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 갈수록 신경이 예민해지는가 아니면 무뎌지는가 하는 문제를 이따금 생각해보게 된다. 내 주변에도 명예퇴직을 한 친구들이 더러 생겨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의 신경은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이 더러 사달이 나는 경우도 종종 있고, 그들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정도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하는 불만도 불쑥 터져나오게 된다. 이런 상황을 여러 차례 겪다 보면 인간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간관계에 있어 점점 더 예민해진다는 결론에 이르곤 한다. 물론 인간이 태어날 때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를 놓고 성선설이 옳다 성악설이 옳다 하면서 결론도 나지 않는 무의미한 논쟁을 계속하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어떤 통계를 낼 수 없으니 인간은 각자 다 다르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만. 세월에 따라 점점 무뎌지기도 하고 예민해지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마다 달라지기도 하고...

 

그러나 산업화 시대를 겪어온 우리 세대는 지금 젊은 친구들이나 어린 학생들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조금 힘들었다고 할지라도 빠른 변화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조금 덜 받지 않았을까 싶다. 그 당시에는 큰 변화라는 게 적어도 한 세대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었던 까닭에 사회 구성원들이 그 변화에 적응하고 학습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변화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미처 적응도 하지 못했는데 또 다른 변화가 닥쳐오는 까닭에 변화에 적응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로 인해 사회 구성원이 받는 스트레스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기 때문이다. 어린 학생들이나 젊은 친구들이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접는 까닭도,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을 갖는 까닭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전에 눈이 조금 내렸다. 아들은 방학이 무색하게 쉬는 날도 없이 학원을 나가고 있다. '희망'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요즘, 세월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신경이 무뎌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의 변화를 따라갈 수 없어 자포자기하는, 그런 인간들이 늘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신년인데 희망을 말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어쩌면 그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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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례(가명) 할머니를 만나던 날은 투명한 겨울 햇살이 사방에 가득했었다. 무겁지 않은 철대문을 지나면 잘 가꾸어진 잔디밭이 나오고 누르스름한 잔디밭의 가장자리를 따라 키가 낮은 자두나무가 듬성듬성 자라 있었다. 한낮에도 햇살을 시샘하는 바람이 강하게 불었고 차에서 내린 나는 소슬한 추위를 느꼈다.

 

낯선 이방인을 맞았던 건 이 집의 주인이 아닌 반려견 누리였다. 잔디의 누런 빛깔과 흡사한 털을 가진 누리는 마당 한켠에 기척도 없이 누워 있다가 이방인의 출현에 짖지도 않고 조용히 다가왔던 것이다. 나는 커다란 덩치의 누리에게 겁을 먹었던 탓에 뒤로 한 발짝 물러섰고, 때 마침 현관문을 열고 나온 김순례 할머니를 향해 어정쩡한 인사를 했던 듯하다.

 

"어서 오세요. 춥지요?"라고 묻는 할머니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답을 미룬 채 누리를 향한 경계 태세를 여전히 풀지 않고 있었다. "괜찮아요. 안 물어요. 누리야, 이리 와!" 할머니의 다정한 부르심이 반가왔던지 누리는 이방인에 대한 경계를 풀고 주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내가 누리의 뒷모습에서 발견했던 것은 뒷다리 두 개 중 하나는 쓰지 못하고 단지 누리는 세 개의 다리로만 걷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누리가 나이가 많은가 봐요?" 하고 묻자, 할머니는 "많지요. 많고 말고요. 그래도 쟤가 집을 나갔다가 3년만에 돌아온 애예요." 타령을 하듯 대답을 하던 할머니는 우리를 따라 현관에 들어서던 누리를 어루만지며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내가 눈을 치켜뜨면서 "그래요?" 하고 놀랍다는 듯 묻자 할머니는 누리의 지난 삶을 조곤조곤 들려주셨다.

