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테이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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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시큰둥하지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이 온 국민의 캐치프레이즈인 양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말에 강한 의문을 품고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누가 지어 낸 말인 줄도 모르면서 사람들은 그 말이 진리이자 정의인 양 떠받들었다. 정말 그랬다. '떠받들었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 더 강조하자면 '신봉하였다'고 해도 좋았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그 말을 내가 심하게 비꼬고 있는 듯 오해하실 분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그런 건 아니다.(주변에는 아직도 그 말을 신봉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기 때문에 혹시라도 나에게 위해를 가할까봐 어쩔 수 없이 덧붙이는 말이다.-나는 비교적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다.)

 

웃기는 발상이지만 이런 생각을 일관되게 밀어붙여 성공한 나라가 있다. 그건 바로 초강대국 미국이다. 미국의 인기 있는 영화나 소설은 어느것 할 것 없이 미국적인 냄새가 난다. 반대로 말하자면 미국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는 소설이나 영화는 인기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A형(고진감래형)-흙수저로 태어난 어떤 사람이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성공한다는 유형, B형(사필귀정형)-승승장구하던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곤경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자신을 곤경에 빠트린 악의 근원을 모두 제거한 후 화려하게 복귀한다는 유형, 그 외에도 더 있지만 이쯤에서 접고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두 유형에서 어쩐지 서부영화의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나요? 서부영화가 아니라 무협지 냄새가 난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나는 줏대가 없을 정도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금세 수용하는 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은 '가장 미국적인 것'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은 언제나 고정 독자층이 있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근에 읽었던 그의 소설 <템테이션>도 다르지 않았다. 소설의 구성을 간단히 말하자면 위에서 언급한 두 유형을 적절히 섞어 놓았다고 보면 된다. 이 글을 읽는 분은 짐작할 것이다. 하나만으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는데 두 유형을 섞어놓았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고 말이다. 벌써부터 읽고 싶어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람이 두 명이나 보인다.

 

무명의 극작가인 데이비드 아미티지는 어느 날 그의 에이전시로부터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유명 방송국 FRT에 팔렸다는 꿈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무명 작가의 세월을 견딘 지 십삼 년만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성공을 기원하며 어려운 시기를 견뎌 온 아내 루시와 딸 케이틀린이 있다. 그의 대본으로 제작된 시트콤 '셀링 유'는 그야말로 대박을 친다. 시트콤의 시즌 연장이 결정되고,언론 매체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영화제작사와의 계약이 줄줄이 성사된다.

 

"사람들은 흔히 성공하면 삶이 편해질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성공하면 삶은 어쩔 수 없이 더 복잡해진다. 아니, 더 복잡해지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더 큰 성공을 거두기 위한 갈증에 자극을 받으며 더욱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바라던 걸 성취하면 또 다른 바람이 홀연히 나타난다. 그 바람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우린 또 다시 결핍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다시 완벽한 만족감을 얻기 위해 모든 걸 걸고 달려든다. 그때껏 이룬 것들을 모두 뒤엎더라도 새로운 성취와 변화를 찾아 매진한다." (p.121)

 

성공한 사람들이 늘 그렇듯 그의 주변에도 그를 유혹하는 것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유능한 투자 브로커인 바비 바라가 그의 자산 관리를 맡게 되고, 억만장자인 필립 플렉으로부터 '시나리오'에 관한 엄청난 제안을 받는다. 게다가 그는 에미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린다. 갑작스러운 성공에 취한 그는 집과 차를 바꾸고 급기야 아내마저 바꾼다. 폭스텔레비전의 젊고 예쁜 이사 샐리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자 이제 유형 B로 넘어갈 시간이 왔다. 잘나가던 그가 아내 루시와 이혼하고 샐리와 동거를 시작했던 그는 어느 날 표절 시비에 휘말린다.연예인들의 가십이나 캐는 무가지 삼류 기자인 테오 맥콜은 그가 쓴 대본에서 표절의 증거를 찾아 내어 기사화하지만 그에게 우호적인 방송국과 여러 언론에 의해 무마되는 듯했다. 처음에는 말이다. 테오 맥콜은 다른 증거들을 상세히 수집하여 다시 기사화하자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는 금세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내가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애쓸수록 '최악의 거짓말은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이다.'라는 생각이 점점 짙어졌다." (p.285)

