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 잔혹동화 속 문장의 기억 Andersen, Memory of sentences (양장) - 선과 악, 현실과 동화를 넘나드는 인간 본성
박예진 엮음,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원작 / 센텐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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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말보다는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 아닐까 싶다. 사실 자신의 인생을 반전시키는 계기가 되는 데는 어떤 유명인사의 말도 있겠지만 자신이 존경하는 어떤 인물, 즉 '롤 모델'의 역할이 크다. 그런 까닭에 누군가를 감화시키는 말보다는 모범이 될 만한 누군가의 행동, 더 나아가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이 각자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지름길이 되는 셈이다. 백 번의 말보다는 열 번의 시범이, 열 번의 시범보다는 단 한 번의 체험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모범이 되는 행동을 선보이는 훌륭한 부모를 가졌을 리 만무하고, 인생의 목표를 세울 만한 감동적인 체험을 할 기회가 모든 아이들에게 주어질 리도 만무하다. 그러므로 시간이 더디고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할지라도 누군가의 말에 의한 교육은 비교적 공평하고, 개인이 노력만 한다면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겠다.


"안데르센은 특히 인간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글들을 여러 편의 동화로 발표했습니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 많은 상처를 받은 만큼, 다른 아이들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교훈을 주고자 그런 잔혹동화를 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부모들은 아이가 이런 잔혹동화 속 숨은 의미를 알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겪어 가며 다시 부모가 된 뒤에야 잔혹동화 속 인간 본성의 한 측면을 깨닫게 되겠지요. 어쩌면 이마저도 인생의 풍파를 다 겪은 후에서야 동화 속 주인공들이 현실에서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테니까요. 그게 우리들의 인생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p.12~p.13 '프롤로그' 중에서)


북 큐레이터이자 고전문학 번역가인 박예진 작가가 쓴 <안데르센, 잔혹동화 속 문장의 기억>은 Part. 1 '인간을 파멸시킨 욕망 잔혹동화', Part. 2 '목숨과 맞바꾼 사랑 잔혹동화', Part. 3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마법 잔혹동화', Part. 4 '사유에 묻히게 하는 철학 잔혹동화' 등 총 4부로 나누어 각 파트에 각각 네 편의 잔혹동화를 배치함으로써 전 세계에서 오늘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안데르센의 명작 열여섯 편이 등장한다. 책에는 제목만 들어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어공주', '미운 오리 새끼', 성냥팔이 소녀', '빨간 구두' 등도 있지만, '부시통'과 같은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동화도 실려 있다.


"sentence 280

Everything has its beauty, but not everyone sees it. The difference in appearance doesn't matter, as long as you have a good heart.

모든 것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 모두가 그것을 보지는 못하죠. 외모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으며, 훌륭한 마음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p.221)


이 책은 어쩌면 이제 막 인생을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아이에게 필요한 책은 아닐지도 모른다. 동화의 전체 스토리를 뚝 떼어 놓은 채 '인생 그 자체가 가장 훌륭한 동화이다.'라는 동화 속 문장을 이해하기에는 아이들의 인생 경험이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동화 속에 내재된 특별한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 채 오직 재미 하나만으로도 안데르센의 동화에 한껏 빠져들 수 있었던, 아름다운 추억을 지닌 누군가가 그 시절을 회상하며 문장 하나하나의 의미를 되새기는 평화로운 시간을 갖게 하는 그런 풍경이 그려지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다 자란 어른이 아이의 시점으로 되돌아가 안데르센의 동화를 매개로 인생의 의미를 곰곰 되짚어보는 책인 셈이다.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음으로써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를 찾고 존중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됐을 겁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그의 동화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들은 독자들이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p.266~p.267 '에필로그' 중에서)


