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 하늘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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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옳지 않아요, 샤파. 옳지 않다고요! 남들이 내가 나쁘거나 이상하거나 죄를 저지르길 바란다는 거, 그 사람들이 나를 나쁘게 만드는 건....." 나쑨은 적절한 단어를 찾아 머릿속을 뒤지며 고개를 흔든다. "난 평범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난 평범한 애가 아니고, 그리고 또 모두가, 엄청 많은 사람들이 나를 증오해요.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증오한다고요. 내가.... 나란 이유로 싫어하지 않는 건 오직 샤파뿐이에요. 그리고 그건 옳지 않아요."    p.118

 

여기 '고요'라는 평범한 대륙이 있다. 어마어마하게 크고 기운이 넘쳐, 지나치게 자주, 너무 많이 움직이는, 결코 고요하지 않은 땅이다. 세상의 종말은 유서 깊고 아름답고 활기 넘치는 한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다섯 번째 계절>에서는 오로진이라는 이유로 아비가 어린 아들을 죽이고, 어미는 이틀을 죽은 아들과 함께 보낸 뒤 아비가 데리고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오로진이라는 존재는 대지를 쥐고 흔들 수 있는 능력을 타고 난 존재로 그 힘은 무심코 한 마을 전체를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었다. 당연히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로진의 능력을 두려워했고, 그러한 감정은 차별과 증오로 구현되었다. <오벨리스크의 문>에서는 사라진 딸을 찾아 고요 대륙을 헤매던 에쑨이 알라배스터로부터 아버지 대지와 계절을 둘러싼 충격적 진실을 접하고 그의 숙명을 이어 받았다.

 

<석조 하늘>은 전작에서 오벨리스크의 문을 발동했던 여파로 몇 달 만에 깨어난 에쑨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긴 여정 동안 에쑨과 나쑨 모녀는 아직도 만나지 못했다. 이들의 모험은 각각 진행되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비로소 만나게 되고, 모녀는 오로진의 힘을 이용해 계절을 끝내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사악한 대지의 분노로 인해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긴 사람들, 이들의 비극은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아끼고 사랑하던 모든 것이 죽고 사라져도, 어떤 일이 있어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아무리 힘들고 지치더라도, 죽고 싶은데도 죽을 수가 없는 삶이란 어떤 걸까.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그 속에서 버티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삶을 체험한다. 이야기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느끼고 아파하면서 말이다. 이 작품이 이인칭 시점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도 한 몫을 한다. 일인칭도, 전지적 시점도 아닌 이인칭은 '너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점'이니 말이다. 사실 이 작품은 인물에 따라 일인칭, 이인칭, 삼인칭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처음에는 다소 낯설지 모르겠지만, 익숙해지면 그 독특함이 이 작품만의 특별함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이들은 운명에 굴복한다. 자긍심을 삼키고, 진실을 잊고, 그들에게 걸맞게 주어진 거짓을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그만큼 소중하고 가치 있을 리가 없다고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그들을 예속하는 데 이토록 열심이라면 그건 그들이 지배당해 마땅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 않더라도 싸우고 저항하는 것은 힘들고 괴롭고 불가능한 일이다... 또 다른 대안은 불가능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건 옳지 않아. 그들은 속삭이고 오열하고, 소리 높여 외친다... 이 방법을 택한다면 반드시 갈등과 충돌을 겪어야 한다.     p.414~415

 

3부작 전권 모두 3년 연속 휴고상 수상이라는 유례없는 기록을 세운 '부서진 대지'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 <다섯 번째 계절>과 <오벨리스크의 문>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기에,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석조 하늘>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책을 받고 보니 좋은 건 마지막까지 아껴두고 싶은 마음이랄까, 이 책만 읽고 나면 이 시리즈가 끝이 난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시리즈 첫 번째, 두 번째 작품을 다시 읽고 나서, 마지막 편을 읽기로 했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게다가 분량부터 방대한 작품을 세 편 연이어 읽는 동안은 즐거웠으나, 읽고 나니 정리하는 게 난감해졌다. 대체 이 엄청난 서사를 단 몇 줄로 요약한다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그래서 작품에 대한 분석이나 요약보다는 짧게라도 감상을 남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대책 없이 애정 표현을 하고 싶을 때는 사실 논리도, 이성도 필요 없다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해보면서 말이다.