 

도시에서 아파트에 살았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누리의 비만이 걱정이 되어 시골로 이사를 결심했다고 했다. 시골에 집을 짓고 이사를 한 후 누리가 마음껏 뛰어놀도록 목줄을 하지 않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누리가 사라졌고, 놀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백방으로 누리를 찾았지만 결국 찾을 수가 없어 반 포기 상태로 지내셨단다. 그런데 3년쯤 지난 어느 여름날 바짝 마른 체구의 누리가 집으로 돌아왔고, 심하게 하혈을 하는 누리를 살리기 위해 곧바로 동물병원을 알아보고 자궁을 들어내는 큰 수술을 했다고 했다수의사로부터 가정집에서 웬 새끼를 그렇게 많이 뽑았느냐는 잘 알지도 못하는 타박과 꾸지람을 들어가면서 누리를 살렸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누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 여파로 누리는 뒷다리 한쪽을 영영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겨울이 싫어져. 땀을 뻘뻘 흘려도 여름이 좋지 겨울은 정말 싫어. 며칠 전에는 제주도를 다녀왔는데 거기는 가는 곳마다 꽃이 만발한 게 봄이야, . 그래도 거기는 섬이라 짠내가 나고 사람 살기에는 좋지 않더라. 그냥 며칠 다녀오는 건 괜찮지만 말이야." 누리의 이야기를 마친 할머니는 슬쩍 다른 이야기를 하며 방한 조끼를 꺼내 입으셨다. 자신의 얘기인 줄 아는지 현관에 턱을 괴고 누워 있는 누리는 큰 눈을 껌벅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귀를 쫑긋 세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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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의 대표주자가 방탄소년단(방시혁이 탄생시킨 소년단: BTS)이라면 K-Movie의 대표주자는 봉탄배우단(봉준호가 탄생시킨 배우단: BTB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BTA라고 해야 할까?)이 아닐까 싶다.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방탄소년단의 방시혁 대표는 뒤로 빠진 채 전면에 나서지 않지만 봉준호 감독은 여러 시상식에서 배우들보다 훨씬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는 점이랄까. 그래도 암튼 송강호를 비롯한 박소담, 조여정 등 영화 '기생충'에서 봉준호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여러 배우들이 영화의 메카인 미국에서도 유명세를 타는 걸 보면 왠지 뿌듯한 느낌도 들고, 한국인의 저력이랄까 잠재력이랄까 뭐 그런 게 있는가 보다 하고 생각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국민의 우수성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닌 듯하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종합우승은 말할 것도 없고, 케이팝을 비롯한 한류 현상은 전 세계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다만 국민의 우수성에 비해 정치인들의 역량은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혹자는 이승만이나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를 일삼았던 정치인들 덕에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소가 웃을 일이다. 이런 헛소리를 공공연하게 떠벌리는 작자들을 가만히 살펴볼라치면 그들의 머릿속에는 국민 개개인의 우수성은 숫제 존재하지 않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고 정치인들에 대한 우상화만 가득하다. 박정희를 반인반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반인반수라면 모를까.

 

