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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회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6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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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면 배신당하지. 대신 기대하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일도 없어. 나는 그걸 깨달은 거야. 그랬더니 희한한 일이 일어나더군. 그때까지는 그저 힘들고 괴롭기만 했던 회사가 아주 편안한 곳으로 보이더라고. 출세하려 하고 회사나 상사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하니까 괴로운 거지. 월급쟁이의 삶은 한 가지가 아니야. 여러 가지 삶의 방식이 있는 게 좋지. 나는 만년 계장에 출셋길이 막힌 월급쟁이야. 하지만 나는 자유롭게 살아왔어. 출세라는 인센티브를 외면해버리면 이렇게 편안한 장사도 없지."    p.47

 

영업2과의 과장을 맡고 있는 하라시마에게 매주 목요일 오후에 진행되는 정례회의는 스트레스였다. 그날도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탓에 영업부장인 기타가와로부터 질책과 추궁을 당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에 비해 영업 1과의 과장 사카도 노부히코는 하라시마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영업부 에이스로, 최연소 과장으로 승진해 화려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인물이었다. 만년 실적 부진인 2과와 비교돼 사내에서는 '꽃 같은 1과, 지옥 같은 2과'라고 불릴 정도였고, 유명 대기업을 고객사로 거느리고 있는 도쿄겐덴의 매출을 견인하는 최고의 수입원이기도 했다. 영업 1과에는 회의만 열렸다 하면 좋다고 꾸벅대는 만년 계장 야스미가 있었는데, 어디서든 무서울 게 없다는 듯 당당하게 졸아서 잠귀신 핫카쿠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날 회의가 끝난 후 사람 좋기로 소문난 사카도가 전부터 쌓아온 분노가 폭발하기라도 한듯 야스미에게 무시무시한 얼굴로 화를 낸다. 그날 이후로 사카도는 야스미에게 노골적으로 폭언과 질책을 퍼붓기 시작하고, 야스미는 기다렸다는 듯 사카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발해버린다. 하지만 실적이 뛰어나고 성실한 에이스와 무능력한 구제불능이라는 구도에서 벌어지는 직장 내 괴롭힘이라니, 결과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뻔히 보였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직장내 괴롭힘이 인정이 되어, 사카도의 인사부 대기 발령이 결정되고 만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인사의 배경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그렇게 추악한 사건을 은폐하려는 자들과 진실을 드러내 고발하려는 자들의 치열한 싸움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고발해봤자 얻을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라, 이 말씀이십니까?" 사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야. 이 일을 은폐하는 일을 하고 있어. 이 회사를 지키고 우리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 너, 그 나이에 구직 활동을 하고 싶어? 여기보다 더 조건 좋은 직장이 있을 것 같아? 세상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도 남잖아."   p.340

 

일본 TV드라마 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를 쓴 이케이도 준의 신작이다. 중견기업 도쿄겐덴에서 발생한 미스터리한 사건을 중심으로, 은폐와 폭로의 기로에 선 직원들의 갈등을 그린 옴니버스 군상극이다. 현지에서는 출간 반년 만에 NHK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며,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 출연진이 대거 출격한 영화 <일곱 개의 회의>(국내 개봉명:내부고발자들━월급쟁이의 전쟁)도 화제를 모았다. 소설도 120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단 한 권으로 이케이도 준의 매력을 담고 있는 대표작이기도 하다.

 

한 중견기업에서 벌어진 추악한 사건을 전체 이야기를 관통하는 중심 플롯으로 세워두고, 각 장마다 중심 인물을 다르게 해서 영업1부, 영업2부, 경리부, 총무부, 거래 업체 등의 풍경을 각각의 시선으로 살펴볼 수 있는 구성이 무엇보다 흥미진진하다. 인물과 시점을 바꿔가면서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그 속에서 독립된 스토리처럼 진행되지만, 차곡차곡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교집합이 생기고, 또 하나의 사건을 여러 방향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더욱 긴장감 넘치게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실제로 어느 회사에나 존재할 것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등장 인물들이 생생한 리얼리티를 부여해 누구라도 공감하면서 보도록 만들어 주는 작품이었다.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가장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엔터테인먼트 문학’을 선도하는 작가라는 평가답게 최고의 '읽는 재미'를 안겨주는 작품이었다. 지루한 소설은 딱 질색이라면,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숨에 읽게 되는 소설을 읽고 싶다면, 이케이도 준의 작품을 만나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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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무섭고 궁금한 최강 공룡 - 공룡대장이 들려주는 공룡 이야기
홍우식 지음, 월드잇 그림 / 빅북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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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자 아이들이 있는 집은 아마도 대부분 공룡에 관련된 책이 한 두 권 쯤은 있을 것이다. 아직 한글도 채 떼지 못한 어린 아이가 그 복잡하고도, 긴 이름들을 어떻게 다 외우는지 신기할 정도로... 시대별, 종류별 공룡 이름들을 다 꿰고 있는 것은 언제나 미스터리지만 말이다. 그래서 덕분에 공룡을 다루고 있는 책들을 꽤 여러 권 보았는데, 이번에 만나게 된 이 책은 제목만큼이나 판형이 커서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할 것 같다.