 

이 시리즈가 나를 매혹시킨 것 중에 가장 큰 부분은 바로 언어였다. 언어의 밀도, 리듬, 아름다움 모두 내게 특별했다. 게다가 그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 또한 나를 사로잡았다. 근사하게 표현된 표지 이미지도 이 작품의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사실 서사와 캐릭터, 구성, 플롯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완벽했다. 우리는 처음 만나는 책의 첫 장을 펼치며 기대한다. 자, 어서 나를 매혹시켜 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은 뻔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우리를 실망시킨다. 이 작품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고심하여 배열된 단어들로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가 발휘하는 마법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 시리즈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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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 Art & Classic 시리즈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지음, 아일렛, 솔 그림, 진주 K. 가디너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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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지만 동화처럼 기운을 북돋아주진 않았다. 황무지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황무지 끝자락에 서 있는 집. 방이 백 개나 있지만 그중 대부분이 자물쇠로 굳게 잠긴 거대한 저택. 상상해보니 너무나 음울했다. 외진 방에 혼자 틀어박힌 등 굽은 남자는 또 어떻고! 메리는 입술을 더 꽉 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그 우울한 이야기에 걸맞게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잿빛의 비스듬한 선을 그리며 유리창을 세차게 두드리고는 밑으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p.35

 

아트앤클래식 Art &Classic 시리즈 그 여섯 번째 책이다. 아름다운 고전들과 오늘을 대표하는 젊은 아티스트들의 감각이 하나로 만난 아트앤클래식 시리즈는 그림에 따라 기존의 고전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전 작품들은 원작을 제대로 읽지 않은 이들까지 모두 내용을 알고 있을 만큼 익숙한 것들이 많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여러번 읽어서 속속들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읽을 때마다 동심의 세계로 우리를 빠져들게 만드는 마법을 발휘한다.

 

그 동안 아트앤클래식 시리즈에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퍼엉, <키다리 아저씨>와 수빈, <오즈의 마법사>와 제딧, <빨강 머리 앤>과 설찌, <어린 왕자>와 유보라의 조합을 보여줬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비밀의 화원>과 아일렛, 솔 작가가 만났다.

 

 

오일파스텔화를 그리는 전은솔(아일렛, 솔) 작가의 그림들은 특히나 풍경을 근사하게 보여주고 있다. 외딴 곳에 있는 거대한 저택, 10년 동안 잠겨 있었던 비밀의 정원, 그리고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아름다운 풍경들이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무엇보다 아트앤클래식 시리즈는 우리가 사랑했던 고전 작품들을 새로운 분위기로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 특별하다.

 

 

마치 사방에 진녹색 베일을 깔아놓은 듯했다. 나무 아래의 풀밭과 우묵한 쉼터의 빛바랜 화병들은 물론이고 여기도, 저기도, 정말 모든 곳에 황금빛과 보랏빛과 하얀빛이 흩뿌려져 있었다. 콜린의 머리 위로는 눈처럼 새하얀 꽃과 분홍색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파닥파닥하는 날개 소리, 희미하고 감미로운 피리 소리들, 콧노래를 부르듯 흥얼흥얼하는 소리들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수십 가지 향기가 진동을 했다. 상냥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처럼 콜린의 얼굴을 비추는 햇살이 따사로웠다. 메리와 디콘은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콜린을 지켜보았다.     p.344

 

주인공 메리는 몸집이 작고 야윈 몸에 조그맣고 핼쑥한 얼굴에 심술보가 가득한, 버릇없는 아이였다. 일하느라 늘 바쁜 데다 병치레가 잦은 아버지와 굉장한 미인이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는 파티에만 관심이 있던 어머니에게서 전혀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이다. 메리는 병약하고 짜증많고 못생긴 아기일 적부터 되도록 부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어야 했고, 아이가 울면 마담이 화를 냈기 때문에 하인들은 메리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었다. 그 결과 메리는 이미 여섯 살 무렵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을 만큼 이기적인 폭군이 되어 있었다.

