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과 살인귀
구와가키 아유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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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미오는 10년 전 묻지마 살인으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집을 나간 뒤로 삶 자체가 고통과 불행으로 점철됐습니다. 그런 미오에게 이번에는 동생 히나마저 살해당하는 비극이 닥칩니다. 하필 아버지를 죽인 소년범이 만기 출소한 시점에 히나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미오는 그저 두려울 뿐입니다. 더 큰 문제는 히나의 과거를 캐던 언론이 그녀에게 보험 사기범 또는 살인범이라는 낙인을 찍으려 한다는 점. 미오는 히나의 무고함을 밝히려 애쓰지만 파견직으로 대학 행정실에서 일하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대학생 나기사가 미오를 돕겠다고 나섭니다. 의도가 의심스럽긴 했지만 미오는 그와 손을 잡습니다. 하지만 사태는 점차 악화되고 괴한들의 습격을 받기에 이릅니다.

 

위의 줄거리는 사실 이 작품의 초반부를 요약한 것에 불과합니다. 구도 자체가 워낙 복잡하게 설계된데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반전이 거듭되면서 이야기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것도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바람에 일목요연한 줄거리 정리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동생 히나의 무고함을 입증하기 위해 의문의 대학생 나기사와 함께 진실 찾기에 나선 미오의 분투가 초중반부를 장식한다면, 아버지를 살해한 소년범이 만기 출소 후 종적을 감춘 시점에 히나가 살해당한 게 우연이 아니라고 여긴 미오가 어쩌면 자신이 다음 목표물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 그 소년범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게 중반부 이후 엔딩까지의 주된 이야기입니다. 거기다가 10년 전 아버지가 살해당하기 직전의 어린 미오와 히나의 과거 속에 숨어있는, 왠지 불안한 폭탄처럼 느껴지는 미스터리와 함께 사이코패스 소년범의 잔혹무도한 독백들이 막간극처럼 곳곳에 배치돼 있어서 내내 독자의 오감을 긴장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온갖 위험한 사람을 등장시켜 보려고 했습니다.”라는 작가의 말대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평범한 사람(제 기준으로는) 한두 명밖에 없습니다. 미오는 자신에게 닥친 거듭된 불행으로 인해 세상이 고통을 주는 쪽고통 받는 쪽으로 양분됐다고 여기게 됐고, 자신과 가족들은 어떻게 해도 타고난 운명을 바꿀 수 없는 고통 받는 쪽의 사람들이라 체념하며 살아왔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의도대로 등장인물 거의 대부분을 고통을 주는 쪽’, 즉 위험한 사람들이라는 캐릭터로 포장했고 그들이 미오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또 파괴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고통 받는 쪽의 무력감에 빠진 미오의 절망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고 동시에 아버지를 살해한 소년범이 히나에 이어 자신을 살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극도의 패닉상태에 빠집니다.

 

쉴 새 없는 반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독자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희롱하는 듯한 트릭의 향연도 대단합니다. 사건은 물론 캐릭터마저 반전의 대상으로 삼은 작가의 정교하고 빈틈없는 설계에 몇 번이나 혀를 내두르며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초반부만 해도 기대했던 것에 비해 다소 밋밋한 이야기가 아닐까 우려를 했는데, 읽는 도중 그런 구성마저도 실은 작가의 계획이었음을 깨달으면서 어느 한 줄도 허투루 읽을 수 없게 됐습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이 복잡하고 정교한 설계가 지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설정된 위험한 사람들역시 다소 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고통 받는 쪽이라 스스로를 규정하며 불안한 심리를 내보이는 주인공 미오의 캐릭터가 비현실적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사건과 인물과 심리를 지저분하지도, 작위적이지도, 비현실적이지도 않게 잘 직조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일본에서 23만부를 기록한 판매고가 조금도 과장되지 않게 보인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처음 소개된 작가지만 후반부에 실린 해설에 따르면 구와가키 아유의 작품은 대부분 잔혹한 사건이나 정상이 아닌 등장인묾의 심리를 다루고 있고, 작가 스스로도 앞으로도 놀랍고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라고 밝힌 바 있어서 후속작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설에서 거론된 처음 만난 사람달궈진 못이라는 작품이 특히 궁금해졌는데 레몬과 살인귀가 좋은 성적을 거둬 이 작품들도 조만간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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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도쿄 하우스
마리 유키코 지음, 김현화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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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방송국 개국 60주년 특별기획으로 ‘1961 도쿄 하우스라는 리얼리티 쇼가 제작됩니다. 1961년의 생활상을 그대로 구현한 집합주택 단지에서 불편함을 무릅쓰고 3개월을 살아내기만 하면 500만 엔이라는 거금의 출연료가 주어집니다. 원래는 가난해도 희망과 웃음이 흘러넘치던 살기 좋은 옛 시대를 만끽하는 리얼리티 쇼였지만, 제작회의가 거듭되면서 자극적인 구도와 갈등 조장 등 시청률을 위한 설정들이 가미됩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은 두 가족 나카하라, 고이케 은 이름과 성격까지 바꿔달라는 제작진의 기이한 요구를 수용하며 집합주택 단지로 이사합니다. 그리고 카메라에 둘러싸인 채 3개월간의 불편한 옛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출연자 한 명이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리얼리티 쇼는 파국을 맞이합니다.

