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알아요, 당신?

아무도 없는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을 때 TV를 켜는 것보다 라디오를 트는 게 아무래도 기분 전환이 된다는 것 말이에요. 낮게 깔리는 DJ의 목소리가 마냥 넓어만 보인던 빈 공간에 울타리를 치고 나와 침묵 사이의 비밀스러운 공간을 헤집고 들어와 별 의미도 없는 싱거운 얘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는가 하면 대중가요의 경쾌한 곡조가 주변의 우울을 띵가띵가 날려보내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어깨를 짓눌러 도통 소파에서 일어날 기운조차 없게 만드는 TV와는 사뭇 다르지 않나요? 요즘과 같은 스마트한 시대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들으면 될 것을 굳이 라디오를 트는 이유가 뭐냐고 당신은 묻는군요. 이따금 그런 날이 있지요. 온종일 같은 노래만 반복해서 듣고 싶은 그런 날 말이에요. 괜히 쓸쓸해지거나 창밖의 빗소리가 조금 전까지도 없던 우울을 좁은 틈새로 쫄쫄 흐르게 하는 날, 김광석의 노래를 '무한반복'으로 들었던 적이 저도 있답니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목까지 차오른 우울이 나를 질식시킬 듯한 오후, 침묵 속으로 속속들이 배어든 우울을 정말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팔랑팔랑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라디오만 한 게 없습니다.

 

당신 , 그거 알아요?

산길을 오래 걷다 보면 인간의 아주 작은 흔적조차 눈에 걸린다는 것을요. 오늘 아침의 일이었답니다. 날씨가 풀리면서 산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탓인지 등산로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가 종종 눈에 띄더군요. 오가는 길에 눈여겨 보면서도 주을까 말까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그저 고민만 하면서 며칠을 보낸 셈이지요. 그러나 오늘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겠더군요. 양파즙 파우치며, 홍삼 캔디 포장지며, 플라스틱 커피 용기며, 500ml 생수병이며, 먹고 버린 소주병이며, 검은 비닐 봉지며, 심지어 강아지 용변 처리를 하고 버린 화장지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쓰레기만 한아름 주워 들고 내려온 오늘, 다른 어느 날보다 개운했던 아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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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운동을 나서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도 없이 내리는 순한 비였다. 집에 다시 들러 우산을 들고 나오는데 이유도 없이 피식피식 웃음이 흘렀다. 아파트 화단의 산수유나무에 꽃이 피었다. 올해 들어 산수유꽃은 처음 본다. 아침이 채 밝기도 전의 옅은 보랏빛 어둠을 배경으로 산수유꽃은 그야말로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깡똥하게 자른 조팝나무 울타리에도 새순이 돋고 있다.

 

먼짓내에 섞여 비 비린내가 훅하고 끼쳐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아파트를 벗어나면 편도 일차로의 좁은 도로가 나온다. 그 도로를 따라 산자락에 이르는 지점까지의 공터에는 요즘 아파트를 짓기 위한 터닦기 공사가 한창이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그 어수선한 공사 현장을 어슬렁거린다. 조립식 건물을 부순 건축 폐자재와 사람이 떠난 자리의 각종 쓰레기가 어수선하게 뒤섞여 있다. 흉물스러운 풍경이었다.

 

우산에 듣는 빗소리가 싫지 않았다. 나무가 많은 등산로에서는 빗소리마저 엇박자로 들린다. 조용한 숲에 먹이를 찾는 까투리 소리만 요란하다. 일정한 크기로 늘어선 소나무들 사이로 길은 이어진다. 이따금 보이는 상수리 나무 위로 부지런한 청설모들이 무리를 지어 내달린다. 높이 매달린 까치둥지도 보인다. 비 오는 날에는 사람의 흔적마저 끊긴다.

 

산을 다 내려왔을 때에도 올라갈 때 보았던 길고양이가 공사 현장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도 한두 사람 보이고 아파트 화단에는 산수유꽃이 여전히 비에 젖고 있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나오는 한 대목이 생각났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의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산수유꽃을 처음 보아서인지 나도 한바탕 꿈을 꾼 듯하였다. 비는 여전히 찔끔찔끔 내리고 있다. 높은 건물 위에서 비 내리는 오후를 내려다 보면 건물 저편에서 마치 한낮의 졸음이 건듯 불어올 것만 같다. 그러지 말고 꿈을 꾸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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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보다는 의도적으로 그 사람의 내면을 보려는 연습을 꾸준히 하다 보면 '사람들은 다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갖게 됩니다. 물론 제가 실제로 모든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건 아닙니다. 저 자신의 내면도 보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요. 말하자면 오랫동안 그런 태도를 유지하다 보면 그런 비슷한 이미지, 배경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비슷한 사진이나 그림을 자신의 마음 속에 한 장 갖게 된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조금씩 굳어져 다른 사람도 이럴 것이다, 확대 해석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저는 늘 생각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이런 것입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팔짱을 낀 두 팔을 제 무릎에 올려 놓고 쭈그려 앉은 열 살 남짓의 소녀. 고개를 드는 것조차 힘이 들었던지 무릎 위에 제 머리를 힘없이 뉘인 채 저 멀리 보이는 사람들을 그저 멀뚱히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깊고 깊은 고독, 삶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 이후의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공포 등 인간이 내적으로 부딪히는 보편적인 절망과 맞닿아 있습니다. 육체적 고통이야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어느 정도 상쇄시킬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지만 인간 내면의 절망은 순전히 한 개인에게 고착된 것이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유대감은 곧 안쓰러움이나 연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김연수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선가 이렇게 말했더군요. 자신이 가장 경멸하는 책이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이라고 말이지요. 가짜로 산 인생, 자신이 자서전에 썼던 대로 살았다고 믿는 한심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김연수 작가가 그들을 경멸하는 이유였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결코 그런 삶을 살 수 없는 까닭이지요. 이세돌 9단과 알파고와의 최종국이 지금 한창 진행되고는 있지만 엊그제 있었던 제4국에서의 이세돌 9단의 승리가 많은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던 까닭도 그런 데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맞수가 아닌 인공지능과의, 말하자면 이세돌 기사 자신만의 고독한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인간 내면의 고독을 극복하는 과정을 세세히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고독을 이해하고 인간으로서의 강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실생활에서 자주 주어지는 게 아니기에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조차 큰 감동을 느꼈을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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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愚民)ngs01 2016-03-16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뉴스에서 전문직 고소득자의 탈세가 33%
고의누락이라더군요 몰랐던 얘기는 아니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 당연한 듯 여기네요. 특히 굳이 안그래도 될 고소득자들이
말입니다. 그들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보다는
숨기는데 애쓰겠지요!
이런식의 부자들의 세금을 제대로 징수 못하고 간접세로 또는 유리지갑인 근로소득세로
메우려는 정부가 너무 한심할 뿐입니다.