 

공룡이 살았던 중생대는 시기가 꽤 길어서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 전기, 백악기 후기 등으로 시대를 나눈다. 그 중에서도 이 책은 중생대의 쥐라기와 백악기에 살았던 공룡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쥐라기는 1억 9000만 년 전부터 1억 3600만 년 전에 해당하는 시기로 나무와 숲이 크게 번성한 날씨 덕에 점차 몸집이 큰 공룡들이 나타났던 시기였다. 그리고 백악기는 1억 3600만 년 전부터 6500만 년 전에 해당되는데, 공룡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6500만 년 전 이후로 공룡들이 갑작스레 멸종하게 되고, 포유류가 번성하기 시작한 신생대로 이어지게 된다.

 

공룡은 지금은 볼 수 없는 멸종된 동물이지만, 전 세계에서 발견된 공룡 화석을 통해 우리는 공룡의 모습과 크기, 몸무게 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공룡 전문가들의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에 의해 거의 흡사한 생김새를 지닌 파충류로 새롭게 태어나서, 실제로 존재하는 동물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나 영상 매체들을 통해서 복원된 모습을 통해 생생하게 보아 왔고, 덕분에 실제 유명한 공룡들의 모습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익숙한 이미지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공룡들은 우선 사는 장소와 습성에 따라 땅에 사는 '육식 공룡', 그리고 땅에 살면서 풀을 좋아하는 '초식 공룡'과 하늘을 나는 '익룡', 물에 사는 '해양 파충류'로 구분되어 있다. 날카로운 이빨로 다른 공룡을 잡아먹으며, 두 다리로 걷는 이족 보행을 했던 육식 공룡에는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가장 유명한 공룡 '티라노사우루스 렉스', 그리고 영화에서도 등장했던 '벨로키랍토르' 등이 있다. 주로 풀이나 열매, 나뭇잎 등을 먹고 살며 얼굴 옆쪽에 눈이 붙어 있어 넓은 곳까지 볼 수 있었던 초식 공룡에는 순하고 귀여운 이미지로도 많이들 기억하는 '브라키오사우루스', '스테고사우루스' 등이 있다.

 

해양 파충류는 물에서만 사는 어룡, 그리고 땅 위와 물속을 오가며 생활하는 수장룡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어룡들은 오늘날의 물고기와 몸의 형태가 비슷해 고래와 비슷한 모습으로 눈에 익을 것이다. 익룡은 트라이아스 후기에 나타난 람포린쿠스과와 쥐라기 후기에 나타난 프테로닥틸루스과로 나뉜다. 람포린쿠스과는 몸집에 비해 머리가 크고 날개는 가벼운 편이었고, 프테로닥틸루스과는 그에 비해 꼬리가 짧고 머리가 작아진 반면 날개는 커져서 하늘을 날기에 더 적합했다. 엄밀히 말하면 어룡과 익룡은 공룡으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과 견해가 분분한 부분이라 정확히 구분해서 규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화보가 아닐까 싶다. 큰 판형의 책이라 이미지들이 크게 수록되어 있고, 색감이나 디테일 등 퀄리티도 뛰어난 편이다. 그리고 각 화보마다 한글 이름과 영문이름, 이름의 뜻을 비롯해 발견 지역과 식성, 몸길이, 몸무게 등 기본적인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아이 덕분에 나도 공룡 이름 수십 개쯤은 거뜬히 외우고, 모습을 보면 누구인지 어느 시대에 살았던 공룡인지 대충 아는 정도가 되었기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공룡들의 모습을 재미있게 만날 수 있었다.

