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의 대여 서점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 2
다카세 노이치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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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에는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많았다. 세책업은 무거운 책궤를 짊어지고 다니며 책을 빌려주는 장사였기 때문에 주로 남자들의 일이었다. 필마단기로 세책업에 뛰어든 센은 남자들과 경쟁하며 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는 성적인 표현이 노골적이거나 정권을 비판하는 책을 엄히 단속하던 시절이었는데, 인쇄 판목을 새기는 조각사였던 센의 아버지는 막부에 비판적인 책을 조각했다는 혐의로 형벌을 받고 실의에 빠져 자살했다. 이로 인해 혈혈단신이 된 센을 지탱한 것은 ‘책을 단속하는 세상’에 대한 의문과, 그럼에도 잃지 않았던 책에 대한 믿음이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작품이라 줄거리를 어떻게 정리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출판사의 소개글만큼 잘 쓸 자신이 없어서 거의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안 그래도 비블리오 미스터리, 즉 책이나 기록문서를 소재로 하는 추리소설을 좋아하는데, 거기에다 미야베 미유키 덕분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 에도시대가 배경인 작품이라 큰 기대를 갖게 됐습니다. (처음 접한 작가지만 북스피어가 펴내고 이규원이 번역한 작품이라 조금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는 뒷골목을 누비며 반딧불이의 희미한 빛을 후세에 남기는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책만 빌려주고 다니는 게 아니에요. 책을 지키는 거예요.” (p66)


5년째 세책점 우메바치야를 운영하는 24살 센의 삶은 99%가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책에 실릴 삽화를 판목에 조각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엔 홀로 무거운 책궤를 들고 사방을 돌아다닙니다. 단순히 생계를 위한 세책이 아니라 센은 진심으로 책을 아끼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책이 얽힌 사건이라면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일단 부딪히고 보는 성격입니다. 당차고 정의로운 반골이라고 할까요?


수록된 다섯 편엔 센의 과거와 현재를 소개하는 내용은 물론 절도, 방화, 살인 등 책과 관련된 크고 작은 사건들을 센이 직접 해결하거나 그에 버금가는 역할을 맡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지혜를 동원하여 진상을 밝혀내기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사건 관련자를 만나거나 사건 현장을 직접 찾기도 합니다. 그 와중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심지어 폭력배와 부딪히더라도 센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 모든 건 어떤 상황에서도 책을 지키겠다는 신념 하나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편집자 후기’ 가운데 “센은 책에 관한 한 집념이라고 해도 좋을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과 출판을 통제하는 나라님들에 대한 반감도 있지요.”라는 설명은 센이 어떻게 세상을 대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엄청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독하고 센 이야기도 아니지만 때론 웃음을 자아내기도, 때론 행여나 다치기라도 할까 걱정하게 만들기도 하는 센의 진심어린 행동들을 읽다 보면 어느새 온힘을 다해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센의 대여 서점’은 북스피어가 야심차게(?) 내놓은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라는 특이한 이름의 시리즈 중 한 편으로, 이마무라 쇼고의 ‘새왕의 방패’에 이은 두 번째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에도시대는 물론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일본소설을 무척 좋아하다 보니 이 시리즈가 북스피어 김사장님의 예고처럼 10편만 내고 끝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자신 있게 추천하는 건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바로 일본 시대소설의 가장 큰 장벽인 고유명사 때문입니다. ‘미야베 월드 2막’을 비롯하여 일본 시대소설을 꽤 읽은 저도 ‘센의 대여 서점’에서 처음 보는 고유명사들이 많아서 주석에 눈길이 많이 빼앗겼는데, 이제 막 입문하는 독자라면 꽤 난이도 높은 책읽기를 각오해야 됩니다. 하지만 이 장벽만 넘는다면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라는 길고도 반어법적인 시리즈 이름에 100% 공감하는 것은 물론 저처럼 ‘에도시대 마니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일본에선 2025년에 센의 두 번째 이야기인 ‘往来絵巻 貸本屋おせん’가 출간됐습니다. 개인적으론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의 세 번째 작품이 센의 두 번째 이야기가 됐으면 좋겠는데, ‘편집자 후기’를 보면 그럴 가능성도 꽤 있어 보입니다. 물론 1~2년에 한 편씩 센의 새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말입니다. (작가 이력을 살펴보니 센의 이야기 외에도 시대소설을 많이 출간했던데, 그 작품들도 한국에 꼭 소개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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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크래쉬
프리다 맥파든 지음, 박지현 옮김 / 북플라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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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잇 때문에 22살에 뜻밖의 임신을 한 테건 베르너는 뒤늦게 아기의 아빠가 부유한 사업가이자 유부남인 걸 알게 됩니다. 만삭인데다 빈곤에 시달리던 테건은 남자로부터 거액을 받는 대신 비밀 계약서를 쓰기로 약속했지만, 계약 당일 남자를 다시 본 순간 자신이 데이트 강간을 당했음을 깨닫습니다.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계약을 거부한 테건은 유일한 가족인 오빠 데니스의 집으로 향하지만 도중에 눈 폭풍에 휘말리며 큰 사고를 당합니다. 한밤중 인적 없는 곳에서 발목까지 부러진 테건은 공포에 휩싸이지만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구합니다. 하지만 남자는 테건을 병원이 아닌 외딴 곳에 위치한 자신의 집으로 데려갑니다.



