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젠의 로마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몸젠의 로마사 1 -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몸젠의 로마사 1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금은 철 지난 이야기지만 지난 정권의 화룡정점은 뭐니뭐니해도 셀프 사면이 아니었나 싶다. 셀프 훈장이네, 셀프 빅엿이네 등등 여러가지 셀프가 들어가는 말이 많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셀프 사면이다. 다른 것이야 자기 기분이 내키는 대로(속어로 꼴리는대로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하겠지만) 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셀프 사면은 법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권력을 이용해서 자기의 잇속을 차리다가 감옥에 간 사람들을 자기 스스로 사면을 하는 행위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청와대 대변인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나서서 사과해야 한다는 판에 자기 가신(멘토라고 하지만 가신 내지는 패거리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겠나?)의 비리를, 그리고 그 비리가 자기에게까지 연류되지 않았을까 의혹을 받는(각하는 절대로 그러실 분이 아니라 소설을 써본다.^^;) 마당에 대통령의 직권으로 사면을 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게다가 BBK 저격수 정봉주 전 의원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본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대통령이 자기에 주어진 특권을 사용하는데 그게 무슨 대수냐, 법대로 해라는 말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법대로라는 것도 상식 안에서 법대로이다. 법이라는 것이 상식 선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법치의 근간을 흔들어 버린다면 그것은 곧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행이 우리 나라가 아직은 미국처럼 대놓고 다민족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크게 불거지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라면 핵폭탄급의 후폭풍을 불러왔을 일이다. 미국과 같은 다민족, 다종교 국가에서는 법치라는 것이 민족과 종교를 떠나서 그나마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흔히 미국을 일컬어서 로마와 가장 가까운 나라라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팍스 로마나를 빗대어서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한 단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 미국을 로마에 빗대는가? 두 나라 모두 다양한 공동체 구성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법치를 통하여 그들을 하나로 묶었고 제국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몸젠의 로마사는 이 부분을 확실하게 집고 넘어간다.

 

  그 뒷부분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몸젠의 로마사 1권은 매우 지루하다. 시오노 나나미처럼 흥미진진한 맛이 없어서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는 매우 느리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하여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시오오 나나미를 역사 소설가로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야 몸젠의 로마사는 매우 훌륭한 책이겠지만 1권을 읽어나간다는 것은 꽤나 지루한 일이다. 그라쿠스의 개혁이나, 제정의 형성을 서술하는 부분이 되면 모르겠지만 로마의 왕정을 다루는 1권은 특히 더 지루하다. 어떤 민족들이 어떤 품습과 종교를 가졌는지, 어떻게 도시를 건설했고,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건조하게 서술하고 있다. 건조한 서술이 한두페이지라면 참고 읽을만하지만 거의 300p에 달하는 내용이 건조함 일색이라면 책을 읽는 것이 꽤나 고역이다.

 

  더 고역인 것은 그렇게 고역을 참고 읽어낸 결과가 "그래서 로마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라는 한문장으로 요약이 된다는 것이다. 고작 내가 이것을 위해서 그 많은 부분을 인내로 버텨왔던가라는 생각이 들어 허무하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역시 몸젠은 "독일 사람"이구나라는 것이다. 독일 사람 특유의 간단한 것을 자세하게 늘려쓰는 좋으면 좋다고 할 수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고약한 습관을 몸젠도 보여주고 있다.

 

  1권의 결론은 "로마는 다양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며 이것을 법을 통하여 하나로 통합해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서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한 것을 살펴 보는 것이 뒷권의 내용이 될 것이다.

 

  로마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그들이 얼마나 법에 투철한 민족인가라는 것이다. 그들은 법과 계약에 관련된 항목들까지 신들로 섬기고 있을 정도이다. 그만큼 계약과 법이라는 것을 신성시하였고, 그 이유는 법만이 로마라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황제라고 할지라도 법을 어길 수 없었고, 설령 법을 어기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모르도록, 혹은 현행 법을 바꾼 다음에 실행하는 번거로움을 감당했다. 만약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로마 시대에도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왔노라, 보았노라, 사면하였노라"라는 카피를 남발하다가 "servant 초이 너마저"라는 카피로 끝나지 않을까? 로마사를 공부하면서 그들이 법을 어떻게 만들었고, 기본적으로 법을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봤으면 좋겠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ransient-guest 2013-05-31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카의 셀프훈장질은 회고록 준비로 이어지고 있죠.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로 돈주고 사서 볼 일은 없겠습니다만...저는 개인적으로 공직자 비리사건으로 투옥된 인간들은 사면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봐요. 순수하게 저질스럽고 뻔뻔스러운 가카, 부정선거로 그 뒤를 이은 그네꼬...진정한 잃어버린 십년이 뭔지 알게 될 듯 합니다.

