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5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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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모방범이후 9. 르포라이터로서의 삶을 접고 조용히 살아가던 마에하타 시게코는 중년부인 도시코의 방문 이후 또 다시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12살에 사고로 죽은 아들 히토시가 사이코메트리였다고 짐작하는 도시코는 시게코에게 그가 그렸던 그림들을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부모가 딸을 살해한 뒤 암매장했던 도이자키사건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있었지만 시게코는 단지 우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히토시의 그림 가운데 모방범사건이 벌어진 산장의 그림과 기표들을 발견한 시게코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어쩌면 히토시는 진짜 사이코메트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시게코는 히토시의 사연과 함께 그가 그림으로 남긴 도이자키사건에 대해서도 알아보기로 결심합니다.

 

읽은 지 15년도 훌쩍 넘어서 줄거리가 전혀 생각나지 않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반부를 읽다가 “‘낙원이 초능력자 이야기였다고?”라며 꽤나 놀랐습니다. 그러다가 도이자키사건이 설명되는 순간 어렴풋이나마 기억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는데, ‘낙원역시 모방범못잖게 씁쓸하고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는 점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르포라이터로서의 시게코의 경력은 9년 전 모방범으로 인해 막을 내렸습니다. 당시 범인의 정체를 직접 폭로하여 세간의 엄청난 관심을 받았지만 자괴감과 자책감에 사로잡혔던 시게코는 자신이 취재한 것들을 책으로 내기를 거부했습니다. 30대 초였던 시게코는 이제 불혹의 나이가 되었고 작은 규모의 무가지 업체에서 일하고 있지만 세상에는 지금도 시게코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당시 시게코가 책을 내지 않은 사실에 놀라고, 그녀가 더는 르포라이터로서 일하지 않고 있음에 더 크게 놀랍니다. 그런 시게코가 사건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건 그만큼 죽은 소년 히토시가 남긴 그림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도이자키 부부는 16년 전 중학생 딸 아카네를 살해한 뒤 마루 밑에 매장을 했고, 최근 화재로 집이 불타버리자 경찰에 찾아가 자수했습니다. 하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부부는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종적을 감췄고, 아카네의 동생 세이코는 이혼이라는 후폭풍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시게코는 죽은 소년 히토시가 아카네의 죽음에 연루된 누군가와 접촉한 탓에 사이코메트리 능력이 발휘됐고 그것을 그림으로 남겼다는 가정 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들은 히토시와 도이자키의 접점을 설명하는 정보제공자 역할 외에도 사건의 비극성과 그 이면의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조연을 맡습니다.

 

1~2권을 합쳐 8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낙원은 주인공 시게코에게나 독자에게나 대단한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지독한 탐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토시와 도이자키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정보까지 낱낱이 파고드는 시게코의 탐문은 나름 기승전결의 구도를 갖추고 있긴 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방대한 수사일지처럼 읽히기도 해서 모방범을 통해 시게코의 전력을 이해하고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꽤나 곤혹스러울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불행한 사건에는 360도 어디서 보아도 완벽한 진실은 있을 수 없어요.”라는 한 등장인물의 말처럼 같은 상황을 놓고 서로 다른 입장과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들이 많아서 시게코는 물론 독자 역시 그 지독하고 방대한 탐문의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낙원은 참 역설적인 제목입니다. 타고난 사이코메트리 재능 때문에 괴로워했던 12살 소년 히토시도, 딸 아카네의 목을 졸라 죽이고 16년 동안 마루 밑에 방치했던 도이자키 부부도, 부모가 언니를 죽였다는 진상을 알게 된 뒤 격심한 혼란에 빠진 동생 세이코도 낙원이라는 안락하고 따뜻한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그 누구의 낙원이든 그것은 여러 가지 것들을 망각한 후에,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하고 나서야 겨우 성립되는 거라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통해 일반적인 의미의 낙원과는 다른, 그러니까 (인터넷서점의 한 서평처럼) “연인에게는 둘만의 공간이 낙원이지만, 연쇄살인마에게는 살인의 무대가 낙원이다.”라는 식의 좀더 심오한 의미의 낙원을 그려냈습니다. 말하자면 누구나 자신만의 낙원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오롯이 그 사람만의 역사와 감정으로 이뤄진 것이어서 그 자신 외에는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그리고 나의 낙원은 누군가의 악몽일 수 있으며, 반대로 나의 비극은 누군가의 낙원의 터전이 될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를 암시한다고 할까요?

