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원숭이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4 링컨 라임 시리즈 4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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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라임은 FBI와 이민귀화국의 지원 요청을 받고 최악의 스네이크헤드(중국인 밀입국 브로커이자 인신매매범)인 연쇄살인범 콴왕, 일명 고스트와 10여 명의 밀입국자가 탄 푸저우 드래곤호를 찾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아멜리아 색스와 해안경비대가 도착하기 직전 고스트는 배를 폭파시켜 모두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그에 그치지 않고 고스트는 가까스로 해변에 도착한 일부 생존자를 죽이는 것은 물론 뉴욕 차이나타운으로 숨어든 나머지 생존자들까지 남김없이 죽이기 위해 청부업자를 고용합니다. 배가 폭파되는 상황까지 예측 못한 자신의 책임을 통감한 라임은 살아남은 밀입국자들을 구하고 고스트를 체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라임과 색스에게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미션이 주어집니다. 국제적인 수배령이 내려졌지만 얼굴조차 노출되지 않은 고스트를 체포하는 것은 물론 생존한 밀입국자들을 고스트보다 먼저 찾아내야 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사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인신매매나 밀입국에 관심이 없는 FBI가 요원과 병력 차출을 꺼린 점도, 도무지 믿을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이민귀화국 사람들의 어리숙한 행태도 라임과 색스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뿐입니다. 배는 유력한 단서들을 품은 채 침몰했고, 사건 당일 현장에 몰아친 태풍급 비바람은 미량증거물을 모조리 못 쓸 지경으로 만들어버려서 라임으로선 뉴욕에 숨어든 고스트와 밀입국자들의 행방을 찾아낼 길이 요원할 따름입니다.

 

고스트와 밀입국자 모두 중국인인데다 라임과 색스를 돕는 수사진에도 중국인 또는 중국계 미국인들이 가세하다 보니 돌 원숭이에는 중국의 문화와 역사와 가치관을 언급하는 대목이 무척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미량증거물과 과학적 단서만을 유일무이한 잣대로 삼는 라임 입장에선 직감과 풍수와 자신이 모시는 신을 신봉하는 중국인들을 상대하는 게 그저 난감할 뿐입니다. 특히 수사진에 참여한 중국인이 번번이 자신의 법과학과는 배치되는 방식으로 단서를 찾아내고 한발씩 앞서 나갈 때마다 라임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곤 합니다. 그런 라임이 중국술을 마시고 바둑을 배우며 풍수에 관심을 가지는 등 조금씩 중국 문화를 습득하는 과정은 역설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프리 디버는 초반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이번 수사에서는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라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던집니다. 절대악인 고스트를 제외하곤 밀입국자들에게도, 수사진에게도, 국가기관의 요원들에게도 뭔가 하나씩 비밀을 감춘 듯한 인상을 심어놓아 독자로 하여금 거듭 혼선을 빚게 만듭니다. 제프리 디버의 이 고약한 메시지는 막판에 터지는 반전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내는데,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할 정도로 전작들에 비해 다소 강도는 약해도 그만의 반전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라임과 색스의 관계는 사건 못잖게 독자의 관심을 끄는 대목인데, 전작인 곤충 소년에 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한 언급은 못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명확한 일보전진이자 동시에 애틋한 일보후퇴를 겪게 된다는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뿐 아니라 대부분의 독자가 한편으론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게 될 텐데, 특히 (라임과 관련된) 예기치 못한 사태로 절망에 빠진 색스가 수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장면에선 연민 이상의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사족이지만, 사실 이 서평에서 라임과 색스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했어야 하는 인물이 한 명 있는데, 그를 언급조차 하지 않은 건 이야기 속 첫 반전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첫 반전까지의 아슬아슬함이 무척 흥미진진한데, 그 인물의 실체를 서평에서 밝히는 건 아직 이 작품을 안 읽은 독자에겐 나름 작지 않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설명조차 스포일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돌 원숭이를 읽을 예정이라면 가급적 다른 정보 없이 출판사 소개글 정도만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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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마술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8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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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오가 진사쿠의 스캔들을 추적하던 르포라이터 나가오카가 살해당하자 경찰은 그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인물들을 조사하던 중 갑자기 행방을 감춘 고시바 신고를 의심합니다. 무엇보다 1년 전 사망한 신고의 누나 아키호가 오가를 담당했던 기자라는 점, 또 아키호의 죽음에 오가가 어떤 식으로든 연루됐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신고는 나가오카를 살해한 용의자이자 오가에 대한 복수를 도모하는 살인예비혐의까지 받게 됩니다. 경시청 수사1과 형사 구사나기는 신고를 조사하던 중 그가 물리학 교수 유가와의 고교 후배이자 과거 각별한 인연을 맺은 사실을 알게 되는데, 문제는 유가와가 신고뿐 아니라 살해당한 나가오카와도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는 점. 하지만 유가와는 무슨 이유에선지 사건과 관련된 사실들을 감추려 합니다.

