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경비원의 일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0
정지돈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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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밤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다. 매일 밤 도로 위를 떠도는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며 여성 혐오와 가난에 대한 이야기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두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 다 끝났어. 돈 때문에 하는 거야. 이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줄일 수도 있다. 그것을 실현하지 않고 그것을 하는 것. 이 이야기는 천삼백팔십세 개의 문장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천삼백팔십세 개의 문장에 매달려 있는 천삼백팔십세 개의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p.9

 

프랑스 코딩 학교인 에콜42에 입학할 꿈을 가진 대학원생 주인공 ‘나’는 서울스퀘어의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역 앞에 있는 거대한 적벽색 빌딩은 원래 대우그룹의 본사였지만 매각과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의 서울스퀘어가 되었다.  ‘나’는 ‘국제야간경비원연맹’의 아시아 지부장 조지훈을 만나게 된다. 조지훈은 '나'에게 야간 경비원의 세계를 처음 알려준 사람이다. '나'에겐 대학에서 알게 된 친구인 시를 쓰는 기한오가 있다. 어느 날 그들은 시인이 있는 독서 모임에 가게 된다. 시인 한 명에 대여섯명의 20대 남녀가 있는 모임으로 잊혀지고 숨겨진 한국 문학의 걸작을 읽고 궁극적으로는 그런 작품을 쓰기 위한 모임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실현이 불가능한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는 수학과 대학원생 에이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조지훈과 '나'는 가끔 새벽 시간 서울로7017로 올라 서울스퀘어의 파사드 위로 흐르는 LED의 불빛을 바라본다. 서울로7017은 2013년, 서울로가 아직 고가도로일 때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자가 분신자살했던 장소이며, 2017년 고가도로가 서울로7017로 조성된 지 10일이 지난 어느 오후, 카자흐스탄에서 온 노동자가 투신자살한 곳이기도 하다. 조지훈에게는 '서울스퀘어의 메인컨트롤러를 장악해 서울스퀘어의 미디어 파사드에 경비원들이 모든 빌딩을 점거했으며, 다국적 기업과 건물주의 소유에서 건축을 해방시킬 것이며, 도시를 정책의 수단에서 분리시켜 거리를 사람들에게 돌려줄 것이며, 서울은 시민의 것이다 등등의 메시지를 송출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에서 보낸 프로그래머(해커)가 ‘나’와 조지훈의 도움을 받아 서울스퀘어로 잠입, 메시지를 코딩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경비원은 투명인간이다. 유니폼을 입는 순간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또는 사람들 눈에는 유니폼만 보일 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서울스퀘어에서 일하는 직장인 대부분이 경비원과 비슷한 연배다. 그들은 출퇴근을 하면서, 미팅이나 식사를 하기 위해 출입구를 드나들며 마주친다. 직장인들은 경비원에게 미소를 짓거나 경비원을 경멸하거나 미소를 지으면서 경멸하고 경비원과 스몰 토크를 하고 스몰 토크를 하면서 경멸하지만 가장 흔한 일은 보지 않는 것이다. 유니폼 위로 텅 빈 허공만 존재한다는 듯, 그곳에는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p.77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이 벌써 스무 번째 작품이다. 한 실패한 혁명가와 그 혁명을 계속해서 좌절시켜온 역사에 대한 이야기인 이 소설은 주인공이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는 2018년 1월 3일부터 2018년 3월 24일까지의 이야기를 블로그 형식으로 구성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도시의 빌딩을 지키는 야간 경비원을 세계의 전복을 꿈꾸는 동시에 도시를 시민의 품으로 돌려보내기를 원하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언론은 조지훈과 프로그래머들을 도시해커로 포장하고, 이 사건이 서울의 무분별한 개발, 다국적 기업의 침투와 신자유주의의 종말에 대해 경고하는 메시지라고 보도한다. 그 일로 조지훈은 구속되고 프로그래머들은 추방된다. 그들은 어느 정도 원하는 바를 이루었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사회의 주변인일뿐이고,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리얼리티와 픽션을 넘나드는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로 독자성을 구현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사실 독자 입장에서는 다소 난해한 작품이었다. 분량이 짧고 술술 페이지가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야간 경비원의 일기>와 이어지는 또 하나의 짧은 소설이 에필로그처럼 덧붙여져 있고, 그 이야기는 박솔뫼 작가가 썼다. 가장 오랜 시간 빌딩에 존재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이뤄지는 업무들에서는 철저히 배제된 존재인 야간 경비원, 그들이 “나는 여기에 없다”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도시 해킹에 나서는 이야기를 박솔뫼 작가가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작품 해설이나 추천평 보다는 이렇게 소설과 이어지는 또 다른 이야기를 다른 작가가 써주는 것은 매우 괜찮은 시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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