saint236 2013-06-01 17:24   좋아요 0 | URL
그거 아직 모르시나요? 공생발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대통령비서실인가에서 만든 책으로 가카의 귀하신 말씀을 모아놓은 어록집입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검색해보면 나올겁니다.

transient-guest 2013-06-03 03:03   좋아요 0 | URL
가카의 롤모델은 역시 재벌이네요...이건희처럼 어록을 남기시는군요..

saint236 2013-06-03 10:06   좋아요 0 | URL
재벌좋아하다가 한대 얻어맞을텐데 말입니다. 아마 재벌을 영어로 chaebol이라고 쓴다죠. 왜 전 저게 체벌로 보이는지..^^

transient-guest 2013-06-20 02:05   좋아요 0 | URL
chaebol은 이상하게 저에게는 잡채를 연상시키는군요..ㅎ

saint236 2013-06-20 15:54   좋아요 0 | URL
잡채라...글자 소리상 연관은 잘 안되지만 하는 짓은 같죠. 있는대로 다 모아서 채로 만들어 드시는 그들의 대단한 식성....아..이러고 보니 잡채를 비하한 꼴이 되었군요. 잡채에게 미안합니다.
 
한비자 교양강의 돌베개 동양고전강의 9
가이즈카 시게키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대한민국이 한비자 열품에 휩싸여 있다. 기껏해야 한길 그레이트 북스의 한비자밖에 모르던 내가 돌베개에서 한비자 교양강의가 나오면서 한비자에 관한 책들을 검색해보다 말 그대로 깜놀했다.

 

  "한비자/인간사랑, 글항하리, 베이직북스, 한길사, 북팜, 풀빛, 신원문화사, 새벽이슬, 홍신문화원" "한비자의 관계술" "한비자의 권력기술" "한비자 피도 눈물도 없는 생존전략" "노자와 한비자의 제황학 후흑학" "세상의 이치를 담은 한비자" "만화 한비자" "한비자의 인간경영" "한비자가 나라를 살린다" "성공하는 CEO" "한비자가 들려주는 상과 벌 이야기" "왜 원하는대로 살지 않는가" 대충 뽑은 것이 이 정도이다.

 

  이 책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깨닫는 놀라운 사실은 한비자를 주로 다루는 곳은 처세술 혹은 자기계발 분야이다. 이들은 한비자를 통하여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서 무언가 대단한 것을 가르쳐 주는 것처럼 책을 찍어낸다.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성공하는 CEO"처럼 제목만 봐도 자극적인 책들이 넘쳐난다. 이런 책들은 한비자를 동양의 마키아밸리라고 정의내린다. 어떤 책에서는 마키아밸리보다 한비자가 앞서니 한비자를 동양의 마키아밸리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마키아밸리를 서양의 한비자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엎어치나 메치나, 하얀 말 엉덩이나 White Horse' hip이나 매한가지다.

 

