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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테이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9월
평점 :
지금은 시큰둥하지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이 온 국민의 캐치프레이즈인 양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말에 강한 의문을 품고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누가 지어 낸 말인 줄도 모르면서 사람들은 그 말이 진리이자 정의인 양 떠받들었다. 정말 그랬다. '떠받들었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 더 강조하자면 '신봉하였다'고 해도 좋았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그 말을 내가 심하게 비꼬고 있는 듯 오해하실 분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그런 건 아니다.(주변에는 아직도 그 말을 신봉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기 때문에 혹시라도 나에게 위해를 가할까봐 어쩔 수 없이 덧붙이는 말이다.-나는 비교적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다.)
웃기는 발상이지만 이런 생각을 일관되게 밀어붙여 성공한 나라가 있다. 그건 바로 초강대국 미국이다. 미국의 인기 있는 영화나 소설은 어느것 할 것 없이 미국적인 냄새가 난다. 반대로 말하자면 미국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는 소설이나 영화는 인기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A형(고진감래형)-흙수저로 태어난 어떤 사람이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성공한다는 유형, B형(사필귀정형)-승승장구하던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곤경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자신을 곤경에 빠트린 악의 근원을 모두 제거한 후 화려하게 복귀한다는 유형, 그 외에도 더 있지만 이쯤에서 접고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두 유형에서 어쩐지 서부영화의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나요? 서부영화가 아니라 무협지 냄새가 난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나는 줏대가 없을 정도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금세 수용하는 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은 '가장 미국적인 것'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은 언제나 고정 독자층이 있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근에 읽었던 그의 소설 <템테이션>도 다르지 않았다. 소설의 구성을 간단히 말하자면 위에서 언급한 두 유형을 적절히 섞어 놓았다고 보면 된다. 이 글을 읽는 분은 짐작할 것이다. 하나만으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는데 두 유형을 섞어놓았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고 말이다. 벌써부터 읽고 싶어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람이 두 명이나 보인다.
무명의 극작가인 데이비드 아미티지는 어느 날 그의 에이전시로부터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유명 방송국 FRT에 팔렸다는 꿈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무명 작가의 세월을 견딘 지 십삼 년만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성공을 기원하며 어려운 시기를 견뎌 온 아내 루시와 딸 케이틀린이 있다. 그의 대본으로 제작된 시트콤 '셀링 유'는 그야말로 대박을 친다. 시트콤의 시즌 연장이 결정되고,언론 매체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영화제작사와의 계약이 줄줄이 성사된다.
"사람들은 흔히 성공하면 삶이 편해질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성공하면 삶은 어쩔 수 없이 더 복잡해진다. 아니, 더 복잡해지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더 큰 성공을 거두기 위한 갈증에 자극을 받으며 더욱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바라던 걸 성취하면 또 다른 바람이 홀연히 나타난다. 그 바람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우린 또 다시 결핍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다시 완벽한 만족감을 얻기 위해 모든 걸 걸고 달려든다. 그때껏 이룬 것들을 모두 뒤엎더라도 새로운 성취와 변화를 찾아 매진한다." (p.121)
성공한 사람들이 늘 그렇듯 그의 주변에도 그를 유혹하는 것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유능한 투자 브로커인 바비 바라가 그의 자산 관리를 맡게 되고, 억만장자인 필립 플렉으로부터 '시나리오'에 관한 엄청난 제안을 받는다. 게다가 그는 에미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린다. 갑작스러운 성공에 취한 그는 집과 차를 바꾸고 급기야 아내마저 바꾼다. 폭스텔레비전의 젊고 예쁜 이사 샐리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자 이제 유형 B로 넘어갈 시간이 왔다. 잘나가던 그가 아내 루시와 이혼하고 샐리와 동거를 시작했던 그는 어느 날 표절 시비에 휘말린다.연예인들의 가십이나 캐는 무가지 삼류 기자인 테오 맥콜은 그가 쓴 대본에서 표절의 증거를 찾아 내어 기사화하지만 그에게 우호적인 방송국과 여러 언론에 의해 무마되는 듯했다. 처음에는 말이다. 테오 맥콜은 다른 증거들을 상세히 수집하여 다시 기사화하자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는 금세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내가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애쓸수록 '최악의 거짓말은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이다.'라는 생각이 점점 짙어졌다." (p.285)
방송국에서 해고되고 모든 계약이 취소된 그는 이제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다. 샐리로부터 날아온 이별 통보와 전처 루시에 의한 그의 딸 케이틀린에 대한 접근금지명령. 그는 이제 회복 불능의 위기에 처햇다. 그러나 그의 에이전시 앨리슨만큼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그의 거처를 마련해주고, 상담치료사를 붙여주고, 일거리를 주선하고, 이 모든 음모의 배후를 캔다. 앨리슨의 도움으로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한 그는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다시 서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모든 걸 줄이자 기분이 묘했다. '버릴수록 자유롭다' 같은 뻔한 헛소리가 아니라 확실히 삶이 단순하고 편해졌다. 앨리슨이 마지막으로 맥콜의 칼럼을 읽어주었을 때 느낀 멍한 기분은 여전히 벗어던질 수 없었다. 그저 자동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움직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자주 들었다. 신용카드를 모두 자르거나 노트북컴퓨터를 판 것도 그랬다." (p.347)
그러나 그렇게 끝나버린다면 미국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겠는가. 위기의 순간에 그를 도와줄 구세주가 짜잔 하고 등장한다. 앨리슨의 노력에 의해 그를 나락으로 빠트린 음모의 배후에 억만장자인 필립 플렉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워낙 교묘하게 설계된 계획인지라 반격을 가할 증거를 찾지 못해 안절부절하고 있을 때 그를 나락으로부터 구해준 사람은 바로 필립 플렉의 아내 마사였다. 필립에게 보기 좋게 카운터펀치를 날린 데이비드는 원래의 자리로 복귀한다. 게다가 필립과의 TV 대담을 성사시킴으로써 필립이 거절할 수 없는 거액의 돈도 받게 된다.
"인생은 그런 겁니다. 누구나 선택을 하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상황이 바뀌고요. 그게 바로 '인과율'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내린 결정 때문에 나쁜 일이 생기면 늘 남 탓을 하는 버릇이 있어요. 상황이 안 좋았다거나 사악한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근본적으로 조목조목 따져보면 진정 탓할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걸 알게 되죠." (p.426)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배신했던 투자 브로커 바비 바라와 샐리는 그가 복귀함으로써 다시 연락을 시도하지만 그는 끝내 거절한다. 이제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은 셈인가? 아, 하나가 남았다. 루시와 케이틀린. '데이비드는 루시와 다시 재결합하고 케이틀린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난다면 그건 동화에나 나올 법한 결말이다. 적어도 더글라스 케네디는 그 정도로 뻔뻔한 삼류 작가는 아니다.
"우리는 위기를 통해 믿게 된다.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걸 믿게 되고, 모든 게 그저 순간에 불과한 거라 믿게 되고, 자신이 하찮은 존재에서 벗어나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는 위기를 통해 깨닫게 된다. 싫든 좋든 우리는 누구나 나쁜 늑대의 그림자 아래 있음을,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는 위험 아래에 있음을, 우리 스스로가 자신에게 행하는 위험 아래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p.451)
어떤가? 미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다못해 버터 냄새로 속이 니글거리지 않는가. 이로써 '가장 미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는 말이 증명된 셈이다. 그것은 어쩌면 문화적 토대가 부족한 미국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내러티브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더하여 그들에게는 돈이 있지 않은가. 천문학적인 액수의 광고로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헐리우드식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주는 더글라스 케네디에게 영광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