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운동을 나서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도 없이 내리는 순한 비였다. 집에 다시 들러 우산을 들고 나오는데 이유도 없이 피식피식 웃음이 흘렀다. 아파트 화단의 산수유나무에 꽃이 피었다. 올해 들어 산수유꽃은 처음 본다. 아침이 채 밝기도 전의 옅은 보랏빛 어둠을 배경으로 산수유꽃은 그야말로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깡똥하게 자른 조팝나무 울타리에도 새순이 돋고 있다.

 

먼짓내에 섞여 비 비린내가 훅하고 끼쳐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아파트를 벗어나면 편도 일차로의 좁은 도로가 나온다. 그 도로를 따라 산자락에 이르는 지점까지의 공터에는 요즘 아파트를 짓기 위한 터닦기 공사가 한창이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그 어수선한 공사 현장을 어슬렁거린다. 조립식 건물을 부순 건축 폐자재와 사람이 떠난 자리의 각종 쓰레기가 어수선하게 뒤섞여 있다. 흉물스러운 풍경이었다.

 

우산에 듣는 빗소리가 싫지 않았다. 나무가 많은 등산로에서는 빗소리마저 엇박자로 들린다. 조용한 숲에 먹이를 찾는 까투리 소리만 요란하다. 일정한 크기로 늘어선 소나무들 사이로 길은 이어진다. 이따금 보이는 상수리 나무 위로 부지런한 청설모들이 무리를 지어 내달린다. 높이 매달린 까치둥지도 보인다. 비 오는 날에는 사람의 흔적마저 끊긴다.

 

산을 다 내려왔을 때에도 올라갈 때 보았던 길고양이가 공사 현장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도 한두 사람 보이고 아파트 화단에는 산수유꽃이 여전히 비에 젖고 있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나오는 한 대목이 생각났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의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산수유꽃을 처음 보아서인지 나도 한바탕 꿈을 꾼 듯하였다. 비는 여전히 찔끔찔끔 내리고 있다. 높은 건물 위에서 비 내리는 오후를 내려다 보면 건물 저편에서 마치 한낮의 졸음이 건듯 불어올 것만 같다. 그러지 말고 꿈을 꾸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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