 

방송국에서 해고되고 모든 계약이 취소된 그는 이제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다. 샐리로부터 날아온 이별 통보와 전처 루시에 의한 그의 딸 케이틀린에 대한 접근금지명령. 그는 이제 회복 불능의 위기에 처햇다. 그러나 그의 에이전시 앨리슨만큼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그의 거처를 마련해주고, 상담치료사를 붙여주고, 일거리를 주선하고, 이 모든 음모의 배후를 캔다. 앨리슨의 도움으로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한 그는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다시 서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모든 걸 줄이자 기분이 묘했다. '버릴수록 자유롭다' 같은 뻔한 헛소리가 아니라 확실히 삶이 단순하고 편해졌다. 앨리슨이 마지막으로 맥콜의 칼럼을 읽어주었을 때 느낀 멍한 기분은 여전히 벗어던질 수 없었다. 그저 자동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움직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자주 들었다. 신용카드를 모두 자르거나 노트북컴퓨터를 판 것도 그랬다." (p.347)

 

그러나 그렇게 끝나버린다면 미국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겠는가. 위기의 순간에 그를 도와줄 구세주가 짜잔 하고 등장한다. 앨리슨의 노력에 의해 그를 나락으로 빠트린 음모의 배후에 억만장자인 필립 플렉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워낙 교묘하게 설계된 계획인지라 반격을 가할 증거를 찾지 못해 안절부절하고 있을 때 그를 나락으로부터 구해준 사람은 바로 필립 플렉의 아내 마사였다. 필립에게 보기 좋게 카운터펀치를 날린 데이비드는 원래의 자리로 복귀한다. 게다가 필립과의 TV 대담을 성사시킴으로써 필립이 거절할 수 없는 거액의 돈도 받게 된다.

 

"인생은 그런 겁니다. 누구나 선택을 하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상황이 바뀌고요. 그게 바로 '인과율'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내린 결정 때문에 나쁜 일이 생기면 늘 남 탓을 하는 버릇이 있어요. 상황이 안 좋았다거나 사악한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근본적으로 조목조목 따져보면 진정 탓할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걸 알게 되죠." (p.426)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배신했던 투자 브로커 바비 바라와 샐리는 그가 복귀함으로써 다시 연락을 시도하지만 그는 끝내 거절한다. 이제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은 셈인가? 아, 하나가 남았다. 루시와 케이틀린. '데이비드는 루시와 다시 재결합하고 케이틀린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난다면 그건 동화에나 나올 법한 결말이다. 적어도 더글라스 케네디는 그 정도로 뻔뻔한 삼류 작가는 아니다.

 

"우리는 위기를 통해 믿게 된다.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걸 믿게 되고, 모든 게 그저 순간에 불과한 거라 믿게 되고, 자신이 하찮은 존재에서 벗어나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는 위기를 통해 깨닫게 된다. 싫든 좋든 우리는 누구나 나쁜 늑대의 그림자 아래 있음을,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는 위험 아래에 있음을, 우리 스스로가 자신에게 행하는 위험 아래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p.451)

 

어떤가? 미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다못해 버터 냄새로 속이 니글거리지 않는가. 이로써 '가장 미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는 말이 증명된 셈이다. 그것은 어쩌면 문화적 토대가 부족한 미국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내러티브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더하여 그들에게는 돈이 있지 않은가. 천문학적인 액수의 광고로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헐리우드식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주는 더글라스 케네디에게 영광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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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들의 망언이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그들이 하는 짓거리로 보자면 이건 뭐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공복은커녕 숫제 모리배 집단의 일원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수장이라는 작자가 워크숍 자리에서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지 않나,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은 기자단과의 오찬에서 "학생들은 빚이 있어야 파이팅한다"고 말하질 않나, 역사 국정교과서 대표집필진이었던 서울대 명예교수는 여기자를 성추행하고 "술 맛있게 먹은 죄밖에 없다"고 하면서 사퇴하더니 이제는 한발 더 나아가 우리나라 교육 정책을 담당하는 고위공직자의 입에서 "민중은 개 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 나는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취지의, 우리나라 헌법에 정면으로 반하는 발언이 튀어나오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그동안 있었던 제반 사건들을 그저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여 왔고, 그런 까닭에 문제의 심각성을 그닥 깨닫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일의 발단이 개인적 차원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는 게 국민 대부분의 생각인 듯하다. 즉 고위 공직자 중에는 우리 역사의 정통성이나 헌법의 기본권 등 우리가 믿고 지켜야 할 가치에 반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포진하여 있었고, 먹고 사는 일이 점점 힘들어진 국민들이 그들의 가치관까지 돌볼 여력이 없어지자 봇물 터지듯 터져나온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는 얘기다.