  한비자를 권력을 얻기 위한 냉혹한 지침서 혹은 마키아밸리즘의 연장선에서 읽는다면 한비자를 제대로 오해하게 된다. 요즘 대한민국의 한비자 열풍을 바라보면서 이건 아닌데라면서 걱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키아밸리즘의 연장선에서 한비자를 읽고, 그것을 장려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한줌의 권력을 얻기 위하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장려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한비자 교양 강의는 한비자에게서 음습한 마키아밸리즘을 걷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한비자를 일컬어 법가의 철학을 집대성한 사람이라 한다. 사마천의 사기를 통하여 한비자는 순자의 문하요, 이사와 동문수학한 사람으로 이해하지만, 이 책에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의문을 표하면서 그들이 동문수학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한비자는 순자의 문하라기 보다는 노자에게서 더 큰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한비자 사상의 핵심은 법과 술과 세라고 하겠다. 한비자는 상앙으로부터 법철학을, 신불해로부터 법을 운용하는 술의 철학을, 신도로부터 법과 술을 유지하는 세의 철학을 배웠고 발전시켰다. 법이란 원칙을 말하며, 술이란 원칙을 운영하는 기술을 의미하고, 세란 법과 술을 유지하고 운용하는 권세와 권력을 뜻한다. 법과 술과 세라는 것이 따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고 집행이 되어야 국가가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한비가 한비자를 통하여 하고 싶은 말이다. 흔히 한비가 말했던 신하를 다스리는 방법,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방법같은 것들은 술에 속하는 것으로 법을 바로 세우기 위한 단편적인 방편일뿐이다.

 

  한국에서 한비자가 열광적으로 읽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엔 두 가지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첫번째는 우리 사회가 무한경쟁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홉스가 이야기했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그리고 그 안에서 승리하는 것이 미덕이 되는 사회 속에서 남보다 한발 앞서기 위해서 한비자만한 것이 없다. 한비자의 술이라는 부분, 특히 군주가 신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라는 부분에 집중하게 되면 이보다 더 효과적인 처세술은 없다. 나의 마음을 숨기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다면 상대방을 조종하고 이용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비자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 부류에 속한다. 아마 한비자를 열독하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

 

  두번째는 현실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한비자에게서 찾는 것이다. 한비는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져만 가는 조국 한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한 대안으로 법치를 주장한다. 한비의 법치는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법과 술과 세가 균형을 이루는 고도의 정치적인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비의 법철학을 따라가다보면 도라는 종착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법과 술과 세, 즉 원칙과 운용 기술과 이를 뒷받침하는 권력, 이것이 어우러질 때 국가는 비로소 국민을 편안하게 하고 순리에 맞게 통치가 된다. 한비의 이야기가 너무 이상적이니 비현실적이니 하는 이야기는 뒤로 미뤄두자. 원래 학자들의 이야기는 이상적인 것이 당연하니 말이다. 한비의 법치라는 것을 오늘 한국에 가져와보자. 법을 강조하지만 세만 있는 새누리, 법도 술도 없고 세만 있는 민주당, 법만 있는 통진당, 진보 정의당, 진보신당, 법도 술도 세도 없는 안철수(이제 막 정치에 입문한 그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기에 판단을 잠시 유보한다.)! 어디에 대안이 있을까?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대안을 찾아야 하는가? 소수의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고민으로 한비자를 열독하는 것이리라.

 

  한비자가, 고전이 대중들에게 많이 읽힌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 없어서 몇자 끄적여 본다. 한비자의 내용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한비자를 읽을 것을(개인적으로는 한길사의 한비자를 선호한다.)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피아 : 돈과 마음의 전쟁
우석훈 지음 / 김영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약은 약사에게 OO은 OO에게"

 

  요즘 들어 많이 보는 카피 문구다. 일에 대한 전문성을 나타내는 카피인데 과거에는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다소 정치적인 표어를 사용했었고, 요즘은 모 구직 사이트에서 자신들의 전문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보통 책을 읽고 나면 나름대로 그 책을 한단어로, 혹은 한마디의 문장으로 요약한다. 때론 책의 내용을 다루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 책을 읽고 받은 느낌인데, 그것이 책의 내용과 연관이 있다면 괜찮은 책으로, 연관이 없다면 뭔가 아쉬운 책으로 평가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소설책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이 전문성이라는 말은 이 책이 꽤나 부실하다는 말이다. 경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소설책을 보고 내린 결론이 경제의 전문성이 아니라 글쓰기의 전문성이니 얼마나 이 책이 문학작품으로서 부실한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간단한다. 한국 경제 정책을 좌지우지해왔던 경제 관료들 중 카르텔을 형성한 이들(이들을 모피아라 칭한다.)이 배후 조종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전면으로 등장하면서 국가의 운명을 두고 한판 승부를 벌인다는 내용이다. 경제의 흐름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와 경제 전쟁이라는 참신한 소재를 가진 소설이니 꽤나 기대가 될 법도 하다.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소설이 애정사에 국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이는 매우 긍정적인 일이겠으나 문제는 이런 참신한 소재를 가지고 식상한 소설을 만들어 버렸다는데 있다.

