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쿠치바 전설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내 남자’, ‘토막 난 시체의 밤’,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등 읽은 작품 모두 독특한 느낌과 여운을 남겨줬던 사쿠라바 카즈키의 2006년 출간작입니다. 이 작품은 2007‘60회 일본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했지만 추미스 독자들이 기대하는 일반적인 추리소설은 아니라서 사전 정보 없이 읽을 경우 살짝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아카쿠치바 전설은 패전 직후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60여년에 걸쳐 돗토리 현 베니미도리 촌에서 제철업의 흥망성쇠를 겪은 아카쿠치바 가문의 여성 3대의 연대기입니다. 패전 무렵 태어나 업둥이로 자랐으며 환시(幻視)와 미래시(未來視)의 능력을 지녔던 만요, 거품경제의 극치를 달리던 80년대에 전국적으로 악명을 떨치던 폭주족이었다가 소녀만화가로 변신하여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게마리, 그리고 할머니와 어머니와는 달리 무기력하게 젊음을 소진하며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도코 등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세 명의 여성이 자신이 살던 시대의 변화상과 아카쿠치바 가문에서 벌어진 갖가지 사건들을 담담하게 들려줍니다.


 

아카쿠치바(赤朽葉, 붉은 고엽)라는 가문 이름답게 건물과 정원 모두 짙은 붉은색으로 뒤덮인 대저택을 무대로 한 여성 3대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굴곡진 삶뿐 아니라 패전-고도성장-거품경제에 이르는 일본의 현대사까지 담아내고 있어서 말 그대로 대하드라마와 같은 무게감과 깊이를 갖고 있습니다.

 

환시(幻視)와 미래시(未來視)의 능력을 지닌 만요는 패전 직후부터 1975년까지의 이른바 최후의 신화시대의 표상입니다. 지금은 존재 여부조차 확실치 않은 산속의 은거자들의 후손으로 피부색이며 머리칼이며 보통 일본인과는 사뭇 달랐던 만요는 업둥이로 자라다가 기구한 인연으로 인해 아카쿠치바 가문의 며느리가 됩니다. 그녀가 지닌 신비한 능력과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아카쿠치바 가문의 범상치 않은 분위기 덕분에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선 최후의 신화시대라는 부제에 걸맞게 매력적인 판타지 서사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만요의 딸 게마리는 1979년부터 1998, 그러니까 고도성장과 거품경제의 붕괴라는 롤러코스터 같았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명문가의 차녀였지만 게마리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폭주족 리더이자 쇠파이프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으로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립니다. 오늘이 행복하다면 내일 죽어도 좋다는 청춘예찬론을 펼치며 거침없이 살아가던 그녀는 뜻밖의 비극을 겪은 뒤 갑자기 소녀만화가로 변신하고 그야말로 짧지만 굵게 불꽃처럼 살아갑니다. 자신이 살던 격동의 시대와 꼭 닮았던 게마리의 삶은 만요의 판타지 서사와는 정반대로 지독한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그려집니다.

 

