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반양장) 반올림 1
이경혜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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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인간에게 가장 극단적인 선택은 결국 죽음밖에는 없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중학교 3학년, 친구들과 나는 저마다 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적합한 성적을 계산하느라 머리를 맞대고 깊은 묵념에 빠졌었다. 점수의 높낮이에 따라 상중하로 나누어지는 학교의 서열, 우리는 일종의 변명 아닌 반항심으로 '젠장, 우리 고등학교 가지 말까?'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1지망, 2지망으로 가고 싶은 고등학교가 아닌 갈 수 있는 고등학교를 선택해야만 했던 나의 학창시절. 중학교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정녕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이었나에 대한 허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거둔 성적으로 갈 수 있는 학교에 가서 정말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하기도……

 

이름만 들어도 '아, 그 학교?'라는 시답잖은 반응을 보이는 어른들을 보면서 '내 인생이 학교 때문에 망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가 부끄럽냐, 나 자신이 부끄러우냐는 질문을 누가 한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왜요, 왜 제가 둘 중의 하나를 꼭 집어서 부끄럽다고 말해야 하나요. 라고 도리어 따졌을 것이다. 나도 한때는 청소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청소년을 먼발치에서 혹은 아주 가까이서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아이들을 볼 때면 '그래. 다 한때야. 마음껏 즐겨.'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너네 그러다가 아주 큰일 나는 수가 있어.'라고 말해주고 싶을 때도 있다. 겁 없이 무한 질주하는 십 대 청소년을 볼 때면, 나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싶기도 하다. 가끔 뉴스를 보면 안타까운 사건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헬멧도 착용하지 않고 폭주족처럼 오토바이를 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한순간에 세상을 떠나버린 아이들, 성(性)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판단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아이들, 술과 담배를 비롯한 유해물질에 중독된 아이들까지… 때로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어른들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이들은 왜, 아이들이 어쩌다가,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는 우리에게 차마 보여줄 수 없었던 아이들의 속마음을 솔직담백하게 털어놓고 있다. 책에는 유미와 재준이가 등장한다. 재혼가정이라는 배경을 등에 지고 당차게 살아가는 유미, 아빠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사는 듯한 재준이의 모습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청소년이 겪는 심리적 위축감 또는 스트레스를 보여준다. 이 책은 청소년 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학교생활, 이성 친구, 입시교육, 부모와의 갈등이라는 요소를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청소년이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어른들의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한다. 재준이는 자신이 남몰래 좋아하는 소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밤늦도록 오토바이 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공부밖에 모를 것만 같았던 재준이의 가장 큰 고민은 짝사랑하는 소희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준이는 한순간의 실수로 오토바이와 함께 하늘을 날아올라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재준이의 부모는 아들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하게 되었고, 일기장의 첫 장에는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라는 섬뜩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문구가 적혀있었다. 재준이에게 일기장을 선물했던 유미, 재준의 엄마는 유미에게 일기장을 대신 읽어주기를 부탁했고, 유미가 재준의 일기를 읽으면서 기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 책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아까 모래밭에 누운 채 사막에서 목말라 죽은 시체 흉내를 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던 탓인가. 나는 진짜 내가 죽은 시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몸을 움직여도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한번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니 덜컥 겁이 났다. 만약 내가 몸을 움직이려고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 본문 중에서

 

재준이는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그러다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아냈는데, 애석하게도 시체놀이를 하거나 죽은 사람이 되어서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기와 같은 다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화가 나고 울적해지면 으레 그러하듯이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고자 했던 것이다. 어른들은 애초에 상처가 나지 않게끔 예방하는 법은 친절하게 알려주면서도 정작 상처가 났을 시에 스스로 치유하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게다가 상처가 났을 시에 뒤따르는 크고 작은 부작용에 대해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설명하면서. 그 상처란, 어른들의 관점에서 정해놓은 것들, 즉 청소년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문제행동에 의한 신체적·정신적 상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재준이는 스스로 치유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재준이의 일기장에 적힌 글자 하나하나만이 유일한 치유제였던 것처럼… 작가는 일기장을 통해서 재준이가 겪어야만 했던, 결국은 그것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는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일기장,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밝혀질 비밀을 간직한 일기장, 재준이의 유일한 소통의 공간이 일기장이었던 것처럼… 가슴 속에 상처를 짓누르고 살아가는 청소년이 처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금 우리 청소년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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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이유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5
멕 로소프 지음, 김희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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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해체, 청소년의 일탈, 참혹한 전쟁이 낳은 비극이 모여서 이루어진 소설이 있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성장소설이라는 성격을 지닌 <내가 사는 이유>는 자신을 낳고 세상을 떠난 엄마의 빈자리를 낯선 새엄마가 차지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데이지가 등장한다. 뉴욕의 도심 한복판에서 자라온 소녀는 영국의 시골 마을에 위치한 이모 집으로 가게 된다. 악마처럼 느껴지는 새엄마와 더는 같이 살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인위적이지 않았음에도 낯설은 시골 이모 집에는 4명의 사촌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드먼드, 파이퍼, 아이작, 오스버트 그리고 고양이들, 흑백 얼룩을 가진 개 진과 제트까지…