 

  우석훈이라는 이름값 때문이랄까, 아니면 모피아에 대해 줄기차게 공격해 왔던 나꼽살과 홍보 효과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MB 정권의 경제 정책에 학을 뗀 사람들의 관심 때문일까? 어떤 이유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이 책은 책의 완성도에 비하여 꽤 많이 팔린 축에 속하는 책이다. 나역시도 이 책을 보면서 "우석훈이 소설을?" 이런 호기심에 책을 살까 말까 고민했었고,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는 순간 충동적으로 구매를 했다. 영화 판권도 팔렸다는 책이라기에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고, 중반부까지는 그래도 흥미 진진하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내 정신세계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내가 소설을 읽는 것인지 환타지의 세계로 날아가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한국의 경제 정책과 환율, 페이퍼 컴퍼니, 중국과 미국의 헤게모니 다툼이 꽤나 현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런 현실적인 묘사를 마지막까지 끌고 가는 것이 소설가로서의 역량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이러한 묘사는 얼음이 녹아버리듯이 사라져 버렸고, 그 사이를 만화와 같은 억지스러움과 끼워맞춰진 해피엔딩이 대체해 버렸다. 역시나 우석훈에겐 소설이 무리구나라는 생각을 해봄과 동시에 이 책을 영화로 각색하려면 각색하는 사람의 능력이 참으로 대단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렇지 않고서는 만들어봐야 흥행헤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석훈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하기 위하여 소설이라는 장르를 택했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택했다는데 꼭 그렇게 했어야만 했을까? 혹 우석훈은 소설이라는 장르를 그의 말과는 달리 만만하게 본 것은 아닐까? 소설에 별점 하나를 주면서도 과한 것 같아서 못내 마음이 쓸쓸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번 한번은 새로운 경험이려니 생각하고 넘어가고 이런 실력으로 두번다시 소설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약 소설을 스고 싶다면 오랫동안 공부를 하고, 습작을 한다음에 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가란 무엇인가?

 

  인류 역사상 이만큼 많은 사람들이 많은 공을 들였던 질문은 없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털어서 날고 긴다는 모든 철학자들이 한번씩은 고민하면서 족적을 남겼을 질문인데 이 질문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방대한 저서로 남겨서 오늘까지 내려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은 아마도 플라톤일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를 잇는 신학의 입장에서의 국가론, 근대적인 국가론의 이론서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는 홉스의 리바이어던, 경찰국가, 법치국가 등등등...국가에 대해서 한마디라도 소리친 철학자들을 꼽자면 아무리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고 해도 모두 다 기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국가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매우 오랫동안 연구해왔고, 지금도 연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연구하게 될 담론이란 말이다.

 

  모든 철학자들이 국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상적인 국가의 정체를 꿈꾼다. 오늘날에는 이미 폐기된 왕정 국가도, 경찰 국가도, 귀족제도, 참주제도, 과두제도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새로운 정체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국가의 정체는 민주주의로 발전해 왔으며, 이것은 정체의 완성이라기보다는 아직도 발전할 여지를 품고 있는 미완의 작품일 뿐이다. 끊임없이 이상 국가를 꿈꾸면서 이상을 향해 나아가지만 한발 나아가면 한발 멀어지는 것이 이상국가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철학자들은 가장 이상적인 국가를 꿈꾸면서 그에 대해서 역설했으며, 이것들을 어느 하나로 딱 묶어서 말하기는 불가능하기에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각 학자들의 이상국가가 무엇인지를 파악해 보고, 오늘날에 그것을 어덯게 이해할 것이냐 살펴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겠는가?