 


“(과학은)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마음에 달렸다. 사악한 인간의 손에 주어지면 과학은 금단의 마술이 된다.” (p209)

 

갈릴레오 시리즈의 여덟 번째 작품인 금단의 마술은 천재 물리학자이자 명탐정이기도 한 유가와의 전문 분야, 즉 과학의 양면성을 정면으로 다룬 미스터리입니다. 과학이야말로 일본을 이끌 새 동력이라 여기면서도 그 부흥을 위한 방법론에 있어 온갖 악덕을 저지르는 정치인, “과학을 제패하는 자가 세계를 제패한다.”는 아버지의 지론을 마음에 담고 진정한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사랑하는 이를 빼앗아간 자에 대한 복수를 위해 과학을 흉기로 이용하기로 한 청년, 유망한 후배에게 과학의 정도와 사명을 각인시켰지만 그 후배가 과학을 금단의 마술로 이용하려 하자 복잡한 심경에 빠지는 천재 물리학자 등 제각각의 태도로 과학을 대하는 여러 인물이 얽힌 사회파 미스터리이자 휴먼 드라마입니다.

 

미스터리의 얼개 자체는 그동안 갈릴레오 시리즈의 장편들에 비해 다소 단선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의 팬들에게 전작들과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라는 인상을 남긴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다소 까칠하고 냉소적인 태도로 경시청 수사1과 형사 구사나기와 우쓰미의 수사를 도왔던 유가와가 평소 그답지 않은 모습으로 사건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유가와는 살해당한 르포라이터와 용의자 신고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를 감추는 것은 물론 신고는 절대 누군가를 해칠 리 없어.”라는, 평소 같으면 스스로 코웃음을 쳤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신고를 감싸곤 합니다. 과학자다운 냉철함을 잃은 적 없는 유가와의 일대 변신이라고 할까요?

 

과학 자체가 중요한 테마로 설정돼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스터리 자체가 딱딱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거나 이과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과학론으로 도배되어 있진 않습니다. 르포라이터의 의문의 죽음, 과학단지 조성을 둘러싼 격렬한 찬반 대결, 뒤늦게 드러난 한 여기자의 죽음의 진실, 그리고 모든 것을 걸고 복수에 임하는 한 청년의 분노 등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사회파+휴먼 미스터리가 잘 녹아든 작품입니다.

다만 평범한 평점에 그친 이유는 앞서 언급한대로 얼개 자체가 다소 단선적인데다 분량도 그리 길지 않아서 깊이 몰입할 여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로 금단의 마술은 원래 단편이었다가 장편으로 늘린 작품인데,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단선적이란 느낌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일본 기준으로) 1998년에 시작된 갈릴레오 시리즈202110편인 透明螺旋’(한국 미출간)까지 출간된 상태입니다. (한국엔 9편인 침묵의 퍼레이드’(일본 출간 2018)2025년에 소개됐습니다) 4년 가까이 신작 소식이 없어서 무척 아쉬운데, 무려 23년을 이어온 시리즈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타고난 문과생이자 과학혐오자(?)인 제가 나름 애정을 가질 정도로 흥미진진한 유가와 마나부의 이과 미스터리가 한두 작품이라도 더 출간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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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체면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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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세 개의 잔’(‘진구 시리즈’ 5) 이후 5년 만에 읽은 도진기의 작품입니다.(단편집으로만 치면 2017악마의 증명이후 8년 만입니다) 2022복수 법률 사무소 1~3’이 출간됐지만 1,500페이지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분량에 짓눌린 데다 기대하던 고진 시리즈진구 시리즈가 아니라서 패스했고, 2023년에 출간된 애니는 중편 분량에 불과해서 장바구니에 담기를 주저했습니다.(다행히 애니는 이번 중단편집에 수록됐습니다)

