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 창비세계문학 6
딩링 지음, 김미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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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세계문학은 빈티지한 스타일이 좋아서 중고서점에서 보이는 족족 다 사들이고 있는데, 처음 듣는 작가의 이 책도 그렇게 나에게 오게 되었다.

 

딩링(丁玲 1904~1986)은 중국 5.4 신문화운동이 길러낸 여성 작가로서 본명은 장웨이인데 5.4 신문학 사상을 접한 뒤 딩링으로 개명을 한다. 여기서 링,'玲'은 '옥소리 령'으로 내 이름의 '영'자와 같은 한자라 반가웠다.

 

딩링은 파란만장한 중국 현대사와 그 삶을 같이 했기 때문에 그녀의 글쓰기도 그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초기엔 여성 지식인의 시각으로 창작활동을 하다가 공산당의 근거지인 옌안으로 와서는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민중 위에서 군림하는 공산당 특권층과 여전히 일과 가정의 고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들을 보면서 그 실상을 폭로하는 작품을 쓰게 된다.

이러한 활동으로 딩링은 중국공산당에게 '자유주의적 작가'로 낙인찍혀 변방으로 발령, 농촌생활을 한다. 이 후 딩링은 비판적인 글쓰기 보다는 '사회의 밝은 면을 부각시키는' 당이 장려하는 글을 쓰고 1952년 '사회주의권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스탈린 문학상'을 수상, 중국혁명의 과정을 세계에 알리는 작가로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이 급진적인 좌경노선을 추진하면서 그녀의 삶은 다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학생들에게 '무릇 작가라면 자신만의 대표작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던 발언이 '출세주의'로 고발, 부르주아 사상을 지닌 우파 작가로 분류된 것이다.

그녀는 당으로부터 숙청 당하고 작가로서 글을 쓸 권리도 박탈 당한 채, 감옥에 수감, 추운 동북지방에서 육체노동을 하게 된다. 이후 문화대혁명(1966~76)이 끝나고 그녀가 다시 세상에 나타날 때까지 어떤 생활을 했는지 거의 알려진게 없지만 심한 고초를 겪었음은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소설집은 이러한 딩링의 시대에 따라 그 성향이 다른 소설이 4편 실려있다.

이 책의 표제작인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는 1941년에 쓴 작품으로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갔다가 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온, 일본군에게 더럽혀진 '부도덕한 여자'로 취급받는 전전의 가슴아픈 이야기이다. 잔혹한 역사에 희생당하고 집으로 돌아온 성노예 여성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멸시는 워낙 알려진 사실이기에 놀랍지 않았지만, 그렇게 돌아온 여성들을 중국공산당이 다시 스파이로 '파견', '애국이란 명목으로' 그들을 이용한 사실에 나는 매우 놀랐다. 힘없는 어린 여성들이 탐욕스러운 전쟁에 이용되고 나중에는  '다 헤어진 신발'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받았으니 얼마나 비참했을까...

그러나 전전은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 마을에 잠깐 머물고 있는 화자인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제로 너무나 많은 일본 놈들한테 당해서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기억이 잘 나질 않고 결국엔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나는 낯선 사람들 속에서 바쁘게 사는 게 집에서 지내거나 친지들이 있는 곳에서 사는 것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번에 그들이 xx로 데려가서 치료해주기로 했으니까 나는 그곳에 머물면서 공부를 하고 싶어요."(p.40)

 

딩링은 전시에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고발하고,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이라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 분투하는 인간의 모습을 전전이라는 의지의 여성을 통해 보여준다.

 

두 번째 단편<병원에서>도 같은 해인 1941년 쓴 작품으로 도시에서 시골 병원의 산부인과 의사로 오게 된 루핑이라는 씩씩한 여성이 주인공이다. 루핑은 공산당원으로서 미래의 정치 공작원을 꿈꾸지만 당에서는 그녀를 시골의 병원으로 보낸다.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시골로 오지만 하룻밤을 자고 난 그녀는 '새로운 생활을 멋지게 시작하는 거야' 라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나 병원의 상황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구부러진 주사바늘, 사용한 종이를 소독도 하지 않고 다시 쓰고, 청소는 커녕 구석구석 버린 솜과 거즈가 널려 있다. 루핑이 아무리 청결을 강조해도 듣지 않자 의사인 루핑이 직접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지만 그 누구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루핑은 '자신이 목도한 불합리한 일'들을 이야기하고 시정을 요청하지만 고루한 관료주의와 타성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하고 오히려 그녀는 당으로부터 '자유주의자','영웅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비판을 받은 그녀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회의감에 젖기도 하며 의기소침해지지만 우연히 두 다리가 다 잘린, 산전수전 다 겪은 환자와 대화를 나눈 후 다음과 같이 마음을 다잡는다.

