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한나 렌 지음, 이영미 옮김 / 엘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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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매끄러운 세계의 인간은 모두 절대적인 이상향에서 살고 있어요. 고통이나 슬픔을 느껴도 그것들이 없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실제로도 언제든 그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죠.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받는 현실로 가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원하면 그것을 이룬 현실로 옮겨가면 되고요.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가능성만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저차원 생물이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자 공포의 대상이에요. 무엇보다 이 세계의 적들이에요.”    

-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중에서, p.43

 

여기, 차갑게 빛나는 검은색 총이 있다. 총의 이름은 '웨딩나이프', 전 세계에서 몇백만 자루나 만들어진 총이다. 이것은 결혼식을 막 끝낸 신랑과 신부를 위한 것이다. 피로연을 마무리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신랑과 신부가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 상대의 이마에 총을 겨누는 행동이다. 방아쇠가 당겨지고 팡 하고 폭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총알이 아니라 극소장치를 주입하는 바늘이다. 두 사람은 쓰러지거나 잠들지 않고, 총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주고 받는다. 이로써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얻게 되었다. 물론 서로에게 총을 쏘기 전부터 그들의 사랑은 진실했지만, 언젠가는 사랑이 식어갈 것에 대한 완벽한 보장을 얻게 된 것이다.

 

상대를 평생 사랑할 마음이 진정이라면, 말에서 그칠 게 아니라 화학적인 보증을 덧붙이는 게 무슨 문제냐고 사람들은 생각했고, '웨딩나이프'는 연금이나 보험을 뛰어넘는 인생의 보증처럼 여겨지게 된다. 하지만 뇌과학 기술을 이용해 인격을 개조하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가, 애정의 방향을 고정시킴으로써 생겨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인격들을 죽이는 것이 과연 인간적인가, 하는 질문들이 남는다. 과학 기술이 감정마저 통제해 영원한 사랑을 보장해주는 세계에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감정이 맞는 것일까.

 

 

신랑신부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 상대의 이마에 총을 겨눴다. 조금 전까지 술렁거렸던 홀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모두 마른침을 삼키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이 총에 '웨딩나이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케이크에 나이프를 찔러 넣듯이 뇌수에 메스를 댐으로써,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로 시작되는 혼인 서약은 말로 할 필요도 없이 자명한 것이 됩니다. 그들의 사랑은 오늘부터 흔들림 없는 과학으로 보증됩니다. 영원한 인연에 축복이 함께하기를."      

 - '미아하에게 건네는 권총' 중에서, p.112

 

이 책은 ‘2019 베스트 SF 1위’에 오른 일본 SF 최고의 화제작으로 정식 출간 이전에 이미 중쇄가 결정되고 출간 2주 만에 5쇄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한나 렌이라는 작가의 이름은 이 작품으로 SF 팬이라면 반드시 챙겨봐야 할 작가가 될 것 같다. 인격이식, 평행세계, 싱귤래리티, 대체 역사, 신칸센 저속화 현상 등 다양한 SF만의 상상력으로 그려낸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데, '감성 SF'라는 호칭에 걸맞게 서정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평행세계를 매끄럽게 넘나들 수 있다면 어떨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할아버지가 살아계신 현실로 가면 되고, 사고로 손을 다쳐서 게임을 하지 못한다면, 사고 따윈 없었던 현실로 가는 것이다.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모든 가능성 속에 살고 있는 자신으로 옮겨 다니며 살아 갈 수 있다면 말이다. 또 이런 세상도 있다.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생들을 태운 신칸센에서 시간지연 현상이 발생한다. 수학여행에 가지 않아 신칸센에 탑승하지 않게 된 주인공은 저속화된 신칸센에 갇힌 사람들을 어떻게 구해낼 수 있을까. 수록된 여섯 편의 작품들 모두 작가의 상상력으로 구축한, 그럼에도 지극히 현실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작가는 '초등학교 때부터 오직 SF를 읽어왔더니, 이런 인간으로 성장하여 이런 책이 탄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야말로 수많은 SF 작품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놀라운 작가의 탄생이 아닌가 싶다. 어린 시절 우리는 어른들에게 '만약에'라는 질문을 끝도 없이 던졌다. 만약에 우리가 매일매일 자신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면 어땠을까. 이 작품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숨어 있던,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어린 천재가 '만약에'라는 질문을 던지며 상상을 펼치던 그 세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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