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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평점 :
(‘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대부분 명작으로 기억하던 작품들이지만 다시 읽었을 때의 감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봄방학을 코앞에 두고 S중학교 1학년 B반 담임 모리구치 유코는 학생들에게 교직 사퇴를 알립니다. 학생들은 얼마 전 유코의 4살 딸 마나미가 학교 수영장에 빠져 숨진 사고 때문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이어진 유코의 말에 모두 파랗게 질려버립니다. 경찰 발표와 달리 마나미는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게 분명하며, 복수의 살인범이 바로 1학년 B반 학생 중에 있다고 유코가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동요하는 가운데 유코는 범인들이 생명의 소중함과 죄의 무게를 깨닫고 그 죄를 지고 살아가길 원한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범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복수했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곤 교실을 나갑니다. 이후 마나미의 죽음에 관련된 자들이 차례대로 자신의 고백을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고백’을 읽은 건 한국에 처음 출간된 2009년 혹은 2010년의 일입니다. 아직 장르물 독서이력이 몇 년 되지 않았던 때지만 앞으로 이런 작품을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미나토 가나에라는 이름이 확실하게 각인될 정도로 길고 깊은 여운을 느낀 기억이 있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은 탓에 언젠가는 다시 한 번 ‘고백’을 읽고 그 감흥을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다짐해왔는데, 거의 15년 만에 그 다짐을 실천하게 됐습니다.
두 명의 살인범이 13살 중학생이며 그들에게 살해당한 건 4살에 불과한 유아이자 담임교사의 딸이라는 점만으로도 그 어떤 범죄미스터리보다 흉악하고 잔혹한 설정이지만, ‘고백’은 전형적인 미스터리 서사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범인의 정체를 공개한 것은 물론 사건 관련자들이 한 챕터씩 화자를 맡아 자신들만의 고백을 들려주는 독특한 구도를 취한 점 때문에 화제가 됐던 작품입니다. 특히 범인들을 향한 유코의 복수가 첫 챕터에서 완료된 탓에 독자는 과연 이후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사뭇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데, 미나토 가나에는 사건 관련자들의 고백을 통해 이 끔찍한 비극이 어떤 뿌리에서 시작돼서 어떤 줄기를 거쳐 자라났는지, 그리고 끝내 어떤 기폭제로 인해 살인이라는 지독하고 끔찍한 과실을 맺었는지를 차갑고 집요한 문장들로 그려냅니다.
희생자의 유족인 유코를 시작으로 두 명의 범인, 범인의 가족, 방관자이자 암묵적 공범이라 할 수 있는 동급생 등 여러 사람의 고백이 이어지는데, 그 고백들이 새삼 사건의 새로운 진상을 드러내거나 뜻밖의 반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종 독자로 하여금 불안감을 갖게 만드는 이유는 전혀 연관 없던 인물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일으키고 만 나비효과가 어떻게 마나미의 죽음을 초래했는가를, 또 마나미의 죽음이 어떤 식으로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고 폭발시키는지를 그 고백들을 통해 섬뜩할 정도로 세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코드가 복수임에도 불구하고, ‘고백’은 복수 과정보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기까지의 ‘각자의 사정’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비슷한 소재를 동원한 작품들과는 전혀 결이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뜻입니다.
“작가는 일말의 용서도 동정도 강요하지 않는다. 또한 상처와 파멸에 대한 회복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한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생채기가 생겨나고, 그들의 삶이 점차 그리고 영구히 바뀌어가는 과정을 잔혹하리만치 집요하게 그릴 따름이다.” (출판사 소개글 中)
‘고백’ 하면 항상 같이 연상되는 작품이 있는데, 40대 여교사가 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기 반 학생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극을 펼치는 ‘그리고 숙청의 문을’(구로타케 요)이 그것입니다. 통쾌함과 비장감 등 전신을 흥분에 빠지게 만드는 통렬한 복수극이란 점에선 ‘그리고 숙청의 문을’이 압도적이지만, ‘고백’은 아주 천천히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을 가하다가 끝내 스스로 지옥도에 떨어지게 만드는 집요한 복수를 그리고 있어서 흥분지수는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뒤에 남는 여운의 농도만큼은 바닥 모를 시커먼 늪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15년 만에 다시 읽은 ‘고백’은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달리 살짝 무덤덤했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첫 챕터에서 유코가 범인들에게 가한 복수라든가 마지막 페이지의 엄청난 반전은 여전히 인상적이었지만, 아마도 제 머릿속에 워낙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던 작품이라 다시 읽었을 때 그 강렬함이 기대에 못 미치자 아쉬움이 불쑥 솟아오른 듯합니다. 15년 전엔 별 5개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여겼지만 이번엔 가까스로 별 5개에 그치고 말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출간된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 가운데 여전히 최고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