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결혼
제네바 로즈 지음, 박지선 옮김 / 반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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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DC 최고의 형사 변호사 세라 모건은 결혼 10주년 다음 날 인생 최악의 상황을 맞이합니다. 전업 작가인 남편 애덤이 호숫가 별장에서 내연녀 켈리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가 점차 소원해지던 중이었긴 해도 사랑 하나만으로 애덤을 믿어왔던 세라는 살인 못잖게 그가 1년 넘도록 켈리와 깊은 관계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에도 불구하고, 세라는 애덤의 변호를 자처합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한다는 점과 그가 범인일 리 없다는 확신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무죄를 밝혀냄으로써 어떻게든 결혼생활을 지켜내고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가는 일을 막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사는 연신 난관에 부딪히고, 애덤마저 연이어 대형 사고를 치며 세라를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가족 또는 부부가 주인공인 도메스틱 스릴러는 어지간히 눈길을 끄는 요소가 없으면 가급적 기피하는 장르지만, ‘완벽한 결혼내연녀를 살해한 남편을 변호하는 아내라는 설정 때문에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남편에게 1년 넘도록 마음까지 주고받은 내연녀가 있었고 그 내연녀를 살해한 혐의를 받게 됐다면, 보통의 아내라면 진실과는 관계없이 피해자 측에 서서 남편을 증오하며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하지만 세라는 이제는 거의 사그라진 한 조각의 사랑과 형사 변호사로서의 명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신을 배신한 애덤의 변호를 자처합니다. 그리고 검찰과 보안관이 놓친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무리한 방법까지 동원해가며 분투합니다. 한편 세라 덕분에 구속을 피해 가택연금 판정을 받은 애덤은 스스로 진범을 밝혀내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짓까지 저질러가며 위험한 행동을 일삼습니다. 문제는 그 행동들이 점점 더 애덤 본인을 옥죄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라와 애덤이 한 챕터씩 번갈아 1인칭 화자를 맡아 각자가 의심하는 인물들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한 챕터의 분량이 짧기도 하지만 무척 빠른 속도로 이야기가 진행돼서 두 사람의 심리묘사에 적잖은 분량이 할애됐음에도 불구하고 금세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주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세라와 애덤의 조사가 진척될수록 여러 명의 용의자가 차례로 수면 위로 떠올라서 독자의 궁금증을 증폭시키는데, 살해된 켈리의 과거 속에 의심스러운 인물들이 보이는가 하면, 조사에 비협조적인 보안관들도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고, 켈리를 살해할 만큼 원한 혹은 집착에 빠진 인물들도 눈에 띕니다. 또한 스스로 진실을 밝히려는 애덤의 무모한 폭주는 세라의 조사를 거듭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그녀로 하여금 혹시 애덤이 진짜 범인이 아닐까?”라는 의문까지 품게 만들 만큼 여러 차례 위기를 자초하곤 해서 내연녀를 살해한 남편을 변호하는 아내라는 설정을 더욱 쫄깃하게 만듭니다.

 

무척 재미있게 읽었지만, 다 읽은 뒤 뭔가 아쉽고 허전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우선 일부 인물들의 관계나 캐릭터 설정이 다소 자연스럽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냥 받아들이기엔 과도해 보이는 우연으로 엮인 인물들도 있고, 단지 한두 개의 역할을 위해 도구적으로 쓰이고 만 인물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작가가 미스디렉션을 위해 여러 명의 용의자를 등장시키며 의혹의 씨앗을 잔뜩 뿌려놓았지만, 정작 그들이 등장할 때마다 이 사람은 신경 안 써도 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금도 의심스럽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용의자들 외에 세라와 애덤 주변인물을 눈여겨보게 만든 설정은 꽤 정교하고 치밀했지만 눈길을 잡아끌 만큼 흡인력이 크진 않았습니다.

