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 - 편애하는 마음과 인문학적 시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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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을 오직 갈등구조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하루키의 팬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확실한 듯 보인다. 예컨대 페미니즘 소설의 애독자라면 책을 읽기도 전에 여성차별은 '악', 여성을 우위에 두거나 적어도 동등하게 두는 것은 '선'으로 규정하게 마련이다. 만일 이런 원칙에 합당하지 않은 책이라면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거나 구멍난 옷가지보다도 가치 없는 것쯤으로 인식할런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은 사상이나 철학을 다룬 책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케인즈를 신봉하는 케인즈주의자들에게 있어 마르크스의 책은 어쩌면 쓰레기보다 못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적대적인 갈등 구조를 완전히 제거한 채 소설을 쓴다면 어떨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어떤 종교나 윤리, 정치와 같은 요지부동의 시스템에 의해 확고한 세뇌교육을 받아 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구축해온 어떤 기준이나 이즘을 일시에 제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언제나 내 시선에 의해 선과 악으로 양분되고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만약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진 자가 나타나 우리의 판단 기준을 일거에 수거해 간다면 어떻게 될까? 내게도 비로소 완전한 자유가 찾아 왔구나, 하면서 기뻐할까? 내 생각은 정반대다.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는 완전한 수감(收監)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해야 하는 어떤 것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공허, 또는 결여의 상태가 지속될 테니까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이 국지적인 한계를 뚫고 나갈 수 있었던 까닭은 이것입니다. 즉 존재하는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인간의 수는 한계가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공유하는 인간의 수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p.213)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가 쓴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작가는 30년 동안 하루키 작품을 읽은 열혈 팬의 입장에서 하루키의 문학세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 책에서 피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동일한 작가에게 내려지는 극과 극의 평가에 대한 일종의 항변이자 하루키 문학의 부당한 평가에 대한 일종의 변론일 수도 있고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팬레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책에 쓰인 하루키에 대한 평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 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팬으로서 오랫동안 지켜봐 왔기에 더욱더 깊이 있는 평을 할 수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기 책에 대한 서평을 일체 읽지 않는다고 선언했을 뿐 아니라 예전부터 비평은 '말똥 같은 것'이라고 단언한 반反 비평의 기수입니다. 그의 주장에 시시비비를 따지기 전에 이렇게 과격한radical 태도부터 살피는 것은 사물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서 아주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비평이란 비평의 대상에 대한 '식욕'을 돋우는 것이어야 한다"는 표현으로 비평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식욕을 돋우는 비평'이란 어떤 것일까요?" (p.129~p.130)

 

사실 이 책은 저자가 하루키 문학에 대해 여러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인데 그는 팬으로서의 시선과 사상가로서의 관점을 함께 다룸으로써 독자들이 하루키 문학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평론가의 글을 마냥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그런 글들로 인해 접해보지 않았던 어느 작가에 대하여 손톱만큼의 관심이라도 생겼다면 그것으로서 그는 평론가로서의 역할을 다한 셈이라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의 매력이 무거운 주제와 산뜻하고 가벼운 문체의 대조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사실은 주제와 문체의 중간에 있는 것이 독자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진국을 보여주는 인간성이라든가 신체성은 '중간 지대'에 아주 농밀하게 들어 있습니다." (p.243)

 

인간이 자신의 가치관이나 세계관, 또는 어떤 현상이나 대상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갖는다는 것은 지독한 폭력의 세계를 용인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나의 가치관이나 판단 기준에 부합하는 것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악으로 간주될 테니까 말이다. 하루키 문학이 추구하는 '중간 지대'란 것은 어느 한 쪽을 편들거나 경도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폭력을 동반한다면, 철저한 중립의 이면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공정성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챈들러, 피츠제럴드, 무라카미 하루키 세 사람의 깊숙한 곳에는 강하게 내 마음을 빼앗아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무슨 짓을 할 때에도 '왜 이 사람은 이런 짓을 할까?'하며 가능한 한 공정한 관점으로 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가 그것입니다." (p.151)

 

하루키 문학의 전반을 다루고 있는 우치다 타츠루의 평론집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를 블로그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다 소개할 수는 없다. 물론 그래서도 안 되고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책을 읽고 우치다 타츠루의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람이라면 다가오는 시월에는 하루키 소설 한두 권쯤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 거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시월이 다 가기 전 어느 날 당신은 이런 독백을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그런 식으로 이유도 없이 악의를 저지르는 일이 쇠털같이 많아. 나도 이해할 수 없고, 너도 이해할 수 없어. 그래도 확실히 그런 일은 존재하는 거야.' ('1973년의 핀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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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주는 그리움의 강도가 누구에게나 매번 일정한 것은 아니어서 가을 주말의 분위기는 언제나 분주하고 어딘가 모르게 어수선하였다. 그래서인지 주말 외출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대개 부산스럽다 못해 소란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등산로 입구를 지나 산의 정상에 이르는 내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러므로 계절을 가리지 않고 산을 오르는 등산 애호가에게 있어, 가을 산행은 더없는 즐거움이라기보다는 가벼운 고통을 수반하는 고된 여정인 경우가 종종 있게 마련이다.