최근에 읽은 프리다 맥파든의 초기작(미국 출간 2018년) ‘대리모’에서 적잖은 실망감을 느낀 탓에 비교적 최신작(2025년)인 ‘더 크래쉬’에서 그 실망감을 만회할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절반쯤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충분히 만족하진 못했지만 막판에 터진 프리다 맥파든 특유의 반전들 덕분에 나름 개운한 기분으로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습니다.


요약한 줄거리는 실은 1부의 중간쯤, 정확히는 69페이지까지의 초반 설정을 정리한 것입니다. 70페이지부터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고, 이어 2부 중간쯤인 150페이지에서 첫 번째 큰 반전이 일어나는데, 사실 이 대목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 자체가 대형 스포일러라서 정작 서평에서 이 작품의 알맹이를 언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소개글 역시 제가 요약한 줄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SNS에 올라온 서평 가운데 ‘첫 번째 큰 반전’을 공개한 경우가 적지 않을 것 같으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가급적 아무 정보 없이 본편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기본적인 얼개는 큰 부상까지 입은 만삭의 임산부 테건이 남자의 집에 감금된 채 나흘이라는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내며 죽음의 위기까지 겪다가 가까스로 살아남는 이야기입니다. 서스펜스 스릴러의 교과서적인 설정에다 ‘프리다 맥파든 표 도메스틱 스릴러’의 서사까지 잘 버무려진 구조인데, 앞서 ‘충분히 만족하진 못했지만’이란 표현을 쓴 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흘간의 감금이 비슷한 상황의 반복으로 이어진 탓에 중반부쯤 지루함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뜻밖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소소한 반전들이 이어지긴 하지만, “또?”라는 불만 섞인 혼잣말이 여러 번 흘러나온 게 사실입니다.