 

한국에 소개된 마리 유키코의 작품이 모두 일곱 편인데, 2016년 처음 소개된 고충증을 제외하고는 모든 작품을 읽었으니 나름 팬이라 자처할 만하지만, 실은 신간이 나오면 빨리 읽고 싶어 안달 나는그런 팬이어서가 아니라 읽고 나면 불쾌해져서 더는 읽고 싶지 않은데 왠지 모르게 자꾸만 끌리는탓에 읽다 보니 어느 새 대부분의 작품을 읽어버린, 좀 이상한 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크 미스터리의 여왕혹은 이먀미스의 여왕이라 불리는 그녀의 마력에 속수무책으로 끌렸다고 할까요?

 

시작부터 어둡고 음울한 게 마리 유키코의 특징인데, ‘1961 도쿄 하우스는 리얼리티 쇼라는 소재 때문인지 전작들과는 달리 가볍고 경쾌하게 출발합니다. 혹시나 마리 유키코의 전혀 다른 스타일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지만 초반을 벗어나자마자 리얼리티 쇼 이면에 자리 한 갖가지 탐욕과 일그러진 감정들이 슬쩍슬쩍 그려지면서 예의 불길함과 긴장감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리얼리티 쇼를 준비하는 제작자들 일부에게서 다른 의도가 감지됐고, 쇼의 무대인 재건축을 앞둔 쇼와 시대의 집합주택 단지자체도 뭔가 어두운 과거를 숨기는 듯한 인상을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실제 1961년에 이 단지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정보가 독자와 일부 등장인물에게만 노출되면서 그 사건이 이 리얼리티 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무척 궁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상치 못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쇼는 일단 중단됩니다. 하지만 진짜 쇼는 그때부터 시작되고 거듭되는 사건과 연이은 반전이 폭죽처럼 터집니다. 독자 입장에선 은밀한 의도를 가진 채 이 리얼리티 쇼를 이용하려는 진범이 누굴까 짐작해보게 되는데, 문제는 챕터가 바뀔 때마다 그 짐작이 여지없이 빗나간다는 점입니다. 또한 쇼를 기획하고 준비했던 일부 인물, 그러니까 모든 걸 알고 있어야 할 인물들조차 예상치 못한 전개에 진심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곤 해서 독자로선 진범의 진짜 시나리오가 무엇인지 도무지 가늠하기 어렵게 됩니다.

 