게마리의 딸 도코는 변화무쌍한 시대에 태어나 극적인 삶을 살았던 할머니 만요나 어머니 게마리와는 너무나도 다른 인물입니다. 2000년대 초반 일본 청춘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도코에게선 그저 무기력함밖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도코에게 주어진 미션은 할머니 만요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한마디 - “내가 옛날에 사람을 한 명, 죽였어.” - 의 진실을 밝히는 일입니다. 60여년에 걸쳐 아카쿠치바 가문에선 여러 사람이 다양한 형태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도코가 알기로는 그 가운데 살인의 가능성이 있는 죽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요의 고백에 담긴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도코는 과거의 죽음들을 모조리 소환합니다. 그리고 결국 만요가 오랜 시간 홀로 감내했던 비극의 실체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 작품의 미스터리 서사는 만요에 의해 시작되고 도코에 의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200760회 일본추리작가 협회상수상 이력만 믿고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다소 배신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그런 오해 덕분에 아카쿠치바 전설을 읽게 돼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수상 이력이 아니더라도 표지와 제목이 호러의 분위기를 내뿜는데다 사쿠라바 카즈키의 작품이란 이유만으로 어떻게든 읽었을 작품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각각 신화의 시대, 풍요와 붕괴의 시대, 무기력의 시대를 살았던 아카쿠치바 여성 3대를 그린 아카쿠치바 전설은 한두 줄로 그 매력을 요약하기가 어려운 작품이며, 특히 굴곡진 개인의 삶과 격변기를 통과하는 시대상을 한꺼번에 맛보고 싶은 독자에겐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쿠라바 카즈키에게 한번쯤 매료된 적 있는 독자라면 이 묵직하고도 기이한 이야기에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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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플라이트
줄리 클라크 지음, 김지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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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출신 예비정치인의 아내로 모두의 부러움을 샀지만 실은 지독한 가스라이팅과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클레어 쿡은 오랜 준비 끝에 신분을 바꾸고 종적을 감추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대학에서 퇴교당한 뒤 12년 넘게 마약 조직에 얽혀있던 이바 제임스는 마약단속국의 미행과 조직의 의심 속에 위기를 느끼곤 고향으로 도망치기로 결심합니다. 일면식도 없던 클레어와 이바는 우연히 공항에서 마주쳤고, 피치 못할 이유 때문에 서로의 항공권은 물론 옷과 휴대폰과 신분증 등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바꿔치기합니다. 그리고 각자가 간절히 원했던 자유로운 삶을 향해 비행기에 오릅니다. 하지만 운명은 결코 두 사람의 뜻대로 흘러가주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서사와 소재가 믹스된 매력적인 스릴러입니다. 가스라이팅, 가정폭력, 마약, 불행한 가족사가 남긴 상처, 신분 바꾸고 종적 감추기, 여성들의 연대와 저항 등 쉽게 섞이기 어렵지만 제대로만 섞인다면 시너지 효과가 대단할 수밖에 없는 재료들이 한 바구니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클레어와 이바가 공항에서 항공권을 바꿔치기 한 직후 이야기는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무사히 이바의 집에 몸을 숨기긴 했지만 끊임없이 찾아오는 위기 때문에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한 시간을 보내는 클레어의 이야기가 하나이고, 또 하나는 이바의 과거사로, 수녀원에 버려진 유년기부터 퇴교 직후 마약조직에 얽혔던 12년 전을 거쳐 공항에서 클레어를 만나기 직전까지의 기구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클레어의 이야기가 언제 남편에게 발각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미래에 대한 막막함을 통해 독자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면, 이바의 과거사는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쉽고 어이없게 궤도를 이탈해 막장에 처박힐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줘서 안쓰러움과 애틋함을 자아냅니다. 또한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젊은 날의 두 사람이 불과 30대에 이르러 자유로운 삶을 찾아 신분을 바꾸고 종적을 감추기로 결심하는 데 이르는 과정은 독자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클레어의 현재와 이바의 과거가 교차되면서 점차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지점에서 독자는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의 계획은 성공할까? 자신들의 삶을 엿 먹인 자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가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은 극적으로, 그것도 웃는 얼굴로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작가는 여기저기 크고 작은 지뢰밭을 만들어놓고 궁금증에 사로잡힌 독자를 희롱합니다. 일부 궁금증은 클라이맥스 즈음에 풀리지만, 결정적인 궁금증은 마지막 에필로그에 이르러서야 해소됩니다. 제 경우 에필로그를 읽곤 이해가 잘 안돼서 잠시 멍~했던 게 사실인데, 5분쯤 지난 후 다시 한 번 에필로그를 읽은 뒤에야 제대로 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아주 특별한 감정에 푹 빠졌습니다. 압권 혹은 반전까지는 아니어도 이 작품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들, 그런 멋지고도 애틋한 에필로그였기 때문입니다.