 

메리가 아홉 살이 되던 해, 콜레라가 발병해서 사람들이 죽어 간다. 혼자 남겨진 메리는 영국에 있는 고모부 댁에 가서 살게 되는데, 그 저택은 지어진 지 600년이나 되었고, 방이 100개쯤 되지만 대부분은 문이 잠겨 있는 곳이었다. 누군가를 배려하거나, 걱정하거나, 좋아해본 적도 없었던 심술쟁이 소녀 메리는 그 곳에서 수다쟁이 하녀 마사와 그녀의 동생 디콘을 만나고, 비밀의 정원에서 꽃을 가꾸며 동물들과도 친해지면서 조금씩 달라져 간다. 

 

 

<비밀의 화원>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 심술궂고 버릇없었던 메리와 어릴 때부터 병약해 곧 죽을 거라며 두려움에 떨던 콜린, 그리고 동물들과 이야기할 줄 아는 디콘까지..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며 조금씩 달라져 가는 모습과 버려진 뜰에 나타나는 마법 같은 변화들이 너무도 사랑스럽게 그려지고 있는 작품이다.

 

죽은 줄만 알았던 정원을 가꾸고 돌보면서 메리가 경험하게 되는 자연의 치유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작품이 주는 감동과 매력이 달라질 수 있다. 서서히 변해가는 정원의 사계절 모습을 따뜻하고, 다채롭게 담아내고 있는 오일파스텔 일러스트가 너무 아름다웠다. 독특한 질감과 색감이 나타내는 풍경들은 따스한 계절과도, 추운 계절과도 굉장히 잘 어울렸다. 아무 것도 없었던 비밀 정원에 싹이 나고 꽃이 피고, 매일 아침 새로운 기적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내 마음 속에도 나만의 비밀 정원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생명력과 마법과도 같은 위로가 필요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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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더봇 다이어리 : 로그 프로토콜 FoP 포비든 플래닛 시리즈 9
마샤 웰스 지음, 고호관 옮김 / 알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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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죽이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모두를 죽여야만 했다. 미키도 포함해서. 아베네도 포함해서. 아직 붙어 있는 아베네의 머리는 내 쇄골에 기대 있었고 내 인간 피부에 닿은 머리카락은 다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래,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단 한가지 똑똑한 방법은 전부 다 죽이는 것이었다. 나는 멍청한 방법으로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나는 내 표정과 목소리를 보안유닛답게 무감각하게 확실히 바꾸고 말했다.     p.104~105

 

총 4부작인 ‘머더봇 다이어리’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이야기의 화자이자 시리즈의 주인공은 보안용 안드로이드인 머더봇murderbot이다. 스스로를 '살인봇'이라 칭하는 머더봇은 과거에 회사가 가장 싼 부품만 사용해서 만든 덕분에 지배모듈이 오작동을 일으켜 시스템의 통제권을 잃고 보호해야 했던 채굴 작업자 쉰일곱 명을 죽인 적이 있다. 회사는 그를 회수해서 새 지배모듈을 설치했고, 그 뒤로 3만 5천 시간이 훌쩍 넘을 동안 살인을 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머더봇은 그 긴 시간 동안 영화와 드라마, 책, 연극, 음악을 즐기며 지냈다. 그런 이유로 자신을 무자비한 살인기계로서는 실패작이라고 칭하는 독특한 캐릭터이다.

