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에는 짠맛이 난다. 그게 입술에 닿는 느낌이 좋다.
나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얼굴을 닦았다.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어질 때까지. p.70
멜린다는 고등학생이 된 첫날부터 왕따가 되었다. 옷도 촌스럽게 입었고, 낯을 많이 가리기도 했지만, 사실 그녀에게도 한때 절친이었던
친구들이 있었다. 멀리서 전학 온 헤더만 유일하게 멜린다에게 말을 건네지만, 전교생들의 놀림거리이자 괴롭힘의 대상이라 그녀에겐 별 의미가 없다.
아이들은 복도에서 일부러 멜린다를 치고 지나가거나, 발을 걸거나, 고의로 밀거나,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찢어 놓고 가기도 했다. 하지만 멜린다는
애써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고, 참고 반응하지 않으며, 말을 하지 않다 보니 점차 말수가 줄어들어 결국 실어증에 걸리게 되고 만다.
멜린다에게 유일한 안식이 되어주는건 독특한 방식으로 미술을 가르치는 미술 선생님의 수업시간과 2학년 구역에 있는 버려진 휴게실이 전부였다.
사실 멜린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 있었는데, 바로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참석한 어느 파티에서 선배 남학생에게 성폭행을 당한 거였다.
당시 그녀는 경찰에 신고 전화를 걸었고, 그로 인해 파티를 완전히 망쳐 버리게 되었고, 진실을 알지 못하는 친구들은 파티를 망쳤다는 이유로
그녀를 공공의 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그날의 진실을 멜린다는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었고, 당연히 피해자로서 보호를 받지도, 위로나
배려를 받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방치된 상처는 점점 더 멜린다를 절벽 끝으로 몰아 넣었고, 평범한 여학생이던 멜린다의 삶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친한 친구들은 모두 그녀를 외면했고, 부모님은 각자의 일로 바빠서 딸에게 별로 관심도 없었다. 멜린다도 속으로는 죄책감과 실수, 분노를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 넣고, 모든 걸 떠넘기고 싶지만.. 생각과는 달리 말하기는 점점 어려워졌고, 침묵에 익숙해졌다. 과연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치러야 하는 수많은 싸움에서 버텨내고, 승리할 수 있을까.
나는 친구 없어.
나한텐 아무도 없어.
난 아무 말도 안 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p.202
이야기는 시종일관 어둡고, 성폭행, 왕따, 실어증 등 우울한 스토리가 차가운 흑백의 이미지로 보여지고 있다. 하지만 학교라는 사회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예리한 비판과 진실을 외면하고 침묵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날카로운 은유들이 스토리 자체를 풍부하게 만들어 있어 그 배경과는
상관없이 매우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다. 고등학교에서 듣는 첫 번째 거짓말에 대한 열 가지 항목에는 교직원들은 항상 여러분을 도울 것이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보낸 학창 시절을 기분 좋게 추억할 것이다 등등이 있고, 고등학교에서 추가로 하는 열 가지 거짓말 항목에서는 지금 수학을
배우면 나중에 커서 쓸모가 있다 라던가, 학교에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와야 한다, 학교는 학생이 하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등등의 문구가
있다. 아마도 학생 시절을 겪었던 그 누구라도 공감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일 것이다.
<스피크>의 원작 소설은 1990년대 후반에 쓰여졌다. 저자인 로리 할스 앤더슨이 열세 살 때 강간당한 이후로 항상 자신을
덮치던 우울과 걱정의 그늘을 견디며 슨 자전 소설이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매년 가장 뛰어난 '영 어덜트 소설'에 주는 최고 권위의 문학상
'프린츠상' 첫 회 수상작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20여 년간 평론가들의 찬사와 독자들의 꾸준한 호응을 얻으며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했고,
이번에 '아이스너상' 수상 작가인 에밀리 캐럴의 강렬한 그림체로 그래픽노블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원작 소설의 명성이야 들어왔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었기에, 이번에 그래픽노블 버전으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왜 이 작품이 ‘영
어덜트 소설’의 고전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최근에야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일어나면서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지만, 이 작품은
‘미투 운동’보다 훨씬 전에 성폭력 문제가 심각한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렸으니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역할을 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가해자가 제일 나쁘지만, 그걸 지켜보면서도 외면하고 침묵하는 방관자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나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이 작품은 그렇게
진실을 외면하고, 침묵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피해자에게 말하라고 외치면서, 과연 우리는 제대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