 

매력적인 소재와 서사들이 잘 섞인 데다 긴장감과 속도감도 적절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금세 달릴 수 있었지만, 중반 이후 살짝 늘어지는 대목들 때문에 별 0.5개를 뺐습니다. 다만 이 대목들 대부분은 클레어와 이바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과거사, 즉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대충 읽어 넘길 수는 없었습니다. 분량이 좀 많아 보였고 비슷한 내용이 반복된 점이 아쉽긴 했지만 말입니다.

아울러 클레어와 이바에게 수호천사처럼 등장한 뜻밖의 조력자들의 존재도 조금은 작위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없었다면 두 사람의 운명은 전혀 달라졌을 텐데 그만한 존재감치곤 너무나도 우연히, 너무나도 적절한 타이밍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등장한 방식이 썩 내키지 않았다고 할까요?

 

몇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재미와 의미와 여운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 주위에도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줄리 클라크의 다른 작품들도 해외에서 좋은 평을 들었던데, ‘라스트 플라이트가 한국에서 선전을 거둔다면 머잖아 그 작품들도 읽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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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진찰실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박수현 옮김 / 알토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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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진찰실신의 카르테 시리즈의 작가 나쓰카와 소스케가 일본에서 2023년에 발표한 메디컬 소설입니다. 교토의 지역의료기관인 하라다병원에서 소화기내과 의사로 근무하는 38살 마치 데쓰로가 주인공인데, 그는 여러 면에서 신의 카르테 시리즈의 주인공 구리하라 이치토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입니다. 구리하라가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광팬이었다면 데쓰로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사상에 심취한 철학적인 의사입니다. 무엇보다 권위나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환자에게만 몰두하는 진정한 의사라는 점이 닮은꼴의 핵심인데, 그래선지 스피노자의 진찰실은 나이를 먹은 구리하라가 등장하는 신의 카르테 시리즈의 외전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라쿠토대학에서 내시경 수술에 관한 한 최고라는 평을 듣던 데쓰로는 싱글맘이던 여동생이 투병 끝에 세상을 뜨자 어린 조카 류노스케를 돌보기 위해 대학병원을 그만두고 지역의료기관인 하라다병원으로 이직합니다.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최첨단 의술을 익혀야 하고 병원 내 권력관계의 스트레스까지 감당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데쓰로는 하라다병원에서 전혀 새로운 의사의 길을 걷습니다. 무엇보다 임종을 앞둔 노령 환자나 말기암 환자가 대부분이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의사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데쓰로는 3년 가까운 시간을 하라다병원에서 보내면서 그런 환자들에게 필요한 건 고도의 의술이 아니라 상대를 안심시키는 말 한마디와 진정성이 담긴 마음 한 조각이라는 걸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런 데쓰로의 태도는 환자뿐 아니라 동료의사들에게도 긍정적이고 선한 영향을 미칩니다.


 

“(스피노자는) 희망 없는 숙명론 같은 것을 제시하면서도 인간의 노력을 긍정했지.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노력하는 의미가 없을 텐데, 그는 이렇게 말했거든. ‘그렇기에노력이 필요하다고.” (p204)

 