 

머더봇은 인간과 계약을 맺고 그들의 목숨을 보호하는 일을 해왔다. 먼 우주로의 여행이 일상이 된 미래, 사람들이 외계 행성을 탐사하려면 기업의 승인을 받고 보안 유닛과 함께 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리즈 첫 번째 작품 <머더봇 다이어리: 시스템 통제불능>에서는 외계 행성에서 자원의 독점 소유권을 입찰할 만한지 따져보려 조사를 하기 위해 과학자로 구성된 탐사대의 보급품 가운데 하나로 머더봇이 등장했다. 행성의 위험 보고서에 등재되지 않은 괴생물체가 과학자들과 머더봇의 목숨을 위협해 그들과 사투를 벌이는 과정이 그려졌었다. 두 번째 작품인 <머더봇 다이어리: 인공 상태>에서는 자신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학살이 있었던 비극의 장소로 돌아가려고 신분을 위조해 증강인간인 척하며 우주선을 얻어 타고 고통스러운 기억의 중심으로 향했었다. 세 번째 작품인 이번 신작 <머더봇 다이어리:로그 프로토콜>에서 머더봇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거대 기업 그레이크리스의 음모가 숨겨진 행성 밀루로 향한다. 과연 소심하고, 사회성 없고, 냉소적인 머더봇이 이번에는 또 어떤 모험을 하게 될지 궁금해졌다.

 

 

음, 젠장. 나도 실수를 한다(특별한 파일에 장부를 만들어 기록하고 있다). 보아하니 내가 큰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윌켄의 행동이 나 때문이라고, 고객이 자신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다른 보안 자문관의 존재와 그자가 보냈다며 뜬금없이 튀어나온 보안유닛과 관련된 편집증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래, 그래. "전부 나와 관련된 일이야"라는 건 으레 인간이나 할 법한 소리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 여자는 완전히 다른 이유로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p.164

 

기본적으로 보안유닛의 임무는 고객이 죽거나 다치지 않게 보호하고 서로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등의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점잖게 만류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어느 거지 같은 행성의 노동 시설로 가는 중이었고, 이 수송선 안에는 인간 관리자 없이 오로지 머더봇 뿐이었다. 인간들은 자주 싸웠고, 그들을 말리느라 지친 머더봇은 다들 머저리같고, 성가시고, 근본적으로 모자란 인간들이라고 투덜댄다. 그렇게 인간이라는 존재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그렇다고 죽여버리고 싶은 정도는 아니라고 말하는 머더봇은 사실 별 것 아닌 일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매사에 시니컬하고 냉소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가장 비인간적인 존재여야 할 인공지능이 마치 진짜 인간처럼 느껴지는 것이 이 시리즈만의 진짜 매력이기도 하고 말이다.

 

거대 기업 그레이크리스는 행성 밀루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 조건을 만드는 테라포밍 사업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외계 문명이 남긴 유물을 독점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머더봇은 증거를 잡아서 그레이크리스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는 멘사 박사와 일행들이 자신의 행성으로 편히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려고 한다. 테라포밍 구조물에 잠입한 머더봇은 그곳을 지키는 전투봇과 무기로 돌변한 그곳 시설의 기계들에 맞서 긴박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스펙터클한 전투가 펼쳐지는 이번 시리즈에서도 머더봇 특유의 유머가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웜홀 여행이 가능한 먼 미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보이는 안드로이드와 함께하는 우주 모험의 그 마지막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시리즈 마지막 편인 <머더봇 다이어리: 탈출 전략>은 내년에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스페이스 오페라의 정수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시리즈를 놓치지 말길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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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한나 렌 지음, 이영미 옮김 / 엘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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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매끄러운 세계의 인간은 모두 절대적인 이상향에서 살고 있어요. 고통이나 슬픔을 느껴도 그것들이 없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실제로도 언제든 그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죠.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받는 현실로 가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원하면 그것을 이룬 현실로 옮겨가면 되고요.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가능성만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저차원 생물이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자 공포의 대상이에요. 무엇보다 이 세계의 적들이에요.”    

-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중에서, p.43

 

여기, 차갑게 빛나는 검은색 총이 있다. 총의 이름은 '웨딩나이프', 전 세계에서 몇백만 자루나 만들어진 총이다. 이것은 결혼식을 막 끝낸 신랑과 신부를 위한 것이다. 피로연을 마무리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신랑과 신부가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 상대의 이마에 총을 겨누는 행동이다. 방아쇠가 당겨지고 팡 하고 폭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총알이 아니라 극소장치를 주입하는 바늘이다. 두 사람은 쓰러지거나 잠들지 않고, 총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주고 받는다. 이로써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얻게 되었다. 물론 서로에게 총을 쏘기 전부터 그들의 사랑은 진실했지만, 언젠가는 사랑이 식어갈 것에 대한 완벽한 보장을 얻게 된 것이다.