가난한 환경으로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까닭에 꿈을 포기해야 했고, 양성애적 애정 문제로 인해서 실연의 상처를 오랫동안 안고 살아야 했던 안데르센. 불행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 경험들이 오히려 삶의 은유로 가득한 아름다운 동화를 탄생하게 하는 밑바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삶의 밑바닥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인간을 현혹하는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된 삶의 진실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싶었던 인간의 욕심, 절제되지 않는 욕망, 쉽게 부서지는 인간의 허영심 등은 어른들에게 주는 안데르센의 따끔한 교훈인 셈이다. 나는 박예진 작가의 저서 <안데르센, 잔혹동화 속 문장의 기억>을 읽는 내내 안데르센으로부터 각성의 회초리를 맞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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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잘 잤으면 하는 너에게 - 고단한 하루 끝, 숙면 기원 에세이
미내플(유민애) 지음 / 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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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피곤이 아침 기상시간에 몰리던 시기가 있었다. 아침을 먹고 학교에 등교하기 위해 혹은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만 하는 그 짧은 시간에 쌓인 피로가 집중되다 보니 시간을 넘겨 더 잘 수만 있다면 나의 운명을 악마의 유혹에 팔아넘길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시간이었다. 그러나 장점도 있었다. 잠에서 빠져나오는 게 힘들 뿐 일단 정신이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뿐했고 하루를 별 탈 없이 잘 보낼 수 있었다. 단지 일어나는 순간이 힘들었을 뿐이다. 이 시기가 지나면 일과에서 쌓인 피로가 저녁 귀가 시간에 집중된다. 밖에서 일을 마치고 일단 귀가하면 그때부터 만사가 귀찮고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해진다.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싫은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면 언제나 그렇듯 습관처럼, 뇌 속에 주입된 일과의 반복이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것처럼 하루를 거뜬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이 시기가 지나고 좀 더 나이가 들자 하루의 피로는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동행이 자연스러운 불치병처럼 말이다. 피로가 풀려 개운하다거나 가뿐하다는 느낌은 옛날 옛적의 동화 속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일주일의 피로가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주말 시간에 더 깊은 피로감으로 몰려온다는 점이다. 친척의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행사에 참가하느라 쉴 시간이 없었던 주말이면 다음 주에 견뎌야 할 시간들이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진짜 휴식을 취하려면 지금 머릿속에 가득한 걱정부터 내려놓자. 물론 그게 얼마나 힘든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걱정에 휩싸일 때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패닉에 빠져 시간만 흘려보내곤 하니까. 그러나 걱정을 안고 있는 상태에서는 몸의 긴장이 풀릴 수 없다. 휴식답게 휴식할 수 없다."  (p.30)


자기계발 유튜버이자 고민 상담가로 잘 알려진 미내플(유민애) 작가의 저서 <오늘도 잘 잤으면 하는 너에게>를 택배로 받았던 건 어제 오후.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던 나는 나도 모르게 후루룩 다 읽고 말았다. 작정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고 이 책의 내용이 가볍다거나 한 번 빠르게 읽고 구석으로 던져버려도 되는 그런 책도 아니다. 이런저런 고민 때문에 불면증과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을 많은 사람들에게 저자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맞춤 처방전을 제시함으로써 같은 시기를 통과하는 젊은 세대에게 큰 도움이 되는 책이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에 이어 1장 '고단했던 하루 끝, 나를 보듬는 시간', 2장 '나를 괴롭혔던 건 너일까? 나일까?', 3장 '일단 자고 내일 생각해 볼 것'에 이어 에필로그 성격의 '땡스 투'로 끝을 맺고 있는 이 책은 각 장의 소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젊은 시절에 공통적으로 겪을 수 있는 일과 관계, 그것으로부터 오는 여러 고민들과 불면의 나날들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저자 자신이나 주변의 그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인해 여러 날 잠들지 못하고 피곤에 절어 다른 문제까지 야기하는 불상사는 막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물론 해결하지 못한 어떤 문제로부터 매번 도망치거나 문제를 회피하라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꾸준히 동력을 잃지 않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계기로 삼는가가 중요하다. 일을 끝까지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시한폭탄 같은 불안을 동력으로 삼는다. '패배자가 될까 봐', '남들이 무시할까 봐', '인정받지 못할까 봐'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듯 자신을 몰아붙인다. 몸과 마음의 근육이 제대로 단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안감에 불을 지핀다면, 머지않아 번아웃으로 향하는 지름길로 가게 될 것이다."  (p.163)


어떤 특정한 고민은 그 시기가 지나면 유효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말하자면 고민에도 유효기간이 있는 셈이다. 결혼을 하지 못했거나 때를 놓친 채 50대가 된 사람이 있다면 결혼은 이제 그에게 큰 고민거리가 되지 못한다. 하면 좋고 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가벼운 주제로 변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효기간이 존재하는 이런 고민들은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다. 종국에는 우리 인생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죽음'도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음을 나는 책을 통하여 배웠다. 나이가 들수록 신체의 바이오리듬도 변하고 젊은 시절처럼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들던 시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만, 숙면의 가장 큰 적이라는 고민을 적절히 조절하고 해결하는 일은 내게도 필요한 듯 보인다.


