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책읽기 - 세상을 이해하는 깊고 꼼꼼한 읽기의 힘
로버트 P. 왁슬러 지음, 김민영 외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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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쓰인 소설은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하듯이 우리가 읽었던 어떤 평론은 우리를 과거의 기억 속으로 이끌고 들어갈 뿐만 아니라 그 기억으로부터의 출구를 도무지 찾을 수 없게 만든다. 저자가 나의 생각을 정확히 대변하는 듯도 하고 소설을 읽던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하나하나 불러내는 듯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여라도 저자가 다루는 어떤 소설이 아직  내가 읽지 못한 소설이라 할지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그 소설을 읽게 되고 과거의 기억으로 변해버린 저자의 평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되짚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미지와 스크린이 우리의 언어를 대체하고 있는 디지털 시대에 언어와 이야기의 중요성을 말한다는 건 시대에 한참이나 뒤진 사람으로 치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험한 책 읽기>의 저자인 로버트 P. 왁슬러 교수는 디지털 시대에 사는 우리가 점점 언어적 존재로서의 입지를 잃어가고 있음을 몹시 우려한다. 우리의 뇌가 깊이 읽고 사고하는 '읽는 뇌'에서 스펙터클과 표면적 감각만 탐하면서 점점 우둔해지는 '디지털 뇌'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우리가 체험하는 세상은 환영과 실제 사이의 경계, 원본과 복사본 사이의 경계, 허구와 일상 사이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고 둘 사이의 벽은 점차 약해져서 급기야 우리는 '오프라인의 삶'보다는 '온라인의 삶을 선호하고 순간적인 지식의 습득만을 추구하게 된다고 진단한다.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우리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지 못하고 우리를 둘러싼 인간 공동체의 삶을 부정하는 불완전한 인간으로의 전환. 디지털 시대의 도래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독서를 통제할 수 있기에 독서는 우리의 필요와 리듬에 따라 조정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주관적이고 연상적인 충동을 충족시키는 데 자유롭다. 이를 위해 내가 만든 용어가 바로 '깊이 읽기', 즉 책을 느리고 사색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단어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에 접근하여 우리의 삶을 꿈꾸는 것이다." (p.10)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지향하는 바는 명확하다. 이야기의 중요성을 일깨움으로써 우리를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집안에서 집 밖으로 나오게 하고, 불편하고 복잡하다고 여기는 공동체를 향해 손을 내밀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을 찾자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스스로의 특이성(개인적 자아)을 발견하고, 공동체와의 연대감(사회적 자아)을 확인하며, 익숙함이나 낯섦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언어 내러티브를 통해 과거와 미래를 연결 짓기도 한다.

 

"이야기는 무엇이 인간 세계에서 지속되며 무엇이 이 세상의 인간을 만들어내는지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완전한 인가으로서 우리의 삶이 가진 불안정함, 그리고 우리의 나약함과 평범함이다. 반면 명멸하는 순간의 산만함 속에서 정보와 데이터는 마치 그 순간 자신이 모든 것을 아는 신神인 것처럼, 군주로 군림하며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킨다." (p.291)

 

디지털 시대의 개인은 자신의 삶이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개인은 절대적인 자아 찾기에 골몰할 뿐 공동체 속에서의 자신인 상대적 자아에는 관심이 없다. 오프라인에서의 관계 맺기에 취약한 현대인의 단점이기도 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문학의 '깊이 읽기'와 '꼼꼼히 읽기'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며, 특히 내러티브를 가진 소설은 우리가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며,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유한한 생명체인 인간이 광대한 시공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의미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비트 단위로 쪼개기를 좋아하는 디지털 시대의 현대인이라면 더더욱 자신의 삶이 인류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 알 수 없게 되며, 그럴수록 우리는 순간적인 쾌락이나 표면적 관계를 중시하게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창세기,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조지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척 팔라닉의 <파이트 클럽>,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깊이 있게 분석함으로써 독서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한다.

