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 나태주 시집
나태주 지음 / 열림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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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힘들게 힘들게 하루가 갔다/
지구를 두 팔로 안아 들어 올리듯/힘들게 힘들게 하루를 보냈다/
그건 아마 너도 그랬을 터/뱃멀미 거센 파도와 바람 무릅쓰고/
먼바다 흔들리는 먼바다 나가/얼마나 많은 고기를 잡아 왔을까/
그렇지만 아이야/잡은 고기가 비록 많지 않고/이룬 일 비록 많지 않아도/
하루를 마음 졸여 무사히/잘 보낸 것만 우선 고마워하자/


-p.90, '가난한 소망' 중에서

 

사실 표지 때문에 읽고 싶어진 책이다. 표지 이미지는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오아물 루의 작품인데, 최근에 국내에서도 전시를 가지기도 해서 좋아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는 주로 여행지에서 경험한 것들을 일러스트로 표현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 그의 작품 속 풍경들이 선사하는 그 느낌을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관심있게 보고 있다. 유명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도 많이 했고, 국내 책의 표지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는데, 특히나 이번 책의 감성은 계절과 너무 잘 어울려 더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겉표지를 벗겨내어서 접힌 부분을 펼치면, 예쁜 포스터로도 활용할 수 있다.

 

이 책은 '풀꽃 시인' 나태주의 등단 50주년 기념 신작 시집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라는 시, '풀꽃'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시를 잘 읽지 않는 이들도 웬만하면 한번쯤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그 시를 쓴 시인 나태주. 이번 신작은 시인의 50년 시력을 기념하는 시집이라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다. 1971년에 작품 활동을 시작해, 등단한 지 햇수로 꼬박 오십 년째라니...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시를 써온 그 길고도 깊은 시간을 차마 헤아리지도 못할 것 같다. 그러니 이 시집은 시인이 쌓아온  반세기의 내공을 함축해서 한 권에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저녁 때/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p.170, '행복' 중에서

 

이번 시집은 1부 신작 시 100편, 2부 독자들이 사랑하는 애송 시(대표 시) 49편, 3부 나태주 시인이 사랑하는 시 6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나 신작 시들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난해하고 복잡하거나, 은유로 점철되어 이해하기 어렵거나 하지 않아서 더 좋았던 것 같다. 그 동안에도 워낙 간결하고 단순한 언어와 짧은 분량으로 시를 써왔기에, 누구나 쉽고 친근하게 읽을 수 있는 시였지만 말이다. 인생이 무엇인가/한마디로 말하는 사람 없고/인생이 무엇인가/정말로 알고 인생을 사는 사람 없다, 사람들이 물이 없는 땅에서도/울창하게 자라는/나무처럼 산다/꿋꿋이 견디며 산다, 지금은 또다시 저녁/어둠이 우리의 피곤한 몸과 마음/감싸 안아 쉬게 한다/쉬어라 쉬어라 다 잊어준다, 그래, 그래, 애썼구나/잘 참아줘서 고마웠단다/이제 좀 쉬어라/쉬어야 다시 또 떠날 수 있지 등등... 담백하지만 위로가 되는 문구들이 가슴에 와 닿았다.

 

사랑하는 마음을 아끼며/삽니다/모진 마음을 달래며/삽니다/될수록 외롭고 슬픈 마음을/숨기며 삽니다, 무엇보다 오늘 하루 살아 있음이 기적이고/내가 또 너를 다시 만나고/너를 사랑함이 더욱 기적 같은 일임을/알기 때문이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등 설레이는 마음을 가득 담고 있는 사랑에 관한 시들도 다정하게 읽혔다. '쓸쓸해져서야 보이는 풍경이 있고, 버림받은 마음일 때에만 들리는 소리'가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럴 때 평소에 안 듣던 음악을 찾아 듣고, 시를 읽고, 영화를 본다. 사는 건 매번 만만치 않은 일이고, 사랑 역시 결코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며,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해서 쉬운 일은 절대 없다. 그러니 '힘들고 지치고 고달픈 날들'을 함께 겪어 나가는 우리 모두에게 시인은 말한다. '인생은 고행이 아니라 여행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말이다. 시인의 따뜻하고 사려 깊은 위로가 필요한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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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크리스마스의 죽이는 미스터리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외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이리나 옮김 / 북스피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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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가 활기 없고 칙칙하게 시작되었다. 윌마는 마지못해 집 주위를 돌아다니며 나무 아래 선물을 두었다. 상자 두 개는 위 윌리가 보낸 것이었다. 만약 복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위 윌리에게 전화해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집에 오라고 했을 것이다. 그랬어도 교외 지역의 분위기와 중산층 특유의 세간을 좋아하지 않는 위 윌리는 집에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복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어니가 일을 때려치우고 당장 뉴멕시코로 딸을 만나러 갈 수 있었을 텐데.... , 엎질러진 물이다. 아니, 엎질러진 술이다.     p.27~28