"내 문제를 어떻게든 마주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때, 내가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나아가려고 노력할 때, 내 주변 사람들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때, 오래 울기를 그만둘 때 세상은 언제나 더 또렷해졌다."  (p.215)


피곤해서 저녁 일찍 취침에 들었지만 이유도 없이 새벽에 깨서 다시 잠들기 위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눈은 더 한층 말똥말똥해지고 잠은 구만리 밖으로 달아나는 날이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낮에 활동량을 늘리고, 햇빛을 쪼이는 시간을 늘려도 소용이 없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고 있음이다. 피곤은 이제 익숙한 배우자처럼 상시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나는 미내플 작가의 책 <오늘도 잘 잤으면 하는 너에게>를 뒤적이며 찡한 마음으로 '더 좋은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야' 마음속으로 내게 깊은 위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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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소설, 향
조경란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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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움직임>에서 작가 조경란이 그리고자 했던 가족은 소설 속 주인공인 '나'(신이경)가 가꾸던 작은 화단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런 힘이 없는 까닭에 주변의 어떤 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가족. '담배꽁초와 빵봉지들'이 쌓인 척박한 환경이지만 거름을 주고 잘만 돌보면 언젠가 분꽃, 채송화처럼 아름답게 피어날 것이라는 기대만 가득했던 가족. 그러나 시름시름 앓던 엄마를 잃고 외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새로 꾸린 가족은 '가족'이라기보다는 혈연관계라는 외피를 두른 '이상한 동물원'에 가까웠다.


"이 목욕탕집에 처음 왔을 때 내게 유일하게 위안이 됐던 건 이 화단뿐이었다. 사과 궤짝만 한 작은 화단에는 담배꽁초와 빵봉지들이 널려 있다. 나는 매일매일 화단에 물을 주고 쓰레기들을 골라낸다. 지금은 분꽃, 채송화가 한창이다. 곧 봉숭아도 몽우리를 터뜨릴 것 같다."  (p.19)


완전한 성년도 미성년도 아닌 스무 살의 '나'는 목욕탕집 일 층의 단칸 셋방의 가족 구성원으로 편입한다. 일 층에는 여섯 가구가 세 들어 살고 있고, 이 층은 목욕탕, 삼 층은 안마시술소가 운영되고 있다. 다락방이 있는 외갓집에는 결혼도 하지 않은 외삼촌과 이모, 외할아버지가 함께 산다. 늑막염을 앓고 있는 외삼촌은 매일 한 움큼의 알약을 털어 넣고, 밤마다 흉몽에 시달리는 이모는 깊이 잠들지 못한다. '나'는 허허벌판의 벽돌공장에서 블록벽돌을 만드는 외삼촌과 외할아버지를 위해 도시락을 싸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한다. 농협에서 하루 종일 돈을 세고 퇴근하는 이모는 책상도 없는 단칸방에 엎드려 새벽까지 외국어 공부를 하고,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내가 산책을 다녔던 샛강과 할아버지의 벽돌공장, 문득문득 마주치곤 했던 장님들과 삼촌의 여자, 그리고 다락방이 있던 어두운 집과 남자의 방이 떠오른다. 그 밖에 더 이상 기억할 게 없다. 기억할 게 많은 사람들은 떠나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툭툭 털어내버린다."  (p.85)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했던 '나'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화단을 가꾸고, 기차역을 서성이기도 하고, 앞방 남자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나처럼 우편물이 오지 않는 앞방 남자는 가느다란 안전줄에 매달려 유리창을 닦는다. 남자 방의 열쇠 하나를 훔친 '나'는 남자가 없는 방에서 이불에 밴 남자의 체취를 맡기도 하고, 3개월이나 밀린 방세 중 한 달치를 남자 몰래 대신 내주기도 한다. 책상을 사기 위해 이모의 지갑에서 몰래 빼돌려 오랫동안 모았던 돈이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나를 위해 검정고시 교재를 사다 주었던 이모는 어느 날 회사 근처로 나를 불러 점심으로 냉면을 사주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집을 나갔다. 농협에 맡긴 고객의 돈을 들고 앞방 남자와 함께.