 

"이 책의 저자인 왁슬러는 책이 우리 인간의 유한함, 세상 속에서의 우리 인간의 위치, 타자와의 관계 등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 등 생각하면 숙연해지고 골치 아파지는 문제들을 성찰해보도록 촉구하는 것이 바로 책이라는 것이다. 몰랐다면 '행복'했을 수 있지만, 한 번 알고 나면 잠들어 있던 우리의 인식을 일깨우는 것이 바로 책이다. 때문에 책은 '위험'하며 그 '위험함'이야말로 책의 미덕이라는 것이 왁슬러의 주장이다." (p.308 '옮긴이의 말' 중에서)

 

나는 그 위험한 것을 오늘도 신줏단지 모시듯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남몰래 들춰 보고 있다. 어떤 혜택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읽는 인간으로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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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 권기태 장편소설
권기태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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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남아공 출신의 괴짜가 있다. 미래 과학이나 우주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한 번쯤 들어보았음직한 이름, 그의 이름은 앨런 머스크이다. "(나는)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봅니다. 그러한 가치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면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지불합니다. 나는 돈이라는 것이 사회(다른 사람들)가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흐른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던 그의 말은 진실일까? 앨런 머스크의 말은 일정 부분 진실이라고 나는 믿는다.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는 특권은 그 희귀성 때문에 사람들의 꿈이 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인해 더 큰 꿈으로 자라기도 하기 때문이다.

 

권기태의 소설 <중력>에는 우주인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책을 읽는 독자들은 어쩌면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을 양성하기 위해 260억 원이라는 거액을 투자했던 2006년의 일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나라 국민 전체의 꿈이자 최종 후보로 올랐던 고산, 이소연 두 사람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2007년 9월 최종 후보자로 낙점되었던 고산 씨는 2008년 3월 관련 보안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이소연 씨로 교체되고 만다. 우주선 탑승까지 한 달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박사과정에 있었던 이소연 씨는 그렇게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유명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2012년 8월 미국으로 건너가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밟았고, 이듬해에는 한국계 미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에 정착하였다. 그와 함께 우리는 260억 원을 들인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을 잃었고, 이소연 씨에 대한 먹튀 논란과 거센 비난이 이어졌다.

 

"나는 내 속에 열정이 숨어 있는 것을 안다. 가끔은 달궈진 마음을 온통 쏟아부을 그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을. 그럴 때 나는 내 몸 이상이며 내 마음 이상의 존재가 된다는 것을. 그런 꿈 없이는 가능성의 흥분이 생겨나지 않는다. 만일 내가 비행기를 만들고 싶다면 가장 먼저 지녀야 할 것은 엔진이나 두랄루민 패널이 아니다. 저 하늘 너머에 대한 상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38)

 

소설에는 생태보호연구원의 과장인 이진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퇴직한 아내와 딸 둘이 딸린 가장이다. 대학 시절부터 우주인이 되는 꿈을 꾸었던 그는 석사 전공을 식물학으로 정하고 나서는 우주선 적재함에서 여러해살이 식물들을 키우는 상상을 하면서 마음 속에서 우주 정원사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우주인이 되기 위해 한국에서의 전기공학연구원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가 항공공학을 전공하는 김태우도 등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유일한 문과 출신이자 '투어리스트'라는 벤처 회사에 다니는 정우성, 유일한 여성 후보이자 마이크로로봇연구단의 연구원인 김유진이 이진우, 김태우와 함께 최종 후보가 된다.

 

"생각해보면 나는 경쟁심도 만만치 않았고 질투를 하기도 했다. 낙오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속이 부서지는 느낌도 받았다. 하지만 남이 잘 해놓은 것이 사라지기를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파괴돼서라도 나와 비슷해진다면 하고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게 공평하고, 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더라면 나는 이 정도만큼도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p.309)

 

네 사람은 최종 후보자가 되기 위해 끝없이 경쟁하고 치열하게 노력한다. 그 과정은 혹독하다. 작가는 너무 세밀하다 싶을 정도로 전 과정을 집요하게 다룬다. 그리고 매 단계를 넘어설 때마다 그들 각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어떤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계속해서 되짚는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들 각자의 인생과 흡사하다. 좌절하고 낙담하면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용기는 계속할 힘이 아니다. 힘이 없어도 계속하는 것이다. 우레 같은 외침만 용기가 아니다. 쉬었다가 다시 해보자. 나지막이 속삭이는 것도 용기다." (p.318)

 