 

교육문제를 다룬 신작소설 <풀꽃도 꽃이다>를 들고 나온 조정래 작가는 오늘 기자 간담회에서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막말 파문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국민의 99%가 개·돼지 새끼들이라면 개·돼지가 낸 세금 받아놓고 살아온 그는 누구냐. 그는 개·돼지에 기생하는 기생충이거나 진딧물 같은 존재"라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분노해야 하는 대상은 따로 있는 듯하다.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온 일회성의 막말이 뉴스에 보도될 때마다 파르르 분노하기보다는 그런 말이 밖으로 나오게 된 배경을 심각하게 바라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하는 말이다. 엄밀히 따지면 교육부 정책기획관은 자신의 소신을 자신있게 말하였을 뿐이다.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그런 사람을 고위공직자로 임명한 정부나 그런 사고를 가능케 한 정부 조직의 문제를 철저히 되짚어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망언을 한 공직자 한 명 자른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결코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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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7-12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당한 말씀입니다!
이번에도 조속한 대처를 빌미로 개인의 일탈로 급히 마무리하는군요. 그리고, 조정래 작가님 말씀에 속이 시원합니다. ^^

꼼쥐 2016-07-13 16:53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 교육을 담당하던 사람이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무력감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건 비단 사건의 당사자를 자르고 자르지 않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데 우리는 얼마나 한심하게 대처하고 있는지...

2016-07-12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13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12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13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당신을 만난 다음 페이지 - 사랑으로도 채울 수 없는 날의 문장들
조안나 지음 / 을유문화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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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하면서 종종 마주치는 문제는 '내가 이 짓을 왜하나?' 하는 자조적인 질문과 아주 가끔씩 부정기적으로 찾아오는 허무감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도 블로깅이라면 으레 공부가 하기 싫어 SNS에 매달리는 10대의 일탈과 취준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그저 남아 도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몸부림치는 '뻘짓'쯤으로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얘기다. 돼지우리와 진배없는 어두침침한 방에서 컴퓨터 모니터의 푸른 불빛을 마주한 채 웅크린 모습으로 자판에 코를 박고 있는 모습은 과히 아름다운 풍경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왜 블로그를 하는가? 하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살아가면서도 '도대체 나는 왜 사는가?' 하고 이따금 자신을 향해 의미도 없이 묻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자신에게는 '매일 복용량'처럼 매일 써야만 하는 글의 양이 있다며 자신을 글쓰기에 미친 글쓰기광이라고 지칭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오래된 블로거들 대부분은 어떤 알 수 없는 의무로 그들 자신을 속박하거나 일정한 주기로 찾아 오는 조급함과 초조함에 얽매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 듯하다. 날씨가 궂은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기상통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봐왔던 오래된 블로거들이 모두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 중 몇몇은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을 가려 뽑아 이따금 자신의 책을 발간하기도 하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보석인 양 간직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쩌면 블로그를 하는 보람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처럼 글쓰기에 이렇다 할 재주도 없고 뚜렷한 주제도 없이 잡다한 글만 올리는 블로거에게는 언감생심 그마저도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그들의 책은 신춘문예와 같은 일정한 루트를 통해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하는 작가의 책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작가의 출신이 문제가 아니라 모든 책은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라고 나는 생각하곤 한다. 예컨대 자신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밝혀야만 하는 순간에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중견작가의 노련함에 비해 블로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쓴다는 데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순진하게도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블로그에 쓰는 글 중 대부분이 자신의 경험과 직접적인 생각을 떠오르는 대로 꾸미지 않고 기록한다는, 말하자면 일기와 같은 특성이 일정 부분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집『일요일들』. 작위적이지만, 일요일 밤에『일요일들』 을 읽는 것이 내 오래된 습관이다. 시시콜콜한 일상에 숨어 있는 인간의 본성을 유쾌하고 날카롭게 풀어내는 작가답게 이 소설은 쉽게 읽히고, 오늘의 안녕을 안심하게 만든다." (p.21)