"서랍에서 검정고시 학습지를 꺼내 읽다 보면 또 시간이 갔다. 꽃들은 다 어디로 날아가버렸는지 한 포기도 보이지 않는다. 작고 까만 씨앗들도 떨어져 있지 않다. 아전부터 쓰레기통이었던 것처럼 담배꽁초며 과일 껍질들만 쌓여 있다. 모종삽으로 화단 흙을 쑤석거린다. 잔돌멩이가 많고 시멘트 조각들이 박혀 있다. 이 거친 흙을 뚫고 한때 꽃들이 피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묵묵히 흙을 파헤친다. 삼촌의 오줌이라도 몰래 뿌리고 싶다. 거름이 필요할 것이다. 내년 봄에도 나는 이 작은 화단에 꽃씨를 뿌리고 있을까."  (p.98)


<움직임>에서 작가 조경란의 문체는 사뭇 건조하다. 건조하고 짧은 문장들이 흩어지는 모래알처럼, 같은 혈연이지만 함께 섞일 줄 몰랐던 외갓집 식구들처럼 내내 서걱거린다. 그럼에도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인 '나'를 통하여, 내가 가꾸는 작은 화단을 통하여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가족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까닭에 서로를 사랑하는 방법도,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도 배우지 못했지만, 때가 되면 그들 모두가 저마다의 꽃을 피울 것이라고 강하게 믿고 응원하는 관계.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쏟아지는 5월. 꽃잎을 떨군 아까시나무는 제 소임을 다한 듯 제법 원숙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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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총총 시리즈
황선우.김혼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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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가까운 미래를 염두에 둔 채 살아간다. 시간에 대한 거리감이 없는 우리로서는 가까운 미래를 곧 닥칠 현재로, 비교적 먼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을 가상의 세계쯤으로 인식하는 게 다반사이다. 그런 까닭에 오롯이 현재에 머물지 못하는 것은 물론 가까운 미래가 현재인 양 인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비교적 먼 미래로 인식되는 젊은이들도, 아주 가까운 미래로 생각해야 마땅한 노인들에게도 '죽음'은 언제나 가까운 미래이면서 또한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듯한 까마득히 먼 미래인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으면서 실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되고 만다. 죽을 만큼 힘들 때도, 죽지 못해 살아갈 때도, 이별 후 죽고 싶었던 어느 젊은 날에도, 죽을 만큼 심심했던 어느 휴일 오후에도 '죽음'은 가깝고도 먼 미래였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어서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 바로 '죽음'인 것이다.


"『빅토리 노트』에서 이옥선 작가님은 노자의 사상을 인용해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고 경고했습니다.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를 위해서는 지나친 열심과 부지런을 금지하고 대신 한 템포씩 느리게 가자고 이야기합니다. 저보다 한참 오래 산 선배가 조금 느긋해도 된다고 얘기해주는 게 참 마음이 놓여요."  (p.35)


김혼비 작가와 황선우 작가 사이에 오고 간 편지를 모아 묶은 서간에세이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는 우리에게 잊혀진 아날로그 감성을 일깨우는 책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편지. SNS의 즉각적인 문자 메시지가 일반화된 작금의 현실에서 누군가를 떠올리며 한 자 한 자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린다는 건 꽤나 답답하고 지루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라디오 드라마가 그렇듯 소리만으로 극 중 인물과 상황을 떠올리며 상상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처럼 편지지를 수놓은 빼곡한 글씨를 통해 상대방의 얼굴과 감정을 상상하고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무척이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물론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느낌을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편지를 쓴다는 건 현재에 안주하지 못하고 오직 미래를 향해 달리려고 하는 현대인의 불치병, 조급증을 치료하는 데 꽤 효과적인 방법으로 쓰일지도 모른다.


