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
이충걸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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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이란 부사는 쓰지 마. 인간은 되풀이할 수밖에 없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은 참아줘.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게 인간이야. 너무 많은 약속도 하지 마. 그럼 서로 외로워져. 지킬 수가 없거든. 내 것이란 말은 곧 내 것이 아니게 된다는 뜻이고. 사람들이 "더 나쁠 수도 있었어"라고 말하면 지금 상황이 아주 안 좋다는 얘기야. "다치지 않을 거야"라고 하면 다친다는 거고.    p.58~59

 

내가 그의 글을 처음 만났던 것은 아주 오래 전, <페이퍼>라는 잡지를 통해서였다. 나는 그의 글에 매혹되어 매달 <페이퍼>라는 잡지를 사서 읽기 시작했고, 그가 글을 기고했던 <보그> 등의 패션 잡지들을 스크랩했고, 그가 초대 편집장을 맡게 된 <GQ KOREA>까지 챙겨 보았다. 하지만 그 잡지는 하필 남성 잡지였고, 그는 기자가 아니라 편집장이라서 머리글 외에 다른 기사들까지 직접 쓰지는 않았다. 그래서 초반에 몇 권 챙겨보다가 결국 남성 잡지까지 사서 보는 건 무리다 싶어서 포기하고 말았었는데.. 그게 벌써 18년 전이라니.. 새삼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이 책은 그가 <GQ KOREA> 편집장으로 있던 18년 동안 한 달에 한 번 써온 에디터스 레터스를 모아 엮은 산문집이다. 내가 아직 읽지 못한 그의 글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모아서 책으로 만나게 되다니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는 느낌이다. 사실 잡지를 보면서 서두에 실리는 편집장의 머릿글을 유심히 읽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은 특별하다. 그는 데이터스 레터를 두세 번 읽어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백만 번 들었다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윌리엄 포크너 식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두세 번 읽어도 어렵다면 네 번 읽어. 한국말을 삼십 년을 했는데 그게 어렵다고? 구두를 삼십 년 닦아봐. 나중에는 부위 별로 맛도 구별할 수 있을걸?" 사실 그렇다. 그의 글은 가끔은 암호처럼 난해하게 느껴지고, 한없이 솔직해서 당황스럽게 만들고, 그러다 어느 순간 날카로운 통찰력에 감탄하고, 현란한 수사법에 매혹 당하게 만들어 설레 이게 한다. 그는 '사용 가능한 최대치의 단어들을 끌어내어 언어로 존재하는 대부분의 감정을' 글로 쓰는 사람이니 말이다.

 

 

문장은 마침표에 의해 의미가 달라진다. 느낌표는 움직임의 동기를 표현한다. 단어가 의미를 잃으면 말의 힘이 사라지지만, 단어에 뜻이 더해지면 의미가 강화된다. 의미가 늘어나면 쓰임도 늘어날 것이다. 언어를 사랑하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로맨스 중 하나이다. 한 사람이 지금 속한 세상에서 모든 뉘앙스를 배우는 사랑인 동시에 넓은 범위의 비상이랄까.    p.263

 

아주 오래 전에 출간되었던 인터뷰 모음집 <해를 등지고 놀다> 부터 지금은 절판된 소설집 <완전히 불완전한>, 에세이 <어느 날 '엄마'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슬픔의 냄새> 등을 모두 읽었고, 소장하고 있으니 나는 그의 글을 아주 오랫동안 지켜봐 온 독자이다. 그나마 최신작이 2008년에 출간되었던 쇼핑에 관한 에세이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이고, 개정판으로 출간된 다시 엄마에 관한 에세이 <엄마는 어쩌면 그렇게>가 2013년이었으니.. 이번에 나온 신간은 정말 정말 오랜만에 출간된 그의 책이다. 그것도 무려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서 살아남은 글이니, 그 시간과 밀도란 대단할 수밖에 없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오래 전에 쓰여진 글도 여전히 감각적이고, 세련되고, 동시대적으로 읽힌다는 사실이다.

 

평생 '독특하다'와 '어려 보인다'라는 두 마디만 듣고 살았던 남자, 잡지의 서두를 장식하는 에디터스 레터를 쓰며 '예민한 지각과 세밀한 묘사의 문학적 글쓰기보다 일본 단가처럼 축약된 글을 쓰고 싶었다'고 말하는 남자, 가끔은 자의식 과잉에 마마보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세상 만사 달변한 철학자 같기도 한 남자. 그의 글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만나게 된다면, 조금 낯설게도, 어렵게도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글을 쓴다.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고, 그 누구도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감성과 문장, 그리고 호기심으로 장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글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패션, 건축, 문학, 사회, 미술, 음악, 사람 등 전 방위적인 부분을 예민하고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어 더 흥미롭다. '일곱 방향에서 빛을 뿜는 문장, 두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미궁의 낱말, 단어마다 매달린 보이지 않는 각주, 결코 쉽게 읽히지 않고, 머릿속을 빽빽하게 만들어 주는 밀도 높은 문장들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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