 

소녀는 제각기 개성이 강한 사촌들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이 해야만 하는 적응법, 즉 생존방식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한다. 자신을 친언니처럼 따르는 파이퍼, 사촌지간임에도 오묘한 애정을 느끼게 되는 에드먼드, 항상 말없이 동물과 교감하는 아이작, 맏이답게 제법 위엄을 갖추려는 오스버트까지, 그러던 어느 날 이모가 급한 일이 생겨서 오슬로로 떠나게 된다. 아이들은 아동 지킴이 역할을 하던 어른이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에 내심 기쁨을 감출 수 없었고… 각자 역할분담을 하면서 제법 씩씩하고 유쾌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자 알찬 계획을 짜게 된다. 그러나 커다란 집에 아이들만 남겨졌다는 것은 장차 다가올 엄청난 비극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모가 출발한 다음 날 런던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기차역에서 폭탄이 터져서 7천 명 혹은 7만 명인지 하는 사람들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곧 전쟁의 시작이라는 것을 아이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그때 검문소에서 조우를 쳐다보고 있던 군인 한 명이 귀찮다는 듯한 동작으로 총을 빼 들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뭔가 쪼개지는 것 같은 큰 소리가 나더니 조우의 얼굴 한쪽이 폭발했다. 사방에 피가 튀고 조우는 트럭에서 길로 떨어졌다. 파이퍼는 모든 것을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보고 있었지만 나는 쇼크 때문에 구역질이 나서 얼굴을 트럭 밖으로 돌려야만 했다.」- 본문 중에서

 

이 책이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선사하는 분위기는 맑고 친숙함을 자아낸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시야에 비친 자연의 모습과 서로 의지하면서 동고동락하는 모습은 그 뒤에 이어질 참혹한 전쟁을 예상치 못하게끔 한다. 그러나 기차역에서 폭탄이 터짐과 동시에 작가는 아이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다.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전쟁은 평화로웠던 시골 마을까지 침투하여 아이들의 행복을 짓밟아버린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라는 갈림길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전쟁이 가져온 비극적 참사에 대한 쓰라림을 사춘기 소녀 데이지의 눈으로 해석한다. 또한, 사촌 동생인 파이퍼와 외딴곳에 남겨진 주인공 데이지가 나머지 사촌들을 찾아가기 위해서 보여주는 전쟁 속 기나긴 여정은 우리에게 고달픔 혹 여린 소녀의 강인한 모험정신을 숨죽이고 지켜볼 수 있는 관찰자의 역할을 제공하기도 한다. 전쟁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고립된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열다섯 살 소녀의 모습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작가가 곳곳에 지뢰를 숨겨놓은 듯, 잠시도 틈을 주지 않고 돌발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과 상황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했던 데이지, 그러나 나에게 보여준 데이지의 대범한 추진력은 여리고 상처입은 아이가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치유하는 고정된 패턴의 성장소설을 뛰어넘는 청소년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청소년을 무대의 중심에 세워놓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이러한 소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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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 사는 집 문지 푸른 문학
조명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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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이의 가족은 특별하다. 할머니의 작은 키를 쏙 빼닮은 꼬맹이 영은이는 올해 고등학교 2학년,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은 영은의 엄마, 파란 눈에 금발을 가진 이모, 바느질솜씨가 뛰어난 작은 거인 할머니까지… 이국적인 외모가 매력적인 영은이의 이모. 이모는 코끼리를 닮았다는 아빠, 할머니의 연인을 찾으러 핀란드로 향한다. 사실 할머니의 남편은 어느 날 갑자기 피부가 하얀 아기를 슬그머니 집으로 데리고 왔다. 할머니는 아기 엄마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일절 묻지 않았으나, 내심 속이 많이 상해졌을 터다. 그렇게 엄마가 다른 영은이의 엄마와 이모가 어른이 되었고, 할아버지와 아빠의 얼굴을 모르는 영은이가 한 지붕 아래에 살아간다. 이모는 할머니가 외국남자와의 짧았던 로맨스를 통해서 자신이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남자의 고향인 핀란드로 가서 직접 아빠를 찾아오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은이는 알고 있었다. 실은 할머니와 엄마가 이모에게 거짓말을 했음을… <농담이 사는 집>은 주인공 영은이의 시점에서 주변인물의 감정까지 유추하고 해석하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영은이는 작은 키가 콤플렉스였으며, 열 일곱 살이 넘도록 생리를 하지 않음에 잠을 못 이루는 사춘기 소녀다. 학교에서는 마치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되어서 생활하는 말 그대로 아웃사이더를 자처하고 있다.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기보다는 자신의 가족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에 더욱 애착을 가지는 영은이다.  

