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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크 에프 그래픽 컬렉션
로리 할스 앤더슨 지음, 에밀리 캐럴 그림, 심연희 옮김 / F(에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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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에는 짠맛이 난다. 그게 입술에 닿는 느낌이 좋다.
나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얼굴을 닦았다.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어질 때까지.     p.70

 

멜린다는 고등학생이 된 첫날부터 왕따가 되었다. 옷도 촌스럽게 입었고, 낯을 많이 가리기도 했지만, 사실 그녀에게도 한때 절친이었던 친구들이 있었다. 멀리서 전학 온 헤더만 유일하게 멜린다에게 말을 건네지만, 전교생들의 놀림거리이자 괴롭힘의 대상이라 그녀에겐 별 의미가 없다. 아이들은 복도에서 일부러 멜린다를 치고 지나가거나, 발을 걸거나, 고의로 밀거나,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찢어 놓고 가기도 했다. 하지만 멜린다는 애써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고, 참고 반응하지 않으며, 말을 하지 않다 보니 점차 말수가 줄어들어 결국 실어증에 걸리게 되고 만다.

 

멜린다에게 유일한 안식이 되어주는건 독특한 방식으로 미술을 가르치는 미술 선생님의 수업시간과 2학년 구역에 있는 버려진 휴게실이 전부였다.

 

 

사실 멜린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 있었는데, 바로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참석한 어느 파티에서 선배 남학생에게 성폭행을 당한 거였다. 당시 그녀는 경찰에 신고 전화를 걸었고, 그로 인해 파티를 완전히 망쳐 버리게 되었고, 진실을 알지 못하는 친구들은 파티를 망쳤다는 이유로 그녀를 공공의 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그날의 진실을 멜린다는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었고, 당연히 피해자로서 보호를 받지도, 위로나 배려를 받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방치된 상처는 점점 더 멜린다를 절벽 끝으로 몰아 넣었고, 평범한 여학생이던 멜린다의 삶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친한 친구들은 모두 그녀를 외면했고, 부모님은 각자의 일로 바빠서 딸에게 별로 관심도 없었다. 멜린다도 속으로는 죄책감과 실수, 분노를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 넣고, 모든 걸 떠넘기고 싶지만.. 생각과는 달리 말하기는 점점 어려워졌고, 침묵에 익숙해졌다. 과연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치러야 하는 수많은 싸움에서 버텨내고, 승리할 수 있을까.

 

 

나는 친구 없어.
나한텐 아무도 없어.
난 아무 말도 안 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p.202

 

이야기는 시종일관 어둡고, 성폭행, 왕따, 실어증 등 우울한 스토리가 차가운 흑백의 이미지로 보여지고 있다. 하지만 학교라는 사회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예리한 비판과 진실을 외면하고 침묵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날카로운 은유들이 스토리 자체를 풍부하게 만들어 있어 그 배경과는 상관없이 매우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다. 고등학교에서 듣는 첫 번째 거짓말에 대한 열 가지 항목에는 교직원들은 항상 여러분을 도울 것이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보낸 학창 시절을 기분 좋게 추억할 것이다 등등이 있고, 고등학교에서 추가로 하는 열 가지 거짓말 항목에서는 지금 수학을 배우면 나중에 커서 쓸모가 있다 라던가, 학교에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와야 한다, 학교는 학생이 하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등등의 문구가 있다. 아마도 학생 시절을 겪었던 그 누구라도 공감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일 것이다.

 

 