 

공룡이 실제로 존재했던 약 2억 4800만 년 전부터 약 6500만 년 전까지 이어진 중생대는 전혀 체감되지 않는 아득한 옛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을 꼽는다면 공룡이 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크기에 무시무시할 정도로 포악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동물일 텐데도 말이다. 그래서 만약 공룡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리고 오늘날 공룡이 되살아난다면 또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상상도 해보게 되는 것 같다.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흥미진진한 공룡들의 세계를 만나게 해주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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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 히가시노 게이고 에세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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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전기 하면 전기회로나 옴의 법칙을 연상하는 게 보통이지만, 배우는 내용은 대부분 수학 관련이다. 특히 1학년과 2학년 때는 수학이라는 이름이 붙는 강의만 해도 열 개가 넘는다. 더군다나 죄다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수학과는 비교도 안 되게 난해하고, '공식을 외우면 어떻게든 풀리는' 문제는 당연히 시험에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강의를 들으며 나는 늘 궁금했다. 이 사람들, 즉 수학 연구자는 어떤 세계관과 꿈을 가지고 살고 있는 걸까. 아니, 애당초 왜 수학자가 되려 한 걸까.    p.45~46

 

다들 알다시피 히가시노 게이고는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전업 작가가 되었다. 그래서 이과적 지식을 바탕으로 기발한 트릭과 반전이 빛나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왔고, 그의 작품 하면 현대과학과 첨단의학을 소재로 한 것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복제 인간, 도플 갱어 등 최첨단 과학과 의학을 다루었던 <분신>, 뇌 이식 이후 인격의 변이를 겪게 되는 인물이 등장했던 <사소한 변화>, 인공지능 로봇의 개발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었던 <브루투스의 심장>, 전 국민의 DNA 정보를 채집해 데이터베이스를 수집해 관리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수사를 진행했던 <미등록자>, 리만 가설, 뇌 과학, 서번트 증후군을 소재로 뇌의학과 수학계의 난제라는 미스터리를 풀어냈던 <위험한 비너스> 등등.. 많은 작품들이 그러했다.

 

그래서 추리 작가이자 이공계 출신 전직 엔지니어로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들려주는 생활 밀착형 과학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에세이라고 해서 개인적으로 굉장히 기대를 했다. 물론 표지에서부터 '과학책이 아닙니다. 그냥 재미로 읽어주세요'라는 경고 문구가 쓰여 있지만 말이다. 이 책은 2003년부터 2005년까지 2년 반 동안 잡지 「다이아몬드 LOOP」와 「책의 여행자」에 연재했던 짧은 글들을 한 권으로 엮은 에세이집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스스로도 연재의 마지막 회에 '원래는 과학을 소재로 이 코너를 꾸려나갈 생각이었지만, 되돌아보니 목표로 했던 글은 별로 못 쓴 거 같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로, 과학 에세이라기 보다는 소소한 일상 에세이에 가까운 글이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유쾌하고, 재미있는 책이었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과 사람은 한 가지 일을 깊이 탐구하는 데는 능해도 발상의 폭을 넓히는 데는 서투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기술자가 들러붙어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가 전혀 문외한이었던 문과 사람의 한마디로 해결됐다는 이야기를 흔히 듣는다. 기술과는 무관한 여고생이 휴대전화를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사용해 개발자를 놀라게 하는 경우도 일상다반사다. 발상이 빈곤하다고 여겨질 것 같으니 앞으로 이과 작가라는 간판은 내걸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빈곤한 건 너뿐이고, 그래서 이과에서 못 버티고 떨어져 나온 거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p.121

 

이 책은 낯선 여자가 옆에 있을 때 남자들이 착각에 빠지는 이유라는 심리학적인 내용으로 시작해, 과학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추리소설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과학수사에서 신원을 특정하는 방법, 혈액형과 성격의 상관관계, 서점에서 벌어지는 좀도둑질을 막기 위한 하이테크 방지책, 그리고 올림픽 결과 예측과 현대인들의 다이어트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거기다 소설 집필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물론, 환경오염, 기술을 악용하는 지능 범죄의 출현, 저출산 문제 등 현대사회가 직면한 크고 작은 과학적 이슈와 관심사들을 위트 있게 다루고 있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어려운 과학적 지식이라던가 전문 분야를 다루고 있는 게 아니라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글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 소설 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과학의 진보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담겨 있어 그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놓치지 말고 만나봐야 할 책이기도 하다.