 

마지막 반전과 복선을 회수하는 방식은 100점까진 아니어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만족스러웠습니다. 주인공 세라의 캐릭터도 한 번만 보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이 작품의 후속작 완벽한 이혼이 미국에서 2025년에 출간됐고, 한국에도 2026년에는 소개될 예정이라고 해서 나름 기대감을 품게 됐습니다. 어딘가 좀 허술하고 아쉬운 대목들이 있긴 해도 진범 찾기 미스터리와 도메스틱 심리 스릴러가 잘 믹스된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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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팝니다
미시마 유키오 지음, 최혜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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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광고회사 카피라이터인 하니오는 어느 날 갑자기 삶에 염증을 느끼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자 자살을 시도하지만 병원에서 의식을 되찾습니다. 이후 그는 자살이 아닌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기 위해 황당한 신문광고를 게재합니다. 바로 자신의 목숨을 팔겠다는 것입니다. 하니오를 찾아온 고객들은 소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고, 그들의 의뢰는 어떤 식으로든 하니오가 죽어야만 완수할 수 있는 기괴한 것들이었습니다. 하니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그 의뢰들을 수행하지만 엉뚱하게도 그는 매번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곤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인물을 만난 뒤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휩쓸리면서 목숨을 판다는 것은 무책임하면서도 멋진 방법이었다.”라던 하니오의 신념은 뿌리부터 뒤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여러 차례 오른 데다 대표작 금각사를 비롯하여 한국에 소개된 소설과 에세이만 20여 편에 달하는 미시마 유키오지만 작품을 통해 만난 건 목숨을 팝니다가 처음입니다. 일본의 탐미주의 소설에 관심이 많긴 했지만 천황제를 주장하다 할복자살한 그의 극우적 사상과 태도가 아무래도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살에 실패한 주인공이 목숨을 판다는 광고를 내면서 벌어지는 기묘한 소동을 유쾌하게 그려낸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는 출판사 소개글에 눈길이 끌렸고, 솔직히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목숨을 팔겠다고 선언한 주인공이 겪는 웃지 못 할 소동극이 맞긴 합니다. 범죄조직 보스의 첩이 된 수십 년 연하 아내를 유혹한 뒤 둘이 함께 보스에게 살해당하라는 노인, 독극물의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죽어달라고 부탁하는 여자, 엄마에게 행복을 되찾게 해준 뒤 죽어달라는 소년 등 하니오를 찾아온 고객들의 면면이나 의뢰 내용도 기괴하지만, 하니오가 그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이라든가 정작 본인은 죽음의 문턱에서 매번 되살아나곤 하는 장면들은 말 그대로 블랙 코미디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이제 끝나간다.’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박하처럼 후련했다.”라고 기뻐하던 그가 매번 죽음에 외면당하는 상황들은 웃을 수도, 안타까워 할 수도 없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곤 합니다.

 

하지만 미시마 유키오가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는 중반부쯤 하니오가 레이코라는 통제 불능의 부잣집 딸을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레이코와의 동거 중 자신이 죽음을 갈망한 진짜 이유를 깨달은 하니오는 혼란에 빠지는데, 거기다가 정체불명의 인물들에게 쫓기는 신세까지 되자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불안과 공포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시마 유키오는 이 작품이 출간된 1968, 그러니까 패전의 여파와 자본주의의 범람과 젊은 세대들의 자유분방하고 극단적인 가치관 등 여러 면에서 혼란에 빠진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들이댑니다. “사회가 욕망하고 강요하는 통념에서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이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옮긴이의 말속 한 줄은 이 작품을 통해 미시마 유키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잘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숨을 팝니다는 단지 스토리만으로는 그 진의와 진가를 알아보기 힘든 작품입니다. 출간 당시 일본의 시대상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목숨을 팔아서라도 죽음을 손에 넣으려 했던 한 허무주의자의 해프닝으로만 읽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편을 다 읽은 뒤 이 작품의 배경에 대해 상세히 소개한 옮긴이의 말’(소부제 : 1968년 일본의 가족행복’)을 정독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런 뒤 다시 한 번 본편을 읽는다면 하니오의 생각과 행동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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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펠
이마무라 마사히로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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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마을 오쿠사토에서 초등학교 마지막 학기를 맞이한 오컬트 마니아 유스케는 학급 게시판 담당을 자청하여 모두가 놀랄 만한 호러와 오컬트 이야기를 게시할 생각이었지만, 뜻밖에도 최고의 모범생인 사쓰키 역시 게시판 담당을 자원하자 당황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1년 전 마을축제 전날 잔혹하게 살해된 사촌언니 마리코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함임을 알곤 더욱 놀랍니다. 살해된 마리코는 오쿠사토 7대 불가사의라는 문서를 남겼는데, 거기엔 여섯 편의 괴담과 함께 일곱 번째 불가사의를 알면 죽게 된다는 기이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사쓰키는 유스케의 도움을 통해 괴담 속 수수께끼를 풀어 일곱 번째 불가사의를 알아낸다면 마리코의 죽음의 진상도 드러날 거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장의 살인 시리즈로 한국 독자에게 어필했던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신작입니다. ‘시인장의 살인 시리즈는 제 취향과는 살짝 맞지 않았지만, “호러와 미스터리는 이런 식으로도 만날 수 있다!”, 띠지에 실린 추천사에 눈길이 끌려 급 관심이 생겼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호러와 미스터리의 조합을 무척 좋아하는데, 이마무라 마사히로는 어떤 식으로 풀어냈을지 무척 궁금해진 것입니다.