신작 소식이 너무 반갑기도 했지만 역시 고진 시리즈진구 시리즈가 아니라서 살짝 아쉬웠던 게 사실인데, 그래도 오랜만에 도진기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단편들을 만날 수 있어서 나름 흥미로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법정을 무대로 한 미스터리 두 편(‘법의 체면’, ‘완전범죄’)을 포함하여 가상현실과 물체 전송기술을 다룬 SF물과 복수 스릴러 등 여러 장르의 맛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뷔페 같은 단편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부장판사와 변호사를 지낸 도진기의 이력이 빛났던 두 편의 법정물이 가장 눈길을 끌었는데, ‘법의 체면이 진실보다 체면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법부의 경직성과 권위의식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면, ‘완전범죄는 말 그대로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는 완벽한 살인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뜻밖의 반전과 함께 풀어낸 작품입니다. (‘법의 체면에는 단편집 악마의 증명에서 두 편의 수록작에 등장했던 전직 검사이자 변호사 호연정이 등장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8년 전 출간된 단편집 악마의 증명에서 도진기는 추리와 오컬트 혹은 호러가 결합된 작품에 늘 매료되곤 한다.”라면서 수록작 중 거의 절반을 예상치 못한 장르로 채웠었는데, 이번 법의 체면을 보면 그의 관심이 SF로까지 확장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갈망하던 인생을 꿈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지만 생각지 못한 오류가 발생하면서 벌어지는 미래형 비극 애니’, 양자컴퓨터를 통해 물체를 다른 공간으로 전송하는 기술을 소재로 한 과학 서스펜스 컨트롤 엑스등 두 편의 SF물은 소재 자체도 흥미롭지만 디스토피아의 암울한 분위기가 돋보였던 작품입니다.

그 외에 사회파 복수 스릴러 당신의 천국은 인생의 최고 단맛과 쓴맛을 모두 맛본 여자가 이끌어낸 아이러니한 엔딩이 인상적이었고, 한 남자의 찌질하면서도 파멸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린 행복한 남자는 허무한 결말 탓에 좀더 세고 독한 설정이 아쉽게 느껴진 작품이었습니다.

 

작가의 관심영역과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해진다는 건 환영해야 할 일이지만, 개인적으론 도진기 미스터리의 진수가 가장 빛나는 고진 시리즈진구 시리즈의 공백이 너무 오래 이어지는 것 같아 서운하고 아쉬울 뿐입니다. 다음에 도진기의 신작 소식이 들려온다면 꼭 두 시리즈 중 한 편이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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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의 사각 - 201호실의 여자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2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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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큰어머니의 단독주택 2층에 얹혀살며 번역 일을 하는 요시오는 오래전부터 관음증에 중독된 남자입니다. 하지만 자주 엿보곤 했던 맞은편 연립주택 201호의 여자가 살해당한 걸 목격한 뒤로 큰 충격에 빠져 알코올중독자가 되고 맙니다. 3개월의 치료를 마치고 귀가한 요시오는 201호에 새로운 여자가 입주한 걸 보곤 놀랍니다. 알코올중독 재발이 두려워 엿보기를 자제하려 했지만 201호의 여자는 마치 도발하듯 부주의하게 사생활을 노출합니다. 한편 알코올중독 병원에서 요시오에게 원한을 품었던 절도범 소네는 복수를 위해 그를 미행하던 중 201호의 여자를 알게 됩니다. 201호에 침입한 소네는 여자가 쓴 일기에 묘사된 요시오의 비열한 관음증을 파악하곤 그를 파멸시키기로 결심합니다.

