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가볍게 읽고 지나쳤던 책이 어느 날 문득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읽게 되는 책은 예전에 읽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를 툭 하고 던져주게 마련인데 그럴 때 나는 택시에 놓고 내린 물건을 다시 찾은 느낌으로 '흠, 이런 게 있었군.' 여러번 되내면서 책에 빠져들곤 합니다. 최근에 내가 읽었던 J.M.쿳시(Coetzee)의 <추락 Disgrace>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윤모 전 청와대 대변인이 자신의 블로그에 썼던 자전적 에세이를 읽는 순간 '그래, 이런 비슷한 주제를 다룬 소설이 있었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입니다.

 

"아이삭스는 부드럽게 말한다. 말이 한숨처럼 그의 입술을 떠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추락하셨죠?" 추락했다? 그래, 추락이 있었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대단하다? 대단하다는 말이 그에게 맞는 말인가? 그는 자신을 모호하고, 점점 더 모호해져 가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역사의 변방에 속하는 인물. 그는 말한다. "어쩌면 가끔씩 추락하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인지 모르지요. 부서지지만 않는다면요."" (p.253)

 

소설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루리 교수.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한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학과 부교수로 있는 그는 50대의 이혼남입니다. 소설의 첫문장인 '그는 이혼까지 한, 쉰둘의, 남자치고는, 자신이 섹스 문제를 잘 해결해왔다고 생각한다.'에는 여러 의미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애적 성향이 강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에는 무관하게 자신의 욕망을 해결해 왔음을 말해줍니다. 게다가 '그는 어렸을 때 여자들에 묻혀 살았다'는 표현은 그가 여자들로부터 떠받듦을 받으며 성장했고 '그의 큰 키와 균형잡힌 골격과 올리브색 피부와 부드러운 머리'로 인해 그는 자신이 원하는 여성은 누구든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던 듯합니다.

 

이 소설의 주된 스토리는 루리 교수가 그의 제자 멜라니와 관계를 갖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자신의 집으로 멜라니를 끌어 들인 루리는 '12살 어린이처럼 가냘픈 엉덩이'를 갖고 있는 멜라니와 성관계를 갖게 됩니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루리 교수는 멜라니와 만남의 횟수를 늘려갑니다. 그러면서 루리 교수는 점차 대담해집니다.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루리 교수는 학과사무실에서 알아낸 멜라니의 아파트로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가곤 합니다. 곤경에 처한 멜라니는 수강을 취소하기에 이르고 멜라니와의 부적절한 관계는 남자친구의 고발에 의해 학교와 멜라니의 아버지에게도 알려집니다. 학교의 진상조사위원회가 개최되고 사과와 자숙을 권고하는 대학의 요구를 루리 교수는 거절합니다. 그는 결국 파면되어 시골에 사는 자신의 딸 루시의 집을 찾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에서도 꾸준히 있어 왔던 흔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루시가 말한다. "값을 톡톡히 치르셨군요. 어쩌면 그녀는 나중에 뒤돌아보면서 아버지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예요. 여자들은 놀랍게도 용서를 잘 하거든요." 침묵이 이어진다. 자식인 루시가 그에게 여자들에 대해서 얘기해 주려고 하는 걸까?" (p.105)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바뀜으로써 스토리는 이제 루시의 이야기로 빠르게 전환됩니다. 루시는 자신의 농장에서 위탁 받은 개를 돌보며 지냅니다. 흑인 원주민의 세력권에서 결혼도 하지 않은 백인 여성이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위태로워 보입니다. 루시는 자신과 함께 살았던 여자 친구 헬렌의 방을 아버지에게 내어 줍니다. 그런데 어느 날 총을 든 흑인 삼인조 강도가 루시의 농장에 쳐들어 옵니다. 그들은 루시가 키우던 개를 죽이고, 루리 교수를 폭행하고, 루시를 성폭행한 후 루리 교수의 차를 훔쳐 도주합니다. 분노한 루리 교수는 경찰에 신고하고 복수를 다짐하지만 루시는 자신의 성폭행 사실을 경찰에게 끝내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여파겠지. 침략의 여파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조금 지나면 몸은 저절로 치유가 되고 그 속에 사는 영혼인 나는 다시 옛 자아를 찾겠지. 하지만 그는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안다. 삶에 대한 즐거움이 꺾여버렸다. 시냇물 위에 떠 있는 하나의 나뭇잎처럼, 산들바람에 날리는 한 알의 민들레 씨앗처럼, 그는 종말을 향해 떠내려 가기 시작했다." (p.163)

 