<스피크>의 원작 소설은 1990년대 후반에 쓰여졌다. 저자인 로리 할스 앤더슨이 열세 살 때 강간당한 이후로 항상 자신을 덮치던 우울과 걱정의 그늘을 견디며 슨 자전 소설이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매년 가장 뛰어난 '영 어덜트 소설'에 주는 최고 권위의 문학상 '프린츠상' 첫 회 수상작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20여 년간 평론가들의 찬사와 독자들의 꾸준한 호응을 얻으며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했고, 이번에 '아이스너상' 수상 작가인 에밀리 캐럴의 강렬한 그림체로 그래픽노블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원작 소설의 명성이야 들어왔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었기에, 이번에 그래픽노블 버전으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왜 이 작품이 ‘영 어덜트 소설’의 고전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최근에야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일어나면서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지만, 이 작품은 ‘미투 운동’보다 훨씬 전에 성폭력 문제가 심각한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렸으니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역할을 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가해자가 제일 나쁘지만, 그걸 지켜보면서도 외면하고 침묵하는 방관자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나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이 작품은 그렇게 진실을 외면하고, 침묵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피해자에게 말하라고 외치면서, 과연 우리는 제대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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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점에서 본 우주 - 실험 천문학자들이 쓰는 새로운 우주 기록
김준한.강재환 지음 / 시공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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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그림자를 관측해낸다면 일반상대성이론의 예측대로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 또한 그림자 주위의 고리가 얼마나 밝은지, 어떤 모습인지는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면 블랙홀을 둘러싼 고온의 플라스마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블랙홀 근처에서 자기장이 어떤 배열을 이루는지, 블랙홀을 어떤 방향에서 관측하는지 등이 영향을 준다. 그렇기에 블랙홀의 직접 관측은 단순한 이론의 검증을 넘어서, 블랙홀의 특성과 주변 시공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제는 영화가 아니라 밤하늘에서 블랙홀을 찾아 나설 때다.   p.108

 

남극은 북미 대륙의 절반보다도 넓은 땅덩이인 남극 대륙 전체를 말한다. 그리고 남극점은 그 대륙의 한가운데, 지구 자전축이 지나는 남위 90도를 발한다. 남극점은 연 평균온도가 영하 50도에 이르며, 기온이 영하 40도 위로 올라가는 약 3개월 반의 하절기 동안에 운행 가능한 비행기로 대원들이 왕래하는 곳이다. 약 3킬로미터 두께의 얼음 평원 위에 자리해 기압이 낮으며, 수분을 거의 품지 못하는 극저온의 공기는 매우 건조한 사막 환경을 만든다. 그러니까 지구에서 가장 넓은 사막인 셈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자연에서 생명체가 살 수 없다. 그러한 극한의 환경에서 우주의 극한을 탐구하는 과학자들의 최첨단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이 책은 보이지 않는 블랙홀의 사진을 찍고, 우주가 태어나는 장면을 들여다보는 등 지금 남극점에서 진행 중인 최신 천문학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인 두 천문학자는 서로 다른 주제로 우주를 연구하기 위해 2014년부터 2019년 까지 총 일곱 차례 남극점에 발을 디뎠다고 한다. 우주를 연구하는데 어떤 도구와 방법을 쓰느 지에 따라 천문학자들도 다양하게 구분할 수 있다. 관측소에서 망원경을 하늘로 기울여 자료를 얻고 분석하는 관측 천문학자, 눈에 보이는 빛인 가시광선을 연구하는 광학 천문학자, 산꼭대기 또는 사막 한가운데의 관측소에서 자료를 얻고 분석하는 전파 천문학자, 복잡한 수식을 통해 물리법칙에 따라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를 연구하는 이론 천문학자, 그리고 실험 천문학자가 있다. 이들은 보통 멀끔한 모습으로 사무실에 앉아있기보다는 많은 시간을 실험실과 관측소에서 때 묻은 초췌한 모습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는 관측소 출장이 일상인데, 애리조나 사막의 산봉우리, 하와이의 해발 사천미터가 넘는 산꼭대기, 칠레의 고원, 그린란드로 향하기도 한다. 남극점도 매우 훌륭한 관측지인데, 천문 관측을 하기 좋은 곳이라는 건, 사람이 생활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뜻도 된다. 그러니 그 견디기 어려운 곳을 몇 년 동안이나 왕복하며 생생한 우주 관측을 했던 전파 천문학자이자 실험 천문학자인 이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우주에 비교하면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물과 현상의 규모는 상당히 작다.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주적 스케일에 익숙해지는 것이 도움이 된다. 천문학의 역사와 함께 우리가 인식하는 우주의 범위는 계속 커졌다. 우리도 살면서 비슷한 일을 겪는다. 어린 시절에 알던 동네와, 어른이 되어 활동하는 범위는 규모가 다르다. 우주론도 지난 100년 남짓한 사이에 폭풍 성장을 했다. BICEP팀이 풀고자 하는 문제는 우주를 이해하는 지평의 끝을 확장시키는 과정의 연장선이다.    P.195~196