 

특히나 동료 문인들 사이에서 이과 출신 작가로서 느끼는 이질감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그는 문과 업계에 들어온 후에야 세상에서 과학기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통감했다고 한다. 무관심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무지하다고 해도 될 정도라고 말이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과학기술과 제조 현장에 관해 디테일하게 썼다가 편집자에게 독자들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듣기도 하고, 추리소설 문학상 심사를 하던 중 소설에 등장하는 수긍할 수 없는 트릭에 대해 다른 심사위원들은 과학적인 모순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닫기도 한다. 이과와 문과 사이에 존재하는 두꺼운 벽, 그리고 우연히 그걸 넘어온 작가, 그래서 그는 변 너머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자신의 의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소설만 읽어서는 알 수 없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색다른 단면을 엿보고 싶다면, 이 특별한 에세이를 꼭 만나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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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사랑학 수업 - 사랑의 시작과 끝에서 불안한 당신에게
마리 루티 지음, 권상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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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남자들은 그라인더로 커피콩을 가는 것보다 더 빨리 여러분의 자존감을 분쇄해버릴 수 있습니다. 이런 남자들은 관계의 모든 위기가 여러분의 결함 때문에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문제의 원인이 아니었음을 깨닫기 시작할 무렵이면 여러분의 자존감은 이미 엉망이 돼버려서 관계를 끝낼 때는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쁜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를 신기 전에 왕자님의 무도회 너머를 볼 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p.108

 

하버드대학교에서 3년간 진행되며 폭발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던 사랑에 대한 12개의 강의를 담고 있는 책으로, 국내에는 2012년에 출간되었었고 이번에 새로운 옷을 입고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저자인 마리 루티 교수는 브라운대학교, 파리7대학교, 하버드대학교를 거치며 문학,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을 전방위로 섭렵해 여성, 젠더, 섹슈얼리티를 연구하며 사랑과 성역할에 대해 학생들에게 강의해왔다.

 

많은 연애지침서에서 남녀가 크게 다를 뿐만 아니라 연애에서 성공하려면 남자의 심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저자는 시작부터 선언한다. 남자의 심리란 없으며, 남자를 유혹하는 불변의 테크닉이란 없다고 말이다. 수많은 연애지침서를 사서 읽어 보았지만, 실제 연애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남녀가 서로 다른 별에 산다는 말이 지긋지긋하다면, 연애라는 게임에 지쳐 있다면, 그럴싸한 기교만 알려주는 연애 지침에 작별을 고하는 이 강의가 굉장히 도움이 될 것 같다.

 

 

실패는 사랑의 반대가 아닙니다. 동전의 이면일 뿐이죠. 동전을 던질 때 우리는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더 끔찍한 건 누군가 뒷면만 있는 가짜 동전을 무더기로 시장에 풀어놨다는 사실이죠. 이런 동전을 만나면 우리의 승률은 제로입니다. 언제나 동전의 뒷면만 나올 테니까요. 그것이 가짜 동전인지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더 성공적인 사랑도 있고 덜 성공적인 사랑도 있지만 인생을 진정으로 바꾸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결코 가짜일 수 없습니다.    p.230~231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사랑과 연애에 대한 온갖 통념들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애는 줄다리기와 같아서 '밀당'을 잘해야 한다는 말에 대해 저자는 말한다. 줄다리기는 자신의 개성을 억누르는 행위이므로, 경계를 풀지 않고서는 사랑에 빠질수 없다고. 남녀 행동의 열쇠는 진화생물학에 있다며, 남녀가 다르게 태어났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남녀에 대해 닳고닳은 구식 통념을 과학적인 사실로 둔갑시킨 거라며 인간의 사랑은 동물의 교미와 다르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화성 남자-금성 여자’ 모델로 대표되는, 사랑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해석에 반기를 드는 것이 대단히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또 첫눈에 반한 사랑은 믿을 수 없다는 말에, 누군가에게 즉시 끌린다는 것은 관계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정확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노력할수록 관계를 더 오래 지속할 수 있다는 말에 대해서는 애써 관계를 유지하며 사랑을 죽이느니 사랑을 잃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친절하고 사려 깊지만, 냉철할 정도로 분명하게 사랑에 대한 진실을 보여주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연애를 잘하는 이들에게는 특별한 스킬이 있는 것 같고, 숱한 사례를 관통하는 공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연애의 공식 따위는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여유를 가지고 사랑하며, 밀당 게임 따위는 집어치우고 모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며, 상처 받을 수도 있지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이다. 연애가 잘못되는 건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용기 내어 다가가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자신의 약점을 두려워 말라. 나를 원하지 않는 상대를 쫓아다니지 마라. 완벽한 상대는 그만 찾아라. 지나간 잘못을 일일이 후회하지 마라. 등등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랑을 잘해내기 위한 조언'들은 당신을 사랑 앞에서 과감하고, 용감하고, 대담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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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
이충걸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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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이란 부사는 쓰지 마. 인간은 되풀이할 수밖에 없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은 참아줘.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게 인간이야. 너무 많은 약속도 하지 마. 그럼 서로 외로워져. 지킬 수가 없거든. 내 것이란 말은 곧 내 것이 아니게 된다는 뜻이고. 사람들이 "더 나쁠 수도 있었어"라고 말하면 지금 상황이 아주 안 좋다는 얘기야. "다치지 않을 거야"라고 하면 다친다는 거고.    p.58~59

