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회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6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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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면 배신당하지. 대신 기대하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일도 없어. 나는 그걸 깨달은 거야. 그랬더니 희한한 일이 일어나더군. 그때까지는 그저 힘들고 괴롭기만 했던 회사가 아주 편안한 곳으로 보이더라고. 출세하려 하고 회사나 상사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하니까 괴로운 거지. 월급쟁이의 삶은 한 가지가 아니야. 여러 가지 삶의 방식이 있는 게 좋지. 나는 만년 계장에 출셋길이 막힌 월급쟁이야. 하지만 나는 자유롭게 살아왔어. 출세라는 인센티브를 외면해버리면 이렇게 편안한 장사도 없지."    p.47

 

영업2과의 과장을 맡고 있는 하라시마에게 매주 목요일 오후에 진행되는 정례회의는 스트레스였다. 그날도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탓에 영업부장인 기타가와로부터 질책과 추궁을 당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에 비해 영업 1과의 과장 사카도 노부히코는 하라시마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영업부 에이스로, 최연소 과장으로 승진해 화려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인물이었다. 만년 실적 부진인 2과와 비교돼 사내에서는 '꽃 같은 1과, 지옥 같은 2과'라고 불릴 정도였고, 유명 대기업을 고객사로 거느리고 있는 도쿄겐덴의 매출을 견인하는 최고의 수입원이기도 했다. 영업 1과에는 회의만 열렸다 하면 좋다고 꾸벅대는 만년 계장 야스미가 있었는데, 어디서든 무서울 게 없다는 듯 당당하게 졸아서 잠귀신 핫카쿠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날 회의가 끝난 후 사람 좋기로 소문난 사카도가 전부터 쌓아온 분노가 폭발하기라도 한듯 야스미에게 무시무시한 얼굴로 화를 낸다. 그날 이후로 사카도는 야스미에게 노골적으로 폭언과 질책을 퍼붓기 시작하고, 야스미는 기다렸다는 듯 사카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발해버린다. 하지만 실적이 뛰어나고 성실한 에이스와 무능력한 구제불능이라는 구도에서 벌어지는 직장 내 괴롭힘이라니, 결과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뻔히 보였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직장내 괴롭힘이 인정이 되어, 사카도의 인사부 대기 발령이 결정되고 만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인사의 배경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그렇게 추악한 사건을 은폐하려는 자들과 진실을 드러내 고발하려는 자들의 치열한 싸움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고발해봤자 얻을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라, 이 말씀이십니까?" 사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야. 이 일을 은폐하는 일을 하고 있어. 이 회사를 지키고 우리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 너, 그 나이에 구직 활동을 하고 싶어? 여기보다 더 조건 좋은 직장이 있을 것 같아? 세상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도 남잖아."   p.340

 

일본 TV드라마 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를 쓴 이케이도 준의 신작이다. 중견기업 도쿄겐덴에서 발생한 미스터리한 사건을 중심으로, 은폐와 폭로의 기로에 선 직원들의 갈등을 그린 옴니버스 군상극이다. 현지에서는 출간 반년 만에 NHK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며,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 출연진이 대거 출격한 영화 <일곱 개의 회의>(국내 개봉명:내부고발자들━월급쟁이의 전쟁)도 화제를 모았다. 소설도 120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단 한 권으로 이케이도 준의 매력을 담고 있는 대표작이기도 하다.

 

한 중견기업에서 벌어진 추악한 사건을 전체 이야기를 관통하는 중심 플롯으로 세워두고, 각 장마다 중심 인물을 다르게 해서 영업1부, 영업2부, 경리부, 총무부, 거래 업체 등의 풍경을 각각의 시선으로 살펴볼 수 있는 구성이 무엇보다 흥미진진하다. 인물과 시점을 바꿔가면서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그 속에서 독립된 스토리처럼 진행되지만, 차곡차곡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교집합이 생기고, 또 하나의 사건을 여러 방향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더욱 긴장감 넘치게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실제로 어느 회사에나 존재할 것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등장 인물들이 생생한 리얼리티를 부여해 누구라도 공감하면서 보도록 만들어 주는 작품이었다.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가장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엔터테인먼트 문학’을 선도하는 작가라는 평가답게 최고의 '읽는 재미'를 안겨주는 작품이었다. 지루한 소설은 딱 질색이라면,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숨에 읽게 되는 소설을 읽고 싶다면, 이케이도 준의 작품을 만나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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