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 히가시노 게이고 에세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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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전기 하면 전기회로나 옴의 법칙을 연상하는 게 보통이지만, 배우는 내용은 대부분 수학 관련이다. 특히 1학년과 2학년 때는 수학이라는 이름이 붙는 강의만 해도 열 개가 넘는다. 더군다나 죄다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수학과는 비교도 안 되게 난해하고, '공식을 외우면 어떻게든 풀리는' 문제는 당연히 시험에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강의를 들으며 나는 늘 궁금했다. 이 사람들, 즉 수학 연구자는 어떤 세계관과 꿈을 가지고 살고 있는 걸까. 아니, 애당초 왜 수학자가 되려 한 걸까.    p.45~46

 

다들 알다시피 히가시노 게이고는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전업 작가가 되었다. 그래서 이과적 지식을 바탕으로 기발한 트릭과 반전이 빛나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왔고, 그의 작품 하면 현대과학과 첨단의학을 소재로 한 것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복제 인간, 도플 갱어 등 최첨단 과학과 의학을 다루었던 <분신>, 뇌 이식 이후 인격의 변이를 겪게 되는 인물이 등장했던 <사소한 변화>, 인공지능 로봇의 개발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었던 <브루투스의 심장>, 전 국민의 DNA 정보를 채집해 데이터베이스를 수집해 관리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수사를 진행했던 <미등록자>, 리만 가설, 뇌 과학, 서번트 증후군을 소재로 뇌의학과 수학계의 난제라는 미스터리를 풀어냈던 <위험한 비너스> 등등.. 많은 작품들이 그러했다.

 

그래서 추리 작가이자 이공계 출신 전직 엔지니어로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들려주는 생활 밀착형 과학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에세이라고 해서 개인적으로 굉장히 기대를 했다. 물론 표지에서부터 '과학책이 아닙니다. 그냥 재미로 읽어주세요'라는 경고 문구가 쓰여 있지만 말이다. 이 책은 2003년부터 2005년까지 2년 반 동안 잡지 「다이아몬드 LOOP」와 「책의 여행자」에 연재했던 짧은 글들을 한 권으로 엮은 에세이집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스스로도 연재의 마지막 회에 '원래는 과학을 소재로 이 코너를 꾸려나갈 생각이었지만, 되돌아보니 목표로 했던 글은 별로 못 쓴 거 같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로, 과학 에세이라기 보다는 소소한 일상 에세이에 가까운 글이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유쾌하고, 재미있는 책이었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과 사람은 한 가지 일을 깊이 탐구하는 데는 능해도 발상의 폭을 넓히는 데는 서투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기술자가 들러붙어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가 전혀 문외한이었던 문과 사람의 한마디로 해결됐다는 이야기를 흔히 듣는다. 기술과는 무관한 여고생이 휴대전화를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사용해 개발자를 놀라게 하는 경우도 일상다반사다. 발상이 빈곤하다고 여겨질 것 같으니 앞으로 이과 작가라는 간판은 내걸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빈곤한 건 너뿐이고, 그래서 이과에서 못 버티고 떨어져 나온 거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p.121

 

이 책은 낯선 여자가 옆에 있을 때 남자들이 착각에 빠지는 이유라는 심리학적인 내용으로 시작해, 과학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추리소설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과학수사에서 신원을 특정하는 방법, 혈액형과 성격의 상관관계, 서점에서 벌어지는 좀도둑질을 막기 위한 하이테크 방지책, 그리고 올림픽 결과 예측과 현대인들의 다이어트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거기다 소설 집필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물론, 환경오염, 기술을 악용하는 지능 범죄의 출현, 저출산 문제 등 현대사회가 직면한 크고 작은 과학적 이슈와 관심사들을 위트 있게 다루고 있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어려운 과학적 지식이라던가 전문 분야를 다루고 있는 게 아니라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글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 소설 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과학의 진보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담겨 있어 그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놓치지 말고 만나봐야 할 책이기도 하다.

 

특히나 동료 문인들 사이에서 이과 출신 작가로서 느끼는 이질감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그는 문과 업계에 들어온 후에야 세상에서 과학기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통감했다고 한다. 무관심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무지하다고 해도 될 정도라고 말이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과학기술과 제조 현장에 관해 디테일하게 썼다가 편집자에게 독자들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듣기도 하고, 추리소설 문학상 심사를 하던 중 소설에 등장하는 수긍할 수 없는 트릭에 대해 다른 심사위원들은 과학적인 모순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닫기도 한다. 이과와 문과 사이에 존재하는 두꺼운 벽, 그리고 우연히 그걸 넘어온 작가, 그래서 그는 변 너머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자신의 의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소설만 읽어서는 알 수 없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색다른 단면을 엿보고 싶다면, 이 특별한 에세이를 꼭 만나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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