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 없는 검사의 사투 표정 없는 검사 시리즈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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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시간대의 기시와다 역 앞에서 끔찍한 묻지마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30대 남자 사사키요가 차로 세 명을 치어죽인 뒤 칼로 네 명을 살해한 것입니다. 대학 졸업 후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었던 잃어버린 세대라 주장하며 사회에 복수하려 했다는 그에게선 후회나 뉘우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사키요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인터넷에서 심심찮게 흘러나오는 가운데 사건을 담당한 오사카지검에서 우편물을 이용한 폭탄테러가 벌어지고, 곧이어 로스트 르상티망이란 자가 사사키요를 석방하라!”는 범행성명을 내는 일이 벌어집니다. 오사카지검 에이스 후와 슌타로가 두 사건을 모두 맡지만, 폭탄테러는 사방에서 빈발하고 잃어버린 세대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점점 더 커져만 갑니다.


 

표정 없는 검사후와 슌타로의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전작의 서평에 썼던 두 주인공에 대한 소개를 인용하면... 후와 슌타로는 이른바 能面’, 즉 일본 전통극 ’()에 쓰이는 가면을 쓴 듯 그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는 기계와도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뛰어난 능력 덕분에 오사카지검의 에이스라 불리면서도 상대를 가리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과 차가운 말투 때문에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인물입니다. 그와 반대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분은 어떤지, 좀 전에 뭘 했는지 등 그야말로 머릿속의 모든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무관 소료 미하루가 후와의 곁을 지킵니다.

 

시리즈 1편에서 후와는 오사카부경(府警)의 치명적인 비리를 밝혀냄으로써 경찰은 물론 검찰 내부에서도 지탄을 받은 바 있습니다. 2편에서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오사카지검 특수부의 비리를 조사하는 역할을 맡아 역시 내부의 적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반면 표정 없는 검사의 사투에서는 검사라기보다는 현장을 뛰며 탐문과 단서 찾기에 전력을 다하는 형사 주인공에 가까운 활약을 펼칩니다. 물론 오사카부경과의 악연과 긴장은 계속 이어지지만 전작들에 비해선 배경정도로만 설정돼있습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연쇄 폭발물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형사에 가까운 검사후와의 사투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으면서 전작들과는 살짝 결이 다른 미스터리를 선보입니다.

 

일곱 명을 살해한 묻지마 살인범과 전대미문의 연쇄폭탄범의 만행은 개인의 문제냐?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냐?”라는 뜻밖의 공방전을 초래합니다. ‘잃어버린 세대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복수 살인극이 일부에게 공감을 일으킨 결과입니다. 또한 테러와는 거리가 멀었던 일본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감정 없는 사법기계후와는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사건에 골몰할 뿐입니다. 그에게 있어 근거 없는 추측과 추상적인 공방전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사키요의 기소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연쇄폭탄범에 대한 수사가 좀처럼 진척을 보이지 않자 상부의 압박과 언론의 비난이 거세지고, 2년 전 후와에게 호되게 당했던 오사카부경 역시 전방위적으로 그를 몰아세우지만 그런 것들은 그에겐 티끌만큼의 영향도 못 미칩니다.