 

결혼 40년차 부부인 윌마와 어니는 항상 같은 숫자로 복권을 사곤 했다. 어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와 그들의 딸이 태어난 해를 조합한 숫자였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 특별 뽑기에 당첨이 되어 무려 200만 달러라는 상금을 받게 되었다. 20년 동안 매년 세금 떼고 10만 달러였다. 어니는 윌마가 이 기쁜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며 행복해했다. 문제는 그때 하필 윌마가 언니인 도로시를 만나러 필라델피아에 가 있는 상황이었다는 거다. 도로시의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고, 라디오도 거의 듣지 않았으니 당첨 소식을 아직 모르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어니는 혼자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위한 자축을 위해 바에서 한 잔 하며 이 돈으로 윌마와 어떤 삶을 누릴 것인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런데 다음날 정오, 윌마가 집에 왔을 때 어니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복권을 잃어버렸다고. , 이들 부부는 도둑맞은 크리스마스 특별 복권을 찾을 수 있을까. 메리 히긴스 클라크의 <그게 그 표라니깐요>라는 작품이다.

피터 로빈슨의 <블루 클리스마스>에서는 혼자지만 크리스마스 동안 사흘간의 휴일을 맞게 된 뱅크스 경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볼 영화, 당일과 복싱데이에 볼 영화도 골라놓고, 함께할 음악과 휴일 동안 읽을 새로 구입한 책도 있었다. 아들은 유럽에서 밴드 멤버들과 있을 예정이고, 딸은 엄마와 새아빠와 크리스마스를 보낼 예정이었다. 뱅크스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와인과 음악을 자유롭게 마시고 즐기는 걸로 충분했다. 물론 한 통의 전화 때문에 그의 계획은 지켜지지 못했지만. 42세 여성의 실종 사건이 벌어졌고, 마땅히 책임지고 수사할 만한 인력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원래 크리스마스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순경이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사소했다. 범죄자들도 칠면조와 크리스마스 푸딩은 먹고 싶은 모양이라고들 생각했을 정도로 말이다. 과연 뱅크스 경감의 크리스마스 연휴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실종된 여성은 발견되고 사건이 해결될까.

 

 

 

 

내 마지막 범죄는 쾌활하고 편안한 영국 중산층 스타일의 크리스마스 범죄였어. 찰스 디킨스식이었지. 퍼트니 인근에 있는 훌륭하고 오래된 중산층 저택이었는데 마차 발자국이 연달아 있고 집 한쪽에 마구간이 있었어. 두 개의 문에는 문패가 달려 있었고 칠레삼나무가 서 있는 집. 어떤 집인지 그림이 그려지지? 디킨스 스타일을 모방하다니 참 솜씨 있고 문학적이었던 것 같아. 같은 날 참회를 했다는 게 애석할 지경이지.   p.244

 

전설적인 편집자 오토 펜즐러가 운영하는 미스터리 서점을 배경으로 유명 작가들이 집필한 크리스마스 사건들을 엮은 단편집이 벌써 세 권째이다.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이어 <화이트 크리스마스 미스터리>가 작년에 나왔고, 올해 <우아한 크리스마스의 죽이는 미스터리>가 출간되었다. 작년에 이 시리즈를 읽었다면 모두 기억하겠지만, 원래 <The Big Book of Christmas Mysteries>는 무려 1,000페이지라는 엄청난 분량이라, 작년과 올해 두 권으로 나누어 출간이 되었다.

 