"몇 달을, 특히 여름을 번아웃 상태로 통과하면서 번아웃은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번아웃이 일 효율을 깡그리 앗아가는 통에 한 번 붙든 일이 끝나질 않아 마음놓고 놀거나 쉴 시간까지 사라지는 게 가장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휴식과 저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다리마저 불태워 없애버리는 게 번아웃이더군요."  (P.63)


책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오가던 편지에는 남에게 내보이지 못했던 자신의 고민이 조심스레 내비치기 시작했고, 세상 사람들이 김혼비 작가에게 늘 작가와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어쩌면 그렇게 현명하게 잘 적응하느냐 묻지만, 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오래전부터 번아웃에 시달려왔음을 편지에 쓰게 된다. 선우씨, 혼비씨 하는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조차 어색하기 짝이 없었던 두 사람이 자신에게 있는 내밀한 이야기를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내보일 수 있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건 아마도 편지가 갖는 기본적인 속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상대방을 생각하며 단어 하나에도 온 신경을 집중하기도 하지만, 답장을 기다리며 어떤 내용의 편지를 받게 될지 머릿속에서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쓰고 지워지는 경험을 겪게 되는 동안 속절없는 기다림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우리들 각자는 스스로 깨우치게 된다. 더불어 편지란 서로 주고받는 것이지 자신의 편지를 통해 상대방을 이겨먹거나 으스대기 위한 도구로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혼비씨,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꺾이지 않는 몸이었어요. 제가 계속 내일을 기대하며 낙관적으로 살아온 건 대단히 의지가 강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꺾이지 않는 식욕 덕분이었던 거죠. 제 태도나 생각이 개방적이었다면, 많은 부분은 활짝 열린 혀와 위장으로 세상과 만나겠다는 자세에서 왔을 거예요."  (p.175)


단순한 에세이를 통하여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과 편지라는 특별한 양식을 통해 다정한 이에게 상담하듯 조금씩 조금씩 털어놓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아무것도 아닌 듯하지만 편지라는 특별한 형식은 읽는 이로 하여금 과거의 특별한 기억마저 함께 소환하는 까닭에 텍스트에 담긴 의미에 더하여 독자의 경험과 그때의 감정까지 함께 느끼도록 하는 효과를 준다. 특히 인터넷이 없던 아날로그 시대를 살았던 세대에게는 그 시절의 향수를 강하게 느끼게 한다. 더구나 글을 쓰는 일이 본업인 작가에게 있어 편지란 얼마나 유용한 도구이며 얼마나 되찾고 싶은 감성일지...


"더 놀라운 것은 초반에는 (목탁이 필요할 정도로) 조금 헤맸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편지 쓰는 일이 정말 즐거워졌다는 것이다. 이래서 편지를 쓰는구나. 다들 이런 마음으로 썼겠구나. 편지를 쓴다는 것은, 쓰는 동안만이 아니라 쓰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편지를 받을 상대방을 계속 생각하게 되는 일이라는 걸 이번에(이제서야!) 알았고, 떠올릴 때마다 웃음과 기운이 나는 사람을 자주 생각하는 게 얼마나 삶을 즐거운 방향으로 이끄는지를 새삼 온 마음으로 느낀 1년 남짓의 여정이었다."  (p.216)


4월도 다 가고 만 지금은 이팝나무의 계절. 순쌀밥(이밥)처럼 흰 꽃들이 풍성하게 피고, 우리는 이 계절에 배달된 배불렀던 기억들을 꽃잎에 적힌 사연인 양 읽고 또 읽는 것이다. 봄마다 피는 꽃은 지난 기억들을 담은 한 통의 편지. 우리는 그 편지를 사진에 담고 다음에 올 봄을 기다리며 또 한 해를 견딘다. 꽃잎에 담긴 기억의 편지 한 통을 우리는 내년 봄의 자신에게 아쉬운 마음을 담아 부친다. 4월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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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
시가 아키라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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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꼬가 트인 생각이 수로를 따라 외길로 흐를 때가 있다. 논에 물을 대는 모든 봇도랑이 그렇듯 외길로 흐르는 생각은 다른 생각이 끼어들거나 또 다른 생각과 합쳐지지도 않는다. 하나의 결과 혹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질주하는 생각은 대개가 부정적이다. 긍정적이거나 합리적인 생각은 그렇게 조금의 여유도 없이 외길로만 흐르지 않는다. 이따금 본류를 벗어나 겉돌기도 하고 다른 생각과 자연스레 합쳐지기도 한다.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처한 고민이나 상실의 고통 등은 오직 외길의 수로를 따라 같은 길을 반복적으로 헤맬 뿐이다.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시간을 통해 선명했던 그 길을 차츰 지우는 방법뿐이다. 시간이 지운 그 길은 옅은 흔적만 남긴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만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언제든 잊었던 그 길의 흔적이 선명하게 되살아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경험이 되풀이된다면...