사무관 미하루는 2년 가까이 후와의 그림자처럼 일한 덕분에 누구보다 그를 잘 안다고 여겼지만, 이번엔 그의 표정 없는 얼굴과 오로지 앞만 보고 수사하는 태도가 너무나도 강경해서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런 와중에 후와가 치명적인 위기에 빠지고 오사카부경이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면서 사태는 급변합니다. 미하루는 말할 것도 없고 오사카지검 전체가 동요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흡인력 높은 필력과 속도감 있는 전개도 좋았고, 사건들 역시 사이즈와 파괴력 모두 커서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전작들에 비해 미스터리의 맛은 다소 싱겁게 느껴졌습니다. 얼개 자체가 단선적이기도 했고, ‘형사에 가까운 검사로서 열심히 분투하긴 했지만 후와가 딱히 일궈낸 성과도 눈에 띄지 않았으며, 비약에 가까운 추리가 등장하여 진범을 밝혀내는 반전 대목은 조금은 억지스럽게 읽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와 슌타로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창조한 가가 형사나 나쓰카와 소스케가 창조한 의사 구리하라 이치토처럼 이런 사람이 한 명쯤 실제로 존재한다면 좋겠다.”라는 열망을 품게 만드는 주인공으로서의 매력과 품격이 대단한 인물임에 분명합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여러 시리즈 가운데 출간된 작품 수가 가장 적긴 하지만 앞으로 가장 기대되는 시리즈로 여기는 이유는 오로지 표정 없는 사법기계후와 슌타로의 캐릭터 때문입니다. 아직 일본에서도 출간소식이 없는 걸 보면 한국에선 빨라야 2026년에나 신작이 나올 것 같은데, 하루라도 빨리 후와 슌타로와 소료 미하루의 네 번째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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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생의 갈림길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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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 중이던 자들의 무죄 변론을 잇달아 성공시킨 미키 할러는 전국의 재소자들로부터 빗발치듯 의뢰를 받습니다. 그 가운데 수임할 의뢰를 1차적으로 검토하는 건 그의 이복형인 해리 보슈입니다. 경찰 퇴직 후 골수암에 걸렸던 보슈는 지금은 할러의 비공식 조사관으로 일하는 중인데, 의뢰 편지를 보낸 재소자에 대해 면밀하게 조사한 뒤 무죄 가능성이 있는 케이스를 할러에게 추천하는 것입니다. 보슈는 보안관 부관인 전남편 로베르토를 사살한 혐의로 수감 중인 루신더의 의뢰에 주목하고, 할러 역시 무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합니다. 문제는 피살자가 보안관 부관이라는 점. 예상대로 숱한 난관이 닥쳐오는 가운데, 할러와 보슈는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하곤 소송을 제기합니다.


 

서평에 앞서 해리 보슈 시리즈의 팬들을 위해 이 작품의 이력을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한국에 출간된 해리 보슈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은 버닝 룸인데 미국에선 2014년에 출간됐습니다. ‘회생의 갈림길미키 할러 시리즈’ 7편으로 보슈가 거의 공동주연으로 등장하는데 미국에서 2023년에 출간됐습니다. 말하자면 보슈의 한국 팬들은 무려 9년이란 시간을 건너뛰게 된 셈입니다. 물론 미키 할러 시리즈’ 6편인 변론의 법칙’(2020)에도 보슈가 잠깐 얼굴을 내비치긴 했으니 ‘9년의 공백은 좀 과장된 표현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9년 사이에 미국에서 해리 보슈 시리즈7편이나 출간됐으니, 보슈의 팬이라면 그 작품들이 먼저 한국에 출간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동안 보슈는 경찰에서 은퇴한 뒤 골수암에 걸렸고, 르네 발라드라는 새 주인공과 여러 번 협업을 거쳤으며, 17살이던 보슈의 딸 매디는 어느새 LA경찰이 돼있습니다. 이 많은 이야기들을 읽지 못한 채 이젠 확연히 노년기에 접어든 보슈를 접하려니 마음이 많이 심란했고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 시장에서 할러의 판매량이 더 높아서 벌어진 일인 듯하지만, 부디 다음 번 마이클 코넬리의 한국 출간작은 해리 보슈 시리즈’ 18편인 ‘The Crossing’이기를 기대해봅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 연대기가 궁금한 분은 https://blog.naver.com/memories226/222086403503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설이 너무 길었습니다. ‘회생의 갈림길은 한때 지독한 속물이자 악마의 변호사로 불렸던 미키 할러가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 중인 재소자들의 무죄 입증을 위해 분투하는 정의의 변호사로 변신한 모습을 그립니다. 원제인 ‘Resurrection Walk’는 본문에서 여러 차례 부활의 발걸음으로 번역됐는데, 이는 할러의 변론 덕분에 새 삶을 얻은 자들이 교도소를 벗어나는 모습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는 속물적인 변호사가 아니라 억울한 자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역할을 자처한 할러 본인의 환골탈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의 변신에 큰 힘을 보태주는 인물이 바로 이복형 해리 보슈입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이야기 구조는 간결합니다. 전남편을 사살한 혐의로 5년간 복역해온 루신더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할러와 보슈는 물론 미키 할러 어벤저스들이 갖은 위협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인신보호 구제청구소송(한국의 재심청구와 비슷합니다)을 통해 끝내 진실을 밝혀내는 이야기입니다. 안 그래도 성공사례가 드문, 변호사로서는 거의 모험에 가까운 도전인데, 사건 피해자가 법집행자(보안관 부관)라는 점과 5년 전 루신더가 스스로 혐의를 인정하고 형량을 거래한 사실 때문에 할러와 보슈의 여정은 험난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할러는 법정에서 자신만의 화려한 쇼를 연출합니다. 강약을 조절해가며 상대를 도발하기도 하고, 속으론 쾌재를 부르면서도 가짜 표정으로 법정 안의 모든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계획대로 재판이 진행되도록 법정에서 위험천만한 난동을 부리기도 합니다. 여느 법정미스터리에선 맛볼 수 없는 이 쾌감이야말로 미키 할러 시리즈의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미덕을 보좌하는 것은 보슈를 비롯한 미키 할러 어벤저스들의 법정 밖에서의 분투인데, 이번에는 보슈를 제외하곤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인 인물이 별로 없어서 조금 심심하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미키 할러 시리즈가 계속 인신보호 구제청구소송에 주력할지 아니면 또 다른 방향으로 선회할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 됐든 할러와 보슈의 협업이 계속 이어질 거란 점만큼은 확실해 보여서 이전까지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재미를 줄 것 같습니다. 이복형제이자 변호사&퇴직경찰 콤비인 두 사람이 다음엔 어떤 사건으로 법정에 나서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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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꽃
로카고엔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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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서평을 쓸지 말지를 한참 고민한 작품입니다. 기이한 설정에 탐미적이고 파괴적인 서사를 품은 독특한 호러물임에 틀림없지만, 수록된 일곱 편의 연작 단편 가운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작품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호러는 이야기나 분위기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장르이기에 논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이해하려애쓰는 것 자체가 독자로서 부적절한 자세일 수도 있지만, ‘죽음에 이르는 꽃은 기시 유스케와 미쓰다 신조를 비롯한 그 어느 호러작가의 작품과도 결이 다른, 그래서 그 안에 담긴 인물과 사건과 엔딩의 함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 읽고도 좀처럼 어떤 맛인지 알아 챌 수 없는 작품이라 읽는 중에도, 다 읽은 후에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던 겁니다.

