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과 설산


'옥과미술관-고인돌바위-세갈래소나무-쉼터-설산정상-금샘-괘일산입구-수도암'


우중산행, 길을 들어서자 멈췄던 비가 다시 시작한다. 많은 비도 아니고 먼 길도 아니라서 그냥 걷는다. 이곳에 터를 잡고 난 후 두번째 설산 산행이다.


설산은 전남 곡성군의 서북쪽 옥과면 설옥리와 전북 순창군 풍산면의 경계에 있는 고도 553m의 산으로 멀리서 보면 눈이 쌓인 것처럼 정상부 바위 벼랑이 하얗게 빛나 설산이라 부른다. 도림사를 품고 있는 동악산은 일출이, 수도암의 설산은 낙조가 장관이다.


비 내리는 안개 속 숲은 상쾌함이 가득하다. 미처 옷을 적시지도 못할만큼 내리는 오늘 비는 산행의 운치를 더해줄뿐 방해꾼은 못된다. 능선으로 올른 후 정상을 향한 길은 오솔길이다. 시야를 가로막는 안개로 먼 곳 보다는 발 밑 친구들에게 주목할 수 있어 다행이다.


며느리밥풀이 지천으로 하얀 속내를 드러내고, 비로 인해 습기가 많아지자 제철 각종 버섯들이 우산을 펼쳐들었다. 하얀 참취꽃에 노란 사데풀, 삽주, 나도송이풀, 산박하, 닭의장풀, 무릇, 광릉갈퀴, 벌개미취, 쑥부쟁이가 눈맞춤한다. 구절초는 이제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숨겨두고 가끔 걷고 싶은 길이 끝나는 곳에 설산의 자랑 낙조가 장관이 그곳이 있다. 문득 그리운 이가 가슴에 담기는 날 그곳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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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취하다'
묵취향서墨醉香序
-이옥(李鈺)

나는 책을 좋아하고 또 술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거처하는 지역이 외지고 이 해는 흉년이기도 하므로, 돈을 꾸어다 술을 사올 길이 없다. 바야흐로 따듯한 봄기운이 사람을 취하게 만들므로 그저 아무도 없고 어떤 집기도 없는 방안에서 술도 없이 혼자 취할 따름이다. 

어떤 사람이 내게 술단지에다 '시여취詩餘醉' 한 질을 넣어 선사하였다. 그 내용은 곧 '화간집花間集'과 '초당시여草堂詩餘'였고, 편집한 사람은 명나라 인장鱗長 반수潘叟(潘游龍)였다. 

기이 하여라! 먹은 누룩으로 빚은 술이 결코 아니고, 서책은 술통과 단지가 결코 아니거늘, 이 책이 어찌 나를 취하게 할 수 있으랴? 그 종이로 장독이나 덮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읽기를 사흘이나 오래 하였더니, 눈에서 꽃이 피어나고 입에서 향기가 머금어 나왔다. 위장 안의 비린 피를 깨끗이 쓸어버리고 마음에 쌓인 먼지를 씻어주어, 정신을 기쁘게 하고 온 몸을 안온하게 하여 주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하유의 곳으로 빠져들었다. 아아! 이것이 술지게미 언덕 위에 노니는 줄거움이니 제구虀臼에 깃들어 살아감이 마땅하도다. 

무릇 사람의 취함이란 것은 어떻게 취하느냐에 달려 있지, 꼭 술을 마신 뒤에야 취할 필요가 없다. 붉은 색과 초록빛이 현란하고 아롱져 있다면, 사람의 눈은 그 꽃이나 버드나무에 취하게 된다. 연지분과 눈썹먹으로 그린 눈썹이 화창하다면, 사람의 마음은 혹 그 아리따운 여인에게 취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책이 거나하게 취기가 돌게하여 사람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이, 어찌 한 섬 술이나 다섯 말의 봉급만 못하겠는가? 

시여의 장조長調와 단결短闋은, 즉 달 아래서 석 잔 술로 축수祝壽하는 것과 같다. 시여에 있는 자가 구양수歐陽脩, 안수晏殊, 신기질辛棄疾, 유영柳永은 바로 꽃나무 사이에 함께 노니는 여덟 신선의 벗이다. 이 책을 읽어서 묘처를 터득하는 것은, 그 짙은 맛을 사랑하는 것이다. 읆조리고 낭송하면서 감탄하여 마지 못하는 것은, 취하여 머리까지 적시는 것이다. 때때로 운자韻字를 밟아서 곡조에 맞추어 지어보는 것은, 극도로 취하여 토해내는 것이다. 이 책을 베껴서 책상자 속에 보관하는 것은, 장차 이것을 도연명陶淵明의 차조 밭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나는 모르겠다. 이것이 책인지 아니면 이것이 술인지? 오늘 날에 또한 누가 능히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옥(李鈺, 1773~1820), '묵취향서(墨醉香序)라는 글이다. 이 글은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이옥 저/심경호 역/태학사2013 초판 4쇄)에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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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백아산'


백아산 눈썰매장-구름다리-약수터-백아산 정상-약수터-삼거리-백아산 눈썰매장


밤부터 내린 비가 멈추지 않는다. 바라보이는 먼 산에 구름이 가득하다. 더 많은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아 길을 나선다. 잔설이 남아 있고 높은 곳에 아직 얼음이 있던 이른 봄에 올랐던 곳을 이슬비 내리는 날 다시 찾는다.