 

「인생에는 수학에서처럼 법칙도 공식도 없는 모양이었다. 분별없고 무질서한 공식과, 동의하고 싶지 않을 만큼 혼란스러운 인생의 법칙들 때문에 나는 느닷없이 아빠를 잃었다. 그리고 공식과 규칙이라곤 없는 한 지점에서 경악에 찬 엄마의 비명이 들렸고, 내가 군고구마 접시를 떨어뜨렸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어쩌고 하는 장면들만이 군데군데 잘린 채로 남아 있을 뿐.」- 본문 중에서

 

 

 

 

작가는 영은이를 고립된 사각지대 한가운데에 세워 놓았다.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은 겪을 법한 소재 속에 풍덩 빠트린 것이다. 한부모 가정에서 성장해온 영은이는 학교생활과 교우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으며, 아빠를 잃은 상실감에 자신을 미처 돌보지 못하는 엄마를 원망하는 대신에 그 현실을 몸소 인정하고자 무덤덤하게 침묵을 지키는 입장을 택했던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아빠를 찾겠노라며 외국으로 떠나는 이모를 보면서 영은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한, 학교에서 유일하게 영은이의 친구가 되어주었던 여진이는 남부러울 것 없는 부모의 재력으로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다. 그러나 여진이는 대학교 진학문제로 자신을 억압하는 부모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농담이 사는 집>은 주인공 영은이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상 속 사람들의 이야기, 그 중에서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으나,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청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삶의 무게감이 애잔하게 펼쳐지고 있다. 작가는 이 책의 무게중심을 '코끼리'에 맡겨두었다.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이모와 영은이에게 '코끼리'라는 존재를 제각기 그들의 소망을 심어서 간직하게끔 만들어준 것이다. 독자로 하여금 영은이의 꿈속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코끼리가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하여 추측하게끔 유도하면서 이 책이 지닌 함축된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뜨자 제일 먼저 코끼리 생각이 났다. 잠옷을 입은 채로 나는 콩콩 소리를 내며 손님방으로 달려갔다. 방문을 열면서 나는 또 꿈일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p.128) 우람한 덩치의 코끼리가 가족을 지켜주는 수호천사라도 된 것 마냥, 영은이의 가족은 코끼리라는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다. 작가는 그들에게 듬직한 수호천사를 선물한 것이다. 사춘기 소녀 영은이의 가슴 속에 사는 코끼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농담과 진담이 한데 어우러진 가족의 이야기가 기나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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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사랑 이야기
마르탱 파주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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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질.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얼굴없는 그녀의 행방을 다시 떠올리기 시작했다. 건조하게 갈라진 자신의 감정을 한순간에 바꾸어놓은 그녀가 갑자기 이별을 고한 것이다. 내가 그녀와 정녕 연애를 했었단 말인가. 그동안 만나 온 여자는 많았으나, 만나고 있었던 여자는 없었노라고 중얼거린다. <아마도 사랑이야기>는 난데없이 이별통보를 하는 정체불명의 여자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이 책은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주인공 비르질의 내면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가차 없이 드러내고 있다. 얼핏 보아 독신주의를 지향하는 듯하나, 알고 보면 애정에 목마른 순수한 청년의 일탈을 보여주는 면도 적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누구와 사랑을 나누었는지에 대한 기억을 몽땅 잃어버린다면 아마 비르질처럼 행동하지는 않을까.

 

「주문한 차가 미지근해졌다. 클라라가 그리웠다. 기억도 할 수 없는 그녀, 하지만 비르질은 클라라가 그리웠다. 24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그는 클라라와 사귀었다고 믿었다. 진정한 사랑 이야기라 믿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클라라와 헤어졌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녀를 향해 조금씩 솟아나는 그의 마음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마치 상처받은 사람인 양 행동하는 것이 정말 그의 가슴에 상처를 낸 것 같다.」- 본문 중에서

 

 

 

 