 

모방범역시 사건 못잖게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감정을 파고든 작품이지만 낙원은 후자의 비중이 훨씬 더 묵직하고 강렬하게 그려진 작품입니다. 편하게 읽히지도 않고,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도 않지만 그만큼 남는 여운은 깊고 무겁습니다. 신문에 연재됐던 작품인데다 지독한 탐문기에 가까워서 다소 늘어지고 지루한 대목들이 적지 않지만 그것들을 견뎌낸다면 미야베 미유키가 그린 낙원이 어떤 모양새를 지녔는지,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깊이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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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 1928, 부산
무경 지음 / 나비클럽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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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경성에서 작은 다방 흑조를 경영하는 천연주는 손님들이 가져오는 온갖 기이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깁니다. 때론 그 답례로 자신이 추리한 이야기 이면의 진상을 들려줘서 손님들을 놀라게 만들곤 했는데, 그 일이 소문이 나면서 요즘은 커피보다 다른 볼일로 흑조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탐정으로 여기진 않습니다. 그저 관심이 가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흥미롭습니다.”라는 한마디와 함께 그 이면의 진상을 나름대로 짐작해볼 뿐입니다. 그런 그녀가 부산 동래온천에서의 요양을 위해 수행원 두 명을 데리고 경부선 열차에 올라탑니다. 그리고 그 여정 중에 구포, 동래, 부산에서 마치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만 같은 기이한 이야기들과 마주칩니다.



무경은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난 작가인데, 출판사의 가제본 서평단 공지를 보고 인터넷서점에서 검색해보니 계간 미스터리(2023 가을호) 신인상을 수상했고 ‘1929년 은일당 사건 기록으로 호평을 받은 작가라 급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또한 기이한 이야기를 듣고 그 진상을 추리한다는 설정이 제 최애작 중 하나인 미야베 미유키의 미시야마 변조괴담 시리즈와 닮은꼴이란 점도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부산이라는 무대가 먼저 눈길을 끌었지만 역시 이 작품에서 가장 기대가 된 건 주인공의 캐릭터입니다. 어마어마한 부자인 친일파 아버지 때문에 천연주와 센다 아카네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된 그녀는 여고시절부터 다른 사람들이 들려주는 기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으며, 특유의 촉을 발휘하여 그 이야기 이면의 진상을 추리하곤 했습니다. 밝고 쾌활하며 행동력까지 갖춘 천연주의 삶을 요동치게 만든 건 2년 전 온몸에 심각한 화상을 입힌 화마였습니다. 수행원의 부축 없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된 그녀는 약간의 충격에도 솟구쳐 오르는 고통에 절망했고, 그렇게 피폐해진 몸은 그녀에게서 표정과 감정마저 앗아갔습니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즐거움은 흑조를 찾은 손님들에게서 기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이상해야 할 이유가 있기에 이상해 보이는 것이다.”라는 옛 친구의 말을 가슴에 품은 채 그 이상함의 이면을 짐작하는 일에 몰두하곤 합니다. 셜록 홈즈처럼 눈에 보이는 단서만으로 상대의 신분이나 처지를 간파해내는 그녀를 사람들은 요괴 사토리’(사람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읽어내는 요괴)라고 부르기도 하고, 화상을 가리기 위한 검은 옷과 그에 대조되는 창백한 피부의 조합 때문에 인간이 아닌, 그저 인간을 닮았을 뿐인 다른 존재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연도 많고 캐릭터도 독특한 천연주가 아버지의 지시로 동래온천에서의 요양을 위해 경부선에 올라타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마담 흑조는 매구의 이야기를 듣는다

죽은 개를 여우가 물고 갔다.”라는 소문이 퍼지자 개의 주인인 일본인 지주는 여우 소탕령을 내립니다. 부산을 코앞에 두고 우연히 구포에 머물게 된 천연주는 그 소문에 의심을 품곤 개의 죽음과 그 이면의 진상을 파헤치기로 결심합니다.

 

마담 흑조는 감춰진 마음의 이야기를 듣는다

동래온천 스미레장()에 투숙한 천연주는 예기치 못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됩니다. 자칫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은 천연주의 추리로 가까스로 해결됩니다.

 

마담 흑조는 지나간 흔적의 이야기를 듣는다

부산에서 고교 선배 채상미를 2년 만에 만난 천연주는 그녀가 무척 곤란한 상황에 빠졌음을 감지합니다. 누군가에게 미행당하는 게 분명하다고 호소하는 채상미를 위해 천연주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기발한 계획을 세웁니다.