다만 마지막 60여 페이지에 걸친 연이은 큰 반전들은 앞서 느낀 지루함을 어느 정도 상쇄시켜 줄 만큼 흥미로웠고, 등장인물 하나하나를 허투루 낭비하지 않은 꼼꼼한 설계에 “역시 프리다 맥파든!”이란 감탄이 저절로 튀어나오기도 했습니다. ‘절반쯤의 성공’이라는 표현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건데, 독자에 따라서는 막판 반전보다 중반부의 지루함이 더 기억에 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프리다 맥파든의 작품 19편 가운데 ‘더 크래쉬’까지 7편을 읽었는데, 고백하자면 아직 못 읽은 ‘하우스 메이드 3’을 제외하곤 더는 큰 기대를 갖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우스 메이드 1~2’와 ‘네버 라이’는 손에 꼽을 작품이지만, 그 외엔 대체로 평작의 느낌이 더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약간의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게 ‘세입자’인데, 그 작품에서도 ‘절반쯤의 성공’ 이상의 만족감을 못 느낀다면 나머지 작품들은 (스포일러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독자들의 서평을 미리 꼼꼼히 살펴보고 골라 읽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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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명성아파트
무경 지음 / 래빗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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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여름, 경성 변두리의 독신자 아파트에서 기이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경찰은 입주민들은 물론 때마침 영화촬영을 위해 아파트에 머물던 감독과 배우까지 철저히 심문하지만 좀처럼 단서를 잡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또 한 명의 입주민이 목숨을 잃고, 조만간 아파트를 허물 거라는 말까지 나오자 남은 입주민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12살의 나이에 식모살이를 하는 입분은 자신이 모시는 마님 최연자, 일명 가야마 렌코가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사태는 점점 악화될 따름입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와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인간의 타락을 지켜보는 악마가 등장하는 판타지 호러 미스터리 ‘부디 당신이 무사히 타락하기를’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무경의 작품입니다. 그의 첫 출간작인 ‘1929년 은일당 사건 기록’을 아직 읽진 못했지만, 제겐 ‘관심 목록’ 상단에 올려놓고 늘 신작 소식을 고대하는 개성 강한 한국 장르물 작가 중 한 명입니다. 


3인칭 시점이긴 하지만 이 작품의 실질적 화자는 일본 경찰에게 부모를 잃고 12살 나이에 식모살이를 전전하는 소녀 입분입니다. 일본 저택에서 쫓겨난 입분은 ‘최연자’와 ‘가야마 렌코’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정체불명의 마님 덕분에 명성아파트에 머물며 생계를 이어가는데, 그곳에서 일어난 두 개의 살인사건에 휘말리며 본의 아니게 큰 고초를 치르게 됩니다. 그리고 프롤로그에서부터 입분의 평범치 않은 재능을 눈치 챈 독자들의 기대대로 막판에 이르러 최연자와 함께 사건 해결은 물론 불꽃놀이처럼 연이어 터지는 반전을 선사합니다.


첫 페이지의 명성아파트 평면도에서부터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가 슬그머니 풍기지만, 첫 살인사건이 벌어질 때까진 ‘불쌍한 소녀 입분의 고행기’가 잔잔하게 펼쳐집니다. 동시에 뭘 하는 사람인지, 왜 이 독신자 아파트에 사는 건지 온통 비밀투성이인 최연자에 대한 궁금증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그러다가 첫 살인사건이 터지면서 이야기는 급속히 빨라지고, 독자는 작가가 슬쩍슬쩍 뿌려놓는 떡밥들이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닌 건지 의아해하며 허겁지겁 쫓아가게 됩니다.


12살 소녀의 눈높이로 전개되는 이야기인데다 사건도 그리 복잡해 보이지 않아서 중반을 좀 넘어선 대목까지만 해도 살짝 느슨하게 읽힌 게 사실인데, 이 작품의 백미는 바로 그 지점부터 엔딩까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반전에 있습니다. 범인의 정체는 그다지 뜻밖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 이후 입분과 최연자가 터뜨리는 연이은 반전은 짜릿한 롤러코스터처럼 속도와 낙차가 대단해서 중반까지의 느슨함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습니다. 또 위화감을 자극했던 사소한 단서와 복선들이 깔끔하게 회수되는 과정에선 본격 미스터리의 참맛도 만끽할 수 있었고, 일제강점기와 근현대사를 미스터리의 주 무대로 삼는 무경의 특기도 다시 한 번 진하게 맛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2024년에 첫 편이 출간된 ‘마담 흑조 천연주’의 두 번째 이야기를 내내 고대하고 있는데, 내년(2027년)엔 꼭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추천의 말’에 실린 송시우의 추천사를 인용하며 서평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무경은 일제강점기 조선을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그럴듯하게 재현해내는 독보적인 작가다. 납작한 반일 감정이나 애국주의로 일변하지 않고, 저 시대 우리가 살았더라면 정말 저랬을 것 같다는 공감을 하게끔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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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우습게 봤겠지만
베라 쿠리안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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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12살이던 자신을 강간한 윌에게 복수할 날만 기다리던 클로이는 뜻밖의 기회 덕분에 그가 다니는 존 애덤스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심리학과 교수인 와이먼이 고교시절 반사회적 인격장애 판정을 받은 클로이에게 ‘다기법 사이코패스 패널 연구’에 참여해달라며 등록금 전액 면제라는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입니다. 클로이는 입학 후 윌에게 서서히 접근하며 살해 계획에 골몰하지만, 예기치 못한 교내 연쇄살인사건이 터지자 큰 혼란에 빠집니다. 피살자들이 자신처럼 와이먼의 연구에 참여한 사이코패스 중 일부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위험을 감지한 클로이는 윌에 대한 복수극과 함께 연쇄살인범 찾기에 나섭니다.