 

내가 그의 글을 처음 만났던 것은 아주 오래 전, <페이퍼>라는 잡지를 통해서였다. 나는 그의 글에 매혹되어 매달 <페이퍼>라는 잡지를 사서 읽기 시작했고, 그가 글을 기고했던 <보그> 등의 패션 잡지들을 스크랩했고, 그가 초대 편집장을 맡게 된 <GQ KOREA>까지 챙겨 보았다. 하지만 그 잡지는 하필 남성 잡지였고, 그는 기자가 아니라 편집장이라서 머리글 외에 다른 기사들까지 직접 쓰지는 않았다. 그래서 초반에 몇 권 챙겨보다가 결국 남성 잡지까지 사서 보는 건 무리다 싶어서 포기하고 말았었는데.. 그게 벌써 18년 전이라니.. 새삼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이 책은 그가 <GQ KOREA> 편집장으로 있던 18년 동안 한 달에 한 번 써온 에디터스 레터스를 모아 엮은 산문집이다. 내가 아직 읽지 못한 그의 글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모아서 책으로 만나게 되다니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는 느낌이다. 사실 잡지를 보면서 서두에 실리는 편집장의 머릿글을 유심히 읽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은 특별하다. 그는 데이터스 레터를 두세 번 읽어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백만 번 들었다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윌리엄 포크너 식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두세 번 읽어도 어렵다면 네 번 읽어. 한국말을 삼십 년을 했는데 그게 어렵다고? 구두를 삼십 년 닦아봐. 나중에는 부위 별로 맛도 구별할 수 있을걸?" 사실 그렇다. 그의 글은 가끔은 암호처럼 난해하게 느껴지고, 한없이 솔직해서 당황스럽게 만들고, 그러다 어느 순간 날카로운 통찰력에 감탄하고, 현란한 수사법에 매혹 당하게 만들어 설레 이게 한다. 그는 '사용 가능한 최대치의 단어들을 끌어내어 언어로 존재하는 대부분의 감정을' 글로 쓰는 사람이니 말이다.

 

 

문장은 마침표에 의해 의미가 달라진다. 느낌표는 움직임의 동기를 표현한다. 단어가 의미를 잃으면 말의 힘이 사라지지만, 단어에 뜻이 더해지면 의미가 강화된다. 의미가 늘어나면 쓰임도 늘어날 것이다. 언어를 사랑하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로맨스 중 하나이다. 한 사람이 지금 속한 세상에서 모든 뉘앙스를 배우는 사랑인 동시에 넓은 범위의 비상이랄까.    p.263

 

아주 오래 전에 출간되었던 인터뷰 모음집 <해를 등지고 놀다> 부터 지금은 절판된 소설집 <완전히 불완전한>, 에세이 <어느 날 '엄마'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슬픔의 냄새> 등을 모두 읽었고, 소장하고 있으니 나는 그의 글을 아주 오랫동안 지켜봐 온 독자이다. 그나마 최신작이 2008년에 출간되었던 쇼핑에 관한 에세이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이고, 개정판으로 출간된 다시 엄마에 관한 에세이 <엄마는 어쩌면 그렇게>가 2013년이었으니.. 이번에 나온 신간은 정말 정말 오랜만에 출간된 그의 책이다. 그것도 무려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서 살아남은 글이니, 그 시간과 밀도란 대단할 수밖에 없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오래 전에 쓰여진 글도 여전히 감각적이고, 세련되고, 동시대적으로 읽힌다는 사실이다.

 

평생 '독특하다'와 '어려 보인다'라는 두 마디만 듣고 살았던 남자, 잡지의 서두를 장식하는 에디터스 레터를 쓰며 '예민한 지각과 세밀한 묘사의 문학적 글쓰기보다 일본 단가처럼 축약된 글을 쓰고 싶었다'고 말하는 남자, 가끔은 자의식 과잉에 마마보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세상 만사 달변한 철학자 같기도 한 남자. 그의 글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만나게 된다면, 조금 낯설게도, 어렵게도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글을 쓴다.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고, 그 누구도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감성과 문장, 그리고 호기심으로 장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글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패션, 건축, 문학, 사회, 미술, 음악, 사람 등 전 방위적인 부분을 예민하고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어 더 흥미롭다. '일곱 방향에서 빛을 뿜는 문장, 두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미궁의 낱말, 단어마다 매달린 보이지 않는 각주, 결코 쉽게 읽히지 않고, 머릿속을 빽빽하게 만들어 주는 밀도 높은 문장들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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