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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 하늘 ㅣ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1월
평점 :
"그건 옳지 않아요, 샤파. 옳지 않다고요! 남들이 내가 나쁘거나 이상하거나 죄를 저지르길 바란다는 거, 그 사람들이 나를 나쁘게 만드는 건....." 나쑨은 적절한 단어를 찾아 머릿속을 뒤지며 고개를 흔든다. "난 평범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난 평범한 애가 아니고, 그리고 또 모두가, 엄청 많은 사람들이 나를 증오해요.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증오한다고요. 내가.... 나란 이유로 싫어하지 않는 건 오직 샤파뿐이에요. 그리고 그건 옳지 않아요." p.118
여기 '고요'라는 평범한 대륙이 있다. 어마어마하게 크고 기운이 넘쳐, 지나치게 자주, 너무 많이 움직이는, 결코 고요하지 않은 땅이다. 세상의 종말은 유서 깊고 아름답고 활기 넘치는 한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다섯 번째 계절>에서는 오로진이라는 이유로 아비가 어린 아들을 죽이고, 어미는 이틀을 죽은 아들과 함께 보낸 뒤 아비가 데리고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오로진이라는 존재는 대지를 쥐고 흔들 수 있는 능력을 타고 난 존재로 그 힘은 무심코 한 마을 전체를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었다. 당연히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로진의 능력을 두려워했고, 그러한 감정은 차별과 증오로 구현되었다. <오벨리스크의 문>에서는 사라진 딸을 찾아 고요 대륙을 헤매던 에쑨이 알라배스터로부터 아버지 대지와 계절을 둘러싼 충격적 진실을 접하고 그의 숙명을 이어 받았다.
<석조 하늘>은 전작에서 오벨리스크의 문을 발동했던 여파로 몇 달 만에 깨어난 에쑨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긴 여정 동안 에쑨과 나쑨 모녀는 아직도 만나지 못했다. 이들의 모험은 각각 진행되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비로소 만나게 되고, 모녀는 오로진의 힘을 이용해 계절을 끝내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사악한 대지의 분노로 인해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긴 사람들, 이들의 비극은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아끼고 사랑하던 모든 것이 죽고 사라져도, 어떤 일이 있어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아무리 힘들고 지치더라도, 죽고 싶은데도 죽을 수가 없는 삶이란 어떤 걸까.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그 속에서 버티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삶을 체험한다. 이야기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느끼고 아파하면서 말이다. 이 작품이 이인칭 시점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도 한 몫을 한다. 일인칭도, 전지적 시점도 아닌 이인칭은 '너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점'이니 말이다. 사실 이 작품은 인물에 따라 일인칭, 이인칭, 삼인칭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처음에는 다소 낯설지 모르겠지만, 익숙해지면 그 독특함이 이 작품만의 특별함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이들은 운명에 굴복한다. 자긍심을 삼키고, 진실을 잊고, 그들에게 걸맞게 주어진 거짓을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그만큼 소중하고 가치 있을 리가 없다고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그들을 예속하는 데 이토록 열심이라면 그건 그들이 지배당해 마땅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 않더라도 싸우고 저항하는 것은 힘들고 괴롭고 불가능한 일이다... 또 다른 대안은 불가능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건 옳지 않아. 그들은 속삭이고 오열하고, 소리 높여 외친다... 이 방법을 택한다면 반드시 갈등과 충돌을 겪어야 한다. p.414~415
3부작 전권 모두 3년 연속 휴고상 수상이라는 유례없는 기록을 세운 '부서진 대지'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 <다섯 번째 계절>과 <오벨리스크의 문>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기에,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석조 하늘>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책을 받고 보니 좋은 건 마지막까지 아껴두고 싶은 마음이랄까, 이 책만 읽고 나면 이 시리즈가 끝이 난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시리즈 첫 번째, 두 번째 작품을 다시 읽고 나서, 마지막 편을 읽기로 했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게다가 분량부터 방대한 작품을 세 편 연이어 읽는 동안은 즐거웠으나, 읽고 나니 정리하는 게 난감해졌다. 대체 이 엄청난 서사를 단 몇 줄로 요약한다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그래서 작품에 대한 분석이나 요약보다는 짧게라도 감상을 남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대책 없이 애정 표현을 하고 싶을 때는 사실 논리도, 이성도 필요 없다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해보면서 말이다.
이 시리즈가 나를 매혹시킨 것 중에 가장 큰 부분은 바로 언어였다. 언어의 밀도, 리듬, 아름다움 모두 내게 특별했다. 게다가 그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 또한 나를 사로잡았다. 근사하게 표현된 표지 이미지도 이 작품의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사실 서사와 캐릭터, 구성, 플롯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완벽했다. 우리는 처음 만나는 책의 첫 장을 펼치며 기대한다. 자, 어서 나를 매혹시켜 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은 뻔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우리를 실망시킨다. 이 작품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고심하여 배열된 단어들로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가 발휘하는 마법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 시리즈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