 

일반인들에게는 천문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낯설 수 있지만, 남극 혹은 남극점이라는 장소 또한 평생 살면서 한번도 접하지 못하는 곳이라 머나먼 딴 세상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이 책에서는 남극에 가기 위한 서류 작성부터, 신체검사와 필요한 장비들의 화물 배송, 그리고 거리상으로 너무도 멀어 여기저기를 거쳐 가야 하는 고된 방법, 남극 대륙에서 입어야 하는 의복들과 음식들, 하루 한 번 인터넷 위성이 뜨고 지는 기지 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책을 통해서 간접 체험하는 남극대륙 여행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생경한 정보들이 많았고, 낯설지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남극점의 풍경 사진들도 있어 시선을 사로잡았다. 1부에서 이렇게 연구자들이 남극에 가기까지의 과정과 남극점 생활에 대해 알려주고 나면, 2부에서는 EHT 프로젝트, 즉 지구 크기의 망원경으로 블랙홀을 사진에 담는 인류 최초의 도전이 그려지고, 3부의 바이셉팀은 빅뱅 직후 우주가 식으며 남겨놓은 열기, 우주배경복사를 연구해 우주 탄생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 

 

2019년 4월, 인류 최초로 찍은 블랙홀 그림자 사진이 공개되어 <뉴욕타임스> <가디언> 등을 비롯한 전 세계 언론의 집중을 받았다. 지구 곳곳에 흩어진 망원경을 이어 ‘지구만 한 망원경’을 만든 신개념 EHT 프로젝트는 블랙홀의 진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책은 바로 그 역사적인 사진 한 장 뒤에 숨어 있는 모든 궁금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우주 진화의 이론적 발견에 큰 공을 세운 제임스 피블스가 201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는데, 3부에서 이번 노벨상에 대한 촘촘한 해설이자, 우주 진화를 설명하는 과학 이론에 현장의 연구까지 더해 풍성한 지식을 얻을 수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무한히 성실한 연구와 관측, 무수한 실패를 딛고 밝혀지는 우주 이야기는 해당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도 감격의 순간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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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경비원의 일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0
정지돈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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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밤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다. 매일 밤 도로 위를 떠도는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며 여성 혐오와 가난에 대한 이야기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두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 다 끝났어. 돈 때문에 하는 거야. 이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줄일 수도 있다. 그것을 실현하지 않고 그것을 하는 것. 이 이야기는 천삼백팔십세 개의 문장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천삼백팔십세 개의 문장에 매달려 있는 천삼백팔십세 개의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p.9

 