데쓰로는 비록 병이 낫지 않더라도, 설령 남은 시간이 짧더라도 사람은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게 내 나름의 철학이야. 그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계속 생각해.”라는 식으로 자신이 심취한 스피노자의 사상을 의료현장에 대입시킵니다. 말하자면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에게 의사로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더라도 어떻게든 작은 행복을 맛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것이 의사 데쓰로의 철학이자 사명이자 존재의 이유라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선생님은 안심을 선물하는 것 같아요.”라는 새카만 후배의사의 한마디는 데쓰로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압축해놓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에 있던 시절을 돌아보면 치료한 암의 형태나 색조는 확실히 기억하지만, 환자의 얼굴은 거의 기억하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여기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잘 보여요.” (p59)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철학이 끼어든 재미없는 메디컬 소설 같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야기는 신의 카르테 시리즈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데쓰로 못잖게 괴짜 캐릭터를 지닌 동료의사들, 각자 기구한 사연을 지닌 환자들, 어떻게든 데쓰로를 대학병원으로 복귀시키고 싶어 안달이 난 선배의사, 그리고 내시경 능력자인 데쓰로에게 배움을 청하러 왔다가 어떻게 봐도 유능한 의사로 보이지 않는 모습에 실망하지만 결국 그의 진심과 그가 추구하는 의사의 길에 감동을 받는 새카만 후배의사 등 여러 인물들이 데쓰로라는 별난 의사와 함께 매력적이면서 감동적인 메디컬 소설을 구축해냅니다. 또한 정취 넘치는 교토의 풍광과 단맛 마니아인 데쓰로가 소개하는 가지각색의 화과자와 모치(もち, )의 향연은 별책부록처럼 독자의 오감을 즐겁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좀더 세고 자극적인 에피소드가 등장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절반, 그런 에피소드가 없어서 더 좋았다는 생각이 절반입니다. 양념이 살짝 덜 들어간 심심함이 아쉬움의 이유로 혹은 정반대로 호감의 이유로 작동할 수 있다는 뜻인데, 과연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느꼈을지 무척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2023년에 출간됐으니 만약 시리즈로 이어진다면 2025년엔 데쓰로의 두 번째 이야기가 출간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억측이지만 나쓰카와 소스케가 후속작을 염두에 둔 듯 본문 여기저기에 데쓰로와 관련된 떡밥을 숱하게 깔아놓아서 그런 기대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신의 카르테 시리즈가 다섯 편으로 마무리된 게 너무 아쉬웠는데, 스피노자에 심취한 데쓰로가 그 배턴을 이어받는다면 더없이 반갑고 기쁠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번역과 편집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후속작이 나온다면 그런 아쉬움들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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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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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대부분 명작으로 기억하던 작품들이지만 다시 읽었을 때의 감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봄방학을 코앞에 두고 S중학교 1학년 B반 담임 모리구치 유코는 학생들에게 교직 사퇴를 알립니다. 학생들은 얼마 전 유코의 4살 딸 마나미가 학교 수영장에 빠져 숨진 사고 때문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이어진 유코의 말에 모두 파랗게 질려버립니다. 경찰 발표와 달리 마나미는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게 분명하며, 복수의 살인범이 바로 1학년 B반 학생 중에 있다고 유코가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동요하는 가운데 유코는 범인들이 생명의 소중함과 죄의 무게를 깨닫고 그 죄를 지고 살아가길 원한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범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복수했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곤 교실을 나갑니다. 이후 마나미의 죽음에 관련된 자들이 차례대로 자신의 고백을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고백을 읽은 건 한국에 처음 출간된 2009년 혹은 2010년의 일입니다. 아직 장르물 독서이력이 몇 년 되지 않았던 때지만 앞으로 이런 작품을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미나토 가나에라는 이름이 확실하게 각인될 정도로 길고 깊은 여운을 느낀 기억이 있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은 탓에 언젠가는 다시 한 번 고백을 읽고 그 감흥을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다짐해왔는데, 거의 15년 만에 그 다짐을 실천하게 됐습니다.

 

두 명의 살인범이 13살 중학생이며 그들에게 살해당한 건 4살에 불과한 유아이자 담임교사의 딸이라는 점만으로도 그 어떤 범죄미스터리보다 흉악하고 잔혹한 설정이지만, ‘고백은 전형적인 미스터리 서사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범인의 정체를 공개한 것은 물론 사건 관련자들이 한 챕터씩 화자를 맡아 자신들만의 고백을 들려주는 독특한 구도를 취한 점 때문에 화제가 됐던 작품입니다. 특히 범인들을 향한 유코의 복수가 첫 챕터에서 완료된 탓에 독자는 과연 이후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사뭇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데, 미나토 가나에는 사건 관련자들의 고백을 통해 이 끔찍한 비극이 어떤 뿌리에서 시작돼서 어떤 줄기를 거쳐 자라났는지, 그리고 끝내 어떤 기폭제로 인해 살인이라는 지독하고 끔찍한 과실을 맺었는지를 차갑고 집요한 문장들로 그려냅니다.