 

무릇 사람은 온갖 시련을 겪고도 꺾이지 않아야 비로소 쓸모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난 속에서 성장하니까.(p.77)

 

이 작품은 '간부를 비판함으로써 이들과 대중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고 이후 그녀는 사회주의 이념에 부합하는 글로 마오에게 인정을 받는다. 그녀의 이러한 행보는 작가로서의 신념이 꺾인 것일텐데, 1957년 '반우파투쟁'에서 또 우파작가로 몰려 숙청을 당하니 그녀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음을 알 수 있다.

 

<발사되지 않은 총알 하나>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민족주의를 고취하고자 발표한 작품으로 홍군 소년병의 이야기이다. 이동 중 대오에서 낙오한 어린 홍군이 마을에 숨어 있다가 국민당 군대에 발각되고 총살 당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대장! 총알 하나를 남겨두는 게 좋겠소. 남겨두었다가 일본 놈과 싸우시오! 나를 칼로 죽이고!" (p.97)

 

이념을 떠나 일본을 상대로 하나의 중국인으로 단결하자는 작가의 의도가 분명한 작품이다.

 

마지막 이야기 <두완샹> 은 사회주의 색채가 강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딩링이 1955년 우파작가로 비판받고 1978년까지 어떠한 활동도 없다가 그 해에 발표한 작품으로 작가가 20년간 육체노동을 했던 베이다황(北大荒)에서 만난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두완샹이라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소녀가 13살에 조혼하고 며느리로 부지런히 대가족을 위해 일한다. 17살에 남편이 한국전쟁에 참가한 가운데서도 열심히 생활하던 그녀는 토지개혁 조사로 마을로 온 여성 동지의 눈에 띄어 교육을 받고 마을의 부녀 주임이 된다. 전쟁에 나갔던 남편이 돌아오고 1958년 남편이 동북의 베이다황으로 발령이 나는데, 이곳은 6월에도 눈이 내리고 겨울엔 사람이 동사하는 험난한 곳이다.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완샹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라면 제가 왜 살지 못하겠어요? 변방을 건설하러 가는 거잖아요."(p.112)라며 남편과 떠난다. 두완샹은 스스로 할 일을 찾아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일하며 모범 노동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 1964년 노조의 여성간사가 되지만 거거에 만족하지 않고 조국을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변방을 개척한다는 사명감과 책임을 잊지 않는다. 이 소설은 두완샹이 청중들 앞에서 강연하는 것으로 끝난다.

 

"저는 평범한 사람이며 누구나 다 하는 평범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가지 이치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오로지 영원히 당의 지도하에, 있는 그대로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탐구하고 성실하게 당의 요구에 따라 공산주의 사업을 위해 죽는 날까지 분투하기를 희망합니다." (p.145)

 

'모래바람을 견디고 자란 한그루 살구나무'같은 공산주의 노동 영웅 두완샹. 중국 공산당의 이념에 충실한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적지않게 당황했고 많이 불편했다.

인간적인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시종일관 강인하고 열정적인 모습의 두완샹이 인조인간 같았다.

 

그러나 뒤에 작품해설에서 작가가 겪은 삶의 풍파와 그녀 자신만이 갖고 있던 신념이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예술성보다는 정치성을 띈 이 소설은 그녀가 얼마나 사상적으로 부담을 갖고 글을 썼는지 알게 해준다.

 

다시는 딩링의 소설을 읽을 일은 없을 듯 싶지만 중국 문학에 딩링이라는 여성 작가가 있었고 파란만장한 중국 현대사와 그 궤를 같이한 그녀의 문학 인생이 인상깊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고난을 겪은 작가가 비단 그녀 뿐만은 아니었을테니 그중에는 당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세상에 진실을 알린 작가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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