 

조안나의 <당신을 만난 다음 페이지>는 순전히 제목이 좋아서 읽게 된 책이다. 나는 그녀가 대학생 때 시작한 블로그를 십 년째 운영하는 오래된 블로거라는 사실도, 결혼을 하기 전에는 출판사에서 근무했다는 사실도, 이십 대의 치기 어린 애독기를 담은『달빛책방』의 저자였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저자는 자신이 예전에 읽었거나 새로 읽은 소설 200여 권 가운데서 이 책에 소개된 30권의 소설을 간추리는 데에만 한 달이 넘는 시간을 소비했다고 한다. 그 시간은 어쩌면 바쁜 직장인으로서의 '눈으로만' 읽는 독서에서 전업주부이자 전업작가로서의 감각이 살아 있는 독서로 탈바꿈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필수적인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번데기에서 성충으로 우화하는 과정에 드는 일정한 시간처럼 말이다.

 

"유행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지 않아도, 세련된 말투로 걸려온 전화에 응대하지 않아도, 마주치는 사람마다 미소를 짓지 않아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최신 맛집을 몰라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도시에 어울리는 차림을 하지 않아도 내 삶이 충분히 빛날 수 있다는 걸 밤마다 읽은 소설들이 가르쳐 주었다." (p.272~p.273)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 이후 소설에 대한 국내 독자의 열기가 뜨겁다. 교재, 수험서, 자기계발서 등의 실용서 비중이 기형적으로 높은 국내의 독서 생태에서 소설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낯선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은 곧 나 자신의 이야기이고, 우리 가족의 이야기이며, 전 인류의 이야기로 확대되는 것이기에 한번쯤 소설에 빠져들었던 독자는 그 행복한 글감옥에서의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발적인 수감을 요구할런지도 모른다.

 

"결혼식이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에야 비로소 책을 읽지 않고 사는 것에 대한 허무감이 밀려왔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건, 내가 나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물건을 갖다 버리고 싶어질 만큼 절망적이었다." (p.260)

 

주말에 맞는 풍경은 언제나 비슷하다. 날은 덥지만 내일 당장 출근해야한다는 조급함과 강박을 그들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한결 느긋해진 표정과 발걸음은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전염되는 듯 덩달아 미소가 번지게 된다. 이런 날 에쿠니 가오리나 박민규가 쓴 가벼운 소설 한 권 옆에 끼고 가까운 계곡에 나들이라도 나가보는 건 어떨까? 계곡에 발을 담그고 소설을 읽는 재미에 한껏 빠져 보면 하루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것이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소슬한 밤길을 달려 귀가하는 발걸음은 또 얼마나 가볍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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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07-10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꼼쥐님처럼 글쓰고 싶어요! 길어도 계속 읽게 되는 문장의 자연스러움~ 많이 배우고 갑니다.

꼼쥐 2016-07-12 15:54   좋아요 1 | URL
너무 과분한 칭찬을...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

qualia 2016-07-10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인터넷의 발명이 가장 획기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모든 혁명 중에서도 인터넷 혁명이 가장 파급력이 컸다고 봅니다. 모든 게 인터넷 이전과 이후로 달라졌다고 볼 수 있죠. 그 덕에 꼼쥐 님의 노트에 적혀 어느 한 가정집의 서랍이나 책장 속에 꼭꼭 숨어 있었을 사적인 글들을 (꼼쥐 님과는 전혀 안면도 없고 관계도 없는) 제가 읽을 수 있게 된 것이죠. 정말 놀랍습니다. 제가 있는 공간과 꼼쥐 님의 책상 혹은 컴퓨터 사이까지의 거리는 그 어느 우주 공간보다도 더 아득히 멀다고 할 수 있잖아요. 지금이 인터넷도 없는 1980년대와 같은 시대라면 말이죠. 그런데 지금 2016년 07월 10일 낮 2시 38분, 한국의 어느 한 도시에서 제가 꼼쥐 님의 내밀한 사적 공간으로 잠입해 들어가 그 내면을 고스란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꼼쥐 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블로거들이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서슴없이 공개하고 있으니까요. 인터넷이 없었다면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현상이죠. 거듭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례는 인터넷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 중 지극히 작은 한 사례에 불과하죠. 다른 거대하고 심층적인 변화와 혁신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잖아요. 아무튼 꼼쥐 님의 윗글 가운데 첫째와 둘째 단락에 들어 있는 얘기와 생각들이 정말 맘에 듭니다. 인용해 주신 글도 그 인용문에 대한 꼼쥐 님의 느낌글도 정말 너무 좋습니다. 덕분에 얕은 생각이지만 이렇게 적을 수 있었네요~ hehe 고맙습니다~ ㅋ