이 멋진 크리스마스 앤솔로지가 탄생하게 된 배경도 너무도 소설스럽다. 당시 뉴욕의 미스터리 서점은 여타의 많은 독립 서점과 마찬가지로 거대 기업의 체인점과 무소불위의 권력자인 온라인 서점과 구식 서점을 위협하는 전자책에 맞서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토 펜즐러는 크리스마스를 즈음해 미국에 거주하는 추리소설 작가들에게 독창적인 이야기를 써달라고 주문한다. 조건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배경으로 해야 하고, 미스터리를 포함해야 하고, 적어도 몇몇 장면은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어날 것이었다. 그걸 소책자로 제작해서 고객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나눠 주었다. 그것이 화제가 되어 평소에 별 관심이 없는 독자들도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소책자를 손에 넣기 위해 책을 주문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게 무려 17년간이나 이어진 행사였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는 이 크리스마스 앤솔로지에서 으스스한 것, 가슴 따뜻하고 뭉클한 것, 웃기고 유쾌한 것, 곤혹스러운 것 등등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 크리스마스는 이미 지났지만 매년 돌아오게 마련이다. 크리스마스 트리 옆에 모여 앉아 맛있는 음식과 함께 읽기에 딱 좋은 책이다. 물론 크리스마스가 아니더라도, 긴 겨울 밤을 함께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이야기들이다. 특히나 여기 수록된 이야기들이 크게 폭력적이지 않고 선혈이 낭자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 더 기분 좋게 미스터리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크리스마스와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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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1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2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커밍 다이어리북 - 참 괜찮은 나를 발견하는 155가지 질문들
미셸 오바마 지음, 김명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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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또는 모든 게 다 있었습니다.

결국 내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가에 달린 문제입니다.

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의 첫 자서전이었던 <비커밍>에서 봤던 그녀의 글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다이어리북이다. <비커밍>을 읽으며 시카고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어린 시절부터, 우등생으로 자라나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하고, 이후 하버드대 로스쿨에 가고, 일류 법률 회사에서 변호사로 일을 하다 신입 인턴인 버락을 만나게 되는 히스토리는 마치 드라마처럼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퍼스트레이디로서 모습은 여성들의 아이콘, 롤모델이라 할만 했다.

 

이번에 만난 다이어리북에는 자기도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때론 강렬하게 독자를 글쓰기로 이끄는 155개의 질문들과 미셸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소소하지만,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적어나가면서, 어제와 다른 나, 어제보다 더 나다운 나를 만나는 기회를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우리가 기억하는 건 그게 무엇이든 다 소중하다. 그러니 시적으로 근사하게 쓸 필요도 없고, 벼락 같은 깨달음이 찾아오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꼭 매일 쓸 필요도 없고, 뭔가 중요한 말만 적어야 할 필요도 없다. 그저 평범한 일상들이나 내일 할 일의 목록을 작성하는 등.. 나의 경험과 생각, 감정들을 고스란히 적어두면 된다. 그게 바로 일기의 역할이자 목표이니 말이다.

 

내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표면적 성취가 아니라

그것을 떠받친 기틀이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수없이 받았던 작은 지지들,

자신감을 키우도록 도와준 사람들이

핵심이었습니다.

살면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어린 시절 자란 동네가 어땠는지 적어보세요. 지금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데 그와 다시 대화할 수 있다면, 무엇을 물어보겠어요? 한 해 동안 겪은 굉장한 일 열 가지를 꼽아볼까요. 세상 어디로든 갈 수 있다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고 싶나요? 어린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선생님은 누구였나요?  부모님이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나요? 지금 어떤 변화를 겪고 있나요? 그것을 겪어낼 준비는 단단히 되었나요? 세상에 근심이라고는 하나 없는 듯 마음이 평온했던 순간을 돌이켜 적어보세요.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바꾸는 일을 해본 적 있다면, 무엇인가요? 풍파 속에서도 늘 마음의 중심을 지키는, 당신만의 방법이 있나요? 등등.. 바로 떠올려보고 적을 수 있는 질문도 있고, 좀 생각해봐야 할 것들도 있고, 다양한 내용들이 담겨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비커밍, 무언가가 되어간다는 것은 어딘가에 다다르거나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진화하는 방법, 더 나은 자신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이다. 비커밍 다이어리북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남들과 나누는 과정 자체를비커밍' 으로 보았던 그녀의 메시지에서 출발하는 다이어리북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각종 다이어리와 플래너가 각양각색의 실용성과 예쁨을 뽐내며 시선을 사로 잡는 시기이다. 연말과 새해만 되면 모두들 한 해 동안 얼마나 치열하고 바쁘게 살아왔는지 돌아보고, 새로 맞이할 일년 동안에 해야 할 일들, 하고 싶은 일들을 계획 세우곤 하니 말이다. 일 년은 365개의 경험 조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퍼즐과도 같다. 눈뜨자마자 정신 없이 반복되는 일상이 평범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그 수많은 하루하루가 쌓여서 오늘의 나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무심코 지나치는 매일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종종 잊어 버리고 사는 경우가 많다. 바로 그래서 이런 책이 필요하다. 사소한 일상들을 기억하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나도 몰랐던 나 자신을 발견하게 만들어주니 말이다. 올해가 시작된 지 벌써 10일이나 지나버렸다. 비커밍 다이어리북과 함께 올 한해는 참 괜찮은 나를 발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내가 되어가는 시간이 되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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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1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20-01-11 02:07   좋아요 0 | URL
저도 매년 별다방 다이어리로 새해를 맞이하는데.. 올해는 비커밍 다이어리북도 함께 하려고요. ^^
 