 

일곱 편의 연작 단편의 화자는 모두 바바 집안사람들입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바바 집안사람들이 겪은 고통과 상처의 1차적인 원인은 폭력적이고 독재적인 아버지 바바 요시유키의 만행이었지만, 설령 그가 없었다 해도 바바 집안은 신의 저주라도 받은 양 세상의 모든 불운과 불행과 악의 기운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 운명을 더욱 가혹하게 만드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매번 다른 모습으로 바바 집안사람들과 인연을 맺는 구네 니코라이라는 신비한 남자입니다. 높은 콧날, 여성적인 얇은 턱, 짐승의 이빨처럼 보이는 뾰족한 송곳니와 함께 복잡한 색의 홍채를 지닌 그는 남자가 봐도 심장이 두근댈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도 변치 않은 외모를 유지하는 그는 운송업자, 정신상담사, 영어교사, 미술상 등 다양한 모습으로 바바 집안사람들에게 다가갑니다. 구네는 (아주 드물게) 고난에 빠진 약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도 하지만, 그를 만난 바바 집안사람들 대부분은 파국에 가까운 엔딩을 맞이합니다. 기회를 주되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규칙을 어기면 가차 없이 벌을 내리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인간의 악마적 근성을 도발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죽음에 이르는 꽃은 지독한 현실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던 바바 집안사람들이 각자의 구네 니코라이와의 만남으로 인해 더욱 더 지독한 파국을 겪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해력의 부족의 가장 큰 원인은 구네 니코라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너무나도 모호하고 추상적인 데 있습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등장인물들 역시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라는 하소연을 거듭합니다. 문제는 그 모호하고 추상적인 말과 행동이 이야기의 향방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적인 장면들에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그 말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니 이어지는 장면들이 머릿속에 도무지 들어오질 않습니다. 난삽하지만 왠지 시선이 끌린다, 추악하고 파괴적이지만 왠지 매혹적이다, 비현실적이지만 왠지 현실감이 강렬하다 등 다른 호러물에선 맛보기 힘든 기괴함과 특별함을 품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론 (호러물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어불성설이지만) 각 수록작마다 해설이 실렸다면 좋았겠다, 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어떻게 서평을 써야 할지, 평점은 어떻게 줘야 할지 무척 난감했는데, 막상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그야말로 횡설수설일 뿐인 서평입니다. 야박한 평점은 오로지 저의 이해력 부족 탓이니 객관성이라곤 조금도 없다고 보면 됩니다.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보니 깔끔하고 선명하기 이를 데 없다는 호평이 대부분이어서 더욱 난감해졌는데(어떤 분은 난이도가 쉬운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스포일러를 담아서라도 좋으니 해설에 가까운 서평을 올려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 서평을 통해 제 이해력이 조금이라도 향상된다면 그때쯤 다시 한 번 죽음에 이르는 꽃에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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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비들
데니스 루헤인 지음, 서효령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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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추락한 이유이후 6년 만에 한국에 소개되는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입니다. 워낙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1970년대가 배경인 이야기라 커글린 가문 3부작에서 맛봤던 데니스 루헤인 특유의 시대물 분위기를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무척 컸습니다.

