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 ㅣ 레이디가가
아라키 아카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4월
평점 :
<1막> 구마모토현의 무인도 아다시마로 여행을 떠나는 일곱 명의 젊은 남녀. 그중 한 명인 히토 기요쓰구는 몰래 숨겨온 비소로 나머지 여섯 명을 독살할 계획을 품고 있습니다. 동기는 룸메이트였던 선배 기다의 인생을 박살낸 것에 대한 복수. 그런데 섬에 도착한 직후 누군가에 의해 일행들이 한 명씩 참혹하게 살해당합니다. 피해자들은 모두 혀가 잘린 채 발견됩니다.
<2막> 아다시마 참극 이후 3년이 지난 2023년. 오사카부에서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혀가 잘린 사체로 발견됩니다. 관할서 형사 이쿠코는 다음 피해자로 예상되는 마리아를 경호하며 진상 파악에 나서는데, 그 과정에서 일련의 연쇄살인이 3년 전 아다시마 참극과 연관 있음을 깨닫습니다.

지구 종말을 앞두고 벌어진 연쇄살인을 다룬 시스터후드 미스터리 ‘세상 끝의 살인’으로 에도가와 란포 상 역대 최연소 수상자가 됐던 아라키 아카네의 신작입니다. ‘세상 끝의 살인’은 2023년 북스피어의 ‘첩혈쌍녀 시리즈’(두 여성이 주인공인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 세 번째 작품으로 소개됐는데,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 역시 남성중심사회의 온갖 폐해를 겪은 여자형사와 환경미화원이 미스터리 해결사로 나선, 시스터후드 서사가 빛나는 작품이지만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미지를 실험”하는 작품들을 모아놓은 ‘레이디 가가 시리즈’로 출간됐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오마주한 1막은 무인도를 찾은 젊은 남녀들이 한 명씩 기괴하게 살해당하는 가운데, 애초 전원을 독살하려던 히토 기요쓰구가 진범을 찾아내려 분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그립니다. 무인도에 들어오기 전 범행성명까지 준비해놓았던 히토는 독살을 완수하는대로 자살할 계획이었지만, 누군가에 의해 연쇄살인이 벌어지자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게 될 위기에 처했고, 결국 독살을 포기하고 진범 찾기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의 명작인 ‘ABC 살인 사건’을 오마주한 2막은 오사카 도심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을 다룹니다. 쓰레기 수거 중 혀가 잘린 토막사체를 발견한 마리아는 난데없는 경찰 경호에 깜짝 놀랍니다. “직전 사건의 피해자를 발견한 사람이 범인의 다음 목표물”이라는 설명은 황당하게만 들렸지만, 마리아는 경호를 담당한 형사 이쿠코의 진심에 설득되고 맙니다. 문제는 수사가 전개될수록 이번 연쇄살인이 3년 전 아다시마 참극과 연관이 있다는 점, 또한 마리아와 가까운 인물들의 이름이 수사 과정에 오르내리게 됐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3년 전 사건을 그린 1막이 이야기의 토대 역할을 맡고 있고, 현재 시점의 연쇄살인을 다룬 2막이 본편이자 과거의 사건까지 아우르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1막은 프롤로그 정도의 분량만 차지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의 1막과 2막은 거의 엇비슷한 분량과 비중을 지니고 있어서 마치 두 편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읽는 듯한 풍성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또한 불과 3년 차이를 두고 벌어진 사건들이지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오마주한 1막 속 사건이 고전미 넘치는 올디스 벗 구디스의 매력을 품고 있다면, 2막 속 사건은 긴박감과 속도감을 지닌 현대 미스터리에 어울리는 세련된 설정이라 마치 30년 이상의 간극을 두고 일어난 사건처럼 읽힌 점도 나름 독특하고 흥미로웠습니다.
진범과 트릭은 밝혀졌지만 명쾌한 엔딩 없이 1막이 마무리된 가운데 전혀 낯선 인물들이 2막의 문을 열면서 독자의 관심은 언제쯤 어떤 식으로 두 개의 막이 접점을 드러날 것인가에 집중됩니다. 동시에 미스터리 해결사 역할을 맡은 두 여성, 형사 이코쿠와 환경미화원 마리아의 케미가 페이지를 넘길수록 기대 이상의 재미와 호기심을 선사해서 1막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데, 특히 과거와 현재의 사건에 마리아의 주변인물들이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자 두 주인공의 관계는 갈등과 연대를 오가며 긴장의 수위를 높이곤 합니다.
내용 대비 1막의 분량이 조금 과했던 점, 형사 이쿠코의 천재적인 추리가 지나칠 정도로 비약에 가까웠던 점, 그리고 막판에 밝혀진 진범의 동기가 설득력이 살짝 부족했던 점이 아쉽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무난함 이상의 평점을 주고 싶은 작품입니다. 시스터후드 미스터리 시리즈 주인공으로 활약해도 될 듯한 이쿠코+마리아 콤비의 매력도 대단했고, 무엇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ABC 살인 사건’의 오마주를 담은 미스터리를 한 작품 안에서 동시에 맛볼 수 있었던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검색해보니 일본에서도 아직 아라키 아카네의 새 작품이 나오지 않았는데, 미스터리 스타일이 제 취향과 아주 잘 맞는 작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의 신작 소식이 들려오면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