소설을 구상하고 취재를 시작한 지 십삼 년 만에 출간되었다는 이 소설은 작가가 집필하는 사 년 동안 적어도 서른다섯 번을 개고했다고 한다. 실로 지난한 작업이었음을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토로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답답하거나 어둡지 않다. '이 겨울이 지나면 우리의 희망은 응달이 걷힌 눈처럼 녹아서 또 시내로 흐르고, 강이 되어서 봄이 숲에 들게끔 숨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작가의 바람처럼 이 소설을 읽게 될 많은 사람들의 꿈도 그렇게 영글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어쩌면 가능성을 먼저 생각함으로써 지난한 과정을 참게 되는지도 모른다. 중력은 날아오르려는 자에게 큰 짐이 되지는 못한다. 중력조차 가벼워지는 당신의 꿈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작가는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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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왕은 안녕하시다 1~2 - 전2권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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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능청스러움에 깜박 속아 넘어갔지 뭔가. 노량진역 헌책방에서 구입한 <국역 연려실기술> 전집 사이에 이 소설의 출처가 된 오래된 원고가 끼어 있었다나.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꾸준히 전해 내려오면서 여러 사람이 보태고 고쳐 쓴 낡은 원고를 바탕으로 작가는 그저 현대에 맞게 고쳐 썼을 뿐이라며 구라를 치는 바람에 순진하기 그지없는 나로서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작가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판인데 책이라면 사족을 못쓸 작가가 어느 날 우연히 구입한 책자 사이에서 낡은 원고 하나를 발견했고, 그 원고의 내용이 여간 탐나는 게 아니어서 현대에 맞게 번역과 각색을 하게 되었다는 말에 책을 400쪽이 넘는 두 권의 책을 다 읽는 동안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사실이겠거니 생각하면서 말이다. 빌리가 애완지구인으로 트랄파마도어 행성에 납치되었었다는 커트 보네거트의 그럴듯한 구라에도 넘어가지 않았었는데...  

 

"이사를 하고 난 뒤 나는 틈날 때마다 '소설'을 노트북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원문에 들어 있는 감정과 감각, 시대정신을 손으로 직접 느껴보고 거리를 좁혀보려 했던 것이지만 과정이 길어지면서 나 또한 자연스럽게 내 나름의 편집과 번안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 소설은 원래 그런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불가해한 힘을 가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1권 p.13)

 

사실 지금 이 세상에 없는 역사적 인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 모두 케케묵은 역사서 속의 인물들이라는 인식을 독자들의 뇌리에서 지운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므로 역사소설을 읽는 독자와 소설 속 인물들 간에는 항상 일정한 거리, 혹은 괴리감이 형성되곤 한다. 그러므로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누구나 그러한 괴리감을 없애기 위한 장치를 이중 삼중으로 설치한다. 그렇게 해도 눈치가 빤한 독자들을 속여먹기에는 역부족일 때가 많다는 얘기다. 성석제 작가는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 조치로 소설의 앞머리에서부터 구라를 친 것이다. 이 책이 마치 먼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야사일 뿐이고 자신은 그저 이야기의 전달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굳게 믿을 수 있도록.

 

각설하고, 조선 숙종 시절로 시간을 되돌려 보면 독자들은 소설의 화자가 되는 성형을 만나게 된다. 기생 할머니 밑에서 자라 '장안에 호가 난 알건달에 파락호'로 이름이 높은 '성형(成衡)'은 스승의 심부름을 갔다가 송시열의 집 앞에서 집을 지키는 하인배의 다리 밑으로 기어가는 수모를 겪는 것으로도 모자라 길바닥의 개똥을 먹어야 할 위기에 처한다. 그 위기를 구해준 인물이 장차 숙종이 될 세자인 소년 숙종이었다. 그 인연으로 소년 숙종과 성형은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고 급기야 의형제를 맺기에 이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에 오르게 된 세자 이순(李焞). 왕의 부름을 받은 성형은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미관말직으로 입궐하여 닳고 닳은 신하들 사이에서 어린 왕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된다.

 

성형은 양반의 자제이기는 하지만 북벌을 꿈꾸었던 임경업 장군을 따라 사라진 아버지로 인해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기생인 할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한양 제일의 기생집을 운영하며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였던 할머니 덕분에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성형. 세상 물정 모르는 천방지축의 성형이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는 궁궐 깊숙이 뛰어들면서 보게 되는 남인과 서인의 당쟁, 대비와 대왕대비, 계비인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로 알려진 장옥정 간의 세력 다툼 등 숙종 치하 46년의 역사가 방대한 사료와 함께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독자들의 시선이 성형에게로 과도하게 쏠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성형으로 인해 역사 속 실제 인물이 더 입체적으로 살아나고 성형 역시 여러 무술을 익혀 검계의 우두머리가 되는 설정을 취함으로써 오래전 무협지를 읽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도 한다.