꼼쥐 2016-07-12 16:02   좋아요 1 | URL
qualia 님의 꼼꼼하게 적어내려간 댓글을 읽으며 순간 감동하게 되는군요. 저는 사실 생각이 날 때마다 이따금 두서없는 글을 남기고 그것을 읽는 다른 블로거의 존재에 대해서는 별 생각도 없이 지내왔었습니다. 제 블로그의 다른 글들을 보시면 알겟지만 이렇다 할 댓글이 달리지 않는 이유도 그런 까닭이지요. 제가 쓰고 싶은 대로 멋대로 쓰고 제가 쓴 글에 누군가 댓글을 달든 그렇지 않든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물론 다른 블로그를 방문하여 글을 읽고 댓글을 남기는 경우는 좀체 없었습니다. 제가 남들보다 게으르다는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군요. 아무튼 이런 성의있는 댓글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제 생각을 간단하게나마 남깁니다. 더불어 제 글에 대한 칭찬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엊그제 발표된 '칠콧보고서'는 아마도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성과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런 결과를 도출해 낸 영국 국민의 위대함과 확고한 신념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못할까?'하는 자괴감도 함께 말이죠.

 

영국의 이라크전 참전 및 진행과정을 규명한 '칠콧보고서'는 2009년 6월 조사위원회가 발족된 지 7년만의 결과물이고, 최종 결론에 이르기까지 문서 15만 건을 검토하고 150명 이상의 증언을 듣고 그때마다 관련자들에게 반론 기회를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조사비용도 만만치 않았죠. 150억 원이라는 큰 돈이 들었으니까요. 칠콧 위원장을 포함한 6명의 조사 위원들이 그동안 들인 노력 또한 무시할 수 없겠죠. 그렇게 만들어낸 결과물이 '칠콧보고서'이며 12권의 보고서에 260만 단어가 쓰였다는군요. 실로 어마어마하죠? 읽는 데만 9일이 걸린다고 하니 참으로 방대한 조사보고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엄청난 결과물 또한 놀랍지만 그들이 내린 결론은 "영국은 이라크를 평화적으로 군축시킬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소진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을 따라 이라크에 침입하기로 선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영국의 정책판단에 오류가 있었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게다가 영국의 이라크전 참전이 오류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며, '전적으로 부적절하게' 세워진 계획과 함께 실행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던 사담 후세인 이라크 독재정권의 대량살상무기(WMD)에 관해선,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정부가 '정당화될 수 없는 확신'에 찬 평가를 국민들에게 제시했으며, 군사 계획과 전쟁 후의 파장에 대해 제대로 숙고하지 않았다는 날카로운 지적도 잊지 않았습니다.

 

보고서가 공개된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라크에서 형제를 잃은 한 여성은 블레어 전 총리를 향해 '세상에서 가장 최악의 테러리스트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200명이 넘는 영국인이 사망하고4400명의 미국인이 전사하고 10만 명 이상의 이라크인이 사망했으니까 말입니다.