생소한 작가의 작품임에도 관심을 갖게 된 건 “6년 전, 윌은 나를 강간했다. 60일 뒤, 나는 그 새끼를 죽일 것이다.”라는 카피 때문이었습니다. 사적 복수를 다룬 장르물은 무조건 찾아 읽는 취향이라 선택했던 건데, 초반부가 채 지나기도 전에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걸 알곤 아쉬움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됐습니다. (평소 큰 글씨의 홍보 카피 외에 내용에 관한 소개글은 읽지 않는 습관 때문에 이런 일이 종종 벌어지곤 합니다)


“사이코패스가 반사회적 인격 장애보다 ‘나쁜’ 건 아니야. 다른 거지. 불행히도 사람들은 두 용어를 섞어 쓴다만. (중략) 불행히도 사이코패스라는 단어에 범죄라는 얼룩이 묻고 말았지만. (중략) 나는 그 단어를 좀 더 쓸모 있는 용어로 되찾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단다.” (p25)


클로이의 사적 복수가 이야기의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사이코패스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추적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사이코패스 버라이어티 쇼’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와이먼 교수의 연구에 참여한 학생들 전원이 제각각 다양한 사이코패스 기질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의외로 소심하고 조심스런 인물부터 남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걸 즐기는 인물, 다분히 폭력적이고 위험한 인물, ‘정상’이 되기 위해 타고난 기질을 억누르는 인물 등 보통사람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범죄라는 얼룩이 묻은 사이코패스’와는 사뭇 거리가 먼 사이코패스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살해당하는 것도, 잔혹한 연쇄살인범도, 그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것도 전부 사이코패스로 설정된 덕분에 이야기는 일반적인 범죄스릴러와는 전혀 다른 결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정상’과 사이코패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잔혹한 살인을 서슴지 않는 클로이는 와이먼의 연구대상 가운데 소심하고 나른한 기질을 지닌 앤드리, 부잣집 막내아들이자 학생회장으로 어떻게든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찰스와 함께 연쇄살인범 찾기에 나섭니다. 문제는 셋 다 사이코패스이다 보니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은 물론 협업 자체가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위태로운 상태로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때론 셋 가운데 연쇄살인범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판이 깨지기도 하고, 때론 서로의 힘과 도움이 필요해지며 다시금 손을 잡기도 하고, 미묘한 질투 로맨스가 작동하기도 합니다. 


20여 년 전부터 사이코패스를 ‘발굴’하여 연구를 해온 와이먼 교수는 사이코패스에 대한 선입견을 부수고, 실험과 면담을 통해 타고난 사이코패스 기질을 어떻게든 ‘정상’의 범주로 돌려놓기 위해 진심으로 애쓰는 인물입니다. 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을 변호했던 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적도 있지만, 그의 연구는 현재까지도 중단 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다만 자신이 선발한 사이코패스들 사이에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그는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클로이 일행의 의심을 사기도 합니다.