 

오늘 아침 산을 오르는데 내 뒤를 따르던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어찌나 시끄럽던지 하마터면 나는 '좀 조용히 하세요!' 하고 호통을 칠 뻔했다. 울긋불긋 요란한 등산복 차림에 등산 스틱과 모자며 배낭까지 그 모습 그대로 히말라야 등정을 한다 해도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빨리하여 그들과의 거리를 멀찍이 떨어트려 놓기는 했지만 산을 울리는 그들의 수다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 행태는 비단 국내에서만 보여지는 것은 아니어서 이따금 '어글리 코리언'이라는 오명을 해외에서도 듣게 되는 걸 보면 그런 못된 습관은 우리 사회의 지도층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만연해 있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단면이 아닐까 싶다.

 

그게 어디 일반인들뿐이랴. '한미 정부가 사드 배치를 결정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부 논란이 야기된 것에 대해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던 보훈처장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참담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그의 말인 즉 미국이 대한민국에 사드 배치를 결정했으면 다소곳이 따를 일이지 어느 안전이라고 반대를 하느냐는 의미와 함께 그런 국민들을 대신해 자신이 사과를 할 테니 노여움을 푸시라, 하는 뜻일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회식 자리에서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는 공직자가 있었는가 하면, '국민은 개·돼지'라고 일갈했던 교육부 공무원도 있었고, 교육부가 주최한 박람회에서는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된 지구본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게다가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경북대 출신의 모 장관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무시를 당한 것이 자신이 지방대 출신의 '흙수저'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했다. 그렇다면 그도 우리나라가 차별과 신분제도가 존재하는 비민주적인 국가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인데 국가 공무원으로서 그의 생각은 과연 옳았던 것인가. 게다가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신하는데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사람을 그대로 쓰겠다고 말하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오히려 국회를 싸잡아 비판하는 대통령의 오만은 국민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고 무엇일까. 현재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공무원은 도대체 국적이 무엇이란 말인가. 만장일치로 국회를 통과한 위안부 기림비 예산을 전액 삭감하는 우리나라의 국가 공무원, 해양수산부 산하 기관의 지도에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공무원, 교육부 주최 행사의 기념 지구본에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공무원 도대체 그들의 국적은 무엇인지... 나는 정말로 그들의 국적을 묻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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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愚民)ngs01 2016-09-2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고위공직자나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소위 엘리트라는 계층의 오만과 국가관보다는 개인적인 출세와 욕망에 사로잡혀 국가 공무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이 많다. 국가의 부름에 고마움과 사명감을 갖고 개인의 영달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것이 공무원인 걸 지 잘나서 행시나 사시 외시등을 붙었으니 오직 자신이 잘나서 누리는 특혜도 당연시 여기는 풍토 자체가 문제입니다.
대통령 또한 입만 열면 거짓말에 이토록 독선적이고 고집불통에 소통불통에다 이석수특별감찰관을 청문회 증인을 못하게 하려고 사표를 수리해 버리는 꼼수까지 쓰는 것을 보면서 한 나라를 책임지는 대통령이 맞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네요!
공기업개혁 한다고 하면서 낙하산인사 없애겠다는 말을 뒤집고 낙하산인사를 해대는 꼴을 보면서 자신의 과는 느끼지 못하는구나 절망하게 됩니다.
정말이지 이 정권 임기가 왜이리도 길고 긴 암울한 터널 같은지....

꼼쥐 2016-09-28 18:48   좋아요 0 | URL
우리가 똑똑히 보아야 하는 것은 국민들을 위한다는 그들의 명목이 과연 합당한가 아닌가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오직 국민을 위한다는 그들의 감언이설과 이율배반적인 행동에 속아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거나 천하에 죽일 놈을 그렇게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내가 사랑한 첫 문장 -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세계문학의 명장면
윤성근 지음 / MY(흐름출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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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했던 대상이 어느 순간 '짠!' 하고 나타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무작정 걷게 될 때가 있다. 예컨대 최근에 헤어진 연인이라든가 허기를 달래줄 맛집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의 어디쯤에선가 마술처럼 짜잔 등장할 거라는 헛된 기대감 말이다. 그런 기대감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처음'이나 '첫'이라는 단어가 앞에 붙었을 때이다. 첫사랑, 첫 데이트 장소, 첫키스 등등. 우리를 마술의 세계로 이끄는 이러한 것들이 현재라는 시공간에서는 영원히 사라져 과거의 영역으로 흘러 들어갔을 때 우리가 느끼는 상실감이 크면 클수록 그때의 기분을 되살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은 더욱 증폭되고, 머릿속 상상의 영역을 밝히는 촛불이 하나둘 불이 켜지고, 우리는 그 불빛을 쫓아 막연히 걷게 되는 것이다.