 

이러한 모든 결과를 가능케 했던 것은 진실과 정의를 사랑하는 영국 국민의 일치된 신념이었을 것입니다. 진실을 밝힘으로써 입게될지도 모를 자국의 경제 안보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언제든 밝혀진다'는 강한 믿음을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었던 게지요. 아무리 오래 전의 일이라도 정부의 정책판단에 있어 잘못이 저질러졌다면 반드시 엄정한 평가를 내린다는 영국의 철학과 신념을 다시한번 보여준 이번 보고서가 그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남을 테지만 무엇이든 숨기기에 급급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할 때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비전투병 수천 명을 파견한 우리나라는 그런 조사를 하자는 건의도 없었고, 명백한 사건을 조사하는 세월호 조사에서도 어떻게 하면 잘못을 감추고 서둘러 종결지을 수 있을까 궁리하는가 하면, 메르스 사태가 종식된 후에도 3명의 확진자가 더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바람에 보고서 한 장 쓸 수 없는 우리나라의 이같은 현실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사드 배치가 확정된 지금, 만약 그 결정이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했었다면 우리는 미래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칠콧보고서'와 같은 따끔한 지적을 할 수 있을까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마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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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6-07-09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우리 한국/한국인한테는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봅니다. 그저 우리 한민족은 ‘음주가무’나 ‘주색잡기’에 능한 게 최대의 장점이죠. 모든 지표며 통계가 세계 1위를 뒷받침하고 있는데 아무도 반박 못합니다. 걍 우물 안에서 우리끼리 물어뜯고 복닥복닥 지지고 볶고 하다가 자멸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게 역사 혹은 신이 우리한테 부여해준 임무 같습니다. 좋은 글 읽고 정말 죄송합니다.

꼼쥐 2016-07-10 10:31   좋아요 1 | URL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태어나서 지금껏 이렇다 할 변화를 겪어보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죠. 그게 지겨운 거고, 그런 무력감이 싫은 거죠. 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모두가 그런 무력감에 휩싸여 자조 섞인 말만 한다면 이 사회는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나부터 나아지려는 노력이 없다면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걸 저는 잘 압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저는 무엇인가 조금씩 꿈적거리고 있습니다. 큰 변화는 아니지만.

김도연 2016-07-26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저는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입니다. 학기말 고사가 끝나고 지망 대학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친구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늘 세상에 대한 분노가 앞섭니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친구들이 진지하게 해외 유학이나 이민을 고려하면서 이 `대책 없는` 나라를 떠나려고만 합니다. 우리나라는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한 걸까요? 보다 좋은 나라를 위해서 언론계에 종사하고 싶은 것이 제 꿈이었는데, 요즘 들어 이 모든 것들이 허망해보이기만 합니다. 쓰신 글을 읽고 현명한 조언을 해주실 거라 생각이 들어 댓글 남깁니다.^^

꼼쥐 2016-07-28 16:1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렇게 어린(?) 학생이 그런 대견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 아직 대한민국이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게 됩니다. 지금은 여름방학이지만 고3이니 방학을 온전히 누리지는 못하고 학교에 나가 비지땀을 흘리고 있겠군요. 곧 수시 지원을 위한 자소서도 준비해야 할 테고 말이죠.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지만 그게 더럽다고 아무도 그걸 치우려 들지 않는다면 온 마을이 또는 온 나라가 더러워지는 건 순식간의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는(가급적 많은 사람들이면 더 좋겠지만) 남아서 이 나라의 잘못된 부분을 개혁하고 후손을 위해 희생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부끄럽게도 제 여동생은 이민을 가서 다른 나라에 살고 있지만 그곳에서의 생활도 만만한 것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오늘 김영란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었습니다. 이 법이 만능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깨끗하고 공정한 사회로 가는 첫걸음인 셈이지요. 그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도 다 사람의 몫입니다. 김도연 학생처럼 현명한 사람들이 보다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

김도연 2016-08-03 14:5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해서 좋은 사회인이 되겠습니당ㅎ
 
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가볍게 읽고 지나쳤던 책이 어느 날 문득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읽게 되는 책은 예전에 읽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를 툭 하고 던져주게 마련인데 그럴 때 나는 택시에 놓고 내린 물건을 다시 찾은 느낌으로 '흠, 이런 게 있었군.' 여러번 되내면서 책에 빠져들곤 합니다. 최근에 내가 읽었던 J.M.쿳시(Coetzee)의 <추락 Disgrace>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윤모 전 청와대 대변인이 자신의 블로그에 썼던 자전적 에세이를 읽는 순간 '그래, 이런 비슷한 주제를 다룬 소설이 있었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입니다.