프랑스 코딩 학교인 에콜42에 입학할 꿈을 가진 대학원생 주인공 ‘나’는 서울스퀘어의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역 앞에 있는 거대한 적벽색 빌딩은 원래 대우그룹의 본사였지만 매각과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의 서울스퀘어가 되었다.  ‘나’는 ‘국제야간경비원연맹’의 아시아 지부장 조지훈을 만나게 된다. 조지훈은 '나'에게 야간 경비원의 세계를 처음 알려준 사람이다. '나'에겐 대학에서 알게 된 친구인 시를 쓰는 기한오가 있다. 어느 날 그들은 시인이 있는 독서 모임에 가게 된다. 시인 한 명에 대여섯명의 20대 남녀가 있는 모임으로 잊혀지고 숨겨진 한국 문학의 걸작을 읽고 궁극적으로는 그런 작품을 쓰기 위한 모임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실현이 불가능한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는 수학과 대학원생 에이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조지훈과 '나'는 가끔 새벽 시간 서울로7017로 올라 서울스퀘어의 파사드 위로 흐르는 LED의 불빛을 바라본다. 서울로7017은 2013년, 서울로가 아직 고가도로일 때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자가 분신자살했던 장소이며, 2017년 고가도로가 서울로7017로 조성된 지 10일이 지난 어느 오후, 카자흐스탄에서 온 노동자가 투신자살한 곳이기도 하다. 조지훈에게는 '서울스퀘어의 메인컨트롤러를 장악해 서울스퀘어의 미디어 파사드에 경비원들이 모든 빌딩을 점거했으며, 다국적 기업과 건물주의 소유에서 건축을 해방시킬 것이며, 도시를 정책의 수단에서 분리시켜 거리를 사람들에게 돌려줄 것이며, 서울은 시민의 것이다 등등의 메시지를 송출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에서 보낸 프로그래머(해커)가 ‘나’와 조지훈의 도움을 받아 서울스퀘어로 잠입, 메시지를 코딩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경비원은 투명인간이다. 유니폼을 입는 순간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또는 사람들 눈에는 유니폼만 보일 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서울스퀘어에서 일하는 직장인 대부분이 경비원과 비슷한 연배다. 그들은 출퇴근을 하면서, 미팅이나 식사를 하기 위해 출입구를 드나들며 마주친다. 직장인들은 경비원에게 미소를 짓거나 경비원을 경멸하거나 미소를 지으면서 경멸하고 경비원과 스몰 토크를 하고 스몰 토크를 하면서 경멸하지만 가장 흔한 일은 보지 않는 것이다. 유니폼 위로 텅 빈 허공만 존재한다는 듯, 그곳에는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p.77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이 벌써 스무 번째 작품이다. 한 실패한 혁명가와 그 혁명을 계속해서 좌절시켜온 역사에 대한 이야기인 이 소설은 주인공이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는 2018년 1월 3일부터 2018년 3월 24일까지의 이야기를 블로그 형식으로 구성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도시의 빌딩을 지키는 야간 경비원을 세계의 전복을 꿈꾸는 동시에 도시를 시민의 품으로 돌려보내기를 원하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언론은 조지훈과 프로그래머들을 도시해커로 포장하고, 이 사건이 서울의 무분별한 개발, 다국적 기업의 침투와 신자유주의의 종말에 대해 경고하는 메시지라고 보도한다. 그 일로 조지훈은 구속되고 프로그래머들은 추방된다. 그들은 어느 정도 원하는 바를 이루었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사회의 주변인일뿐이고,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리얼리티와 픽션을 넘나드는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로 독자성을 구현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사실 독자 입장에서는 다소 난해한 작품이었다. 분량이 짧고 술술 페이지가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야간 경비원의 일기>와 이어지는 또 하나의 짧은 소설이 에필로그처럼 덧붙여져 있고, 그 이야기는 박솔뫼 작가가 썼다. 가장 오랜 시간 빌딩에 존재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이뤄지는 업무들에서는 철저히 배제된 존재인 야간 경비원, 그들이 “나는 여기에 없다”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도시 해킹에 나서는 이야기를 박솔뫼 작가가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작품 해설이나 추천평 보다는 이렇게 소설과 이어지는 또 다른 이야기를 다른 작가가 써주는 것은 매우 괜찮은 시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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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문명 건설 가이드 -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도구와 기계의 원리
라이언 노스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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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이해하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우리는 이 개념을 모두 하나의 표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이 표를 읽는 데는 기껏해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죠. 이제 당신은 인류가 0이 뭔지도 모른 채 삽질하며 낭비한 수천수만 년의 시간을 절약하고, 불과 한나절이면 당신의 문명에 이 개념을 도입할 수 있습니다. 감사 인사는 받았다고 치겠습니다. 앞으로 이 기본적인 수 체계로 무엇을 할지는 전부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인류가 아주 한참을 걸려 알아낸 꽤나 유용한 수학 공식들이 이 안내서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p.56~57

 

자, 당신은 최첨단 개인용 타임머신인 FC3000을 타고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려던 참이다. 이 타임머신은 현시점에서 1.5초 이상 미래로 가는 것은 허용하지 않으며, 오직 과거로만 갈 수 있다. FC3000에는 당신이 방문할 지역의 환경과 안전을 보장해줄 다수의 바이오 필터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과거로부터 수십 가지 치명적인 전염병을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을 예방하고 있다.이 타임머신은 현재 가장 신뢰할 만한 기계이지만, 기기 내부에는 사용자가 수리할 수 있는 부품이 없다. 그러니 고장이 나게 된다면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당신의 불길한 예감대로 아주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으며, 아마도 영영 미래로, 그러니까 당신의 현재로 돌아가지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과거에 꼼짝없이 갇혀서, 다시는 미래로 돌아갈 수 없다면... 미래를 되가져오는 방법이 있다. 무슨 얘기냐고? 바로 '길 잃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문명 건설 가이드'가 그 모든 것을 알려줄 거라는 얘기다.