 

독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한 권의 책을 마저 다 읽어내는 데 필요한 마음의 준비는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마음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여정이 사뭇 즐거울 것이라는 기대감,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안온한 잠자리가 마련되었을 거라는 기대감은 나그네로 하여금 쉽게 첫발을 내딛도록 한다. 그러나 힘든 여정이 될 거라는 예상은 나그네의 발길을 주저앉히기도 한다. 소설의 첫 페이지를 마주하는 독자 역시 막연한 기대감으로 들뜨기도 하고, 두려운 나머지 다음 페이지를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면 좋은 첫 문장은 무언가? 내 기준에서 좋은 첫 문장은, 우선 미스터리한 느낌이 있어야 한다.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그런 서늘한 분위기가 아니라, '도대체 이렇게 첫 시작을 떼면 다음은 어떻게 이어갈지 궁금해지는 걸?'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묘한 느낌이면 좋다. 더불어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에도 첫 문장이 의미하는 것이 알쏭달쏭하게 만들어야 한다." (p.39)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윤성근은 자신의 책 <내가 사랑한 첫 문장>에 위와 같이 썼다. 까다롭기 짝이 없는 주문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로서의 저자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까다로워서야 어디 소설 한 편을 쓰겠다고 감히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것이다. 다독가로도 유명한 저자에게 있어 소설의 첫 문장이 주는 감동과 짜릿한 희열이 어떤 것인지 나와 같은 일반독자는 감히 짐작도 하기 어렵지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어렴풋한 느낌은 내게도 있고, 소설을 사랑하는 다른 많은 독자들에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기억하고 있다. 멋진 문장이었고, 인상적인 출발이었다. 독자는 왠지 모를 쓸쓸함과 허전함을 안고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다. 소설 속으로 뚫고 들어가 주인공 '기 롤랑'의 어깨를 토닥여줘야 할 듯한 분위기. 소설은 그렇게 독자를 안내한다.

 

<내가 사랑한 첫 문장>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책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비롯하여 스물세 권이나 된다. 물론 적다면 적은 숫자이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서 소설의 첫 문장을 도대체 몇 권이나 발견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일일이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이상의 '날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조르주 페렉의 '인생 사용법',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이 그것이다. 어떤가. 이것들 중 읽어본 것도 있을 테고 어떤 것은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보기만 한 책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첫 문장이 아름다운 소설로 뽑혀진 소설이라고 하니 왠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가.

 

'그래, 이곳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로 시작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소설 <말테의 수기>를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릴케는 고독한 예언자 말테의 입을 빌려 대도시의 비극을 알리는 소리 없는 외침을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들은……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9쪽) 그리고 자신의 예감을 확신하는 일화를 이어가는데, 이 암울한 시대를 각종 냄새와 갖가지 소음들로 채워놓다가 문득 정적이 흐르는 순간을 포착한다." (p.345)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어느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듯 들뜬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 한 권이 옆에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리고 그 소설의 첫 문장을 기억한다는 건 또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마음으로 이 가을에 소설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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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지음, 백시나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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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연작시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 20수 중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유난히 더웠던 지난 여름을 생각하면 유배지에서 몸도 마음도 힘들었을 정약용의 마음을 시에서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支離長夏因朱炎(지리장하인주염) 汁汁焦衫背汗沾(즙즙초삼배한점)

灑落風來山雨急(쇄락풍래산우급) 一時巖壑掛氷簾(일시암학괘빙렴)
不亦快哉(불역쾌재)

 

지리한 긴 여름날 폭염에 시달려서

등줄기 땀에 젖어 베적삼이 척척한데

상쾌한 바람 건듯 불어 산비가 쏟더니만

한꺼번에 벼랑 위에 얼음발이 걸렸구나.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마음을 비우는 지혜' 중에서, 정민)

 

시라는 게 묘한 구석이 있어서 반복해서 읽다 보면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름다운 곡조의 노래가 되기도 한다. 행복한 순간으로 '뿅' 하고 순간이동을 한다고나 할까. 시에는 그런 힘이 있다. 예컨대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읽어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샤갈의 유명한 그림 '나와 마을'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왠지 친근한 느낌이 들고 꿈 속에서 보았던 어느 마을이 떠오르는 것이다.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피는 풍경' 말이다.

