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모 저택 사건 ㅣ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기웅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3월
평점 :
1994년 2월, 예비교(일종의 대입 재수학원) 수험을 위해 도쿄에 올라와 호텔에 투숙한 18살 오자키 다카시는 프런트에서 만난 어두운 분위기의 중년남자에게서 기이한 인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호텔에 대형화재가 발생하고, 화염과 연기에 휩싸인 다카시는 죽음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중년남자에게 가까스로 구조됩니다. 문제는 의식을 되찾은 곳이 58년 전인 1936년 2월 26일 새벽의 도쿄이며, 히라타 지로라고 이름을 밝힌 중년남자의 정체가 시간여행자였다는 사실. 혼란에 빠진 다카시는 어떻게든 현대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지만, 결국 히라타의 조카라는 거짓신분으로 육군대장 가모우 노리유키의 저택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새벽, 일본 근대사의 변곡점이 된 2·26사건이 벌어지고 저택의 주인인 가모우가 자결합니다.

일본 미스터리 입문작이 ‘모방범’이었던 덕에 미야베 미유키의 한국 출간작들을 허겁지겁 찾아 읽던 제게 2008년 출간된 ‘가모우 저택 사건’은 그녀의 여느 작품보다 강한 인상과 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디테일한 부분까진 기억하지 못해도 몇몇 장면은 얼마 전에 읽은 듯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은 탓에 언젠가 그 인상과 여운을 다시 한 번 맛볼 생각이었는데, 개정판이 나오고도 2년이 지난 후에야 책장에서 두 권으로 분권된 ‘가모우 저택 사건’을 꺼내게 됐습니다.
‘가모우 저택 사건’은 ①시간여행과 평행우주를 다룬 SF소설이자 ②주인공 다카시가 2·26사건의 와중에 벌어진 가모우 육군대장의 자결의 진상을 파헤치는 미스터리이며 ③58년 전에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을 목도한 다카시를 통해 역사와 개인의 문제,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역사소설이기도 합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쉽게 섞일 것 같지 않은 이 세 가지 서사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정교하게 직조하여 ‘한 몸통의 이야기’로 만들어냈습니다. 시간여행의 혼란에 빠진 채 현대로 돌아가려고 발버둥치던 다카시는 가모우 육군대장 자결의 진상을 파헤치고 근미래에 이 저택에 닥칠 비극을 막아내려는 열망에 잠시나마 1936년에 머물기로 결심하는데, 그 과정에서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역사’에 관해 심각하고 진지한 고민에 빠지곤 합니다.
무엇보다 다카시를 혼돈에 빠뜨린 건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것 아닌가?”와 “1936년의 역사를 바꾼다면 내가 살던 1994년은 일그러지고 마는 건가?”라는 모순된 의문입니다. ‘시간여행을 통한 과거(역사) 바꾸기의 딜레마’는 타임트립 장르물의 단골 소재인데, 미야베 미유키는 현대사에 무지한 18살 대입수험생 다카시와 비밀투성이인 시간여행자 히라타의 갈등과 논쟁을 통해 이 문제를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그려냅니다. 어떻게든 근미래의 비극을 막고 싶은 다카시는 18살다운 순진무구함을 앞세워 과거를 바꿀 것을 요구하지만, 베테랑 시간여행자인 히라타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혹시 가능하더라도 역사를 뒤바꿀 순 없음을 단호하게 설명합니다.
“역사는 자기가 가려는 쪽을 지향해. 그것을 위해 필요한 인간을 등장시키고, 필요 없게 된 인간은 무대에서 내리지. 때문에 개개의 인간이나 사실을 대체하더라도 상관없는 거야.” (1권 p203)
가모우 육군대장의 자결 미스터리를 파헤치면서 다카시는 시간여행과 역사의 문제를 조금은 성숙한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히라타가 스스로를 ‘가짜 신’, 즉 신에 가까운 능력을 지닌 것 같지만 실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고 자조한 까닭도 제대로 깨닫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반전과 함께 드러나는 자결 미스터리의 진상과 히라타가 오랫동안 감춰온 비밀의 실체는 단 며칠 만에 다카시를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진화시킵니다.
“나 말이야, 과거를 보고 왔거든. 덕분에 알게 됐어. 과거는 고쳐봐야 소용없고 미래는 고민해봐야 쓸모없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나, 더욱 똑바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어.” (2권 p273)
스토리도 방대하고, 인물도 많은데다 자칫 스포일러가 될 내용들이 많아서 약간은 두루뭉술한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몇몇 주요 조연들은 그 캐릭터와 역할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스포일러라 전혀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에 관심이 가더라도 다른 독자의 서평을 먼저 읽는 건 정말 말리고 싶습니다. 적잖은 분량이라 무작정 도전하기 어려운 작품이긴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에게 호감을 가진 독자라면, 또 시간여행과 미스터리와 역사소설의 콜라보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과감하게 1936년의 도쿄로 날아가 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