아직 안개로 쌓인 숲은 더디 깨어나는 중이다. 물기 가득 담은 바람에 제법 찬기운이 엄습하지만 긴팔 옷을 입었기에 움츠려들지는 않는다. 능선을 올라서 바람을 맞서지만 여전히 안개는 길을 내어줄 마음이 없나 보다. 천길 낭떨어지 사이에 놓은 구름다리는 그야말로 구름을 뚫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백아산 정상(해발 810m)을 올라 돌아서는 동안에도 안개는 여전하다.


여름꽃이 지고 아직 가을 꽃이 피기 전, 꽃 보기가 쉽지 않다. 며느리밥풀꽃, 등골나물, 수까치깨, 참취, 원추리, 닭의장풀, 산비장이, 좀고추나물, 마타리 정도가 전부다. 이런 아쉬움을 안다는 듯 산행을 마무리할 즈음에 뻐꾹나리가 달래준다. 뒷산 뻐꾹나리 상태가 부실해 아쉬움이 컷는데 백아산 뻐꾹나리는 상태도 양호하게 온전한 모습으로 제법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이슬비와 함께한 가을 맞이 산행은 안개 속에서 행복한 시간이다. 온전히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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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 내 사랑

-안도현

인간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에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 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을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개를 치고가는 불명산 능선 한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엇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안도현 시인의 화암사 사랑이 가득담긴 시다. 불명산 깊은 계곡 중턱에 자리잡아 세간의 주목을 덜 받고 있을때 안도현 시인의 이 시가 화암사와 세상 사이 다리를 놓은 셈이다.


화암사는 내게 이른 봄에 피는 얼레지다. 극락전(국보 316호), 우화루(보물 662호) 보다 꽃이 귀한 이른봄 얼레지로 먼저 알게된 절이다. 정작 얼레지 피는 봄에도 가보지 못했는데 여름 끝자락에 그 화암사를 찾아간다.


숲길이 좋다. 사람의 손때를 덜탄듯 다소 거친 돌길이 절다운 절에 드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무엇이든 다 품어줄듯 하면서도 오로지 자신만을 의지해야 하는 구도자의 삶처럼 녹녹치 않은 길이어서 더 좋다. 돌 몇개만 고르면 좋은 길에 쇠와 방부목으로 나무길을 내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우화루(雨花樓), 보물 662호로 경사면에 석축을 쌓고 기둥을 세운 다음 그 위에 마루를 내어 안마당을 더 넓게 보이도록 하고 대중이 모일 강당을 만들었다. '꽃비 내리는 누각'이라는 이름도 건축만큼 아름답다.


극락전(極樂殿), 국보 316호로 정면 3칸, 측면 3칸인 극락전은 다포양식의 맞배집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국 목조건축의 전형인 하앙식(下昻式) 구조를 갖고 있다.

이 두 건축물 보다 속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좁은 터에 건물들이 어께를 걸고 있지만 욕심 부리지 않아 보이는 모습이다. 거의 모든 절이 자본의 위력을 과시하느라 혈안이된 듯 보이는 이 시대에 그것과는 비켜선듯 참으로 단아한 절 맛을 지녔다.


안도현 시인이 "절을 두고 잘 늙었다고 함부로 입을 놀려도 혼나지 않을지 모르겠다"고 말한 이유를 짐작하는 사이 얼굴에 미소가 절로 난다.


건물과 산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하늘공간이 좋아 오랫동안 처마끝에 시선이 머문다. 낙엽지는 때를 골라 다시 찾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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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랑 2016-08-24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진 님 올려주신 글 덕에 시인의 글을 찾아보고, 잘~ 늙은 산사를 눈에 새기고 갑니다.

낡음을 고스란히 내보여서 오히려 좋네요.
단청으로 어색한 꽃단장을 해놓고 홀로 화려하게 버티고 있는 산사는 거부감이 생기는데, 불명산 화암사 그 정겨움을 찾아 꼭 가봐야겠어요.

오늘도 좋은 시간되세요 ^^

무진無盡 2016-08-24 12:11   좋아요 1 | URL
좋은 만남 되시길 바랍니다 ~^^
 

'입추立秋에 노고단에 오르다'
새벽 길을 나섰다.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잠 덜깬 딸을 앞세워 나선 길이다. 이른 시간이지만 사람들 발길은 분주하다.


여름꽃이 만발한 길을 더딘 발걸음에 새벽 안개가 몸을 감싼다. 다람쥐를 앞세워 잔대, 모시대, 층층잔대, 병조희풀, 이질풀, 동자꽃, 원추리, 짚신나물, 파리풀, 노루오줌, 오이풀, 여뀌, 여로, 푸른여로, 술패랭이, 큰까치수염, 참취, 곰취ᆢ하나하나 눈맞춤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늘 아래 첫동네 심원마을엔 예전 달맞이꽃이 그대로다. 이미 계곡엔 사람들로 넘치지만 여름의 끝자락 입추立秋의 시원함은 여름의 끝인지 가을인지 시작인지 모호하다.


딸아이는 투덜대면서도 제법 잘 따라 오르고 초등학생 때의 옛기억은 없다고 한다. 시원한 바람에 먼 산은 더 아득하고 발 아래 풀들은 더 향기롭다.


'입추立秋에 딸하고 노고단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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