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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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 많은 외국어로 번역, 대중적으로 사랑받았던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 백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그를 사랑하는 독자들은 많고, 나도 그 중 한 명이다.

아쉽게도 책을 가까이 한 세월이 그리 길지 않아 모든 작가가 호기심의 대상이고 그만큼 관심이 가는 작가는 많으나, 이렇게 작가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냥 '무조건' 좋은 작가는 아직까지는 슈테판 츠바이크가 유일한 듯 싶다.

2013년 처음 그의 전기소설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를 읽고 (책에 관심만 많았지 거의 안 읽던 시절이었는데 어떻게 이 책을 사서 읽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의 고전적이면서도 세련되고 유려한 문체에 그냥 푹 빠져버렸고, 그의 문체만큼이나 그가 실제로 교양있고 예의바르며 여러 외국어에도 능통한 지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에 더욱 매료되었다.

 

<감정의 혼란>은 1년 전 '녹색광선'의 다른 두 책 <눈보라>,<미지의 걸작>과 함께 구입한 책으로 책의 고급스러운 디자인이 구매욕에 기름을 붓긴 했지만, 푸시킨, 발자크, 츠바이크의 작품이라는 점도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또 어떤 책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올지 기대하게 만드는 시리즈인데, 구성과 내용을 좀 더 알차게 해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본다.

 

이야기는 30년간의 교수생활을 기념하여 어문학자들이 헌정한 기념 문집을 보며 주인공 롤란트가 과거를 회상, 진실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전기문이기도 한 이 책은 그저 자신을 '기술했을 뿐', 자신의 본질을 밝혀주지는 못하기에,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지금의 자신을 만든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전기문에는 존재하지 않는 감정을 고백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대학 학장으로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학구적인 집안에서 자란 그는 학문에 대한 반감에 공부를 멀리했지만 대학만큼은 다녀야 한다는 아버지의 주장에 베를린 대학 영어학부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에게 대학은 형식적이며 지루하고 답답할 뿐, 대학 생활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며 방탕한 생활로 하루하루를 이어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불시에 찾아오고 애인과 방에서 즐기고 있던 그는 자신의 문란한 삶을 아버지에게 들키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가 불쾌감과 경멸감을 억누르고 침착하고 냉정하게 묻자그는 아버지에게 순간 존경심을 갖게 되고 자신의 의미없는 삶을 반성하게 된다.

진지하게 학문에 임하고자 작은 도시에 있는 대학의 영문학부에 가게 된 그는 그곳에서 우연히 셰익스피어를 강의하는 영문학 교수를 만나게 되는데, 그 순간 그는 교수에게 알 수 없는 강함 끌림을 느끼게 되고 동시에 학문의 열정에 휩싸이게 된다.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심장이 찔린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내 자신이 스스로의 열정을 동원해 감각을 고양시킬 수는 있었지만, 내가 한 인간에게, 선생님에게 사로잡힌 것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p.46)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에 전념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알게 된 교수는 자신이 사는 주택에 세 놓은 방도 소개해주고 저녁에 초대하는 등 두 사람은 제자와 스승으로 교류를 하게 된다. 롤란트는 무엇을 하던지 '언제나 열정으로부터 시작'하라는 교수의 가르침과 그가 자신에게 보여준 신뢰에 보답을 하고 그에게 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하루하루 공부에 전념한다.

 

난생 처음으로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부지런함을 그토록 뜨겁게 가열시킨 것은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그의 신뢰에 실망을 끼쳐드리지 않고 나를 사로잡았던 그의 미소를 얻고 싶은 허영심, 내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을 선생님도 내게 느끼기를 바라는 바로 그 허영심이었습니다. (p.67)

 

그러나 이 교수에게는 이상한 점이 있다. 그토록 멋진 강의로 모든 이들을 감격에 휩싸이게 하던 그가 어떤 날은 활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딱딱한 강의로 실망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호기심에 그가 쓴 책들을 찾아본 롤란트는 그만 놀라고 마는데, 이유는 20년간 쓴 책이 몇 권 되지도 않고 그 내용도 강의에 비해 전혀 울림이 없기 때문이다.

 

롤란트는 같은 집에 세들어 살면서 교수 부부와 식사도 같이 하고 유대감을 느끼며 그를 흠모하는 마음이 점점 커져 가지만, 그가 자신의 그런 마음을 내비치는 순간 교수는 냉정하고 쌀쌀맞은 표정으로 돌변, 비꼬는 말로 상처를 주면서 롤란트를 절망스럽게 만든다.  게다가 갑자기 며칠 씩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 이런 돌발 행동이 롤란트를 혼란스럽고도 불안하게 한다.

 

교수에겐 35살의 아내가 있는데 부인과의 관계도 수상스럽다. 부부 사이에 아무런 긴장도 느낄 수 없고 둘 사이엔 '무겁고 후덥지근한 감정의 무풍(無風)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롤란트는 묘사한다. '오직 정신적인 것에만 활기를 띠는' 교수와는 달리 그녀는 진지한 대화를 나누지 않고, 항상 흥얼거리며 육체적인 활동을 할 때 가장 기분좋아 보인다. 이렇게 상반된 두 사람이 어떻게 부부가 되었는지 교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미스터리하다.

 

이런 기묘한 집안의 분위기, 한없이 다정하다가도 갑자기 차갑게 변하는 모습, 어느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이런 교수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롤란트도 불안하지만, 읽는 나도 긴장되고 때로는 오싹한 느낌마저 들어서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이 교수는 왜 이러는 걸까? 이 궁금증이 책을 내려놓기 힘들게 한다.

나중에 진실에 도달하기까지, 이런 인물들 사이를 오고가는 알 수 없는 사랑과 감정들, 지적이고 정신적인 세계를 향한 열망과 육체적 욕망, 그 안에서 꿈틀대는 금지된 욕망 등이 이 세 인물을 통하여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전개된다.

 

토마스 만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은 사랑과 자유 정신의 모델"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인간의 모순성과 그로 기인한 여러 감정을 담고 있는 사랑의 모습을 생각했다. 고통, 절제, 절망, 연민, 신의, 우정, 배려, 숭고함, 존경, 순수, 부끄러움 등...이 모든 미묘한 인간의 감정을 담고 있는 사랑의 모습.

 

이 책은 두 번 읽으면 좋다. 왜냐하면 처음 읽을 때는 수상한 교수의 정체를 생각하며 긴장 속에서 읽게 되기에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감정에 몰입하기가 힘든데, 두 번째 읽을 때는 교수의 감춰진 비밀을 알기 때문에 그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감정이입하며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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