사이코패스 캐릭터도 생생하고, 사건도 궁금증과 의아함을 자아내도록 설정돼있어서 무척 흥미진진한 작품이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분량의 문제입니다. 중반부쯤엔 비슷한 이야기의 동어반복이 이어지고,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과도하게 디테일한 묘사들이 종종 목격됩니다. 작가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지만, 100페이지 정도만 줄였더라면 속도감과 함께 이 작품의 미덕이 더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클로이의 두 번째 이야기가 기대되긴 하지만, 아무래도 ‘분량의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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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놀이공원의 살인
샤센도 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더블샷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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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인 2001년, 가오픈 첫날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으로 인해 단 3시간여 만에 문을 닫은 비운의 놀이공원 일루전 랜드. 이후 폐허처럼 방치된 이곳을 사들인 괴짜 부호 도시마 이오리가 과거 놀이공원 관계자들과 폐허 마니아 등 10명을 초대합니다. “보물을 찾는 자에게 일루전 랜드를 넘기겠다.”는 도시마 이오리의 제안에 일행은 잠시 들뜨기도 하지만, 한 남자가 참혹하게 살해당하면서 일루전 랜드는 다시 한 번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으로 탈바꿈합니다. 연이어 살인이 벌어지는 와중에 20년 전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고, 참가자들은 도시마 이오리가 자신들을 초대한 목적이 따로 있음을 감지합니다.



아쓰카와 다쓰미와 함께 출간한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 이후 두 번째로 만난 샤센도 유키입니다. 앞서 ‘낙원은 탐정의 부재’에 도전했다가 판타지에 가까운 설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 적이 있는데,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의 좋은 기억과 함께 ‘폐허를 무대로 한 미스터리’라는 홍보글에 눈길이 끌려서 이 작품을 읽게 됐습니다. (샤센도 유키는 93년생 작가지만 검색해보면 엄청난 출간목록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한국에는 非미스터리 포함 모두 일곱 편이 소개됐습니다)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은 괴짜 부호의 초대장을 받고 지금은 폐허가 돼버린 일루전 랜드를 찾은 10명의 방문객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엽기적인 살인에 큰 충격을 받곤 진범을 찾는 이야기가 메인 스토리지만, 독자의 관심을 더 끄는 대목은 20년 전에 벌어진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의 이면에 숨은 가혹하면서도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놀이공원이 들어설 땅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아마쓰키촌 주민들의 피눈물을 짜낸 뒤 들어선 일루전 랜드가 총기 난사 사건으로 가오픈 3시간 만에 문을 닫고 20년 간 폐허로 방치됐다는 건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데, 작가는 거대한 클로즈드 서클이나 다름없는 일루전 랜드에서의 연쇄살인사건과 20년 전의 비극을 잘 직조함으로써 단순히 놀라운 트릭만 앞세운 본격 미스터리 이상의 서사를 만들어냈습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에 수록된 샤센도 유키의 ‘흔한 잠’에 대해 “애틋하고 안쓰러운 여운을 남기는 감성적인 미스터리”라는 평을 쓴 적이 있는데, ‘폐놀이공원의 살인’ 역시 미스터리 자체보다 20년 전의 비극에 얽힌 여러 인물들의 복잡다단한 심경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듯 합니다.


다만, 막판에 ‘탐정역’을 맡은 주인공 마가미 에이타로가 연쇄살인사건의 진상을 풀어내는 부분에선 역시 제 취향과는 좀 거리가 먼 억지스러움이 느껴져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범인의 범행동기도, 또 그렇게 복잡한 살인을 벌여야만 했던 이유도 어느 정도 납득은 됐지만, “과연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일까?”라는 반문이 계속 몰입을 방해했습니다. 이른바 ‘시마다 소지 스타일의 본격 미스터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저 같은 독자라면 비슷한 경험을 할 수도 있는데, 그 반대의 경우라면 이 작품에 높은 점수를 주고도 남을 만큼 열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저자 후기’를 통해 샤센도 유키는 괴짜 부호 도시마 이오리를 앞세운 ‘폐허 탐정 시리즈’를 구상하고 있음을 밝혔는데, 한번쯤 더 샤센도 유키에게 재도전 해볼지 여부는 좀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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