 

이 책은 '전문적인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한 인간이 맨땅에서 맨손으로 하나의 문명을 다시 세우는 데 필요한 모든 과학, 공학, 수학, 기술, 예술, 철학 등의 각종 정보와 구체적인 수치들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들이 수백만 년에 걸쳐 인류 문명을 세워왔는데 반해, 그 모든 답을 이 책 한 권으로 담아냈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문명 재건을 위한 한 편의 '커닝 페이퍼 모음집'이라고. 과거에 표류한 시간여행자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전체 17개의 흥미로운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은 타임머신 고장으로 예상치 못한 시점에 불시착했을 가능성에 대비해 현 시간 좌표를 알려주는 순서도로 시작한다. 자신의 새로운 현재가 역사 속 어디쯤인지 먼저 파악해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서양 의사들은 부정확하고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는 체액 불균형이라는 발상을 바탕으로 무려 2,000년이나 환자를 치료해왔다는 말입니다. 사체액설은 이 가설이 처음 시작된 그리스 문명을 비롯한 대부분 문명이 지속된 기간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습니다. 사체액설이 폐기된 후 몇백 년 동안 의학은 과거를 전부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발전했습니다. 자신이 세운 문명 속에서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 왜냐하면 당신은 존엄한 인간이고, 또 병에 걸려 세상을 일찍 뜨는 것이 객관적으로 볼 때 한 생명이 맞이할 수 있는 최선의 결말은 아니므로 - 당신은 현대 의학의 기초를 하루빨리 소개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p.410

 

마치 내가 SF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게 만들고 나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도구와 기계의 원리를 비롯한 과학 지식들이다. 방대한 양의 정보를 다루고 있지만,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것은 유쾌함과 빵빵 터지는 유머이다. 덕분에 전혀 어렵게 느껴지지 않고 술술 읽히며, 지루할 틈 없이 소설이라도 읽는 것처럼 페이지가 넘어간다. 수학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 현대 과학과 측정법의 기초가 되는 정보, 과일과 채소를 비롯한 식물들의 교배 방법과 품종 개량법, 문명은 건설하는데 유용한 동물과 쓸모없는 동물들의 리스트, 그 외에도 챙겨야 할 기초 영양소, 화학의 기초 지식, 인간 고유의 창조 활동, 의학 상식, 응급 처치법 등등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갖 종류의 지식과 정보들이 담겨 있다. 정말 이 한 권의 책만 있다면, 과거 어느 시대에 있든지, 그곳이 어떤 환경이든지 완벽하게 생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사피엔스>와 <마션>이 만났다는 문구가 전혀 과장이 아닐 정도로, 세상 유쾌하고 가장 쓸모 있는 과학책이었다. 불 피우기, 식량 구하기, 집 짓기부터 농경과 산업에 필요한 재료와 도구의 제작까지.. 오늘날의 세계를 만든 발명과 혁신의 모든 것을 담고 있으나 전혀 딱딱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데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시작해 독자들이 직접 적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들이라고 체감하도록 만들어진 책이니 말이다. 당신이 만약 표류한 시간여행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항해 중 무인도에 표류했을 때, 화성에 홀로 낙오했을 때, 외계인이 침공했을 때, 좀비 바이러스가 퍼졌을 때에도 이 책은 매우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영화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냐 싶겠지만, 사실 당장 내일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누가 알겠는가. 작가의 거침없는 상상력과 번뜩이는 재치로 무장한 이 책을 읽다 보니, 어떤 설정이든 가능할 것 같고, 어떤 상황이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당신도 이 책을 읽었다면, 이제 새로운 시대에서 가장 유능하고 똑똑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 보다 나은 인류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먼저, 부디 최선을 다해 살아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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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트 콜렉터
캠론 라이트 지음, 이정민 옮김 / 카멜레온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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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리, 우리의 모든 것은 문학이 될 수 있어. 생활과 희망, 욕구, 절망, 열정, 우리의 장점과 단점 모든 것이. 이야기는 오늘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갈망과 내일의 가능성을 보고 싶은 열망을 담고 있어. 그래서 사람들은 문학을 '인간이 되는 기술 안내서'라고 부르기도 하지. 그러니까 당연히 문학의 역할이 크다고 봐야겠지."
"문학을 공부하면 아들의 병을 낫게 하는 법을 알 수 있을까요?     p.163~164