 

주인공은 세 명의 초등학교 6학년생입니다. 모든 게 평균치 캐릭터지만 나름 오컬트 마니아라 자부하는 유스케, 학급회장이자 명문 사립중학교 입학이 확실한 모범생 사쓰키, 그리고 전학 온지 얼마 안 돼 학급 내에서 존재감이 희미한 미나가 이른바 오쿠사토 7대 불가사의를 추적하고 그 안에 숨은 수수께끼를 풀어냄으로써 미제사건으로 남은 마리코의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입니다.

 

사고로 죽은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터널, 담력테스트를 시도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는 폐건물, 해질녘 참배한 사람들을 죽게 만드는 지장보살, 자살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댐 위의 공중전화, 우물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정신줄을 놓아버린 산속 마을 등 마리코가 남긴 문서 속의 여섯 편의 괴담은 언뜻 보면 평범해 보였지만, 세 주인공은 현장에 직접 가보거나 관련된 사람들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괴담 속에 숨은 위화감과 수수께끼의 실체를 발견하곤 하는데, 문제는 그 실체들이 하나같이 마리코의 죽음과 연관돼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부터 세 주인공은 서로 다른 역할을 맡게 됩니다.

오컬트 마니아인 유스케가 괴이한 힘에 의한 범행, 즉 명백한 오컬트적 가설을 내세우는 반면, 모범생인 사쓰키는 (유스케에게 도움을 청하긴 했어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추리로 맞섭니다. 그리고 미나는 두 사람의 주장을 검증하고 허점을 지적하며 판정을 내립니다. “공포와 추리가 같은 속도로 달려간다.”는 출판사 소개글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겁니다.

 

호러와 미스터리의 조합은 물과 기름을 섞는 일과 마찬가지로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대체로 호러인 줄 알았는데 실은 미스터리라는 타협점을 찾는 게 일반적이지만, ‘디스펠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두 장르를 절묘하게 조합한 작품입니다. ‘오쿠사토 7대 불가사의라는 문서에 담긴 괴담들은 각각 호러물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사쓰키가 펼치는 합리적인 추리와 미나가 소개하는 각종 미스터리 기법은 이 작품을 본격 미스터리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논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생들이 주인공이라는 점 때문에 선입견을 가질 독자도 있겠지만, ‘디스펠은 오히려 세 주인공의 캐릭터 덕분에 리얼리티와 긴장감을 더욱 생생하게 품게 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른 뺨 칠 정도로 지나치게 똑똑하다는 점이 간혹 거부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고, 그 또래들만의 고민과 갈등이 소개된 대목에선 이야기가 살짝 느슨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매력적인 주인공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처럼 미쓰다 신조의 호러와 미스터리의 조합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고,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새로운 모습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도 권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후속편이 나올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이마무라 마사히로가 다시 한 번 호러와 미스터리의 조합에 도전한다면 두 손 들어 환영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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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손님들 마티니클럽 2
테스 게리첸 지음, 박지민 옮김 / 미래지향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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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든 호수의 고급 여름별장에서 15세 소녀 조이가 실종됩니다. 퓨리티의 경찰서장 대행 조 티보듀는 MIT교수 출신의 농부 루터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그의 이웃인 매기 버드를 비롯한 마티니 클럽 멤버들은 나름의 조사를 통해 루터의 무죄를 입증합니다. 이어 매기는 조 티보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클럽 멤버들과 함께 진범 찾기에 나서지만, 일관성 없는 장소들에서 단서가 발견되는가 하면 호수에서 발견된 의문의 유골 때문에 조사가 혼선을 일으키자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그러던 중 50여년 전 퓨리티에서 벌어졌던 대량 살인사건이 소녀 실종사건과 연관 있다고 확신한 매기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인물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합니다.