 

  플라톤이 생각한 이상적인 국가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철인국가이다. 우리가 철학시간에 한두마디로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이런거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라는 것이 있고, 그 본성에 맞는 역할을 감당할 때 그 사회는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굴러가게 된다. 철인은 국가를 다스리는 정치인이 되어야 하고, 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군인이 되어서 나라를 보호해야 하며, 생산의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생산계층에 종사하면 된다는 것이다. 상당히 거칠게 표현했지만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는 이것인데 왜 철학자가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는가? 철학자는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형상과 질료, 이데아와 이데아의 모방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사상은 중세를 거치면서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루터를 통하여 인간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신국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다른 것은 뒤로 젖혀두고 나는 철학자에 의한 국가 통치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철학자가 다스리는 국가가 과연 이상 국가일까? 태어나면서 정치 지도자에 맞추어 진 사람이 과연 존재하는가? 철인이 다스리는 국가가 이상 국가라는 말을 조금 비틀어보면 절대 왕정, 혹은 동양의 천자와 매우 흡사하게 닮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정한 인물(그것이 철학적인 식견이 있는 인물이어도 좋고, 천명을 받은 천자여도 좋다.)이 정치에 특화되어 있다는 말은 사실은 체제를 강화하는 기제로 이용될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마치 아무런 능력이 없으면서도 혈통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듯이 말이다. 멀리갈 필요도 없다. 우리 주변에서 이와 유사한 일을 보지 않았는가? 정작 본인이 무엇인가 정치적인 능력을 보여주기 이전에 벌써부터 위대하신 영도자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로 차기 대선후로로 이름으로 올린 박근혜 대통령이 있지 않은가? 그를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등장과 동시에 대통령감이라는 평가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그게 합당한 것인가? 플라톤의 입장에서 본다면 합당할 수도 있다. 그가 철학이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 철학이라는 것을 어덯게 해석할 것인가? 어떤 사람이 정치에 합당한 철인이라는 판단은 누가 도 내린다는 말인가?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사실상 실패가 이미 예견된 국가론이 아니겠는가? 그의 대부분의 철학이 그렇듯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현실을 무시하니 현실적인 감각이 필요한 국가론이란 얼마나 형용모순의 말인가? 감히 되먹지도 않게 플라톤을 비판하고 있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넘어가주기를 바란다. 다만 그가 한 말 중에 철학이 필요하다는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나라 정치인들 중에 철학이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 국정 철학, 국정 철학하는데 그게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 철학이라는 것은 중심을 잡아 주는 것인데 그 중심이 없이 당파적인 이해타산에 따랄 끌려다니던 것이 우리 나라 정치 지형의 모습이 아닌가? 한국에게 이상국가는 그저 이상으로만 존재할 것 같아서 씁쓸하다.

 

 마지막으로 고전의 힘이란 무섭다. 읽는 것만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니 말이다. 국가를 읽어본 모든 사람들이 말하듯이 서광사에서 나왔던 플라톤의 국가에 비하면 천병희의 국가는 읽기가 쉽다. 철학적인 용어라든지, 개념 설명, 편역 같은 것이 빠져버리고 가독성을 높인 결과물이기 대문이다. 이것 대문에 천병희를 욕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다. 천병희는 철학자가 아니라 언어학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노고 때문에 국가론을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 나아가서 고전들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감사할 일이기 때문이다. 좋은 고전들을 번역해주는 천병희와 출판해 주는 출판사 숲에게 무한 감사할 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ransient-guest 2013-04-25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천병희 역본을 찾아서 주문했어요. 아직 받지는 못했지만. 그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가격이 상당히 높게 책정되었더라구요. 배송비까지 하면 꽤 높잖아요 여기서는...
어떤 특정 계층이나 직업군이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상당히 위험하죠.