 

잔인하거나 복잡한 사건들은 아니지만 천연주의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매 수록작마다 크고 작은 반전의 묘미도 맛볼 수 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상을 사건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 넣은 대목들이나 당시 부산과 그 일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낸 장면들도 읽는 내내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덕분에 작가의 전작에도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또한 (후속작에서 그 정체가 밝혀질 것으로 보이는) 천연주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두 사람 - 천연주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과외선생, 천연주와 비슷한 감성을 지녔던 여고시절 친구 선화 - 의 과거와 현재도 궁금해졌는데, 그들이 등장할 사건은 무게감이나 밀도가 남달라서 천연주의 현재의 삶을 크게 뒤흔들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게 읽고도 별 4개에 그친 건 임팩트 있는 한 방이 부족해보였기 때문인데, 천연주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사건이든 감정이든 조금은 더 세고 독한 전개가 펼쳐지기를 기대해봅니다. 이런 기대를 하는 이유는 모처럼 롱런 시리즈를 이끌 만한 매력적인 주인공을 발견한 반가움 때문입니다. 사심 가득한 바람이지만 마담 흑조천연주의 이야기가 미시마야 변조괴담 시리즈만큼 오래도록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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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1 - 개정판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5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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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공원 쓰레기통에서 젊은 여성의 오른팔이 발견된 사건으로 일본 전역이 충격에 빠집니다. 더구나 범인은 언론사는 물론 피해자의 유족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희롱하듯 자신의 범죄를 폭로합니다. 연이어 동일범에게 살해당한 시신들이 발견되지만 경찰은 단서 하나 잡지 못한 채 궁지에 몰립니다. 연속 유괴살인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르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 가족이 무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으로 인해 죄책감에 빠져있던 중 공원에서 잘린 오른팔을 발견한 고교생 쓰카다 신이치, 범인에게 손녀를 잃은 70대 노인 아리마 요시오 등 사건 관련자들은 제각각의 희망과 절망 속에서 어떻게든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합니다.


일본에서 무려 5년에 걸쳐 연재됐으며 (2006년 번역판 기준으로) 1,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론 2007년 가을쯤 일본 미스터리에 입문하게 만든 작품이라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올해의 독서목표인 명품재독을 계획하면서 거의 17년 만에 모방범과 그 후속작인 낙원을 다시 읽을 생각에 무척 설렜는데, 사흘에 걸쳐 다시 읽은 모방범은 역시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이라 부를 만큼 서사와 여운 모두 압도적이었습니다.


전대미문의 연속 유괴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지만 모방범은 초반부터 진범은 물론 누명을 쓰게 되는 인물까지 공개하는데다 서사의 중심 자체가 추리나 반전보다는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들을 그리는 데 있기 때문에 단순한 미스터리 이상의 거대한 휴먼 드라마로 읽히는 작품입니다. 경찰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 역시 수사의 주체라기보다는 사건에 휩쓸린 대다수의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을 헤매는 조연 역할에 더 충실합니다.


이야기를 견인하는 건 크게 세 그룹입니다. 하나는 유괴와 살인은 오로지 부차적인 수단일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를 던져줌으로써 을 체현(體現)하고자 하는 사이코패스와 그를 추종하면서 오로지 쾌락을 위해 피해자들을 유린하고 살해하는 잔혹한 살인마이고, 또 하나는 르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와 경찰로 대표되는 사건의 기록자들이자 방관자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그룹은 연속 유괴살인사건의 첫 목격자인 쓰카다 신이치와 범인에게 손녀를 잃은 70대 노인 아리마 요시오, 그리고 범인으로 지목된 오빠의 무죄를 주장하는 다카이 유미코 등 범죄에 직접적으로 휘말린 일반인들입니다.