 

"아이삭스는 부드럽게 말한다. 말이 한숨처럼 그의 입술을 떠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추락하셨죠?" 추락했다? 그래, 추락이 있었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대단하다? 대단하다는 말이 그에게 맞는 말인가? 그는 자신을 모호하고, 점점 더 모호해져 가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역사의 변방에 속하는 인물. 그는 말한다. "어쩌면 가끔씩 추락하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인지 모르지요. 부서지지만 않는다면요."" (p.253)

 

소설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루리 교수.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한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학과 부교수로 있는 그는 50대의 이혼남입니다. 소설의 첫문장인 '그는 이혼까지 한, 쉰둘의, 남자치고는, 자신이 섹스 문제를 잘 해결해왔다고 생각한다.'에는 여러 의미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애적 성향이 강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에는 무관하게 자신의 욕망을 해결해 왔음을 말해줍니다. 게다가 '그는 어렸을 때 여자들에 묻혀 살았다'는 표현은 그가 여자들로부터 떠받듦을 받으며 성장했고 '그의 큰 키와 균형잡힌 골격과 올리브색 피부와 부드러운 머리'로 인해 그는 자신이 원하는 여성은 누구든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던 듯합니다.

 

이 소설의 주된 스토리는 루리 교수가 그의 제자 멜라니와 관계를 갖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자신의 집으로 멜라니를 끌어 들인 루리는 '12살 어린이처럼 가냘픈 엉덩이'를 갖고 있는 멜라니와 성관계를 갖게 됩니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루리 교수는 멜라니와 만남의 횟수를 늘려갑니다. 그러면서 루리 교수는 점차 대담해집니다.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루리 교수는 학과사무실에서 알아낸 멜라니의 아파트로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가곤 합니다. 곤경에 처한 멜라니는 수강을 취소하기에 이르고 멜라니와의 부적절한 관계는 남자친구의 고발에 의해 학교와 멜라니의 아버지에게도 알려집니다. 학교의 진상조사위원회가 개최되고 사과와 자숙을 권고하는 대학의 요구를 루리 교수는 거절합니다. 그는 결국 파면되어 시골에 사는 자신의 딸 루시의 집을 찾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에서도 꾸준히 있어 왔던 흔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루시가 말한다. "값을 톡톡히 치르셨군요. 어쩌면 그녀는 나중에 뒤돌아보면서 아버지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예요. 여자들은 놀랍게도 용서를 잘 하거든요." 침묵이 이어진다. 자식인 루시가 그에게 여자들에 대해서 얘기해 주려고 하는 걸까?" (p.105)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바뀜으로써 스토리는 이제 루시의 이야기로 빠르게 전환됩니다. 루시는 자신의 농장에서 위탁 받은 개를 돌보며 지냅니다. 흑인 원주민의 세력권에서 결혼도 하지 않은 백인 여성이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위태로워 보입니다. 루시는 자신과 함께 살았던 여자 친구 헬렌의 방을 아버지에게 내어 줍니다. 그런데 어느 날 총을 든 흑인 삼인조 강도가 루시의 농장에 쳐들어 옵니다. 그들은 루시가 키우던 개를 죽이고, 루리 교수를 폭행하고, 루시를 성폭행한 후 루리 교수의 차를 훔쳐 도주합니다. 분노한 루리 교수는 경찰에 신고하고 복수를 다짐하지만 루시는 자신의 성폭행 사실을 경찰에게 끝내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여파겠지. 침략의 여파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조금 지나면 몸은 저절로 치유가 되고 그 속에 사는 영혼인 나는 다시 옛 자아를 찾겠지. 하지만 그는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안다. 삶에 대한 즐거움이 꺾여버렸다. 시냇물 위에 떠 있는 하나의 나뭇잎처럼, 산들바람에 날리는 한 알의 민들레 씨앗처럼, 그는 종말을 향해 떠내려 가기 시작했다." (p.163)

 

