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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우습게 봤겠지만
베라 쿠리안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7월
평점 :
6년 전, 12살이던 자신을 강간한 윌에게 복수할 날만 기다리던 클로이는 뜻밖의 기회 덕분에 그가 다니는 존 애덤스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심리학과 교수인 와이먼이 고교시절 반사회적 인격장애 판정을 받은 클로이에게 ‘다기법 사이코패스 패널 연구’에 참여해달라며 등록금 전액 면제라는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입니다. 클로이는 입학 후 윌에게 서서히 접근하며 살해 계획에 골몰하지만, 예기치 못한 교내 연쇄살인사건이 터지자 큰 혼란에 빠집니다. 피살자들이 자신처럼 와이먼의 연구에 참여한 사이코패스 중 일부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위험을 감지한 클로이는 윌에 대한 복수극과 함께 연쇄살인범 찾기에 나섭니다.

생소한 작가의 작품임에도 관심을 갖게 된 건 “6년 전, 윌은 나를 강간했다. 60일 뒤, 나는 그 새끼를 죽일 것이다.”라는 카피 때문이었습니다. 사적 복수를 다룬 장르물은 무조건 찾아 읽는 취향이라 선택했던 건데, 초반부가 채 지나기도 전에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걸 알곤 아쉬움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됐습니다. (평소 큰 글씨의 홍보 카피 외에 내용에 관한 소개글은 읽지 않는 습관 때문에 이런 일이 종종 벌어지곤 합니다)
“사이코패스가 반사회적 인격 장애보다 ‘나쁜’ 건 아니야. 다른 거지. 불행히도 사람들은 두 용어를 섞어 쓴다만. (중략) 불행히도 사이코패스라는 단어에 범죄라는 얼룩이 묻고 말았지만. (중략) 나는 그 단어를 좀 더 쓸모 있는 용어로 되찾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단다.” (p25)
클로이의 사적 복수가 이야기의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사이코패스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추적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사이코패스 버라이어티 쇼’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와이먼 교수의 연구에 참여한 학생들 전원이 제각각 다양한 사이코패스 기질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의외로 소심하고 조심스런 인물부터 남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걸 즐기는 인물, 다분히 폭력적이고 위험한 인물, ‘정상’이 되기 위해 타고난 기질을 억누르는 인물 등 보통사람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범죄라는 얼룩이 묻은 사이코패스’와는 사뭇 거리가 먼 사이코패스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살해당하는 것도, 잔혹한 연쇄살인범도, 그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것도 전부 사이코패스로 설정된 덕분에 이야기는 일반적인 범죄스릴러와는 전혀 다른 결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정상’과 사이코패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잔혹한 살인을 서슴지 않는 클로이는 와이먼의 연구대상 가운데 소심하고 나른한 기질을 지닌 앤드리, 부잣집 막내아들이자 학생회장으로 어떻게든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찰스와 함께 연쇄살인범 찾기에 나섭니다. 문제는 셋 다 사이코패스이다 보니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은 물론 협업 자체가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위태로운 상태로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때론 셋 가운데 연쇄살인범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판이 깨지기도 하고, 때론 서로의 힘과 도움이 필요해지며 다시금 손을 잡기도 하고, 미묘한 질투 로맨스가 작동하기도 합니다.
20여 년 전부터 사이코패스를 ‘발굴’하여 연구를 해온 와이먼 교수는 사이코패스에 대한 선입견을 부수고, 실험과 면담을 통해 타고난 사이코패스 기질을 어떻게든 ‘정상’의 범주로 돌려놓기 위해 진심으로 애쓰는 인물입니다. 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을 변호했던 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적도 있지만, 그의 연구는 현재까지도 중단 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다만 자신이 선발한 사이코패스들 사이에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그는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클로이 일행의 의심을 사기도 합니다.
사이코패스 캐릭터도 생생하고, 사건도 궁금증과 의아함을 자아내도록 설정돼있어서 무척 흥미진진한 작품이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분량의 문제입니다. 중반부쯤엔 비슷한 이야기의 동어반복이 이어지고,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과도하게 디테일한 묘사들이 종종 목격됩니다. 작가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지만, 100페이지 정도만 줄였더라면 속도감과 함께 이 작품의 미덕이 더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클로이의 두 번째 이야기가 기대되긴 하지만, 아무래도 ‘분량의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