마리 유키코의 전작들이 미스터리 자체보다는 지독하리만치 불편하고 어두운 감정과 심리를 그리는데 주력했다면 ‘1961 도쿄 하우스누가, ?”에 충실한 정통 미스터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거듭되는 사건과 반전들은 평소 마리 유키코와 담을 쌓았던 독자들도 좋아할 만큼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으로 구축돼있어서 그녀에 대한 선입관을 확 바꿔놓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녀 특유의 다크 미스터리와 이야미스는 여전하지만 말입니다.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미지의 힘에 이끌려 꾸역꾸역 찾아 읽은 작품들이라 그런지 그동안 읽은 마리 유키코의 작품에게는 모두 별 4개만 주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미스터리의 만족도가 무척 높았던 덕분에 0.5개를 더했습니다. 몇몇 애매모호한 설명 때문에 만점을 주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마리 유키코의 새로운 진면목을 발견한 것 같아 꽤 만족스러운 책읽기였습니다. 아마 다음 신작 소식을 듣게 되면 그때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그녀의 작품을 집어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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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의 참극 - JM 북스
도오사카 야에 지음, 김현화 옮김 / 제우미디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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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의 명문 도오고교에는 극과 극의 쌍둥이 자매가 재학 중입니다. 팬클럽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지만 성적은 바닥권인 후지미야 미야와 평범한 외모를 갖고 있지만 성적은 전국 톱클래스권인 사야가 그들입니다. 미야와 사야의 어머니가 꽤 극성스럽다는 소문은 동급생들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실상은 극성을 훨씬 뛰어넘는 가혹한 통제와 압력이 쌍둥이 자매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한편 폐교사의 교실을 근거지로 연실 연구회라는 동아리를 운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학생과 교사의 의뢰를 받아 비밀리에 해결해주는 심부름센터활동을 하고 있는 2학년생 다키 렌지와 우즈키 레이치는 서로 다른 이유로 의뢰를 해온 미야와 사야의 일을 돕던 중 끔찍한 살인사건에 휘말리고 맙니다.

 

인형의 집의 참극2022년 제25회 보일드 에그즈 신인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에 특화된 상은 아니지만 대중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폭넓은 의미의 장르물을 대상으로 삼은 듯 해서 일단 눈길이 끌렸습니다. (제가 읽은 같은 상 수상작은 코믹+첩보+로맨스물이라 할 수 있는 이중생활 소녀와 생활밀착형 스파이의 은밀한 업무일지’(도쿠나가 케이)가 유일합니다. 그 외에 판타지 로맨스로 분류되는 가모가와 호루모‘(마키메 마나부)가 출간됐습니다.)

 

서평을 쓰기 전에 출판사가 공개한 정보를 검색하다가 무척 난감해지고 말았는데, ‘인형의 집의 참극이란 제목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건이나 끔찍한 사건이란 표현만 있을 뿐 정작 살인이란 말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당연히 누가 살해당했는지도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살자를 공개하는 게 스포일러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조심스러우니 다소 인상비평에 가까운 서평이 되더라도 피살자는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끔찍한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은 도오고교 2학년생 다키 렌지와 우즈키 레이치입니다. 체격도 성격도 전혀 다르지만 교내 심부름센터라는 특이한 동아리 활동을 하는 두 사람은 쌍둥이 자매와의 인연으로 인해 사건에 휘말립니다. 친할머니가 영국인이며 무난한 성격에 10대다운 순수함을 지닌 렌지가 쌍둥이 중 하나인 사야에 대한 걱정과 우정 때문에 사건에 뛰어들었다면, 냉정하면서도 때로 4차원 캐릭터를 보여주는 레이치는 말 그대로 집요한 탐정의 자세로 쌍둥이 자매에게 닥친 끔찍한 사건을 조사합니다.

 

사건에 휘말린 인물들 대부분이 10대인 고교 2학년생들이라 인형의 집에서 참극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마치 청춘 로맨스물 같은 흐름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어머니에 의해 가혹하게 통제당하는 것은 물론 서로를 깔보거나 원망하며 악연을 이어가는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가 병행되면서 세 모녀가 사는 인형의 집은 점차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 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참극 이후 렌지와 레이치의 조사가 시작되는 시점부터는 밀실에서 벌어진 사건을 명탐정이 추리하고 해결한다!’라는 본격 미스터리 서사로 급전환됩니다.

미스터리 해결에서 주역을 맡은 레이치는 대수롭지 않게 보였던 사소한 단서들을 끌어 모은 뒤 날카롭지만 살짝 비약에 가까운 추리로 진상을 파악하는 반면, 렌지는 감성에 의지한 수사로 레이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웁니다. 서로 전혀 다른 스타일이지만 희한하게 궁합이 잘 맞는 콤비라고 할까요?