 


도착의 론도에 이은 도착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도착 3부작은 일본 미스터리 가운데 서술트릭의 대표적 작품으로 언급되곤 하는 시리즈인데, 그래선지 이번에도 작가에 대한 도전심이 충만한 상태로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도착의 론도를 읽은지도 너무 오래됐고, 당시 남겨놓은 서평에도 줄거리를 적어놓지 않아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전체적인 인상부터 말하자면, ‘도착의 론도가 다소 어려우면서도 신선한 서술트릭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면 도착의 사각은 쉽고 선명한 이야기 전개 덕분에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지만 서술트릭의 쾌감은 전작에 비해 평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음증 중독자이자 201호를 엿보곤 하는 번역가 요시오, 201호에 입주한 새내기 회사원으로 요시오의 불결한 시선에 치를 떨곤 하는 마유미, 요시오에게 복수하고자 마유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소네 등 세 사람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마유미의 어머니인 미사코의 편지가 막간극처럼 등장하곤 합니다.

요시오와 마유미가 1인칭 시점의 일기를 통해 자신들이 겪는 불안과 초조와 분노를 직설적으로 드러낸다면, 소네는 요시오에 대한 복수심과 마유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야릇한 흥분을 3인칭 시점으로 서술하면서 이야기 전체를 중계하는 듯한 설명역을 맡습니다.

세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 건 마유미의 불륜남입니다. 요시오는 마유미와 불륜남의 행위를 엿보며 격한 흥분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소네는 요시오뿐 아니라 불륜남에 대한 증오심까지 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불온한 감정들은 어느 날 밤 충격적인 사건과 함께 대충돌을 벌이며 예상치 못한 진상을 드러냅니다.

 

사실 도착의 사각은 서술트릭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는 작품입니다. 관음증, 살인, 시신유기, 불륜, 절도, 알코올중독 등 서스펜스 스릴러에 잘 어울리는 소재들이 가득한데다 하나같이 일그러진 캐릭터들이 벌이는 상식 밖의 행위들이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져서 오히려 서술트릭이 없었다면 독자의 눈길을 더 사로잡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리하라 이치의 서술트릭이 독자를 완전히 배신한 건 아닙니다. 막판에 밝혀진 진상과 서술트릭의 실체는 비록 전작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충격적이었고, 크든 작든 위화감을 느꼈던 대목들이 실은 전부 작가가 깔아놓은 복선임을 깨닫게 되는 짜릿한 쾌감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탓에 충격과 쾌감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아쉽게 느껴진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도착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은 도착의 귀결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살짝 예습해보니 앞선 두 작품에 비해 분량도 방대한데다 두 개의 소설이 독립적으로 전개되는 특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시리즈 첫 편인 도착의 론도이후 10여년 만에 2편을 읽은 탓에 감흥이 많이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공백 없이 곧바로 도착의 귀결을 읽을 생각입니다.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만큼 서술트릭의 짜릿함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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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 레이디가가
아라키 아카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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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마모토현의 무인도 아다시마로 여행을 떠나는 일곱 명의 젊은 남녀. 그중 한 명인 히토 기요쓰구는 몰래 숨겨온 비소로 나머지 여섯 명을 독살할 계획을 품고 있습니다. 동기는 룸메이트였던 선배 기다의 인생을 박살낸 것에 대한 복수. 그런데 섬에 도착한 직후 누군가에 의해 일행들이 한 명씩 참혹하게 살해당합니다. 피해자들은 모두 혀가 잘린 채 발견됩니다.

<2> 아다시마 참극 이후 3년이 지난 2023. 오사카부에서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혀가 잘린 사체로 발견됩니다. 관할서 형사 이쿠코는 다음 피해자로 예상되는 마리아를 경호하며 진상 파악에 나서는데, 그 과정에서 일련의 연쇄살인이 3년 전 아다시마 참극과 연관 있음을 깨닫습니다.

