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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망초 피는 병원, 아즈사가와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최주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5년 9월
평점 :
신슈 마쓰모토市 외곽의 아즈사가와 병원은 지역 의료기관이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뿐 아니라 환자 대부분이 80~90대의 고령이라는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는 작은 종합병원입니다. 도쿄 출신이지만 신슈의 시나노대학을 졸업한 후 마쓰모토에 눌러 앉은 1년차 수련의 가쓰라 쇼타로와, 잘못된 것이나 이상한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당찬 성격의 3년차 간호사 쓰키오카 미코토는 악전고투라고밖에 할 수 없는 아즈사가와 병원에서의 하루하루를 진심과 전력을 다해 버텨내는 의료인들입니다. 그리고 병원에는 ‘작은 거인’, ‘사신’, ‘블리자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개성 강한 베테랑 의사와 간호사들이 즐비한데, 이들은 따끔한 채찍이자 동시에 거대한 스승으로서 가쓰라와 미코토의 성장을 돕습니다.

‘물망초 피는 병원, 아즈사가와’는 ‘신의 카르테 시리즈’와 ‘스피노자의 진찰실’로 한국 독자와 친숙한 나쓰카와 소스케의 휴먼 메디컬 소설입니다. 낭만적이고 평화로워 보이는 표지와 제목은 나쓰카와 소스케를 잘 모르는 독자에겐 밝고 따뜻한 힐링 서사를 기대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물망초 피는 병원, 아즈사가와’는 고령화 사회, 연명치료, 올바른 치료란 무엇인가?, 죽음에 대처하는 법 등 꽤 묵직한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파 메디컬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두 주인공 가쓰라와 미코토의 달달한 멜로가 깔려 있고, 시종 웃음을 자아내는 에피소드들이 이어져서 나쓰카와 소스케의 전작들과 비슷한 경향과 무게감을 지닌 것도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마주하기 거북하고 어두운 주제를 작가 특유의 따뜻한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낸, 제대로 된 메디컬 소설이라고 할까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까지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각각의 소제목에는 모두 꽃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샌더소니아, 추해당, 달리아, 산다화, 얼레지, 물망초 등이 그것인데, 이런 설정은 1년차 수련의인 주인공 가쓰라의 본가가 꽃집으로 설정돼있기 때문입니다. “꽃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은 남의 아픔도 모른다.”라는 아버지의 조언을 격언 삼은 가쓰라의 캐릭터는 지금까지 봐온 메디컬 픽션의 그 어느 주인공보다 진정성과 진심을 갖춘 인물로 보입니다. 비록 전작들의 주인공에 비해 주인공 가쓰라의 캐릭터가 다소 싱거워 보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7년 후쯤엔 가쓰라가 ‘신의 카르테 시리즈’의 주인공 구리하라 이치토가 돼있을 것 같고, 다시 7년쯤 흐른 뒤엔 ‘스피노자의 진찰실’의 주인공 마치 데쓰로가 돼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입니다. (마지막 수록작에서 가쓰라와 구리하라 이치토가 운명적으로 만날 가능성을 암시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또 그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출간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가쓰라에 호응하는 3년차 간호사 미코토 역시 ‘의사를 움직이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펼치는 건 물론 잘못된 것이나 이상한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당찬 성격으로 설정돼서 가쓰라와는 묘하게 합이 잘 맞는 캐릭터입니다.
두 주인공 못잖게 눈길을 끄는 건 일명 ‘사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순환기내과 의사 다니자키입니다. “그 시절엔 어떤 환자든 최선을 다해 살리는 게 당연했어요. 근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에요.”라며 80세 이상 환자는 치료를 최소한으로만 하고 그냥 지켜보는 방침으로, 즉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유도하는 그의 의사로서의 철학은 무척 위험천만하면서도 동시에 현실을 제대로 꿰뚫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느끼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달 남짓 그에게 지도를 받게 된 가쓰라는 ‘고령 환자에게 올바른 치료란 무엇인가?’라는, 베테랑들조차 정답을 내놓을 수 없는 화두를 놓고 의사로서 갈등을 거듭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때론 다니자키의 지독한 현실론에 공감하기도 하지만, 때론 그의 철학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무겁고 어둡고 지독히 현실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쓰카와 소스케의 메디컬 소설은 언제나 웃음과 눈물을 번갈아 짓게 만들곤 합니다. 또한 감동이나 기적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의료현장의 희로애락을 솔직담백하게 그려내서 매번 읽을 때마다 그 어느 독한 설정의 메디컬 픽션보다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판타지 같은 힐링 메디컬이 아니라 의료현장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주면서도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야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나쓰카와 소스케의 작품들을 꼭 읽어볼 것을 강추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