 

희생자의 유족인 유코를 시작으로 두 명의 범인, 범인의 가족, 방관자이자 암묵적 공범이라 할 수 있는 동급생 등 여러 사람의 고백이 이어지는데, 그 고백들이 새삼 사건의 새로운 진상을 드러내거나 뜻밖의 반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종 독자로 하여금 불안감을 갖게 만드는 이유는 전혀 연관 없던 인물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일으키고 만 나비효과가 어떻게 마나미의 죽음을 초래했는가를, 또 마나미의 죽음이 어떤 식으로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고 폭발시키는지를 그 고백들을 통해 섬뜩할 정도로 세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코드가 복수임에도 불구하고, ‘고백은 복수 과정보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기까지의 각자의 사정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비슷한 소재를 동원한 작품들과는 전혀 결이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뜻입니다.

 

작가는 일말의 용서도 동정도 강요하지 않는다. 또한 상처와 파멸에 대한 회복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한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생채기가 생겨나고, 그들의 삶이 점차 그리고 영구히 바뀌어가는 과정을 잔혹하리만치 집요하게 그릴 따름이다.” (출판사 소개글 )

 

고백하면 항상 같이 연상되는 작품이 있는데, 40대 여교사가 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기 반 학생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극을 펼치는 그리고 숙청의 문을’(구로타케 요)이 그것입니다. 통쾌함과 비장감 등 전신을 흥분에 빠지게 만드는 통렬한 복수극이란 점에선 그리고 숙청의 문을이 압도적이지만, ‘고백은 아주 천천히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을 가하다가 끝내 스스로 지옥도에 떨어지게 만드는 집요한 복수를 그리고 있어서 흥분지수는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뒤에 남는 여운의 농도만큼은 바닥 모를 시커먼 늪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15년 만에 다시 읽은 고백은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달리 살짝 무덤덤했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첫 챕터에서 유코가 범인들에게 가한 복수라든가 마지막 페이지의 엄청난 반전은 여전히 인상적이었지만, 아마도 제 머릿속에 워낙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던 작품이라 다시 읽었을 때 그 강렬함이 기대에 못 미치자 아쉬움이 불쑥 솟아오른 듯합니다. 15년 전엔 별 5개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여겼지만 이번엔 가까스로 별 5개에 그치고 말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출간된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 가운데 여전히 최고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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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없는 집 율리아 스타르크 시리즈 1
알렉스 안도릴 지음, 유혜인 옮김 / 필름(Feelm)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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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율리아 스타르크는 50대 남자 페르 귄터 모트(일명 PG)로부터 기이한 의뢰를 받습니다. 간밤에 기억을 잃을 정도로 술에 취했다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자신의 휴대폰에 자루를 뒤집어쓴 채 살해당한 한 남자의 사진이 들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남자를 살해하고 사진을 찍은 건지, 이미 살해된 남자를 자기도 모르게 찍은 건지 확신하지 못하는 PG는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사진의 경위를 알아내기 위해 탐정인 율리아를 찾아온 것입니다. 자루를 뒤집어쓴 탓에 사진 속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전남편이자 경찰인 시드니와 함께 PG가 사는 숲속의 저택을 찾은 율리아는 유서 깊은 목재 재벌로 한때 큰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지금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모트 집안에 감도는 불온한 기운을 감지합니다.