 


지구 종말을 앞두고 벌어진 연쇄살인을 다룬 시스터후드 미스터리 세상 끝의 살인으로 에도가와 란포 상 역대 최연소 수상자가 됐던 아라키 아카네의 신작입니다. ‘세상 끝의 살인2023년 북스피어의 첩혈쌍녀 시리즈’(두 여성이 주인공인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 세 번째 작품으로 소개됐는데,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역시 남성중심사회의 온갖 폐해를 겪은 여자형사와 환경미화원이 미스터리 해결사로 나선, 시스터후드 서사가 빛나는 작품이지만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미지를 실험하는 작품들을 모아놓은 레이디 가가 시리즈로 출간됐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오마주한 1막은 무인도를 찾은 젊은 남녀들이 한 명씩 기괴하게 살해당하는 가운데, 애초 전원을 독살하려던 히토 기요쓰구가 진범을 찾아내려 분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그립니다. 무인도에 들어오기 전 범행성명까지 준비해놓았던 히토는 독살을 완수하는대로 자살할 계획이었지만, 누군가에 의해 연쇄살인이 벌어지자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게 될 위기에 처했고, 결국 독살을 포기하고 진범 찾기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의 명작인 ‘ABC 살인 사건을 오마주한 2막은 오사카 도심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을 다룹니다. 쓰레기 수거 중 혀가 잘린 토막사체를 발견한 마리아는 난데없는 경찰 경호에 깜짝 놀랍니다. “직전 사건의 피해자를 발견한 사람이 범인의 다음 목표물이라는 설명은 황당하게만 들렸지만, 마리아는 경호를 담당한 형사 이쿠코의 진심에 설득되고 맙니다. 문제는 수사가 전개될수록 이번 연쇄살인이 3년 전 아다시마 참극과 연관이 있다는 점, 또한 마리아와 가까운 인물들의 이름이 수사 과정에 오르내리게 됐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3년 전 사건을 그린 1막이 이야기의 토대 역할을 맡고 있고, 현재 시점의 연쇄살인을 다룬 2막이 본편이자 과거의 사건까지 아우르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1막은 프롤로그 정도의 분량만 차지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의 1막과 2막은 거의 엇비슷한 분량과 비중을 지니고 있어서 마치 두 편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읽는 듯한 풍성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또한 불과 3년 차이를 두고 벌어진 사건들이지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오마주한 1막 속 사건이 고전미 넘치는 올디스 벗 구디스의 매력을 품고 있다면, 2막 속 사건은 긴박감과 속도감을 지닌 현대 미스터리에 어울리는 세련된 설정이라 마치 30년 이상의 간극을 두고 일어난 사건처럼 읽힌 점도 나름 독특하고 흥미로웠습니다.

 

진범과 트릭은 밝혀졌지만 명쾌한 엔딩 없이 1막이 마무리된 가운데 전혀 낯선 인물들이 2막의 문을 열면서 독자의 관심은 언제쯤 어떤 식으로 두 개의 막이 접점을 드러날 것인가에 집중됩니다. 동시에 미스터리 해결사 역할을 맡은 두 여성, 형사 이코쿠와 환경미화원 마리아의 케미가 페이지를 넘길수록 기대 이상의 재미와 호기심을 선사해서 1막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데, 특히 과거와 현재의 사건에 마리아의 주변인물들이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자 두 주인공의 관계는 갈등과 연대를 오가며 긴장의 수위를 높이곤 합니다.

 

내용 대비 1막의 분량이 조금 과했던 점, 형사 이쿠코의 천재적인 추리가 지나칠 정도로 비약에 가까웠던 점, 그리고 막판에 밝혀진 진범의 동기가 설득력이 살짝 부족했던 점이 아쉽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무난함 이상의 평점을 주고 싶은 작품입니다. 시스터후드 미스터리 시리즈 주인공으로 활약해도 될 듯한 이쿠코+마리아 콤비의 매력도 대단했고, 무엇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BC 살인 사건의 오마주를 담은 미스터리를 한 작품 안에서 동시에 맛볼 수 있었던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검색해보니 일본에서도 아직 아라키 아카네의 새 작품이 나오지 않았는데, 미스터리 스타일이 제 취향과 아주 잘 맞는 작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의 신작 소식이 들려오면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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