 

"아버지라는 스승을 통해 배운 무공이 어느 경지에 다다르게 되자 세상이 달라 보였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작고 미미한 것들의 움직임이 환하게 눈에 들어왔고 그런 것이 대국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빠르다고 생각했던 것이 느리게 보였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은 곧 따라잡을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몸은 금강석처럼 단단해지고 머릿속은 차곡차곡 정리된 지식과 논리로 빠르게 돌아갔다." (2권 p.126)

 

열네 살에 즉위하여 46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신권(臣權) 세력을 자주 교체하는 '환국(換局'을 유도한 것으로 잘 알려진  까닭에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숙종 재위 기간은 어쩌면 독자들에게도 익숙할지도 모른다. 책이 아니더라도 영화와 드라마, 연극이나 뮤지컬을 통해 여러 번 접해보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진부하다거나 낯익게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은 성형이라는 가공의 인물이 약방의 감초처럼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역사 속 인물들을 작가의 재치와 유머로 재탄생시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명이든 아니든 허구적으로 변용되거나 창작되었으며 역사상 실재했던 인물과는 같지 않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그럼에도 당대의 창작물과 기록물에 힘입은 바 큰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 이긍익의『연려실기술』, 김천택의『청구영언』, 작자 미상의『 인현왕후전』『박태보전』『박태보실기』 등이 대표적이고 그 외의 수많은 문집과 내가 어릴 때 단편적으로 만난 사랑방에 떠도는 이야기들이 소개가 되었다. 그 기록 속의 격렬하고 치열하고 오욕칠정에 사로잡힌 인정을 숨김없이 묘사하는, 가혹하리만큼 아름다운 문장들이 이 소설을 계속해서 쓰게 만들었다." (2권 p.418~p.419 '작가의 말' 중에서)

 

성석제의 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익숙했던 시대적 배경과 인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역사적 재발견의 시간을 갖게 된다. 남인에서 서인, 서인에서 다시 남인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왕은 숱한 목숨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두려운 존재로 변해가고 의형제였던 성형과 왕의 관계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마음에 두었던 여인 장옥정이 왕의 여자가 되는 과정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성형의 마음을 그려냄으로써 소설은 권력과 부에 대한 욕망의 그러데이션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을 펼친 독자가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까닭은 성형이라는 가공인물을 통해 역사 속 인물을 생생하게 되살릴 뿐만 아니라 작가의 능청스러움에 독자 역시 깜빡 속아 넘어가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허구라는 걸 까맣게 잊고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인 양 느꼈던 건 내가 남보다 더 순진하기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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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체험판)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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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아무도 없는 계단을 올라본 사람은 알 것이다. 계단의 난간과 난간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1층 로비의 여린 불빛, 그것은 어쩌면 까마득한 높이에 대한 공포이자 기우뚱 난간 옆으로 쓰러짐으로써 삶과 죽음의 아득한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강한 유혹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삶의 한쪽 끝을 부여잡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 그와 같은 불안은 우리 곁에서 조용히 거닐다가 농밀한 침묵이 내려앉는 순간 아득한 공포로, 혹은 강한 유혹으로 우리를 일깨우곤 한다.

 

김영하의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에는 '여행'이라는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박사학위를 준비하면서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맡고 있는 한선과 짧았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수진. 말하자면 그들은 오래 전의 연인이었다. 지금은 상대방의 생일마저 기억에서 희미해진. 그러나 수진은 자신이 결혼한다는 사실을 한선에게 알린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게 예의라고 생각해서. 한선은 수진에게 같이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담긴 끈끈하고 강한 미련을 수진에게 어필하면서.

 

그러나 결혼을 이 주 앞두고 마지막 이별 여행을 가겠다고 했던 수진은 연락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한선은 수진의 집으로 찾아가고 백화점에서 산 혼수품을 들고 귀가하던 수진을 불러 세운다. 예상치도 않았던 한선의 출현에 수진은 들고 있던 쇼핑백을 놓쳐버리고 만다. 그 바람에 쇼핑백 안에 들었던 그릇이 와장창  깨져버리고, 주차 공간이 없어 잠시 이중 주차를 했던 한선의 차를 빼 달라는 경비 아저씨의 요청에 수진은 어쩔 수 없이 한선의 차에 오른다. 가까운 데서 차나 한 잔 하자던 한선은 느닷없이 고속도로로 내달렸고 수진은 자신의 엄마와 예비 남편으로부터 여러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는다.