saint236 2013-04-25 08:39   좋아요 0 | URL
가독성은 서광사판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특정 계층이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아직은 한국에 팽배합니다. 일본을 따라 가려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몇대를 이어서 국회의원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건축을 위한 철학]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건축을 위한 철학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브랑코 미트로비치 지음, 이충호 옮김 / 컬처그라퍼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건축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사람들이 흔히 하는 대답은 "건물을 짓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에도 철학이 있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집을 짓는데 무슨 철학이 있단 말인가? 건물만 잘 지으면 되지라는 말과 함께 괴짜 취급받기가 쉽상이다. 기껏해야 건축에서 필요한 철학이라봐야 건물을 지을 위치를 선택하는 풍수지리 정도라고나 할까? 건물은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쓰임에 맞도록 지으면 된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예쁘게 지으면 된다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가 건물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이정도이다. 건물을 짓는 사람에 대해서도 당신의 건축철학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기껏해야 건축학과 교수에게나 물을 법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건축에도 분명하게 철학이 필요하다 선언한다. 건물을 짓는 행위 자체가, 건물의 위치를 선점하는 것에도, 그리고 건물의 모양을 결정하는 것도 모두다 철학적이라는 말이다. 건축가에게 철학이 부재하게 될 때 건물은 인간의 생활의 가치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지금까지 건축에 대해서 철학이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 건축물이 그렇게 지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언젠가 한강 주변에 늘어선 아파트들을 바라보면서 외국사람이 평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한국 사람이 외국인에게 한강 주변에 늘어선 아파트들을 보여 주면서 어떻게 생각하는 지 물었을 때에 외국인은 왜 저렇게 멋대가리없이 건물을 이렇게 지어 놓았는가, 한국이 분단국가라고 하는데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북한의 공격을 늦추기 위하여 차폐물로 사용하려고 저렇게 지었는가 물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비싸고 조망권도 좋고, 꿈의 집이라고 불리는 한강변의 아파트들도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멋대가리 없이 전시에 차폐물 정도로 지어진 그런 쓸모 없는 집일 뿐이라는 말이다. 

  얼마전 개봉되었던 건축학 개론이라는 영화를 생각해 보자. 그 영화에서 끊임없이 던지는 짊문은 당신은 집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이다. 당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구석구석을 살펴 보았는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 건물에 담겨진 추억과 그 추억을 공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건축가들은 어떻게 대답할 껏인가라는  질문을 계속적으로 던진다. 건물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라든가,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추억을 보존하는 것은 건축공학적인 질문이 아니라 건축가가 가지고 있는 철학이 대답할 문제이다. 

  건축을 위한 철학이라는 제목을 달고는 있지만 이 책은 건축가를 위한 철학 개론이다. 처음 이 책을 펴면서 건축물은 어떠한 철학을 담고 만들어기는가라는 부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다못해 판옵티콘은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러한 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철학의 흐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제목을 가리고 본다면 대학생들이 철학개론 수업 시간에 교재로 사용해도 무방할 정도로 철학에 집중한다. 간혹 건축의 미학에 대해서, 건축물의 비례에 대해서 다루고는 있지만 그것들은 가볍게 지나가는 정도이다. 건축에 대한 철학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뒤통수를 한대 얻어 맞은 것같은 배신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서서히 흥미가 일기 시작했다. 이런 철학들이 건축가에게 소화가 되었을 때 그가 어떤 건물을 짓게 될 것인가? 기대가 되지 않는가?

  요즘 시사인을 읽으면서 꽤 흥미를 가지고 읽는 기사가 있다. 행복한 집짓기라는 타이틀로 건국 곳곳에 있는 건축물들을 살펴 보는 것이다. 그 기사에 등장하는 건축물들의 고려 조건은 단가, 재테크가 아니다. 부동산이 가지는 가치도 아니다. 오직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편안한 잠을 자는가, 이웃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는가? 그 어디에도 우리가 가파트를 바라보면서 고려하는 항목들은 발견할 수 없다. 건물을 지으면서 경제적인 요건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이 건물을 지을 때 고려해야할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고대 사람들은 건물을 통하여 자신드르이 세계관과 가치관을, 공동체의 이념을 구현하려고 해썼다. 궁궐, 신전, 박물관 뜽 그 어느 것을 둘러보아도 경제적인 부분을 신경쓴 흔적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건물을 짓고 국고가 텅비어서 국가가 멸망하기도 했고,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렇지만 건물 자체를 놓고 보자면 그렇게 지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니겠는가?

  어느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가치관이 경제와 효율이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효율도 경제라는 틀 안에서의 효율이다. 이 만큼 투자하면 얼마만큼 수익을 거두어 들일 수 있다는 식의 효율 말이다. 그렇지만 건물은 결코 효율만으로 이야기할 수도 없고, 이야기 해서도 안된다. 효율을 따진 결과가 아파트고, 교도소 같은 건물이 아닌가? 이젠 진지하게 철학적인 접근, 인문학적인 접근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