 

캄보디아 스퉁 민체이, 상 리와 기 림 부부에게 꿈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매일 같이 거대한 쓰레기 매립장에서 쓰레기를 주워 내다 팔며 하루 벌어 겨우 하루 먹고 사는 생활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는 16개월이 된 아들 니사이가 있었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고열과 설사에 자주 시달리곤 했다. 스퉁 민체이는 높이가 수십 미터나 되는, 악취가 코를 찌르는 쓰레기 산들이 복잡하게 엉킨 거미줄처럼 골짜기를 이루고 있어 주민들조차 길을 찾는 게 쉽지 않은 곳이었다. 프놈펜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곳 사람들은 남들이 내다 버린 것들에서 삶을 일구고자 매일같이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쓰레기를 줍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달픈 일이었다.

 

게다가 이들 부부를 괴롭히는 것이 또 있었으니, 집집마다 집세를 걷으러 다니고, 집세가 밀리면 당장 쫓아내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 인정머리 없는 집세수금원(Rent Collector) 소피프 신이라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암소’라고 부르며 치를 떨지만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표독스럽게 집세를 받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 림이 강도를 만나는 바람에 돈을 다 빼앗겨 집세를 내지 못하게 되었고, 소피프 신은 당장 아침까지 집을 비우라고 협박을 하던 중이었다. 소피프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 아이를 힐끗 보다가 바닥에 펼쳐진 책을 발견하게 된다. 한 순간 맹렬하던 분노가 느닷없이 잠잠해지더니 정적이 감돌고 소피프는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아름다운 책이긴 했지만 사실 너무 낡고 오래된 물건이었다. 상 리는 도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진다.

 

 

"당신을 아주 자랑스러워했을 거예요." 내가 떠날 준비를 하자 치유자가 말했다.
"아마도 그는 미리 전해 들은 얘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린 매립장 근처에 살아요."
그는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디에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죠."     p.346

 

이 작품은 캄보디아 프놈펜 외곽의 쓰레기 매립장, 스퉁 민체이에서 살아가는 실제 인물들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작가인 캠론 라이트는 그의 아들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승리의 강>에서 영감을 받아,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선물이 주어진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라는 문학적 상상을 하게 된다. 쓰레기를 주워서 내다 팔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아픈 아이를 돌보며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문학이 들어온다면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까. 언젠가는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살던 상 리는 소피스 신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에게 부탁한다. 자신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냐고. 이유는 단순했다. 아들에게 글을 가르칠 수 있다면, 니사이한테 지금보다 나아질 기회를 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여자의 문학 수업이 시작된다.

 

아무렇지 않게 욕설을 내뱉고, 늘 싸구려 술에 취해 모든 것에 냉소하던 소피프와 성실하고 순진한 시골 여자 상 리, 극단적으로 다른 두 여자가 가르치고, 배워나가는 문학 수업의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매혹적이다. '문학을 이해하려면 머리로 읽고 가슴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해' '우리의 모든 것은 문학이 될 수 있어... 그래서 사람들은 문학을 '인간이 되는 기술 안내서'라고 부르기도 하지' '교육은 언제나 옳아. 특히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게 해줄 때는 더욱 그렇지'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충분히 공감을 얻을 만하다고 여길 때 영웅은 가장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나올 수도 있어' 등등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공감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진다. 내일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인생, 절망뿐인 삶 속에서 문학이 어떻게 누군가의 삶을 구원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서사 자체도 뭉클하지만, 가난한 이들이 그저 하루를 버티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그린 드라마만으로도 너무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작품이었다. 캄보디아 최대 쓰레기 매립장에서 벌어진 실화 위해 세워진 허구의 이야기는 문학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력을 매우 견고하고,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감동적이기도 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아무리 절망적이고 내일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인생이라도 누구에게나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간절히 믿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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