채 백 일도 남지 않은 총선. 우리는 또 어떤 정치인들을 뽑고 자신의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다는 후회를 하게 되지나 않을까. 선거 때가 되면 박정희의 망령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전두환에 대한 헛된 충성심이 국민 개개인의 뇌를 흔들어놓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국민들의 의식 수준은 나날이 높아지는데 정치인의 수준은 나날이 퇴보하는 듯해서 하는 말이다. 미세먼지 탓인지 가슴만 답답했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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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든 개인이든 몰락의 시작은 무분별한 감정의 표출에서 비롯되는 듯 보인다. 미국이 이란에게 보여준 솔레이마니 사령관에 대한 표적 살인과 그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취해진 이라크 미군기지에 대한 이란의 미사일 공격은 비단 어느 한쪽의 몰락으로 끝이 날 것 같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 서방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전력이 최강이라고는 하지만 미국 본토와의 거리가 멀고 이란과의 핵합의 파기나 선제적인 공격에 대한 부당함을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공유하고 있는 만큼 동맹국에 대한 협조를 이끌어내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중동지역에서의 반미감정이 확산되는 것도 미국에게는 불리한 점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다혈질적인 면모를 그대로 드러낸 미국 최대의 실수라고 아니할 수 없다. 어쩌면 이번 사건으로 인해 미국과 이란 양국은 몰락의 길로 서서히 진입할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예는 무수히 많지만 최근 국내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진중권 씨에 대한 논란도 한 예가 되지 않을까 싶다. JTBC 신년 토론회에 참여했던 진중권 씨는 자신의 몰락이 마치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 부당한 처우에서 비롯된 것인 양 세상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보기에 따라서는 부끄럽거나 참담할 정도로 추한 모습이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시청자의 입장에서도 그러했으니 곁에서 지켜보던 유시민 이사장의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인간이 이렇게도 처참하게 무너질 수 있구나!' 하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토론장에서 보여준 유시민 이사장의 태도가 꼭 옳았다고는 보기 어렵다. 자신을 공격하는 진중권 씨에 대해 적당히 화를 내고 맞장구를 쳐줘야 하는 게 옳은 태도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네가 어떤 말로 나를 공격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유 있는 척,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한껏 여유를 부린다는 건 감정을 표출하는 당사자의 심정을 더욱 참혹하고 수치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진중권 씨의 참담한 모습은 한 인간의 몰락을 여실히 보여준 안타까운 현장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절제하지 못한다는 건 자신의 감정에 그 사람의 이성이 통째로 잠식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 경전 중 능엄경에 이르기를 "내가 손가락을 누르면 해인(海印)이 빛을 발하지만 그대가 마음을 움직이면 번뇌(煩惱)가 먼저 일어난다."고 했다. 인간이 오욕칠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오욕칠정으로 인해 자신의 사람됨을 잃는다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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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밤새 뒤척였다. 한 해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는다는 게 그저 의례적인 행사일 뿐 내가 과거에 흘려보냈던 무수히 많은 나날들과 하등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남들처럼 뭔가 근사한 새해 다짐도 하고 형식적으로나마 덕담도 나누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부담(그야말로 부담이다)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이런저런 고민이 나를 푹 잠들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게 아닐까. 몇몇 새해 다짐인들 반드시 지켜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뒤돌아보면 지난 한 해 나는 시골에 사는 많은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내 삶의 방향이 바뀌고, 울고 웃고 공감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분들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기쁘고 행복했던 기억보다는 슬프고 안타까웠던 일들이 훨씬 많아서 나 역시 그 절절함에 가슴이 젖었더랬다. 물론 새해 첫날부터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적절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난해 내가 만났던 한 분 한 분 어르신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내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고영순(가명) 할머니를 만났던 날은 겨울 햇살이 무척이나 따사로웠던 하루였다. 산간 지역이라 아침 기온은 낮았지만 낮이 되자 좁은 마당의 누렇게 메마른 잔디 위로 햇살이 한가득 쏟아졌다. 방문 앞에 놓인 허술한 평상에 믹스 커피 한 잔씩을 들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앞으로 십 년이 고비가 아니겠어? 그쯤 되면 갈 사람은 다 갔을 테고 마을도 사라지겠지." 하면서 쓸쓸한 표정을 지으셨다. 방 안에는 점심을 함께 하기 위해 모인 어르신들이 가득했다. "저 사람들도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속으로는 다 안 아픈 데가 없는 사람들이야. 골골 십 년이면 그것도 끝이 나겠지." 평상 옆으로 놓인 빈 항아리들이 쓸쓸함을 더했다.

 

오늘은 2020년의 첫날, 하늘은 끄물끄물 어둡고 나는 그날처럼 믹스 커피 한 잔을 책상 위에 놓고 있다. 삶이 부실해지는 이유는 내가 단단하지 못해서라고 자책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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