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 쉼 없는 분주함 속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소중한 것들
수영.전성민 지음 / 루이앤휴잇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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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페이지가 한 장 넘어가는 지금에서야

우리는 늘 마음속으로 생각해왔다. 크게 달라질 것 없는 이 삶,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이놈의 처지가 그리 놀랍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억울해서 분통이 터진다고.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러나 그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업자득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우리의 선택으로 인해 시작되어 끝을 맺어간다. 어떤 이는 탁월한 선택으로 역전의 왕이 되었으며, 어떤 이는 패배자의 비애를 맛보기도 한다. 누군가 그것은 '확률'에 의한 삶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낚싯줄보다 가느다란 희망의 줄을 꽉 잡고 있는 것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진정 나를 살게 해 줄, 나를 살리는 한 줄기 빛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는 그대에게, 걸어가는 내가 말하다.

고만고만하게 사는 것이 정답이라고 했다. 헌데, 이렇게 사는 것이 쉽지는 않다. 기대를 낮추고 포용력으로 나를 인도한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라고. 문득, '나라고 이렇게 살고 싶은 줄 아는가.'라는 반박을 하기도 한다. 삶이 항상 화려하게 눈부신 것이 아님을 알기에, 잿더미를 뒤집어쓴 신데렐라가 되기도 하는 것이 삶- 종이 울리면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하는 '오직 내 삶'이기에, 미우나 고우나 끈질기게 희망을 줄을 잡고 살아간다. 이번에 읽은 이 책은 제목부터가 이미 나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어떤 목적의 달성에 있어 단축된 시간보다 소중한 것은, 뜨겁게 쏟아부은 열정이다.

신속하게 처리된 일이 때로는 우리를 유리하게 만들지만, 자칫 경솔하게 끝을 맺었다는 오점을 남기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상황에 따라 적절한 선택을 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책은 다양한 인물을 통해 '삶에 임하는 자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평범했던 삶을 아름답게 개척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마사 스튜어트, 스티브 잡스, 데일 카네기, 빌리 그에이엄 목사, 시드니 셀던, 고 이태석 신부, 카렌 암스트롱, 찰스 다윈, 조르지오 아르마니, 콘래드 힐튼, 마스다 마쓰히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이르는 다양한 인물의 사례를 소개한다. 저자는 이들의 삶에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지닌 속도력으로 삶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길다. 괜히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것이 아니다. 넘어져도 곧 일어나야 한다. 일어서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향해 다시 걸어가야 한다. 방향이 정해졌다면 시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생에 늦은 때란 없으니까."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달려왔던 것일까? 지금 이 순간, '내가 달리는 이유'에 대한 생각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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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안 된다, 자기 한정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도창스님 지음 / 북씽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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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벗어나는 것은 더이상 두렵지 않다.

삶을 거창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작은 실패에도 크게 좌절하고 쓰러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기대가 컸기에 스스로 용납할 수 없음이며, 삶에 대한 여러 갈래를 만들어놓지 않았던 실수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즐기면서도 자신의 삶은 급격하거나 잦은 변화 없이 잔잔한 호수처럼 꾸준히 진행되기를 바란다. 한편으론 이기심에서 비롯된 모습 같기도 하다. 바람직하게 살아가는 타인을 보면서도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은커녕 더욱 앞질러가기 위한 전략을 세우기에 바쁜 것이다. 모든 것이 경쟁심에서 시작된 전쟁과 같지 않은가. 하루라도 빨리 이 지독한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증, 하여 스스로를 가혹하게 채찍질하고 차분히 물 한 잔 마시는 여유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하여 사는 것일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도창스님은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부터 가상공간을 통한 법문과 자기 성찰에 대한 이야기 공간을 만들었다. 비단 불교 신자가 아닐지라도 모든 사람이 소통할 수 있는 '가상 법당'을 만든 것이다. 여기에 올라온 글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엮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은 불필요한 생각으로 힘들어하는 현대인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과거와 미래만 바라보는 미련함을 탓하는 것이다. 마음이 번잡하니 몸의 분란이 일어나는 것이며,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이 삶이 나아갈 길을 가로막는다고 말이다. 우리가 도리를 따르는 것이 곧 마음을 믿는 것이니, 마음으로 행하지 못할 일에는 애써 몸을 던지지 말아야 한다. 책은 마음을 내려놓아 부드럽게, 다소곳이, 청정하게 살 것을 당부한다.

 

"강물이 원래 조그마한 샘물에서 시작하여 끊이지 않고 흐르면 시내를 이루고 마침내는 만경창파를 이루게 되지만, 어떤 사람이 그 물줄기의 근원을 끊으면 모든 흐름이 다 쉬게 되는 것처럼 모든 아의 근본이 되는 탐욕·성냄·어리석음을 다스리면 그 모든 악이 그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p.71<삼독(三毒)중에서>

 

인생의 외길을 걷되, 언제라도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을 닦아놓아라.

