과 작가의 사유는 특별하다. 광증과 망상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단단한 문장으로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며 날것 그대로의 뉴욕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문제적 작가라는 말이 잘 어울릴 정도로 범상치 않은 작품을 써온 작가답게, 오직 김사과만의 문체로 풀어내는 뉴욕의 풍경들이 너무 인상적인 에세이였다. 여타의 여행 에세이에서 보아온 평범한 감상을 예상했다면 조금 당황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에세이라기보다는 인문학 통찰이 돋보이는 담론집에 가까우니 말이다. 그런데 평범한 여행 에세이보다 더 재미있게 읽히는 글이었고, 내가 마치 뉴욕이라는 도시에 있는 듯한 기분 마저 들게 하는 공간감이 인상적이었다. 뉴욕에서는 다섯 애비뉴 정도를 가로지르는 것은 장난일 정도로 도무지 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는 사실과 반대로 뉴욕에 있으면 집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다고, 도무지 움직이지 않고 집에 틀어박힌 채 온라인 쇼핑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 이상하지만 완벽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뉴욕이라는 도시를 설명해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라이프스타일, 음악, 패션, 음식, 문화 등 뉴욕이 모든 것을 날것의 스타일로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 보자. 지금껏 만나보지 못했던 색다른 경험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본이 없는 완벽한 인공의 세계' 뉴욕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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