바다에서는 베르사체를 입고 도시에서는 아르마니를 입는다 - 패션 컨설턴트가 30년 동안 들여다본 이탈리아의 속살
장명숙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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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시절 이탈리아에서 발견한 특이한 점은, 어린아이 가운데 심하게 칭얼대거나 우는 아이가 없다는 것, 그리고 개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관광객과 순례자로 늘 어수선해 보이는 사회이지만, 깊숙이 들여다보면 유유자적하게 삶을 영위해가는 그들만의 저력을 느낄 수 있다. 남과 나를 비교하며 자신을 들볶지 않는 합리적인 개인주의, 평화로운 공존. 어릴 때부터 받아온 충분한 사랑이 자양분이 되어 아기들도, 개들도 순하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p.61

 

패션 컨설턴트 장명숙이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일하며 만난 사람들을 통해 이탈리아의 다채로운 모습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대한민국 최초로 밀라노로 유학을 떠난 저자는 지난 40여 년간 한국과 밀라노를 오가며 패션과 디자인을 공부하고 유명 백화점의 패션 담당 바이어로, 무대의상 디자이너로서 살아오고 있다. 최근 유튜브 [밀라논나] 채널을 운영하며 자신만의 라이프 스타일과 코디, 패션 이야기로 다가올 젊은 세대를 만나고 있기도 하다.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명예기사 작위'를 받았던 저자이니, 그야말로 그 누구도 이야기할 수 없었던 이탈리아의 속살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가 되었다. 

 

 

저자가 유학을 떠났던 40여 년 전만 해도 서울에서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려면 타이완과 방콕, 바그다드, 로마를 거쳐 꼬박 36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지금은 직항으로 12시간 정도만 가면 되는데 말이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우리에게 이탈리아는 자전거 도둑이 횡행하고 소매치기와 사기꾼이 득실거리는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또 놀라울 따름이다. 이탈리아 하면 갖가지 명품 브랜드가 바로 떠오르고, 스파게티와 피자 등 이탈리아의 음식 또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지금에서야 상상도 못할 일일 것이다.

 

지금은 밀라노가 패션과 디자인의 도시로서 확고부동한 지위를 차지 하고 있다.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패션과 디자인, 성악과 요리 등을 배우러 이탈리아로 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런 이탈리아를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여기, 이탈리아통이 이야기하는 ‘진짜’ 이탈리아 이야기를 만나 보자.

 

 

"이탈리아 남자들은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잘생기고 멋있어요?"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탈리아 사회의 비애가 자리하고 있다. 워낙 성향이 그렇기에 잘 차려입는 것이 즐겁긴 하겠지만 이제는 항상 긴장을 하고 살아야 한다. 미혼남은 여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기혼남은 사랑이 식었다고 언제 폭탄선언을 할지 모를 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또 이혼남은 언제 어디서나 새 파트너를 찾아야 하므로 늘 자신을 가꾸어야 한다. 결국 불안한 결혼의 현주소 때문에 남자들은 더욱 피곤해지고 남성복 산업은 호황을 누리는 것이다.     p.117~118

 

밀라노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주5일 근무에 백화점도 일요일에는 쉰다고 한다. 어느 직장이라도 여름휴가 한 달은 기본이요, 직장에 따라 성탄절, 부활절 휴가 등 1년에 거의 2개월의 유급 휴가를 준다. 어디든 노동조합이 확실한 역할을 해 하루 8시간 근무를 초과하는 법이 없고, 감기만 살짝 걸려도, 마음이 조금 우울해도 당당히 결근을 한다고 하니.. 우리로선 부럽기 짝이 없는 환경이 아닐 수 없다.