 

"전화를 끊자 한선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어떤 얇고 끈적이는 막을 찢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태연히 거짓말을 했고 다른 남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다. 수진은 눈을 감은 채 그동안 꼿꼿하게 긴장하고 있던 머리를 등받이에 기댔다. 고단한 하루였다." (p48)

 

들어가야 한다는 수진의 요구를 무시한 채 납치하다시피 하여 동해안에 다다른 수진과 한선. 둘은 차에서 내려 인적이 없는 포구의 방죽을 걷게 된다. 한선이 벌인 돌발행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던 수진은 한선에게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른다. 그러는 수진을 힘으로 제압한 한선. 어쩌면 한선은 자신과의 관계를 정리한 채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수진이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시련? 그런 게 아니라 모래언덕에서 아래로 계속 미끄러져 내려가는 기분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힘을 내서 다시 올라가고 싶은 기분도 아니라는 거야. 올라가봤자 모래언덕일 뿐이야. 그 너머엔 또다른 모래언덕이 있겠지." (p.42)

 

"내 인생이 TV 드라마였다면 벌써 시청자들의 항의가 인터넷 게시판에 빗발쳤을 거야. 지루한 연장 방영을 즉각 중단하라고." (p.51)

 

인적이 없는 포구에서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둘 사이에 갑자기 낯선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배를 타지 않겠느냐 권하고 싫다며 달아나는 두 사람을 앞질러 가 한선의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한선을 향해 마구잡이로 폭력을 행사한다. 한선은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수진은 낯선 남자를 향해 경찰에 신고를 했으니 그만두라고 말한다. 수진의 말에 그 사람은 마을을 향해 달아나고 수진은 119에 신고를 한다. 심하게 다친 한선을 앰뷸런스에 실은 구급대원이 동행할 것을 수진에게 요구하였으나 수진은 모르는 사람이라며 거부한다. 그리고 수진은 택시를 부른다.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은 채.

 

"택시에서는 뽑은 지 얼마 안 되는 새 차 냄새가 났다. 지친 몸을 뒤로 기대며 발을 뻗는데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깨진 그릇이 담긴 백화점 쇼핑백이었다. 이제는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고 한쪽 옆구리는 찢어지기도 했다. 그녀는 쇼핑백 안에서 사금파리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었다. 택시는 어느새 고속도로로 들어서 있었다." (p.61)

 

헤어진 남자 친구의 리벤지 폭행을 연상시키는 이 소설은 마치 서늘한 공포영화처럼 긴박하게 돌아간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에는 이와 같은 불안이나 공포가 상존하지 않던가. 비록 언제라는 기약은 없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매일 반복적으로 경험되고 익숙해지는 일상에 의해 꾸려지는 것만은 아니다. 게다가 세상을 흔들고 지배하는 것은 흔한 일상이 아니라 전혀 본 적도 없고 예상하지도 못했던 '블랙스완'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안정화시키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구축하도록 한다. 김영하의 단편소설 '여행'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보이지 않는 '블랙스완'의 존재를 강하게 믿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 서늘한 공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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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습관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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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은 러시아의 문학자이자 형식주의자인 빅토르 시클로프스키에 의해 시도된 것으로 사람들이 매일 마주치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대상보다 새롭고 낯선 대상으로부터 미학적 가치를 느낀다는 사실에서 착안되었다. 돌이켜 보면 사랑도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흔히 하는 우스갯소리로 '남자에게 가장 매력 있는 여자는 처음 보는 여자'라고 하지 않던가. 미학적인 측면에서 어쩌면 당연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결혼을 하여 매일 한 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의 모든 부부들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일지도 모른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도리스 레싱은 그녀가 쓴 단편소설 '사랑하는 습관'에서 사랑조차 습관이 돼버린 한 남자에 대해 쓰고 있다. 연극을 제작하기도 하고 강연도 하는 조지는 연극계에서는 꽤나 영향력이 있는, 그야말로 연극계의 거물이었다. 아내 몰리와 이혼한 후 5년쯤 동거를 했던 연인 마이러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을 피해 호주로 떠났다. 전쟁이 끝나자 조지는 마이러에게 영국으로 돌아올 것을 청한다. 그러나 마이러는 조지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지는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방황한다.