꼼쥐 2016-03-16 13:49   좋아요 0 | URL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인들의 잘못은 투표에서 판가름이 나는 게 당연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가려지니 정치인들은 겁나는 게 없는 셈이죠. 나라를 팔아먹어도 당선될 판이니... 우리 세대에서는 한국의 문화가 바뀌기는 어려울 듯싶어요.
 

'사제갈 능주 생중달(死諸葛 能走 生中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시는 분도 있겠습니다만 삼국지에서 전해지는 말이지요. 죽은 제갈량이 살아 있는 사마의를 쫓아냈다는 뜻으로 촉인들 사이에 회자되던 말인 듯합니다. 출사표를 바치는 것으로 시작된 제갈량의 북방원정은 읍참마속(泣斬馬謖)의 비극을 겪은 후에 결국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죽음으로써 끝이 나게 됩니다만 제갈량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자신이 죽기 전에 사마의를 몰아낼 계책을 세웠던 것입니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촉군을 향해 진격했으나, 촉군 진영에서는 제갈량이 살아서 군대를 통솔하고 있었다지요. 혼비백산한 사마의는 꽁지가 빠져라 퇴각하였고 그 바람에 촉군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제갈량이 아니라 제갈량을 본뜬 목상이었습니다. 후에 사마의는 "나는 그의 삶도 헤아리지 못하고 그의 죽음도 헤아리지 못하는구나!" 하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요즘 여당이나 야당이나 4월에 있을 총선에 대비하여 공천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만 그로 인하여 정국이 시끄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웃기는 것은 살아 있는 권력보다는 죽은 사람이 더 무서운 것인지 연일 '친노 패권'이니 '노무현 세력'이니 '노빠'라느니 7년 전에 서거하신 노무현 대통령을 들먹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삼국지에서의 조조도 죽은 관우의 환영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지요. '친박 패권 청산'이라는 구호는 들어본 적도 없으니 살아 있는 권력은 아무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새누리당이든 야당을 표방하는 국민의당이든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의 환영에 시달리는 걸 보면 그들의 최후도 멀지 않은 듯합니다.

 

과연 그들은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요? 무덤 속에서 권력을 행사할 리도 만무한데 말입니다. 뉴스에서 연일 떠드는 바람에 한동안 잊고 지냈던 국민들도 돌아가신 대통령을 다시 그리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깜박 잊었던 그 모습을 선명하게 떠올리기도 하고 말입니다. 야권의 분열로 인하여 여권이 어부지리의 승리를 점치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권력의 향배야 어찌 되든 고인이 되신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많은 국민들이 있는 한 살아 있는 권력은 영원히 고인의 환영 속에서 두려움에 떨어야 할 것입니다. 꽃이 피는 4월이 오면 우리는 20대 국회의원을 새로이 뽑고 허깨비 같은 그들을 국회의원이라 칭하겠지만 5월의 기억은 꿈결인 양 아련한 그리움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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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1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2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허리 인대를 다쳐 한동안 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게 겉으로 보기에는 다 나은 것 같지만 피곤하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때면 여지없이 재발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때로는 아주 심하게 아플 때도 있고, 조금 뻐근하다가 이내 좋아질 때도 있다.

 

어제는 좀 과하게 피곤했었던지 오늘 아침부터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설라치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와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 엉거주춤 걷는 폼이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한의원을 찾았다. 찜질에 전기치료에 부황에 침까지 맞고서야 치료가 끝났다. 내일 또 오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에서 소를 잃고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내가 소를 잃었구나. 다시는 소를 잃지 않도록 단속을 보다 철저히 해야겠는걸' 하는 마음이 들었다면 비록 소를 잃었다고 할지라도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국가도 다르지 않다. 현 정부와 지난 정부의 실정으로 인해 국민들이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도 오히려 감사할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예컨대 지난 정부의 사대강 공사로 인해 해마다 구경하는 녹차라떼나, 큰빗이끼벌레의 창궐을 보면서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나 현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작업으로 인해 역사 바로 알기의 중요성을 깨닫는 일, 북한과의 강대강 대결로 인해 깨닫게 되는 평화의 소중함 등은 비록 소 잃고 외양간은 고치지 못했지만 소를 잃었다는 사실만큼은 국민들이 똑똑히 알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동안 기레기 언론으로 인해 우리가 소를 잃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몰랐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정부의 실정이 잦아지면서 소를 잃었구나, 국민들이 확실히 깨닫는 건 좋은데 이렇게 계속 소만 잃으면 소는 누가 키울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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