 

 

사는 방식이 구석구석 다른 북부와 남부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와 이탈리아 남자들의 못 말리는 바람기, 이탈리아 할머니에게 배우는 멋있게 나이 드는 법, 프랑스 제품의 하청 국가에서 밀라노를 세계 제일의 패션 도시로 키운 배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소개되어 있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탈리아라는 나라에 대해 기본적으로 알고 있던 것 이상의 정보들을 만날 수 있어, 언젠가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게 되면 더 재미있게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탈리아의 패션과 관련한 이야기가 주를 이룰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문화와 라이프 스타일 전반적인 것들을 폭넓게 다루고 있어 이탈리아라는 나라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는 책이라는 느낌이다. 남북으로 긴 반도국가라는 지리적 위치와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품성 때문에 이탈리아는 흔히 우리나라와 닮은꼴로 회자되는 나라이지만, 사실 문화나 생활양식 등은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진짜 이탈리아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길 추천한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아니라, 깊숙이 숨어 있는 은밀한 이탈리아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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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간호사 - 가벼운 마음도, 대단한 사명감도 아니지만
간호사 요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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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던 길, 같이 퇴근하던 동료가 말했다. “우리가 이 직업에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냥 즐기면서 부담 없이 일하면 되지 않을까? 보람을 느끼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어.” 하지만 병원은 내가 나에게 바라는 것보다 더 큰 걸 요구하고, 숨이 꼴딱 넘어가기 직전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부담 없이 일할 수는 없다. 그러니 보람, 그거라도 있어야 버틸 것 같은데....     p.43

 

현직 간호사가 그들의 리얼한 현실을 그려내 화제가 되었던 웹툰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콜 벨을 눌러 분노케 만드는 할아버지 환자부터 잘해도 못해도 타박하는 선임 간호사, 초과 근무가 잦은 근무 환경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둘까 말까 고민하는 간호사의 시선이 실감나게 담겨 있다.

 

 

워라밸은 꿈꿀 수 없는 3교대와 잦은 초과 근무, 군대 못지않은 위계질서,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태움’까지… 간호사의 민낯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어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보여지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간호사들이 매일 업무 시작 전에 챙겨야 할 것들은 사원증과 네임펜, 가위, 볼펜, 면테이프.. 그리고 가장 중요한 '멘탈'이다. 제대로 밥 먹을 틈도 없이 정신 없는 하루를 보내고, 겨우 시간이 나서 구내식당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점심인지 저녁인지 모를 밥을 꾸역꾸역 삼킨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이렇게 밥 한 끼 먹는 것도 힘이 든다니.. 괜시리 자괴감이 밀려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러 가고, 병원에서의 날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렇게 저자는 이제 대형 병원 5년 차 간호사가 되었다. 그 시간 동안 병원은 조금 더 다닐만해 졌고, 이제는 적응이 됐는지 처음의 힘들었던 감정이 가물가물해졌다. 아마도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지 않을까. 버티다 보니 어느새 신입이 아니라 선배가 되었는데, 여전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내가 이러고 있나'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입사 초, 말로만 듣던 ‘태움’이 내게도 찾아왔다. ‘여쭤보고 해야 하나?’ 싶어서 물어보면 ‘아직 그것도 몰라?” 그래서 알아서 하면 “모르면 쫌 물어봐야지!” 기승전 혼남! 이러나저러나 혼나기는 마찬가지... 어떤 일이든 처음부터 척척 잘 해내는 사람은 없기에 입사 초기의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기가 있을 거다. 그렇지만 누구나 그렇다는 말로 한 사람이 느끼는 어려움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러니 선배들이여! 제발, 말은 예쁘게 씁시다!    p.60

 

한때 뉴스에 숱하게 보도되어 일반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던, 간호사들의 '태움'에 대해서도 수록되어 있다. 저자의 실제 경험담을 바탕으로 태움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걸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비롯해서 그에 대한 독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도 수록되어 있다. 현재 간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 중이라던가, 신입 간호사로 일을 시작한 이들이라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초과 근무가 잦은 근무 환경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둘까 말까 고민하는 간호사의 시선 또한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현실감 있는 충고가 되어 줄 것이다.  

 

 

주로 현직 간호사들이 울고 웃을만한 에피소드가 담겨 있어서 간호사 커뮤니티에서 격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화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기에 공감할 수 있는 지점들이 많을 것 같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어쩌다 간호사가 되었지만 어쨌든 간호사다'라는 문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거창한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매일 성실하게 해내는 세상의 수많은 직장인들에게도 와 닿을 수밖에 없는 문구이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대부분의 직업들이 그렇지 않을까. 장래 희망이나 꿈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성적에 맞춰서, 등급에 맞춰서,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어쩌다 보니 선택하게 된 길이 직업이 되어 버린 경우들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좋든 싫든, 보람을 느끼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들을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대단한 사명감은 아니더라도 하루하루 보람을 찾으며 오늘도 버텨내는 간호사들을 비롯한 세상의 수많은 직장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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