 

"사람들의 우스갯소리에 웃을 수 없을 때도 많았다. 가볍고 암시적이고 건조한 그의 말투도 변했음이 분명했다. 옛 친구들이 혹시 요즘 우울하냐고 물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친구들은 조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예전처럼 공감한다는 듯 미소를 짓지 않았다. 조지는 자신이 이제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상대가 아닌 것 같다고 추측했다." (p.18)

 

결국 조지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몰리를 찾아간다. 이혼을 하기는 했지만 그녀와 함께 살 때 그닥 나쁘지 않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오랜만에 보는 몰리는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고, 조지는 그녀에게 자신과 다시 결혼하지 않겠냐고 묻는다. 그러자 몰리는 "있잖아요, 당신은 그저 사랑이 습관이 되었을 뿐"이라며 거절한다. 결혼 생활을 지속할 때 조지가 만났던 여인들을 거론하면서. 필리파, 조지나, 재닛 등.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미친 사람처럼 밤거리를 쏘다니던 조지는 결국 심한 감기에 걸리고 만다. 몰리는 그를 간병할 사람을 물색해준다. 그녀의 이름은 보비 티팻. 예순 살의 조지에 비하면 40대의 보비 티팻은 무척이나 젊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조지는 자신이 앓아 누워 있는 동안 자신을 돌보고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등 능숙하게 안주인 역할을 했던 보비가 무정하지만 예의가 바른 여인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그가 보기에 그녀는 모든 면에서 무척이나 어리다고 판단한다.

 

"지금 그는 그녀 안에서 되살아난 자신의 과거 속에서 그 과거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평생의 경험이 그에게 위엄을 주었다. 그의 눈빛은 묵직하게 상대를 조롱하며 비난하는 듯했다." (p.37)

 

보비와 혼인을 한 조지는 그녀와 함게 노르망디의 한 마을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전에 이브라는 아가씨와 갔던 곳이었다. 보비에 대한 조지의 사랑이 열렬하고 뜨거웠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조지의 주선으로 보비는 예전에 했던 연극배우의 세계로 복귀한다. 보비가 출연한 연극이 유명세를 타면서 보비는 제법 바빠지기도 했고, 같이 출연한 남자 배우와도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조지와의 결혼 생활이 이어지면서 보비 역시 몰리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조지의 사랑이 한 여인에 대한 깊은 애정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여자를 곁에 둘 뿐이라는.

 

"사랑이 습관이 되었다는 표현이 조지의 마음속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그 말이 맞다. 그는 생각했다. 충격이 너무 커서 자신의 맨살에 누군가의 맨살이 닿는 느낌, 젖가슴이 닿는 느낌에 본능적인 반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보비가 지금껏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지금까지 사실상 그녀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p.38)

 

연극 연습을 마치고 매일 비슷한 시각에 귀가를 하던 보비가 어느 날 연락도 없이 늦었다. 걱정이 된 조지는 보비를 찾아 나선다. 모두가 떠난 연극 연습장은 텅텅 비어 있다. 보비가 어딘지 모르게 아파 보였다는 말을 듣게 된 조지는 속이 탄다. 보비의 상대 배우인 재키의 집에서 보비를 발견한다. 이십대 초반인 재키와 사십대인 보비. 조지는 둘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비는 조지의 그와 같은 생각에 펄쩍 뛴다. 나이로 따지면 재키는 자신의 아들뻘이라고 하면서.

 

"이제야 비로소 그녀가 감정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두 사람이 진정으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지는 자신의 팔다리를 타고 그녀를 향해 힘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직 남자였다." (p.52)

 

우리는 객체화된 대상에 대해서 그것이 사람이건 자연이건 집이건 상관없이 마주치는 횟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특별한 감정을 갖고 대하는 게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어떤 것, 감정을 교류하는 대상이 아니라 단지 존재로서의 개체, 사물화된 어떤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건 아닐까.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어제와 다름없이 출근을 하는 반복되는 일상처럼 말이다. 도리스 레싱은 사랑에 있어서도 사람들의 습관화된 무심함 그것을 지적하고 싶었을 게다. 남녀 간의 사랑이 처음 만나던 그 순간과 영원히 같을 수는 없겠지만 습관화된 일상에 우리의 사랑마저 포함한다면 그러한 삶은 얼마나 불행한가. 추억을 떠올리는 건 무료한 시간의 청량제이기도 하지만 사랑이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걸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랑은 언제나 처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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