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아한 크리스마스의 죽이는 미스터리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외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이리나 옮김 / 북스피어 / 2019년 12월
평점 :
크리스마스이브가 활기 없고 칙칙하게 시작되었다. 윌마는 마지못해 집 주위를 돌아다니며 나무 아래 선물을 두었다. 상자 두 개는 위 윌리가 보낸 것이었다. 만약 복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위 윌리에게 전화해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집에 오라고 했을 것이다. 그랬어도 교외 지역의 분위기와 중산층 특유의 세간을 좋아하지 않는 위 윌리는 집에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복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어니가 일을 때려치우고 당장 뉴멕시코로 딸을 만나러 갈 수 있었을 텐데.... 흥, 엎질러진 물이다. 아니, 엎질러진 술이다. p.27~28
결혼 40년차 부부인 윌마와 어니는 항상 같은 숫자로 복권을 사곤 했다. 어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와 그들의 딸이 태어난 해를 조합한 숫자였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 특별 뽑기에 당첨이 되어 무려 200만 달러라는 상금을 받게 되었다. 20년 동안 매년 세금 떼고 10만 달러였다. 어니는 윌마가 이 기쁜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며 행복해했다. 문제는 그때 하필 윌마가 언니인 도로시를 만나러 필라델피아에 가 있는 상황이었다는 거다. 도로시의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고, 라디오도 거의 듣지 않았으니 당첨 소식을 아직 모르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어니는 혼자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위한 자축을 위해 바에서 한 잔 하며 이 돈으로 윌마와 어떤 삶을 누릴 것인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런데 다음날 정오, 윌마가 집에 왔을 때 어니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복권을 잃어버렸다고. 자, 이들 부부는 도둑맞은 크리스마스 특별 복권을 찾을 수 있을까. 메리 히긴스 클라크의 <그게 그 표라니깐요>라는 작품이다.
피터 로빈슨의 <블루 클리스마스>에서는 혼자지만 크리스마스 동안 사흘간의 휴일을 맞게 된 뱅크스 경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볼 영화, 당일과 복싱데이에 볼 영화도 골라놓고, 함께할 음악과 휴일 동안 읽을 새로 구입한 책도 있었다. 아들은 유럽에서 밴드 멤버들과 있을 예정이고, 딸은 엄마와 새아빠와 크리스마스를 보낼 예정이었다. 뱅크스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와인과 음악을 자유롭게 마시고 즐기는 걸로 충분했다. 물론 한 통의 전화 때문에 그의 계획은 지켜지지 못했지만. 42세 여성의 실종 사건이 벌어졌고, 마땅히 책임지고 수사할 만한 인력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원래 크리스마스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순경이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사소했다. 범죄자들도 칠면조와 크리스마스 푸딩은 먹고 싶은 모양이라고들 생각했을 정도로 말이다. 과연 뱅크스 경감의 크리스마스 연휴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실종된 여성은 발견되고 사건이 해결될까.
내 마지막 범죄는 쾌활하고 편안한 영국 중산층 스타일의 크리스마스 범죄였어. 찰스 디킨스식이었지. 퍼트니 인근에 있는 훌륭하고 오래된 중산층 저택이었는데 마차 발자국이 연달아 있고 집 한쪽에 마구간이 있었어. 두 개의 문에는 문패가 달려 있었고 칠레삼나무가 서 있는 집. 어떤 집인지 그림이 그려지지? 디킨스 스타일을 모방하다니 참 솜씨 있고 문학적이었던 것 같아. 같은 날 참회를 했다는 게 애석할 지경이지. p.244
전설적인 편집자 오토 펜즐러가 운영하는 미스터리 서점을 배경으로 유명 작가들이 집필한 크리스마스 사건들을 엮은 단편집이 벌써 세 권째이다.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이어 <화이트 크리스마스 미스터리>가 작년에 나왔고, 올해 <우아한 크리스마스의 죽이는 미스터리>가 출간되었다. 작년에 이 시리즈를 읽었다면 모두 기억하겠지만, 원래 <The Big Book of Christmas Mysteries>는 무려 1,000페이지라는 엄청난 분량이라, 작년과 올해 두 권으로 나누어 출간이 되었다.
이 멋진 크리스마스 앤솔로지가 탄생하게 된 배경도 너무도 소설스럽다. 당시 뉴욕의 미스터리 서점은 여타의 많은 독립 서점과 마찬가지로 거대 기업의 체인점과 무소불위의 권력자인 온라인 서점과 구식 서점을 위협하는 전자책에 맞서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토 펜즐러는 크리스마스를 즈음해 미국에 거주하는 추리소설 작가들에게 독창적인 이야기를 써달라고 주문한다. 조건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배경으로 해야 하고, 미스터리를 포함해야 하고, 적어도 몇몇 장면은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어날 것이었다. 그걸 소책자로 제작해서 고객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나눠 주었다. 그것이 화제가 되어 평소에 별 관심이 없는 독자들도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소책자를 손에 넣기 위해 책을 주문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게 무려 17년간이나 이어진 행사였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는 이 크리스마스 앤솔로지에서 으스스한 것, 가슴 따뜻하고 뭉클한 것, 웃기고 유쾌한 것, 곤혹스러운 것 등등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자, 크리스마스는 이미 지났지만 매년 돌아오게 마련이다. 크리스마스 트리 옆에 모여 앉아 맛있는 음식과 함께 읽기에 딱 좋은 책이다. 물론 크리스마스가 아니더라도, 긴 겨울 밤을 함께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이야기들이다. 특히나 여기 수록된 이야기들이 크게 폭력적이지 않고 선혈이 낭자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 더 기분 좋게 미스터리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크리스마스와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