루시의 농장일을 도와주는 나이든 이웃 원주민 페트루스가 집을 지은 기념으로 루시와 루리 교수를 파티에 초대합니다. 루리 교수는 그곳에서 삼인조 강도 중 한 명이었던 나이 어린 흑인을 발견합니다. 분노한 루리 교수는 페트루스에게 격분하여 따지지만 어린 흑인이 자신의 친척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루시가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밑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내가 둘씩이나 있는 그의 세 번째 부인이 되라는 것이었죠. 루리 교수는 자신의 전처이자 루시의 엄마가 있는 네덜란드로 가서 살면 어떻겠느냐고 루시에게 권합니다. 그러나 루시는 자신의 땅을 페트루스에게 지참금으로 주고 그의 밑으로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집과 개를 돌보는 일은 끝까지 지키겠노라고 말합니다. 강간의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루시는 그것이 마치 그들의 영역에서 살아가기 위한 '세금 징수'와 같은 것이라고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얘야, 화내지 말아라. 그래, 나는 이것이 유일한 삶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동물에 관해서 얘기하자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동물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자. 하지만 균형을 잃지는 말자. 우리는 동물과는 다른 차원의 피조물이다. 반드시 더 높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동물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려면, 죄의식을 느끼거나 보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단순한 아량에서 그렇게 하자." (p.112)

 

법률적 용어로 말하자면 위계에 의한 성추행의 가해자였던 루리 교수는 자신의 딸 루시에 의해 피해자의 아버지로 전락합니다. 루리 교수는 한동안 돌보지 않아 폐가처럼 변한 케이프타운에 있는 자신의 집을 처분하고 그곳에서 있었던 자신의 삶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멜라니의 아버지를 찾아가 만나기도 하고, 연극 공연을 하는 멜라니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도 합니다. 루리 교수는 결국 딸 곁으로 되돌아 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임신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루시의 이웃 중에는 동물 병원을 하며 루시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베브 쇼가 있습니다. 베브 쇼는 주로 치료가 불가능한 동물의 안락사를 담당합니다. 루리 교수는 동물 병원에서 나온 죽은 개의 시체를 자신의 차에 실어 화장장으로 옮기는 일을 합니다. 젊은 시절의 루리 교수였다면 베브 쇼는 결코 쳐다보지도 않을 여인이었지만 베브 쇼의 유혹에 적당히 넘어가는 그의 모습은 어쩌면 이 책의 주제와도 같은 대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그들의 섹스에 대해서, 적어도 자신이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정열은 없지만 혐오감도 없다. 결국 베브 쇼가 그녀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도록, 그녀가 의도한 것은 모두 성취됐다. 데이비드 루리, 그는 남자가 여자한테 도움을 받듯이,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 루시 루리는 어려운 방문으로 도움을 받았다고. 그들이 지치자, 그는 그녀 곁에 누워 이렇게 생각한다. 이 날을 잊지 말자. 이것이 멜라니 아이삭스의 달콤하고 젊은 살 다음에, 다다른 지점이다. 이것이 내가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 아니 이보다 못한 것조차." (p.225)

 

약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이 직접 약자의 입장에 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983년, 1999년 2회에 걸쳐 맨부커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2003년 노벨문학상까지 거머쥐었던 J.M.쿳시는 자신의 소설 <추락 Disgrace>에서 모든 갈등에는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윤모 전 청와대 대변인의 칼럼을 읽으면서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만 한 번의 추락을 경험했던 윤모 대변인은 아직도 약자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나이를 잊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좋은 말을 다 벗겨내고 보면, 바로 그것을 처벌하려고 위원회가 열렸던 것이다.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한 재판. 부자연스러운 행위에 대해, 늙은 씨, 피곤해진 씨, 생기없는 씨를 뿌린 것에 대해. 자연에 반한 것.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탐내면, 종족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이 고발의 밑바닥에 깔린 것이었다. 문학의 반은 그것에 관한 것이다. 종족을 위하여, 나이든 남자들의 무게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젊은 여자들. 그는 한숨을 쉰다. 감각적인 음악에 묻혀, 나 몰라라, 서로를 껴안고 있는 젊은 사람들. 이곳은 나이든 남자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p.286)

 

'나이든 남자들의 무게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젊은 여자들'의 심리를 윤모 대변인은 과연 몰랐을까요? 한 번의 추락으로도 그는 뭔가 깨닫는 게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이르게 되면 그도 분명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날이 있겠지요. 쿳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은 결코 나이든 남자들을 위하 나라가 아닌 듯합니다. 그도 이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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