 

상대를 평생 사랑할 마음이 진정이라면, 말에서 그칠 게 아니라 화학적인 보증을 덧붙이는 게 무슨 문제냐고 사람들은 생각했고, '웨딩나이프'는 연금이나 보험을 뛰어넘는 인생의 보증처럼 여겨지게 된다. 하지만 뇌과학 기술을 이용해 인격을 개조하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가, 애정의 방향을 고정시킴으로써 생겨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인격들을 죽이는 것이 과연 인간적인가, 하는 질문들이 남는다. 과학 기술이 감정마저 통제해 영원한 사랑을 보장해주는 세계에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감정이 맞는 것일까.

 

 

신랑신부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 상대의 이마에 총을 겨눴다. 조금 전까지 술렁거렸던 홀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모두 마른침을 삼키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이 총에 '웨딩나이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케이크에 나이프를 찔러 넣듯이 뇌수에 메스를 댐으로써,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로 시작되는 혼인 서약은 말로 할 필요도 없이 자명한 것이 됩니다. 그들의 사랑은 오늘부터 흔들림 없는 과학으로 보증됩니다. 영원한 인연에 축복이 함께하기를."      

 - '미아하에게 건네는 권총' 중에서, p.112

 

이 책은 ‘2019 베스트 SF 1위’에 오른 일본 SF 최고의 화제작으로 정식 출간 이전에 이미 중쇄가 결정되고 출간 2주 만에 5쇄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한나 렌이라는 작가의 이름은 이 작품으로 SF 팬이라면 반드시 챙겨봐야 할 작가가 될 것 같다. 인격이식, 평행세계, 싱귤래리티, 대체 역사, 신칸센 저속화 현상 등 다양한 SF만의 상상력으로 그려낸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데, '감성 SF'라는 호칭에 걸맞게 서정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평행세계를 매끄럽게 넘나들 수 있다면 어떨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할아버지가 살아계신 현실로 가면 되고, 사고로 손을 다쳐서 게임을 하지 못한다면, 사고 따윈 없었던 현실로 가는 것이다.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모든 가능성 속에 살고 있는 자신으로 옮겨 다니며 살아 갈 수 있다면 말이다. 또 이런 세상도 있다.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생들을 태운 신칸센에서 시간지연 현상이 발생한다. 수학여행에 가지 않아 신칸센에 탑승하지 않게 된 주인공은 저속화된 신칸센에 갇힌 사람들을 어떻게 구해낼 수 있을까. 수록된 여섯 편의 작품들 모두 작가의 상상력으로 구축한, 그럼에도 지극히 현실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작가는 '초등학교 때부터 오직 SF를 읽어왔더니, 이런 인간으로 성장하여 이런 책이 탄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야말로 수많은 SF 작품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놀라운 작가의 탄생이 아닌가 싶다. 어린 시절 우리는 어른들에게 '만약에'라는 질문을 끝도 없이 던졌다. 만약에 우리가 매일매일 자신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면 어땠을까. 이 작품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숨어 있던,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어린 천재가 '만약에'라는 질문을 던지며 상상을 펼치던 그 세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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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동영상 스토리콜렉터 90
마이크 오머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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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에겐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살인범의 머릿속으로 침투해 살인범의 시각을 통해 사고하고, 때론 범인이 앞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측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재주는 공짜가 아니었다. 때로는 살인범이 아니라 피해자의 머릿속에 갇히기도 했다. 피해자들의 마지막 순간을 보고, 마치 자신이 피해자가 된 양 그들의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니콜의 경우에는 굳이 상상력을 발휘하려고 애쓸 필요조차 없었다. 이번에는 피해자의 고통을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까. 그 악몽의 순간 니콜 메디나의 머릿속으로 침투하는 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p.93

 