가능성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는 하나를 알되, 오직 하나만 안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 그 이상의 것을 몸소 습득해야만 했던 도전 정신과 명확한 꿈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와 하나의 조화를 지키면서 보다 넓은 세계로의 눈을 뜨고 살았던 것이다. 우리는 우직하게 하나의 길을 걷기 위해서, 지금처럼 도전하고 또 노력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길을 걸어도 좋으나, 외골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도창스님의 마음공부에서 알알이 맺어진 글을 읽으면서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마음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나길 시가 있는 고요아침 34
김광희 / 고요아침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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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붓을 잡고 자신의 삶을 그리기 시작하다.

오늘처럼 벼루가 무겁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한동안 빛이 차단된 공간에 틀어박힌 채, 작은 인기척에도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곤 했던 나의 오랜 벗이자 길동무, 벼루는 이제 서서히 밝은 세상으로 나올 태세를 갖춘 듯하다. 풍성하고 부드러운 붓 한 자루만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는데, 살아가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붓을 놓아버린 것이 못내 아쉬운 오늘이다. 《나길》을 읽으니, 이 시원섭섭함은 좀체 가시지 않는다. 시인은 칠십여 년을 붓으로 살아온 '뿌리 깊은 서예가'였기 때문이다.

 

인고의 세월로 무장된 삶 그리고 글

시집을 읽으면 나는 시인의 고향으로 떠난 여행가가 되었다. 시인은 연만한 나무 한 그루처럼, 사회와 문화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시어로 풀어놓았다. 시집의 각 장 마다 직접 쓴 붓글씨 작품이 삽입되어, 시적 감수성과 서예에 대한 정신력이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했다. 필히, 삶이란 것에 오감을 열어놓고 광활한 대지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먹물의 인생

 

 

 

까맣게 드리운 모습이

붓끝에서 당신으로 떠 오른다

영겁의 세월 속에

침묵으로 다가 선

한 많은 세월

 

일곱 소녀 시절에 잡았던 먹물은

할매된 늙은 화선지에서도

힘있게 번져나가

나를 일으켜 세운다

 

고고한 학의 날개처럼

등에도 가슴에도

'국민대통합'을 새겨 놓고

여명을 기다리는

붓과 벼루의 인생

 

 

김광희 시인의 <먹물의 인생>은 개인적으로 동질감이 느껴져 발췌해보았다. "영겁의 세월 속에 침묵으로 다가 선 한 많은 세월"에서 붓을 잡기까지의 삶을 회상하는 시인의 모습이 애련하게 떠오른다. 모진 풍파 넘기고 연만한 몸뚱어리에 검고 진하게 물든 먹물, 그것은 애써 버리지 않아도 시인과 하나 되어 늙어가는 먹물의 인생 그 자체를 보여준다. 시인은 "할매된 늙은 화선지에서도 힘있게 번져나가 나를 일으켜 세운다"라고 하였다. 필력이 증명하는 자신의 곧은 정신력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아가 먹물은 고고한 학이 되어 여명을 향해 날아가고자 한다. 이것은 곧 "붓과 벼루의 인생", 즉 시인이 그토록 바라던 이상세계가 아니었나 싶다. 《나길》은 시인의 삶이 진솔하게 드러나는 시집. 이 깊은 밤, 생각하는 서예가의 詩香이 은은하게 번지는 듯하다. 

 

 



 
 
 
가고 싶은 길을 가라
로랑 구넬 지음, 박명숙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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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자신의 뜻을 아는 자에게 길을 열어준다.

그 언젠가 박학다식하고 다재다능하다는 것이 과연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삶을 보다 유연하고 능동적으로 다루기 위해선 지식과 재능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것을 안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은 저마다 소신을 따르면서 제 삶을 위해 충실히 살아간다.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것, 지금 걸어가는 길, 지금 생각하는 모든 것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한편으론,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정녕 이것이 나를 위한 것인가.'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 또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생각하다.

유감스럽게도 재능과 권력이 있다고 하여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아직도 이러한 생각으로 희망을 품은 자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재능보다 귀한 것이 '지혜'이며, 권력보다 강한 것은 바로 '정신력'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삶의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삶의 주체 즉, '나'라는 것이다. 이로써, 지혜와 정신력으로 온전한 자기 자신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시대와 애써 타협하지 않아도 '스스로 완성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늘과 내일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개인적으로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라.'는 마음가짐으로 삶에 임하는 메시지가 상당히 못마땅하다. 물론, 그 말에 숨겨진 뜻은 보다 넓고 깊은 진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썩 그리 와 닿지 않는 비현실적인 충고가 아닐까 싶다.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루를 살아가면 될 것인데, 애써 강박적으로 하루를 다룰 필요가 있을까. 로랑 구넬은 《가고 싶은 길을 가라》를 통해서 의기소침한 남자와 스님의 만남을 보여준다. 스님은 남자에게 진실된 눈으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인도하는데…….