친구들은 그에게 다그친다. 어쩌다가 헤어졌으며, 상심이 꽤 크겠노라고 말이다. 자동응답기에 남긴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이름만 알았을 뿐이다. 생김새, 사는 곳, 취미, 연락처를 비롯한 그녀에 대한 모든 것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비르질은 심각한 고민에 휩싸인다. 어쩌면 자신은 기억상실증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하여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상담을 하고 건강검진을 받아보았으나, 큰 이상은 없는 것으로 나온다. <아마도 사랑이야기>는 의문의 여인을 찾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의 건망증 혹은 꿈속의 환상체험과도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우리는 그가 그녀를 찾아낼 수 있는지에 대하여 지레짐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그의 건망증을 통해서 이 시대의 젊은이가 추구하는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기억 속에서 사라진 얇지만 순수했던 참사랑이란 무엇인지, 사랑에 목마른 청춘이 진정 소중히 다루어야 할 인간의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땐 내가 철이 없었지.'라는 말로서 어설픈 첫사랑을 깊숙한 창고에 숨겨두기엔 우리가 사랑할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오늘 사랑을 속삭이다가 등 돌리면 남이 되어버리는 우리의 짧고 강렬한 사랑이 결코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고… 비르질은 그녀를 찾기 위해서 삶의 중심이 흔들리는 위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향해 부질없는 짓이라고 손가락질할 수는 없지 않은가. 행여 그것이 어리석은 자의 사랑일지라도… 우리가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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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는 꽃이다 - 축제 엑스포 테마파크 공연의 꽃 퍼레이드 이야기
이기호 지음 / 이야기꽃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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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을 겨냥한 각양각색의 퍼레이드, 축제장을 찾으면 어김없이 우리의 오감을 떠들썩하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바로 퍼레이드다. 나는 졸업여행을 하면서 에버랜드의 퍼레이드를 직접 본 적이 있다. 내외국인이 유쾌한 모습으로 어우러져 관람객의 흥을 북돋워 주었던 그 웅장하고 화려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을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퍼레이드의 행진은 나로 하여금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게끔 유도하는 듯했다. 그리 길지 않았던 적당한 시간 속에서 많은 사람이 행복과 웃음이 함께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퍼레이드가 끝나고 찾아온 여운은 한동안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했다. 이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퍼레이드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1991년 에버랜드에 입사하여 지금까지 에버랜드 공연단 총감독을 맡고 있는 이기호 감독. 그는 1992년 에버랜드 공연단이 창단된 후 수많은 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하면서 느꼈던 퍼레이드의 매력을 <퍼레이드는 꽃이다>를 통해 말하고 있다.

 

「퍼레이드는 어린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모든 이를 만족시키고자한다. 이는 어떤 기업도 시도해보지 못하는 일이다. 남녀노소를 모두 아우르는 상품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퍼레이드가 하고 있는 것은 퍼레이드가 문화상품이기에 가능하다. 그리고 독특한 판매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퍼레이드는 독립적인 상품도 아닌 열린 공간에서만 관람할 수 있는 상품이다. 게다가 퍼레이드의 대부분은 무료관람이다.」- 본문 중에서

 

 

이 책은 퍼레이드의 역사와 유래 그리고 전반적인 기획과 제작과정을 알려줌과 동시에 그로 인해 파생되는 다양한 효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제작자와 관람자의 입장을 나누어서 퍼레이드를 어떻게 인식하고 판단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독특한 관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퍼레이드의 간판이라고 할 수 있는 디즈니랜드의 퍼레이드 사례를 보여주면서 그를 토대로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는 퍼레이드의 성격을 저자의 생각을 토대로 이야기한다. 퍼레이드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열린 세계와 같다. 제한적이지 않은 공간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다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하게끔 풍부한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불특정다수를 공략하기 위해 제작된 퍼레이드가 아닌 그저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제작되는 것이다.

 

<퍼레이드는 꽃이다>는 실제 퍼레이드 제작에 참여하는 입장에서 느낀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무엇이 필요하고 부족하며, 또 적당한지에 대한 난이도를 어렴풋이 독자에게 알려주는 셈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뒤따른다. 저자는 퍼레이드 자체가 이야기를 내포한다고 했다. 그것을 관람하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결과는 다르겠으나, 적어도 제작하는 입장에서 의도한 것은 보다 대중적 성격을 띤 이야기를 함축시키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퍼레이드는 ~라서, ~이기도 하며, ~이기 때문에'라는 설명문처럼 진행되기 때문에 그 '이야기'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집중적으로 파헤쳐보는 부분이 없어서 아쉽기도 하다. 퍼레이드에 얽힌 실제 사연과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글로서 연출했다면, 그것이 완변학 신빙성을 입증할 수는 없을지라도 퍼레이드가 무엇이냐는 것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과 감성을 자극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에 퍼레이드가 체계적으로 진행되지 못하는 점, 퍼레이드 전문가가 부족하다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퍼레이드가 일정한 시기에 체계적으로 다양한 곳에서 펼쳐진다면, 그것은 곧 퍼레이드의 경험과 인식이 풍부해지고 확장된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대중에게 퍼레이드를 이야기할 때, 보다 광범위하게 접근할 수 없음이 안타깝기도 하다. 이 책은 축제, 엑스포, 테마파크에서 볼 수 있는 퍼레이드에 대한 진솔한 경험담이 녹아있다. 퍼레이드에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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