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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문명 건설 가이드 -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도구와 기계의 원리
라이언 노스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모두 이해하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우리는 이 개념을 모두 하나의 표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이 표를 읽는 데는 기껏해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죠. 이제 당신은 인류가 0이 뭔지도 모른 채 삽질하며 낭비한 수천수만 년의 시간을 절약하고, 불과 한나절이면 당신의 문명에 이 개념을 도입할
수 있습니다. 감사 인사는 받았다고 치겠습니다. 앞으로 이 기본적인 수 체계로 무엇을 할지는 전부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인류가 아주 한참을 걸려
알아낸 꽤나 유용한 수학 공식들이 이 안내서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p.56~57
자, 당신은 최첨단 개인용 타임머신인 FC3000을 타고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려던 참이다. 이 타임머신은 현시점에서 1.5초 이상
미래로 가는 것은 허용하지 않으며, 오직 과거로만 갈 수 있다. FC3000에는 당신이 방문할 지역의 환경과 안전을 보장해줄 다수의 바이오
필터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과거로부터 수십 가지 치명적인 전염병을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을 예방하고 있다.이 타임머신은 현재 가장 신뢰할 만한
기계이지만, 기기 내부에는 사용자가 수리할 수 있는 부품이 없다. 그러니 고장이 나게 된다면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당신의 불길한
예감대로 아주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으며, 아마도 영영 미래로, 그러니까 당신의 현재로 돌아가지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과거에 꼼짝없이
갇혀서, 다시는 미래로 돌아갈 수 없다면... 미래를 되가져오는 방법이 있다. 무슨 얘기냐고? 바로 '길 잃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문명 건설
가이드'가 그 모든 것을 알려줄 거라는 얘기다.
이 책은 '전문적인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한 인간이 맨땅에서 맨손으로 하나의 문명을 다시 세우는 데 필요한 모든 과학, 공학, 수학,
기술, 예술, 철학 등의 각종 정보와 구체적인 수치들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들이 수백만 년에 걸쳐 인류 문명을 세워왔는데 반해, 그
모든 답을 이 책 한 권으로 담아냈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문명 재건을 위한 한 편의 '커닝 페이퍼
모음집'이라고. 과거에 표류한 시간여행자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전체 17개의 흥미로운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은 타임머신
고장으로 예상치 못한 시점에 불시착했을 가능성에 대비해 현 시간 좌표를 알려주는 순서도로 시작한다. 자신의 새로운 현재가 역사 속 어디쯤인지
먼저 파악해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서양 의사들은 부정확하고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는 체액 불균형이라는 발상을 바탕으로 무려 2,000년이나 환자를 치료해왔다는 말입니다.
사체액설은 이 가설이 처음 시작된 그리스 문명을 비롯한 대부분 문명이 지속된 기간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습니다. 사체액설이 폐기된 후 몇백 년
동안 의학은 과거를 전부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발전했습니다. 자신이 세운 문명 속에서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 왜냐하면 당신은
존엄한 인간이고, 또 병에 걸려 세상을 일찍 뜨는 것이 객관적으로 볼 때 한 생명이 맞이할 수 있는 최선의 결말은 아니므로 - 당신은 현대
의학의 기초를 하루빨리 소개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p.410
마치 내가 SF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게 만들고 나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도구와 기계의 원리를 비롯한 과학 지식들이다. 방대한 양의 정보를 다루고 있지만,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것은 유쾌함과 빵빵 터지는 유머이다.
덕분에 전혀 어렵게 느껴지지 않고 술술 읽히며, 지루할 틈 없이 소설이라도 읽는 것처럼 페이지가 넘어간다. 수학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 현대
과학과 측정법의 기초가 되는 정보, 과일과 채소를 비롯한 식물들의 교배 방법과 품종 개량법, 문명은 건설하는데 유용한 동물과 쓸모없는 동물들의
리스트, 그 외에도 챙겨야 할 기초 영양소, 화학의 기초 지식, 인간 고유의 창조 활동, 의학 상식, 응급 처치법 등등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갖 종류의 지식과 정보들이 담겨 있다. 정말 이 한 권의 책만 있다면, 과거 어느 시대에 있든지, 그곳이 어떤 환경이든지 완벽하게
생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사피엔스>와 <마션>이 만났다는 문구가 전혀 과장이 아닐 정도로, 세상 유쾌하고 가장 쓸모 있는 과학책이었다. 불
피우기, 식량 구하기, 집 짓기부터 농경과 산업에 필요한 재료와 도구의 제작까지.. 오늘날의 세계를 만든 발명과 혁신의 모든 것을 담고 있으나
전혀 딱딱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데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시작해 독자들이 직접 적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들이라고 체감하도록 만들어진
책이니 말이다. 당신이 만약 표류한 시간여행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항해 중 무인도에 표류했을 때, 화성에 홀로 낙오했을 때, 외계인이 침공했을
때, 좀비 바이러스가 퍼졌을 때에도 이 책은 매우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영화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냐 싶겠지만, 사실 당장 내일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누가 알겠는가. 작가의 거침없는 상상력과 번뜩이는 재치로 무장한 이 책을 읽다 보니, 어떤 설정이든 가능할 것
같고, 어떤 상황이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당신도 이 책을 읽었다면, 이제 새로운 시대에서 가장 유능하고 똑똑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 보다 나은 인류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먼저, 부디 최선을 다해 살아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