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발표된 '칠콧보고서'는 아마도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성과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런 결과를 도출해 낸 영국 국민의 위대함과 확고한 신념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못할까?'하는 자괴감도 함께 말이죠.

 

영국의 이라크전 참전 및 진행과정을 규명한 '칠콧보고서'는 2009년 6월 조사위원회가 발족된 지 7년만의 결과물이고, 최종 결론에 이르기까지 문서 15만 건을 검토하고 150명 이상의 증언을 듣고 그때마다 관련자들에게 반론 기회를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조사비용도 만만치 않았죠. 150억 원이라는 큰 돈이 들었으니까요. 칠콧 위원장을 포함한 6명의 조사 위원들이 그동안 들인 노력 또한 무시할 수 없겠죠. 그렇게 만들어낸 결과물이 '칠콧보고서'이며 12권의 보고서에 260만 단어가 쓰였다는군요. 실로 어마어마하죠? 읽는 데만 9일이 걸린다고 하니 참으로 방대한 조사보고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엄청난 결과물 또한 놀랍지만 그들이 내린 결론은 "영국은 이라크를 평화적으로 군축시킬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소진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을 따라 이라크에 침입하기로 선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영국의 정책판단에 오류가 있었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게다가 영국의 이라크전 참전이 오류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며, '전적으로 부적절하게' 세워진 계획과 함께 실행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던 사담 후세인 이라크 독재정권의 대량살상무기(WMD)에 관해선,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정부가 '정당화될 수 없는 확신'에 찬 평가를 국민들에게 제시했으며, 군사 계획과 전쟁 후의 파장에 대해 제대로 숙고하지 않았다는 날카로운 지적도 잊지 않았습니다.

 

보고서가 공개된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라크에서 형제를 잃은 한 여성은 블레어 전 총리를 향해 '세상에서 가장 최악의 테러리스트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200명이 넘는 영국인이 사망하고4400명의 미국인이 전사하고 10만 명 이상의 이라크인이 사망했으니까 말입니다.

 

이러한 모든 결과를 가능케 했던 것은 진실과 정의를 사랑하는 영국 국민의 일치된 신념이었을 것입니다. 진실을 밝힘으로써 입게될지도 모를 자국의 경제 안보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언제든 밝혀진다'는 강한 믿음을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었던 게지요. 아무리 오래 전의 일이라도 정부의 정책판단에 있어 잘못이 저질러졌다면 반드시 엄정한 평가를 내린다는 영국의 철학과 신념을 다시한번 보여준 이번 보고서가 그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남을 테지만 무엇이든 숨기기에 급급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할 때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비전투병 수천 명을 파견한 우리나라는 그런 조사를 하자는 건의도 없었고, 명백한 사건을 조사하는 세월호 조사에서도 어떻게 하면 잘못을 감추고 서둘러 종결지을 수 있을까 궁리하는가 하면, 메르스 사태가 종식된 후에도 3명의 확진자가 더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바람에 보고서 한 장 쓸 수 없는 우리나라의 이같은 현실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사드 배치가 확정된 지금, 만약 그 결정이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했었다면 우리는 미래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칠콧보고서'와 같은 따끔한 지적을 할 수 있을까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마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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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6-07-09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우리 한국/한국인한테는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봅니다. 그저 우리 한민족은 ‘음주가무’나 ‘주색잡기’에 능한 게 최대의 장점이죠. 모든 지표며 통계가 세계 1위를 뒷받침하고 있는데 아무도 반박 못합니다. 걍 우물 안에서 우리끼리 물어뜯고 복닥복닥 지지고 볶고 하다가 자멸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게 역사 혹은 신이 우리한테 부여해준 임무 같습니다. 좋은 글 읽고 정말 죄송합니다.

꼼쥐 2016-07-10 10:31   좋아요 1 | URL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태어나서 지금껏 이렇다 할 변화를 겪어보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죠. 그게 지겨운 거고, 그런 무력감이 싫은 거죠. 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모두가 그런 무력감에 휩싸여 자조 섞인 말만 한다면 이 사회는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나부터 나아지려는 노력이 없다면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걸 저는 잘 압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저는 무엇인가 조금씩 꿈적거리고 있습니다. 큰 변화는 아니지만.

김도연 2016-07-26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저는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입니다. 학기말 고사가 끝나고 지망 대학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친구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늘 세상에 대한 분노가 앞섭니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친구들이 진지하게 해외 유학이나 이민을 고려하면서 이 `대책 없는` 나라를 떠나려고만 합니다. 우리나라는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한 걸까요? 보다 좋은 나라를 위해서 언론계에 종사하고 싶은 것이 제 꿈이었는데, 요즘 들어 이 모든 것들이 허망해보이기만 합니다. 쓰신 글을 읽고 현명한 조언을 해주실 거라 생각이 들어 댓글 남깁니다.^^

꼼쥐 2016-07-28 16:1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렇게 어린(?) 학생이 그런 대견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 아직 대한민국이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게 됩니다. 지금은 여름방학이지만 고3이니 방학을 온전히 누리지는 못하고 학교에 나가 비지땀을 흘리고 있겠군요. 곧 수시 지원을 위한 자소서도 준비해야 할 테고 말이죠.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지만 그게 더럽다고 아무도 그걸 치우려 들지 않는다면 온 마을이 또는 온 나라가 더러워지는 건 순식간의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는(가급적 많은 사람들이면 더 좋겠지만) 남아서 이 나라의 잘못된 부분을 개혁하고 후손을 위해 희생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부끄럽게도 제 여동생은 이민을 가서 다른 나라에 살고 있지만 그곳에서의 생활도 만만한 것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오늘 김영란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었습니다. 이 법이 만능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깨끗하고 공정한 사회로 가는 첫걸음인 셈이지요. 그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도 다 사람의 몫입니다. 김도연 학생처럼 현명한 사람들이 보다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

김도연 2016-08-03 14:5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해서 좋은 사회인이 되겠습니당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