 


젊은 시절, 정글을 헤쳐 가던 때가 떠올랐다. 매기는 예전의 그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낡은 몸은 아직 그 유령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p267)

 

마티니 클럽은 메인주()의 작은 휴양도시 퓨리티에 모여 사는 다섯 명의 은퇴한 CIA 요원들이 꾸린 독서모임입니다. 대도시를 떠나 철저히 신분을 감춘 채 은둔생활을 즐기면서도 그들은 60~70대가 된 지금도 평생 갈고 닦은 기술을 잊지 못합니다. 또한 스파이로 암약하면서 수도 없이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과거를 그리운 추억으로 소중히 품은 채 살아가는 중입니다.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진 아드레날린유령을 포기할 마음이 없는 클럽 멤버들이 퓨리티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에 개입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시리즈 첫 편인 스파이 코스트에서 클럽 멤버들은 오랜만에 스파이로서의 재능과 기술을 선보이며 조금도 녹슬지 않은 활약을 펼쳤는데, 두 번째 작품인 여름 손님들에선 한 소녀의 실종사건에 말려든 뒤 복잡한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명탐정으로서의 기량을 발휘합니다. 처음엔 이웃에 사는 농부 루터의 무고함을 입증하는 게 주된 목표였지만, 매기와 클럽 멤버들은 자신들이 찾아낸 작은 단서와 갖가지 정보를 통해 진범을 찾아내기로 결심합니다.

마티니 클럽의 가장 큰 은 퓨리티의 경찰서장 대행 조 티보듀입니다. 30대 초반인 그녀가 볼 때 매기와 클럽 멤버들은 그저 자극적인 사건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는 평범한 노인들일 뿐입니다. 전작인 스파이 코스트에서 멤버들의 범상치 않은 능력을 직접 목격하곤 그들의 정체에 의문을 품긴 했어도 여전히 오지랖과 호기심에 사로잡힌 노인들이란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탓에 소녀 실종사건 수사과정에서도 사사건건 부딪히는데, 재미있는 건 조 티보듀가 클럽 멤버들의 도움과 조언에 나름 신경을 쓰고 귀 기울이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사실상 마티니 클럽의 객원멤버나 다름없는 캐릭터인 셈인데, 덕분에 그녀와 클럽 멤버들의 케미는 사건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이 사건은 여러 개의 움직이는 부품들로 이뤄진 하나의 큰 기계였어요.” (p417)

 

여름 손님들은 소녀 실종사건으로 시작되지만 50여년 전의 대량 살인사건 및 미제 실종사건 등 여러 사건들이 뒤엉키는데다 고급별장을 소유한 코노보 일가 내부의 갈등은 물론 부자 외지인들과 퓨리티의 가난한 토착민과의 충돌까지 섞여있어서 400여 페이지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거의 벽돌책에 버금가는 서사를 품고 있습니다. 이 모든 재료들은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별개의 것처럼 보였지만 매기와 클럽 멤버들은 그 안에서 거대한 하나의 줄기를 찾아내고 끝내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냅니다. 다 읽은 뒤에 찬찬히 복기를 해보면 거대한 하나의 줄기를 정교하게 엮어낸 테스 게리첸의 설계와 필력은 물론 아드레날린유령을 포기하지 않은 채 전력을 다해 진상을 밝혀낸 매기와 클럽 멤버들의 열의에 감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올해로 만 72세가 된 테스 게리첸은 이 시리즈는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한 제 감정을 반영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는 것 같았다.”라는 소회를 밝힌 바 있는데, 그래선지 마티니 클럽 시리즈가 아주 오랫동안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매기와 클럽 멤버들의 평온한 일상이 깨지는 건 안타깝지만 그들의 아드레날린유령이 다시 한 번 활약하는 모습을 기대하게 되는 건 팬으로서 당연한 바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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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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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는 한국 독자와 만나는 다카노 가즈아키의 여덟 번째 작품으로(앤솔로지 적색의 수수께끼제외), 일본보다 한국에 먼저 소개됐습니다. 수록작 모두 2004~2017년 사이에 집필된 단편들이지만 대부분 미발표 신작들입니다.