작은 자비들197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본 사회파 서사와 딸의 복수를 위해 지옥행을 마다하지 않은 한 어머니의 투쟁기가 절묘하게 섞여있어서 영화에 비유한다면 당시의 혼란상을 생생하게 그린 다큐멘터리와 롤러코스터 같은 액션 스릴러가 한 화면에 절반씩 담긴 듯한 특별한 느낌을 줍니다.

 

인종차별 서사의 출발점은 버싱(Busing)입니다. 1974년 보스턴 법원은 인종차별문제의 해소책이라며 각각 백인과 흑인학생으로만 이뤄진 두 공립고등학교에게 상당수의 학생을 맞바꿔 버스(Bus)로 통학시키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강제 전학을 통해 두 인종의 학생들을 섞어놓기만 하면 인종차별문제가 해소될 수 있을 거라는 안이하고도 무책임한 이 판결 때문에 가난한 백인들의 도시 사우디(사우스 보스턴의 애칭)는 대혼란에 빠지고 이내 격분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와중에 42살의 메리 패트는 조만간 버싱으로 인해 흑인학생들과 한 반에서 수업을 듣게 될 17살 딸 줄스 때문에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런데 전날 밤 친구들과 외출한 줄스가 아무 연락도 없이 실종되고, 하필 같은 시간대에 흑인청년 한 명이 기차역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자 메리 패트는 두 사건이 연관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패닉에 빠집니다. 함께 외출했던 딸의 친구들은 물론 사우디를 장악하고 있는 마피아까지 찾아가 줄스의 행방을 묻던 메리 패트는 결국 믿고 싶지 않은 사실과 마주하게 되고, 그때부터 지옥행을 각오한 복수극을 준비합니다. 문제는 딸을 위한 복수극이 곧 흑인청년의 죽음의 진상을 파헤치는 행위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안 그래도 버싱으로 인해 흑인들을 향한 혐오감이 극에 달한 사우디의 백인들의 눈에 메리 패트는 흑인을 위해 싸우는 백인여성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자비들은 지금까지 읽은 인종차별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모두 1차원적으로 보이게 만들 만큼 묵직한 작품입니다. 가난한 백인들의 도시 사우디에서 벌어진 흑인청년 살인사건 미스터리와 한 어머니가 벌이는 무자비한 복수 스릴러를 그리면서도 이분법과는 거리가 먼 다층적인 인종차별 서사를 저변에 깔아놓아서 흔히 선악의 대결로만 포장되곤 했던 유사한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감과 깊이를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눈길을 끈 건 인종차별이 단지 흑백 간에 벌어지는 문제만은 아니란 점(가난한 백인 VS 상류층 백인), 또 인종차별에 대한 신념이란 게 실은 그때그때 개인의 처지에 따라 갈대처럼 흔들릴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인종차별을 이용하여 물질적 혹은 정치적 이익을 보는 세력이 존재했다는 점 등 지금껏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인종차별의 이면을 집요하게 그린 대목들입니다.

 

주인공 메리 패트는 이 대목들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강렬하게 드러냅니다. 인종차별에 비교적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던 그녀는 버싱과 흑인청년의 죽음과 딸 줄스의 실종을 겪는 동안 거듭 자신의 태도를 바꿉니다. 그것은 신념이 약해서도 아니고, 생각이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줄스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인종차별에 관한 한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게 메리 패트의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신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줄스가 정글과도 같은 사우디에서 무탈하게 성장하기를 바랐던 탓에 자기도 모르게 백인의 우월감을 주입했던 일에 대해 메리 패트는 처절할 정도로 자책합니다. 그런 심정에서 총과 무기를 집어 들고 복수에 나서는 그녀를 지켜보는 독자의 마음은 착잡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리 패트의 복수극은 조용하지만 잔혹하게 이뤄집니다. 납치, 협박, 폭행, 감금 등 그녀가 해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합니다. 하지만 그 복수극은 조금도 짜릿하거나 통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수가 거듭될수록 메리 패트의 가슴속에 무거운 누름돌이 연이어 쌓이는 듯 느껴져서 안쓰러움과 애틋함이 배가될 뿐입니다.