흑백 화면 속에 젊은 여자는 공포로 얼굴이 일그러진 채 비좁고 어두운 장소에 누워 있다. 이윽고 화면이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아래쪽 화면은 어두운 공간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위쪽 화면은 무덤처럼 보이는 직사각형 구덩이 안에 모래를 퍼붓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화면 속 남자의 냉정하고 침착한 움직임과 여자의 히스테리 사이의 불협화음은 보는 이들을 몸서리 쳐지게 만든다. 누군가 살아 있는 여자를 생매장하고 있는 것이다. 영상 아래쪽에는 '실험 1호'라는 자막이 떠 있었고, 게시자는 '슈뢰딩거'였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밀폐된 상자 속에 독극물과 함께 있는 고양이의 생존 여부를 이용해 양자역학의 원리를 설명한 사고실험이다. 실험 속에서 고양이는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모른다. 이 영상 속에서 상자에 갇혀 있는 여자 역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다. 여자는 정말 생매장을 당한 걸까? 이 영상은 라이브로 촬영되었을까? '실험 1호'라면 앞으로 비슷한 일이 더 벌어진다는 걸까? 이는 연쇄 살인의 시작인 걸까?

 

FBI 요원 테이텀 그레이와 범죄심리학자 조이 벤틀리가 콤비 플레이를 보여주는 '조이 벤틀리'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이다. 대책 안 서는 고집불통 할아버지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소시오 패스 고양이와 함께 사는 역시나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상사들과 부딪쳐 온 FBI 요원과 살인범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는 알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감정은 전혀 헤아리지 못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돌직구만 날려대는 범죄심리학자라는 조합이야말로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이다. 사사건건 서로를 공격하고 무시하고 부딪히는 두 남녀 주인공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특별한 시너지를 발휘하기도 하고, 상반된 성격으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티격태격하는 과정에서의 재미도 선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조이가 코웃음 쳤다. "난 놈의 소명의식 따위엔 털끝만치도 관심없어요. 놈은 그냥 그런 말로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떠들다 보면 실수로 우리한테 진짜 실마리를 주게 될지도 모르죠. 우리가 써먹을 수 있을 만한 걸요."
"무슨 뜻이에요? 놈이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라니."
"사람들은 항상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요, 해리.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당신은 아주 잘 알 텐데요. 그리고 이 남자는 아주 단순한 진실을 보지 않으려고 자신에게 크고 정교한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p.317

 

전작인 <살인자의 사랑법>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언론에서 '목 조르는 장의사'라고 불리는 연쇄살인범 사건을 함께 해결했다. 이번에는 '실험 1호', '실험 2호'라는 제목으로 여자가 생매장당하는 영상을 온라인으로 중계하는 연쇄살인범을 뒤쫓는다. 게다가 조이는 전작에 이어 유년 시절부터 트라우마로 남은 또 다른 연쇄살인마 로드 글로버로부터 동생인 안드레아를 지켜야 한다. 그녀는 10대 시절 이웃에 살던 연쇄살인마 로드 글로버에 의해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FBI의 수사를 돕는 범죄심리학자가 되었다. 여전히 잊지 않고 연락을 해오던 로드 글로버는 전작에서 조이를 기습 살해하려다 실패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이의 여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왔었다.  그 이후로 완전히 종적을 감춘 상태이지만, 조이는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혀 안드레아를 설득해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게 했다. 하지만 조이가 매순간 안드레아를 지켜보며 곁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녀는 사건 수사를 하는 틈틈이 언제 위협을 실행에 옮길지 알 수 없는 로드 글로버로부터 동생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동시에 또 다른 살인마를 잡는 일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조이에게 최악의 위기가 닥쳐 온다.

 

마이크 오머는 기자와 게임 개발자였던 이력 덕분인지 매우 현실적인 공포를 그리면서도, 오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지루할 틈없이 탄탄한 서사로 꽉 채우고 있다. 독특한 성격의 두 남녀 주인공 캐릭터가 전작에 이어 더 생생하게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 군더더기 없이 잘 만들어진 미드 한 편 본 것 같은 기분도 드는 작품이었다. '조이 벤틀리' 시리즈 다음 작품도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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