루시의 농장일을 도와주는 나이든 이웃 원주민 페트루스가 집을 지은 기념으로 루시와 루리 교수를 파티에 초대합니다. 루리 교수는 그곳에서 삼인조 강도 중 한 명이었던 나이 어린 흑인을 발견합니다. 분노한 루리 교수는 페트루스에게 격분하여 따지지만 어린 흑인이 자신의 친척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루시가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밑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내가 둘씩이나 있는 그의 세 번째 부인이 되라는 것이었죠. 루리 교수는 자신의 전처이자 루시의 엄마가 있는 네덜란드로 가서 살면 어떻겠느냐고 루시에게 권합니다. 그러나 루시는 자신의 땅을 페트루스에게 지참금으로 주고 그의 밑으로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집과 개를 돌보는 일은 끝까지 지키겠노라고 말합니다. 강간의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루시는 그것이 마치 그들의 영역에서 살아가기 위한 '세금 징수'와 같은 것이라고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얘야, 화내지 말아라. 그래, 나는 이것이 유일한 삶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동물에 관해서 얘기하자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동물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자. 하지만 균형을 잃지는 말자. 우리는 동물과는 다른 차원의 피조물이다. 반드시 더 높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동물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려면, 죄의식을 느끼거나 보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단순한 아량에서 그렇게 하자." (p.112)

 

법률적 용어로 말하자면 위계에 의한 성추행의 가해자였던 루리 교수는 자신의 딸 루시에 의해 피해자의 아버지로 전락합니다. 루리 교수는 한동안 돌보지 않아 폐가처럼 변한 케이프타운에 있는 자신의 집을 처분하고 그곳에서 있었던 자신의 삶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멜라니의 아버지를 찾아가 만나기도 하고, 연극 공연을 하는 멜라니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도 합니다. 루리 교수는 결국 딸 곁으로 되돌아 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임신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루시의 이웃 중에는 동물 병원을 하며 루시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베브 쇼가 있습니다. 베브 쇼는 주로 치료가 불가능한 동물의 안락사를 담당합니다. 루리 교수는 동물 병원에서 나온 죽은 개의 시체를 자신의 차에 실어 화장장으로 옮기는 일을 합니다. 젊은 시절의 루리 교수였다면 베브 쇼는 결코 쳐다보지도 않을 여인이었지만 베브 쇼의 유혹에 적당히 넘어가는 그의 모습은 어쩌면 이 책의 주제와도 같은 대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그들의 섹스에 대해서, 적어도 자신이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정열은 없지만 혐오감도 없다. 결국 베브 쇼가 그녀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도록, 그녀가 의도한 것은 모두 성취됐다. 데이비드 루리, 그는 남자가 여자한테 도움을 받듯이,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 루시 루리는 어려운 방문으로 도움을 받았다고. 그들이 지치자, 그는 그녀 곁에 누워 이렇게 생각한다. 이 날을 잊지 말자. 이것이 멜라니 아이삭스의 달콤하고 젊은 살 다음에, 다다른 지점이다. 이것이 내가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 아니 이보다 못한 것조차." (p.225)

 

약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이 직접 약자의 입장에 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983년, 1999년 2회에 걸쳐 맨부커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2003년 노벨문학상까지 거머쥐었던 J.M.쿳시는 자신의 소설 <추락 Disgrace>에서 모든 갈등에는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윤모 전 청와대 대변인의 칼럼을 읽으면서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만 한 번의 추락을 경험했던 윤모 대변인은 아직도 약자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나이를 잊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좋은 말을 다 벗겨내고 보면, 바로 그것을 처벌하려고 위원회가 열렸던 것이다.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한 재판. 부자연스러운 행위에 대해, 늙은 씨, 피곤해진 씨, 생기없는 씨를 뿌린 것에 대해. 자연에 반한 것.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탐내면, 종족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이 고발의 밑바닥에 깔린 것이었다. 문학의 반은 그것에 관한 것이다. 종족을 위하여, 나이든 남자들의 무게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젊은 여자들. 그는 한숨을 쉰다. 감각적인 음악에 묻혀, 나 몰라라, 서로를 껴안고 있는 젊은 사람들. 이곳은 나이든 남자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p.286)

 

'나이든 남자들의 무게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젊은 여자들'의 심리를 윤모 대변인은 과연 몰랐을까요? 한 번의 추락으로도 그는 뭔가 깨닫는 게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이르게 되면 그도 분명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날이 있겠지요. 쿳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은 결코 나이든 남자들을 위하 나라가 아닌 듯합니다. 그도 이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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