 

‘10대 고교생 탐정물은 개인적인 취향과는 좀 거리가 있긴 하지만, ‘인형의 집의 참극10대 청춘물과 살인 미스터리 서사가 잘 조합된 작품이라 거부감 없이 잘 읽혔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렌지와 레이치는 나름 흥미로운 명탐정 콤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시리즈화가 결정되어 20239월 후속편(‘괴물과 요람’)이 나왔다고 하니 어쩌면 한국 독자들도 두 사람의 활약을 좀더 지켜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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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협주곡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5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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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던 30년 전 어린 소녀를 토막 살해하여 시체배달부라는 별명을 얻었던 변호사 미코시바 레이지를 징계하라는 일반인들의 청구가 봇물처럼 쏟아집니다. 하지만 미코시바는 오히려 그들을 향해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합니다. 그런 와중에 사무소 직원 구사카베 요코가 갑자기 연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더구나 흉기에서 그녀의 지문이 발견된 탓에 곧바로 구치소에 수감되고 맙니다. 미코시바는 자네가 살인을 저질렀든 저지르지 않았든 반드시 꺼낸다.”는 말과 함께 조사를 시작하지만 이내 자신이 요코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녀에게 누명을 씌운 자를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요코의 과거를 캐던 미코시바는 그녀가 30년 전 자신이 토막살인을 저질렀던 곳에 살았던 사실을 알아내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시체배달부였던 미코시바의 캐릭터가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인 건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론 더는 그 과거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계속 그 과거에만 함몰된다면 어떤 사건이 등장하든 동어반복이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2019년에 출간된 시리즈 네 번째 작품 악덕의 윤무곡을 읽고 쓴 서평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그때만 해도 진심으로 더는 과거와 얽히지 않은 사건들을 다루기를 바랐지만, ‘복수의 협주곡을 읽고 나니 실은 이 시리즈 자체가 미코시바 레이지의 갱생과 속죄를 다룬 하나의 거대한 서사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즉 그의 과거가 얽히지 않은 사건은 이 시리즈에서 다룰 이유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할까요? 그래선지 30년 전 그가 저지른 토막살인이 그 어느 때보다 정면으로 다뤄진 복수의 협주곡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겨줬습니다.

 

미코시바의 미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블로그를 통해 일반인들을 끌어 모아 자신을 징계하라고 청구한 블로거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 징계청구자 전원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익명을 이용하여 제멋대로 선의니 정의니 떠드는 자들에 대한 지독한 혐오를 감추지 않는 것은 물론 현실적인 이익까지 얻어내려는 미코시바다운 대응입니다. 또 하나는 살인혐의로 체포된 사무소 직원 구사카베 요코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유일무이한 직원이지만 미코시바는 그녀에게 조금도 사적인 감정이 없습니다. 오히려 직원할인을 받을 수 있는 의뢰인으로만 취급할 뿐입니다. “자네가 살인을 저질렀든 저지르지 않았든 반드시 꺼낸다.”는 건 그녀를 아끼고 지켜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평소 의뢰인을 대하는 미코시바의 태도이기 때문에 나온 말일 뿐입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미코시바를 당황하게 만든 건 자신이 요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녀의 고향도, 가족도, 살아온 이력도 전혀 몰랐던 미코시바는 누명을 씌울 만큼 원한 관계에 있는 자를 찾아내기 위해 요코의 과거를 캐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알게 된 그녀의 과거 30년 전 자신과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점 - 는 미코시바를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요코의 과거를 캐는 일은 곧 자신이 30년 전에 저지른 토막살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요코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미코시바가 품은 의문은 거의 마지막 장에 가서야 풀리는데, 그 해답 역시 미코시바를 꽤나 놀라게 만듭니다.

 