 

작은 자비들은 쉽고 편하게 읽히는 스릴러는 절대 아닙니다. 따로 떼어놓아도 각각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구축할 수 있는 두 개의 서사가 절묘하게 섞여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각각의 서사가 지닌 무게감과 비극성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작인 우리가 추락한 이유에서 다소 아쉬움을 느낀 데니스 루헤인의 팬이라면 작은 자비들을 통해 그때의 아쉬움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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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생님을 죽였다
사쿠라이 미나 지음, 박선영 옮김 / 시옷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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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인 사이카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 중인 오쿠사와는 준수한 외모와 젊은 교사 특유의 친근감 덕분에 학생들에게서 호감과 지지를 받아왔지만, 여학생과의 부적절한 행위가 담긴 음란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온 이후 비난과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교내 창고에서 근신하던 오쿠사와는 새 학기가 시작된 직후 전교생과 교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옥상에서 투신자살합니다. 하지만 그가 담임을 맡았던 반의 칠판에 누군가 내가 선생님을 죽였다라는 글을 남긴 탓에 타살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학교 전체가 큰 충격에 빠집니다.


 

2021년에 읽은 사쿠라이 미나의 죽인 남편이 돌아왔습니다에 그리 좋은 평점을 주지 못해서 읽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학교 미스터리의 유혹에 넘어가 집어든 작품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역시 사쿠라이 미나는 저와는 잘 안 맞는 작가였고, 미스터리 역시 지나치게 단선적인데다 나이브하게 풀려서 애초 그리 높지 않았던 기대감조차 충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인기교사 오쿠사와의 충격적인 자살 장면을 그린 프롤로그 이후 그와 자주 접촉했던 네 명의 학생이 한 챕터씩 화자를 맡아 최근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오쿠사와를 못 마땅히 여겼으며 출처불명의 음란 동영상을 다운받아 인터넷에 유포한 문제아 도베, 대학교 추천입학과 관련하여 오쿠사와가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고 여기며 원망해온 모범생 구로다, 오쿠사와를 남자로 사랑했지만 늘 거절당했던 모모세,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입시 관련 특혜를 받은 탓에 오쿠사와에게 그 이유를 집요하게 물어봤던 부잣집 아들 고미나토가 그들입니다. 이들의 이야기에 이어 오쿠사와가 화자인 마지막 챕터에선 그의 고교시절부터 옥상에서 투신한 순간까지의 삶이 그려지면서 미스터리의 진상이 공개됩니다.

 

칠판에 적힌 내가 선생님을 죽였다는 의문의 문구 때문에 미스터리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오쿠사와의 죽음은 과연 자살일까, 타살일까? 타살이라면 의문의 문구를 남긴 학생이 범인일까? 자살이라 하더라도 과연 오쿠사와를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끔 만든 간접적인 살인범은 네 명의 화자 가운데 누구일까?

네 명 중 적어도 세 명은 오쿠사와의 죽음에 직접적인 연관 또는 책임이 있어 보입니다. 음란 동영상 자체가 가장 큰 원인인 것 같지만, 화자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동영상 외에 분명 다른 원인이 숨어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애초 동영상을 찍은 게 누구인지, 그걸 유포하여 어떤 이득을 얻으려 한 것인지가 독자의 궁금증을 계속 증폭시킵니다.

 

전작인 죽인 남편이 돌아왔습니다에 야박한 평점을 줬던 이유는 독자와의 게임을 불공정하게 만든 작가의 반칙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진실에 근접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라이맥스를 위해 입을 다물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던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생님을 죽였다의 경우 반칙까진 아니었지만, 이야기의 발단이 된 오쿠사와의 자살 자체가 설득력도 없고 공감을 얻기도 어려웠으며, 반전은 진작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단순한데다 그것이 과연 그를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 할 만큼 파괴적이었는가, 라는 의문만 남겨서 역시 야박한 평점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남은 느낌은 약간의 억지가 섞인 계몽극이었는데, 다른 독자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읽었을지 나름 궁금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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