 

오랜만에 접한 스웨덴 범죄 스릴러로 율리아 스타르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입니다. 알렉스 안도릴은 라르스 케플레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부부 작가로 한국에는 최면전문의스토커등이 소개됐는데, 실은 두 작품 모두 모두 읽다가 중도 포기했던 터라 이 작품 역시 살짝 고민하다가 도전하게 됐습니다.

 

주인공 율리아 스타르크는 무척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지방법원 서기 출신으로 탐정이 된 33세의 여성인데, 어릴 적 겪은 끔찍한 사고 때문에 몸과 마음에 큰 상처가 남아있습니다. 얼굴에는 큰 흉터가 있고, 걸을 때는 지팡이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타인과의 아주 사소한 접촉에도 공황장애에 빠지곤 해서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이 모든 건 어릴 적 사고의 악몽이 남긴, 그리고 평생을 안고 가야할 율리아의 숙명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그 사고의 후유증이 율리아에게 탐정으로서 특별한 능력을 부여했다는 점입니다.

 

율리아의 시간이 서서히 멈추는 순간들이 있었다. 마치 사고를 당할 때처럼 1000분의 1초 단위로 모든 순간이 기억에 새겨졌다. PTSD의 한 증상에 불과했지만 율리아는 그 덕에 사람들의 표정과 말에 숨은 뜻을 포착하고 디테일을 볼 수 있었다.” (p194)

 

즉 수사 과정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면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하고 율리아는 그 순간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습니다. 물증과 단서도 중요하지만 율리아는 사람들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몸짓에서 진위를 더욱 확실하게 가려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율리아가 오직 이 재능만으로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추리와 탐문 등 명탐정으로서의 능력도 겸비하고 있는데, 그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건 전남편이자 유일하게 율리아가 공황장애 없이 신체적 접촉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현직 경찰 시드니입니다.

 

의뢰인 PG가 죽은 남자의 사진을 찍은 날은 목재회사의 지분을 가진 모트 집안사람들이 저택에 모여 주주총회를 연 날입니다. 말하자면 PG가 범인이 아니라면 그의 휴대폰을 손에 넣어 죽은 남자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건 그날 저택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란 뜻입니다. PG를 포함한 네 명의 육촌, PG의 아내, 저택의 가정부 등 여섯 명을 상대로 율리아는 집요한 심문과 함께 자신만의 방식으로 면밀한 관찰을 이어갑니다. 그러던 중 사진 속 죽은 남자의 신원이 밝혀지자 율리아는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모트 집안의 어두운 과거와 현재가 복잡하게 뒤얽힌 계획된 살인임을 확신합니다.

 

저택에 모인 인물 중에 범인이 있으며, 탐정은 그들과 함께 지내며 진범을 밝혀낸다는 다소 고전적인 구도를 지녔지만, 율리아의 캐릭터가 워낙 특이한데다 누구 하나 정상적으로보이지 않는 모트 집안사람들의 비밀과 거짓말 때문에 고전미 이상의 새로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특히 작가는 집안사람 모두가 사진 속 죽은 자와 오랫동안 일그러지고 비틀린 관계를 이어왔다는 설정을 통해 율리아가 특별한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놓았습니다. 즉 물증이나 단서보다 용의자의 표정과 말투를 통해 진실과 거짓말을 가늠할 수 있는 사건으로 설정했다는 뜻입니다.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이어질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많이 남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공교롭게도 주인공 율리아의 탐정으로서의 캐릭터 때문입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독특한 탐정인 건 맞지만, 역동성과는 거리가 먼 그녀의 특별한 재능이 오히려 미스터리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든 게 사실입니다. 발로 뛰며 추리와 탐문과 단서 찾기를 거듭하는 탐정 본연의 자세라기보다는 마치 심리탐정이란 타이틀이 더 어울려 보였는데 이 때문에 탐정 주인공에게 기대되는 미덕들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율리아 스타르크 시리즈가 독자의 호응을 얻으려면 그녀만의 특별한 재능에 못잖게 탐정이라면 갖춰야 할 당연한 매력이 좀더 풍성하게 그려져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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