이미 범인이 누군지 아는 상태에서 독자는 수시로 몰입의 대상과 애증이 뒤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결코 흥미나 인기에 영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결국엔 불확실한 정보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만들뿐인 르포라이터 시게코에게는 응원과 비아냥을 번갈이 보내게 되고, 살아있는 게 지옥이나 마찬가지인 피해자의 유족이나 범인은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용의자의 가족에게도 챕터가 바뀔 때마다 미묘하게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말하자면 누구를 편들어야 할지, 누구를 비난해야 할지, 누구를 동정해야 할지 그 구분 자체가 미묘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바로 이런 점 -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이야기 - 모방범의 가장 큰 미덕이자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워낙 방대한 이야기인데다 등장인물도 많아서 상세한 내용이 없는 인상비평이 되고 말았지만, ‘모방범은 축약한 줄거리만으로는 그 진가를 1/100도 설명할 수 없는 작품이라 직접 읽어보라는 것 외에는 달리 마땅한 추천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엄청난 분량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일단 1권만 읽어보자.”라는 심정으로 도전한다면 어느새 3권 막판까지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미야베 미유키의 현대물에 실망했던 독자라도 출간된 지 20년이 넘은 모방범만큼은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손꼽게 될 것입니다.


이제 모방범이후 9년의 시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한 낙원을 읽으려고 합니다. 희미한 기억이긴 하지만 모방범보다는 다소 인상과 여운이 깊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원역시 충분히 매력적인 책읽기의 시간을 제공해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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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유희
이가라시 리쓰토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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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간 사법시험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했지만 호토대학교 로스쿨에는 뛰어난 세 명의 인재가 있습니다. 이미 사법시험에 합격하고도 로스쿨에 들어온 괴짜 천재 유키 가오루, 사법시험 합격이 유력해 보이는 구가 기요요시와 오리모토 미레이가 그들입니다. 실제로 기요요시와 미레이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가오루는 예상과 달리 법조인 대신 학자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살인사건의 피해자, 가해자, 변호인의 처지로 재회합니다. 가오루가 칼에 찔린 시신으로 발견된 가운데 미레이가 현장에서 범인으로 체포됐고 기요요시는 미레이의 변호인이 되어 재판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0.1%도 되지 않는 승산에 기요요시는 애가 타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구치소에 갇힌 미레이는 좀처럼 기요요시에게 협조하지 않습니다.

 

현직 변호사인 이가라시 리쓰토는 2023뒤틀린 시간의 법정으로 한국 독자와 처음 만났습니다. 법정 미스터리를 좋아하지만 타임 슬립 코드가 깔려 있어서 구매목록에서 뺐던 작품인데, ‘법정유희를 읽고 나니 조만간 다시 장바구니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작 제목도 法廷遊戯인데 유희(네이버 사전을 그대로 인용하면) ‘즐겁게 놀며 장난함. 또는 그런 행위’. 영어로는 ‘play’, ‘game’을 뜻합니다. 실제로 이 작품 속엔 법의 테두리 안에서, 또 법정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갖가지 유희가 등장합니다. 다만 즐거운 놀이나 장난과는 거리가 먼 어둡고 길고 고통스러운 한 판의 게임이 벌어집니다.

 

죄와 벌, 제재와 구제, 무고와 원죄(冤罪) 등 법을 둘러싼 묵직하고 심오한 주제들이 이야기 전반에 흐르고 있고,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분투하는 미스터리의 매력도 잘 살아있어서 진지한 법정 미스터리이면서도 모든 복선이 하나로 연결되는 본격 미스터리 특유의 쾌감을 선사한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작품입니다. 동시에 오래 전부터 여러 겹의 악연으로 얽혀온 세 주인공이 법정 안팎에서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는 비극도 미스터리 못잖게 눈길을 끌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과 비슷한 암담하고도 먹먹한 분위기까지 더해져 마지막 장까지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어버립니다.

 