 

오늘 아침 집에서 백석의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들고 나왔다. 한 손에 시집을 그러쥔다는 건 가을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뜻이다. 남들은 어떤지 몰라도 내게는 그렇다. 말하자면 나는 사계절 중 가을에 주로 시를 읽는다는 얘기가 된다. 아침에 집을 나서려는데 옷깃을 파고 드는 소슬한 바람에 불현듯 백석의 시가 생각났던 것이다.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생략)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 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생략)

 

평론가 김현은 백석의 시를 기려 '한국 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평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백석의 시는 그가 쓴 다른 어떤 시들을 읽어보아도 시에서 그려지는 다양한 풍경과 이미지들이 저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가 쓴 언어는 마치 붓의 터치인 양, 짤그랑거리는 소리의 재현인 양 읽혀진다. 그런 까닭에 나 같이 시에는 문외한인 사람도 시 한 수에 울고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샤갈이 그린 행복한 풍경 속에 온전히 머물렀던 것처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와 나타샤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시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의 이 시를 읽으면 나도 따라 거나하게 취하여 아름다운 나타샤를 그리워하고, 그리움에 술기운이 깊어지고, 어느 순간 눈길을 뚫고 달려 온 이국의 소녀가 내 귀에 대고 고조곤히 이야기할 것만 같다. '에잇,더러운 세상' 나타샤와 나는 흰 당나귀 등에 올라 앉아 세상을 향해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는 순백의 눈이 쌓인 마을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가 도착한 눈이 내린 마을에는 어쩌면 행복을 그리는 화가 샤갈도, 샤갈을 노래한 시인 김춘수도 먼저 와서 우리를 반갑게 맞을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 편의 시를 읽는 동안에는, 백석의 시집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한 이 가을에도 소복소복 흰 눈이 내리고 방울소리 울리며 꿈길을 향해 걸어가는 당나귀 발자욱 소리가 자박자박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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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제쳐두었던 지진에 대한 공포를 다시 일깨운 건 어젯밤 8시 33분의 여진이었다. 따로 의미를 둘 필요는 없겠지만 8시 33분이라는 시각은 최근에 발생한 지진활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듯 보였다. 저녁 밥상을 물린 후 느긋하게 쉬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그 시간에 지진은 마치 장난기라도 발동한 듯 '흠, 다들 아무것도 모른 채 널부러져 있군. 심심한데 어디 한 번 사람들이나 놀래켜줘 볼까.' 하고 잊을 만하면 한번씩 지축을 흔들어놓는 것이다. 그때마다 무방비로 있던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집을 뛰쳐나갔고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이거 해도 너무 하는 것 아냐?'하는 표정으로 화풀이 대상을 찾곤 하였다. 그렇다고 이미 벌어진 지진이 미안하다고 사과의 말이라도 한마디 던질 리 만무하지만 말이다.

 

무방비의 사람들을 놀래키는 건 비단 지진뿐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북한이, 때로는 일본이, 때로는 미국이 '서프라이즈~~!!'하면서 느끼한 표정으로 국민들의 심기를 긁어놓기는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가끔일 뿐이고, 우리나라 정치권은 시도 때도 없이 '서프라이즈'를 연출하는 통에 당하는 국민들은 이제 식상하다 못해 지겨운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어제 반기문 띄우기에 나선 정부 여당의 뜬금없는 행동만 하더라도 정치인들의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서프라이즈'의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 싶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맞다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 10여 년을 지하세계에서 살았던 사람이나 다름없다. 말하자면 정부 여당은 저승에 있던 사람을 불러내어 이승의 사람을 다스리는 게 어떻겠느냐 묻고 있는 셈이다. 이 나라에 아무리 인재가 없기로서니 명계에 있던 사람을 국가 지도자로 삼자는 발상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수준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한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서프라이즈' 차원에서 웃자고 한 말이라는 건 알지만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센스가 없어서야 어디...

 

이제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서프라이즈 퍼포먼스'는 제발 그만 보았으면 좋겠다. 가뜩이나 지진으로 인한 '서프라이즈'에 지쳐가고 있는데 정치인들의 식상한 '서프라이즈'를 보면서 웃어줄 여력은 없기 때문이다. 한·일간의 위안부 협상이 타결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불가역적'이라는 생뚱맞은 단어를 들고 나왔던 외교부의 애교도 이제는 지겨운 것이다. 이 좋은 계절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정치인들의 '서프라이즈'는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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