 

우리가 살아오면서 그냥 지나쳐버린 것들에 대하여

내면을 본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차라리 자신의 내면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로랑 구넬의 책은 '자기로의 최면과 명상'으로 심신을 다스리는 느낌이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나는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지에 대한 자문자답의 시간을 가지라고 당부한다. 나는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존재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 된다고 말이다. 책은 말한다. "언제나 선택은 있는 법이지요." 그 선택으로 인해 달라질 당신의 인생은 빛과 어둠, 어느 곳에 존재합니까?

 

 



 
 
 
누가 나의 아픔을 알아주나요
브라이언 코나한 지음, 정미현 옮김 / 작은씨앗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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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서기를 시작하는 고슴도치의 삶으로 뛰어들다.

그들은 온몸에 가시가 돋아난 고슴도치와 같았다. 고요한 정적에 파장을 일으키듯,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재빨리 가시를 뾰족하게 세웠다. 그리고 똬리를 트는 뱀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버렸다. 자신을 향해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 입과 귀 그리고 눈을 막아버린 것이다. 우리는 고슴도치에게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았다. 딱 하나, "너희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그 무엇이 되어라!"고 말해줬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고슴도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죽음이었다.

 

우리가 누군가와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자괴감을 느껴야 하는 이유

그것은 자존심이 걸린 문제와 같았다. 낯선 문화와 환경을 가져온 클렘, 아이들은 전학생 클렘에게 적개심과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에 분노했으며, 분노를 감추기 위해서 처참히 짓밟기 시작했다. 《누가 나의 아픔을 알아주나요》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청소년의 심리적 특성을 중심으로 '학교 폭력'에 대한 고발성이 담긴 청소년 문학이다. 잉글랜드에서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로 이사를 오게 된 클렘. 그는 새로운 학교와 친구에 대한 희망을 품었으나, 그 누구도 클렘을 반갑게 맞아주지 않는다. 도리어 클렘의 영국식 말과 행동에 대한 비난과 조롱을 일삼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여자 선생님과 불미스러운 관계라는 소문까지 떠돌게 되었다.

 

「내가 할 말은 딱 하나다. 학교에서 듣는 얘기를 전부 믿지는 말라는 말씀! 그게 다다. 문자 한 통이면 전교에서 가장 헤픈 계집애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학교가 그런 데다. 가끔은 간절하게 휴대폰 따위 없던 옛날로 돌아가고픈 마음일 때도 있다. 우리 엄마는 아직도 그 시절 얘기를 한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휴대폰이 없다니 그게 상상이나 되나? 분명 친구 하나 없는 왕따가 될 거다.」p. 23 <코라 켈리의 견해 中>

 

클렘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 모든 것이 진실인가?

책은 클렘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에 대한 회고록 형식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주인공 클렘의 주변 인물이 각자 입장과 주장을 독자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클렘이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점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침묵, 방관, 체념으로 버텨오던 클렘. 그는 결국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던 분노를 참지 못해 터트리고 말았다.

 

학교 폭력은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요즘 '폭력'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학교 폭력'이다. 현재 학교에서 청소년으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 사건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사건 자체가 성인의 폭력을 능가할 정도로 잔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다양한 매체의 영향 즉, 모방학습으로 인한 폭력의 재현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청소년의 억눌린 자아와 욕구가 비현실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청소년. 그들은 아동기와 성인기 사이에 놓인 '애매한 존재'다. 스스로 성숙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여리고 순수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의 특성을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는 사회의 구조가 도리어 청소년의 일탈을 부추기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클렘의 사연을 해석하는 방식이 편파적임을 밝힐 수밖에 없다. 

 

작가는 초반에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빌미를 넌지시 던져놓았다. 그리고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양하게 제시했다. 그 역할을 피해자의 주변 인물이 맡은 것이다. 누군가의 합리적인 선택, 변명으로 인해 피해자는 자신의 존재가 지닌 권리를 박탈당했다. 자신에게 닥친 일을 감당할 수 없었던 주인공 클렘에게 소극적인 반항력만 제공해주었을 뿐, 작가는 그 이상의 용기와 희망을 보여주지 않았다. 피해자의 부모는 권위적인 모습으로 등장했으며, 친구들도 방관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진부하게 행복한 결말로 막을 내리지 않았음이 인상적이다. 문제를 던져놓았으나, 작가가 정답까지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로서 생각할 거리를 남겨둔 셈이니 말이다. 한편으론 청소년 문학이 한정된 공간을 맴돌고 있음이 안타깝다. 또한, 청소년을 올바로 이해하고 문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그래서 클렘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난 녀석이 고슴도치가 되어야만 했던 이유를 생각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