법률 전문용어가 꽤 많이 등장하기도 하고, 인물들의 심리나 속내를 에둘러 표현한 부분도 종종 있어서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는 작품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런 느린 책읽기 덕분에 세 주인공의 비밀과 거짓말, 숨은그림찾기처럼 정교하게 설치된 복선들, 0.1%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법정 안팎의 긴장감 등에 좀더 몰입할 수 있었고, 또 그런 몰입 덕분에 막판에 연이어 터지는 불꽃놀이 같은 반전의 참맛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정당한 죗값은 누가 정해야 하는 걸까?”라는 심오한 주제와 함께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아들이는 길벌을 거부하고 죄와 마주하는 길을 선택하는 인물들의 고뇌와 갈등 역시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좀 복잡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스포일러가 될 여지들이 너무 많아서 세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도, 법정에서 벌어지는 공방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가 조심스러운 작품입니다. 달리 말하면 소개글이나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접하지 말고 바로 본편을 읽어야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정 궁금하다면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출판사의 소개글 정도만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가라시 리쓰토는 한국에 소개된 두 작품 외에도 일본에서 꽤 여러 편의 법정 미스터리를 출간한 걸로 검색되는데, 조만간 그의 세 번째 작품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필명을 律人으로 정할 정도로 법룰의 매력을 전하기 위하여 꾸준히 소설을 발표해 왔다는 이가라시 리쓰토의 진심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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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
필리프 클로델 지음, 길경선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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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 지중해에 위치한 개의 형상을 닮은 군도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이 살고 있는 한 화산섬. 외부와 거의 고립되다시피 한 그 섬에 세 구의 흑인의 시신이 파도에 떠밀려오면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비극이 시작됩니다. 시장, 의사, 신부 등 섬의 지도층은 성사가 코앞인 온천사업을 지키기 위해 시신들을 화산 구덩이에 은폐합니다. 단 한 명뿐인 섬의 교사는 엄연한 범죄행위에 반대하지만 유일한 외지인인 그가 토박이들의 뜻을 꺾진 못합니다. 하지만 육지에서 온 경찰이 페리선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섬에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그의 태도와 말투에서 마치 시장 일행이 저지른 시신 은폐를 모두 알고 온 듯한 명백한 비난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섬은 불온한 광기에 잠식되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문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은 외형적으로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에 자리 한 가상의 화산섬을 배경 삼아 심연 속에 파묻힌 진실을 폭로하는 미스터리지만 동시에 난민 문제를 소재로 한 사회성 짙은 고발물 혹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비꼰 우화이기도 합니다. 또한 섬의 이름은 그저 개의 군도’(이 작품의 원제이기도 합니다)일뿐이고, 등장인물 모두 직업 또는 그 특징으로만 명명될 뿐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지 않으며 화산섬이라는 공간 역시 고정세트 같은 무대처럼 보여서 다분히 연극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어둡고 이기적인 심리는 몇 백 페이지의 장편만큼이나 묵직하고 심도 깊게 그려집니다.

 

화산섬의 비극은 해변에서 세 구의 흑인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됩니다. 극소수의 반발 속에 은폐가 진행되지만 육지에서 온 경찰 한 명 때문에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이어 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비열한 음모가 전개되고 사태는 뜻밖의 방향으로 폭주합니다. 하지만 섬의 운명은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파국으로 치달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파국에 동조하듯 화산은 점차 빈번하게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25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이지만 무척 다양한 코드를 품고 있는 작품입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일부 인용하면 난민 위기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척, 목적을 이루기 위한 권력자들의 권모술수, 매 순간 모든 곳에서 감시당하는 사생활, 대중을 선동하는 가짜 뉴스, ‘아니면 말고식의 마녀사냥, 가정 폭력에 노출된 아동등 인간이 일으키는 현대사회의 갖가지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파괴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은 인간을 파괴하고 인간들의 세상을 파괴한다.”(p238)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 자체가 딱딱한 다큐멘터리 같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직설적인 화법으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대목도 있지만 대부분은 프랑스 문학 특유의 지독한 풍자와 비유로 채워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장과 경찰(공권력), 의사(과학), 신부(종교), 교사(지식), 노파(방관자) 등 고유한 이름도 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은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몰입하는 대신 객관적인 시선으로 화산섬의 비극을 바라보게 하는 우화적인 설정이라 초반부터 눈길을 끌었습니다. 말하자면 특정인물에게 공감하거나 반감을 갖게 하지도 않고, 선과 정의가 승리하기를 혹은 악과 부패가 응징되기를, 이라는 바람조차 갖지 못하게 함으로써 탐욕과 방관과 무지에 휩싸인 화산섬의 인간들이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똑바로 바라보게 만든다고 할까요?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간혹 목격되곤 하는 프랑스 문학 특유의 난해함 또는 모호함입니다. 불편할 정도로 심한 건 아니지만 앞뒤 맥락을 살펴봐야 하거나 같은 문장을 두어 번 되읽어야만 하는 수고를 간간이 반복해야 되곤 합니다. 매번 프랑스 작품을 읽을 때마다 첫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긴장하게 되는 게 사실인데,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은 평균보다는 쉽게 읽히는 작품이니 미리 편견을 갖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처음 만난 작가라 이름이 생소했지만 검색해보니 이전까지 한국에 소개된 필리프 클로델의 작품이 무려 다섯 편이나 됐습니다. 모두 순문학이나 에세이 등으로 아마 장르물이 아니라서 그동안 제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으로 관심이 생긴 독자라면 전작들을 찾아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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