2001‘13계단으로 데뷔한 이래 25년에 걸쳐 단 여덟 편만 출간한 과작(寡作) 작가지만, ‘のカルテ’(2005) 외엔 모두 한국에 소개될 정도로 국내 팬에겐 큰 호응을 얻어온 게 사실입니다.

 

표제작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를 포함하여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네 편이 유령 또는 영혼을 소재로 삼은 미스터리이며, 나머지 두 편은 이중인격을 다룬 서스펜스물과 기억상실을 소재로 한 SF물입니다.

한밤중 인적이라곤 전혀 없는 특정 장소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의 진실(‘발소리’), 한 여성이 참혹하게 살해된 사찰에서 유령 목격담이 잇따르는 가운데 진범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 꿈에서 낯선 남자의 죽음을 지켜본 여자가 그 죽음 이면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세 번째 남자’), 1958년을 무대로 깊은 산속에 자리한 유령 산장의 사연과 비밀을 캐는 이야기(‘아마기 산장’) 등 네 편의 유령 미스터리가 차례로 수록돼있고, 이어 건물에 갇힌 채 이중인격자인 무차별 살인범과 마주한 한 아르바이트생의 공포(‘두 개의 총구’), 기억을 잃은 뒤 수상한 기관에 수용된 한 남자가 자신의 과거를 알아내기 위해 위험한 선택을 하는 이야기(‘제로’) 등 서스펜스와 SF가 대미를 장식합니다. 개인적으론 앞선 네 편의 유령 미스터리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단편만의 묘미까지 더해져서 더 인상 깊었던 것 같습니다.

 


꽤 오래 전, 초기작인 ‘13계단그레이브 디거로 다카노 가즈아키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그를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새로운 기수로 여겼는데, 그래선지 신인류의 존재를 둘러싼 초대형 SF제노사이드가 그의 특별한 외도일 거라고 멋대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빙의를 소재로 한 ‘KN의 비극’.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연작단편집 ‘6시간 후 너는 죽는다를 연이어 읽으면서 어쩌면 다카노 가즈아키의 전공은 따로 있으며 오히려 초기의 사회파 미스터리가 진짜 외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직전에 한국에 소개된 건널목의 유령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는 그 생각을 확실하게 뒷받침해준 작품들입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유령 미스터리는 그저 공포와 재미에만 방점을 찍지 않습니다. 오히려 처연함과 애잔함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게 살아있는 주인공의 활약보다도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유령의 안타까운 사연이기 때문이며, 또한 미스터리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게 바로 유령 본인이기 때문입니다. “한때 살아 있던 이들의 사연과 인간성에 대한 깊은 시선을 드러낸다. 다카노 가즈아키가 천착해 온 인간의 악의와 연민이라는 주제의식을 느낄 수 있다.”는 출판사 소개글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듯 한데, 혹시 이 작품을 통해 다카노 가즈아키의 독특한 유령 미스터리 서사에 마음이 끌렸다면 장편인 건널목의 유령을 읽어볼 것을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한국에 최초로 소개됐지만 같은 해 출간된 ‘13계단의 명성에 밀려 주목받지 못했던 유령인명구조대가 유일하게 못 읽은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인데, 기회가 되면 중고로 구해서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팬으로서 가장 아쉬운 건 그가 하라 료 못잖은 과작 작가라는 점입니다. 초기에만 해도 매년 신작을 냈지만, ‘제노사이드’(2011) 이후 건널목의 유령’(2022)이 나올 때까지 무려 11년이 걸렸습니다. 단편집이라 살짝 아쉬웠긴 해도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를 통해 어느 정도 갈증이 해소되긴 했지만, 언제쯤 새 장편 소식이 들려올지 그저 감감할 따름입니다. 오랜만에 사회파 미스터리를 내놓는다면 더없이 반가울 것 같고, 처연하고 애잔한 유령 미스터리라도 두 손 들어 격하게 환영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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