"도박에 빠져든 뒤로 남편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걸핏하면 불끈해서 험한 욕설을 퍼붓고 주먹까지 휘두르는 가정 폭력을 저지르곤 했다. 견디다 못해 나는 아야나를 데리고 남편에게서 도망치듯이 집을 뛰쳐나왔다."  (p.33)


시가 아키라의 미스터리 소설 <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는 꽤나 흡입력이 있는 책이다. 시대상을 그린 미스터리 추리물이라는 게 대개 흡입력이 있고 마니아층을 형성한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호평을 받게 마련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기를 등에 업고 마구잡이로 출간되는 미스터리 소설로 인한 폐해는 많은 독자들의 이탈을 부추겨왔던 것도 사실이다. 미스터리 소설의 넓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일본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은 다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실력 있고 참신한 신예 작가의 유입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2017년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로 데뷔한 시가 아키라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 최근 발표한 <너는 속고 있다>는 지금 일본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SNS 불법 사채업'을 소재로 재구성한 미스터리 소설이다.


"사업 실패로 빚더미에 올라앉고 아야나마저 잃어버린 뒤로 사채업의 트러블을 해결하기에 급급해서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은 변함없이 순환하고 있었다. 내가 까맣게 잊고 있던 동안에도 벚꽃은 몇 번이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이렇게 아낌없이 떨어져 흩어졌을 것이다."  (p.307~p.308)


사업 실패 후 폭력적으로 변한 남편을 피해 일곱 살 딸아이를 데리고 도쿄로 도망쳐 나온 싱글맘 누마지리 다카요는 콜센터 일을 했던 경력을 살려 클레임 처리팀의 상담사로 일했으나 산경에 이상이 생겨 결국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자 3개월째 연체된 임대료를 열흘 안에 납부하지 못하면 강제 퇴거를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변변한 직장도 없는 그녀에게 돈을 융통해 주겠다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녀는 결국 SNS로 고객을 모집하는 불법 사채업자에게 매달리게 되는데...


"사채업자라고 하면 살벌하다 못해 끔찍한 폭력과 피 튀기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사채업자들은 '소프트 사채'라는 신조어처럼 겉으로는 말랑하게 예의를 차리는 보통 사람입니다. 이웃처럼 선량한 얼굴의 사채업자라니, 더더욱 피부에 스며드는 오싹함이 있습니다."  (P.325 '옮긴이의 말' 중에서)


생각의 외길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같은 길을 헤매는 이는 오히려 사채의 늪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돈 때문에 궁지에 몰린 사람들은 한 달 이자 9%라는 살인적인 금리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는 데 급급할 뿐이다. 미래의 일은 그다음의 문제일 뿐이다. 당장 처한 상황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사채의 늪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그렇게 더욱 깊숙한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사채업자들 역시 이런 심리를 십분 이용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린다. 시가 아키라의 소설 <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를 읽는 독자라면 채무자의 딱한 사정과 그들의 어리석은 선택에 탄식하며 안타까움에 몇 번이고 손에서 책을 놓게 될지도 모르지만, 작가가 마련한 마지막의 반전에 혀를 내두르게 될지도 모른다. 미스터리 소설의 묘미는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 싶다.


비가 그친 바깥 풍경은 마치 물때를 제거한 유리창처럼 맑고 신선하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우울하지만 덥다 싶었던 기온이 제자리를 찾아서인지 산책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나선 사람들이 유난히 많아 보인다. 경제가 어렵다는데 불법 사채업의 수렁에 빠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아질지 걱정이 되지만 오늘은 일단 선선한 날씨의 일요일 오후. 산책에 나선 저 사람들의 여유로운 표정이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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