요코의 무죄를 입증하는 과정은 다소 싱겁게 전개되고, 미코시바의 추리도 홀로 폭주하는 경향이 있어서 막판에 힘이 살짝 빠진 건 사실이지만, 미코시바가 지목한 진범의 정체는 다시 한 번 독자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시리즈가 미코시바 레이지의 갱생과 속죄를 다룬 하나의 거대한 서사라는 점을 절감하게 만듭니다. 다 읽고 복기해보면 미코시바의 탐문과 조사는 실은 30년 전 자신이 저지른 사건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고통스런 과정이었고, 요코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또 하나의 속죄의 계단을 올랐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서사는 단순하지만 속죄라는 주제는 그 어느 작품보다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20233월에 일본에서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 살육의 광시곡이 출간됐다고 합니다. 노인 요양센터에서 9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최악의 피고를 변호한다는데 과연 어떤 접점을 통해 미코시바의 속죄와 연결될지 쉽게 예상하기가 어렵습니다. 늦어도 내년 하반기에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이라도 빨리 출간되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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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의 살인자
시모무라 아쓰시 지음, 이수은 옮김 / 창심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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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화장실에서 6세 소녀를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이 고교생으로 밝혀지자 일본 전역은 경악합니다. 이후 소년A라는 익명으로만 보도되던 범인의 이름 오오야마 마사노리가 한 주간지를 통해 공개됩니다. SNS에서는 범인 본인은 물론 그의 가족과 주거지를 추적하는 광기 서린 폭주가 이어집니다. 그런 와중에 상상치도 못한 피해를 입은 자들이 나타납니다. 바로 범인과 이름이 똑같은 여러 명의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입니다. 단지 이름이 같을 뿐이라고, 기분이 좀 나쁠 뿐이라고만 여겼던 그들은 실제로 자신에게 크고 작은 피해가 벌어지자 격분합니다. 그리고 불과 7년 후 범인이 만기출소하면서 그 이름이 다시 언론에 회자되자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은 동성동명 피해자 모임을 결성하고 진범의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기로 결심합니다.

 

대부분의 이름이 세 글자뿐인 한국에는 워낙 동성동명인 경우가 많아 이 작품의 설정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실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유명한 사람과 같은 이름을 가진 경우 보통사람은 알 수 없는 불편함을 안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 유명 드라마의 주인공과 (성은 달랐지만) 이름 두 글자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난감한 상황에 처한 적이 종종 있었는데, 만일 연쇄살인범이나 온 국민의 지탄을 받는 인물과 이름 석 자가 모두 같다면 그 난감함과 불편함은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프로축구 선수를 꿈꾸는 유망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야간고등학생, 건실한 영업사원, 개인 과외교사, 만화와 게임에 빠진 오타쿠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오오야마 마사노리들6세 소녀 살인사건의 범인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크고 작은 좌절을 겪게 됩니다. 주위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은 말할 것도 없고, 인생의 진로가 완전히 틀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저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잊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후 범인이 만기출소하면서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의 인생은 또다시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제안으로 동성동명 피해자 모임을 결성하기에 이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는 살인범과 이름이 똑같다는 이유로 현실과 SNS에서 놀림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동성동명 등장인물들이 겪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그려나간다.”라고 돼있는데, 작품 속 여러 명의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이 겪는 건 단지 놀림과 조롱이 아니며 이야기 역시 결코 흥미롭거나 가볍지 않습니다. 진범을 찾아내 얼굴을 공개함으로써 자신들이 살인마 오오야마 마사노리가 아님을 입증하고 싶을 정도로 그들의 삶은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SNS의 마녀사냥은 그칠 줄 모르는데다 부정확한 정보로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는 일까지 반복되면서 그들은 마녀사냥이 언제든 자신을 향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사실 초반만 해도 무슨 이야기로 4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채우려나?”라는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진범을 찾아내 얼굴을 공개하겠다!”는 피해자 모임의 목표도 단선적으로 보였고, 이야기를 풍성하게 채울 재료들도 딱히 충분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같은 이름을 가진 여러 인물이라는 점을 잘 활용하여 예상치 못한 트릭과 반전을 수시로 끌어냅니다. 또한 피해자 모임 내부에도 시한폭탄 같은 장치를 심어놓아 서로를 100% 믿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막판에 이르러 거듭된 반전을 통해 독자를 이리저리 뒤흔들면서 앞선 페이지들을 다시 들춰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앞서 한국에 소개된 시모무라 아쓰시의 전작 시체 찾는 아이들생환자를 모두 읽었지만 이만한 트릭과 반전을 맛본 적이 없어서 무척 의외였고 놀라웠습니다. 아이디어와 서사 모두 기발하고 탄탄해서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검색해보니 일본에서 모두 23편의 작품을 출간한 걸로 나오는데 어쩌면 아직 한국에 그 진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작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머잖아 그의 또 다른 작품이 한국 독자들을 찾아오기를 기대해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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