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의 살인자
시모무라 아쓰시 지음, 이수은 옮김 / 창심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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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화장실에서 6세 소녀를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이 고교생으로 밝혀지자 일본 전역은 경악합니다. 이후 소년A라는 익명으로만 보도되던 범인의 이름 오오야마 마사노리가 한 주간지를 통해 공개됩니다. SNS에서는 범인 본인은 물론 그의 가족과 주거지를 추적하는 광기 서린 폭주가 이어집니다. 그런 와중에 상상치도 못한 피해를 입은 자들이 나타납니다. 바로 범인과 이름이 똑같은 여러 명의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입니다. 단지 이름이 같을 뿐이라고, 기분이 좀 나쁠 뿐이라고만 여겼던 그들은 실제로 자신에게 크고 작은 피해가 벌어지자 격분합니다. 그리고 불과 7년 후 범인이 만기출소하면서 그 이름이 다시 언론에 회자되자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은 동성동명 피해자 모임을 결성하고 진범의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기로 결심합니다.

 

대부분의 이름이 세 글자뿐인 한국에는 워낙 동성동명인 경우가 많아 이 작품의 설정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실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유명한 사람과 같은 이름을 가진 경우 보통사람은 알 수 없는 불편함을 안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 유명 드라마의 주인공과 (성은 달랐지만) 이름 두 글자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난감한 상황에 처한 적이 종종 있었는데, 만일 연쇄살인범이나 온 국민의 지탄을 받는 인물과 이름 석 자가 모두 같다면 그 난감함과 불편함은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프로축구 선수를 꿈꾸는 유망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야간고등학생, 건실한 영업사원, 개인 과외교사, 만화와 게임에 빠진 오타쿠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오오야마 마사노리들6세 소녀 살인사건의 범인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크고 작은 좌절을 겪게 됩니다. 주위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은 말할 것도 없고, 인생의 진로가 완전히 틀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저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잊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후 범인이 만기출소하면서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의 인생은 또다시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제안으로 동성동명 피해자 모임을 결성하기에 이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는 살인범과 이름이 똑같다는 이유로 현실과 SNS에서 놀림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동성동명 등장인물들이 겪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그려나간다.”라고 돼있는데, 작품 속 여러 명의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이 겪는 건 단지 놀림과 조롱이 아니며 이야기 역시 결코 흥미롭거나 가볍지 않습니다. 진범을 찾아내 얼굴을 공개함으로써 자신들이 살인마 오오야마 마사노리가 아님을 입증하고 싶을 정도로 그들의 삶은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SNS의 마녀사냥은 그칠 줄 모르는데다 부정확한 정보로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는 일까지 반복되면서 그들은 마녀사냥이 언제든 자신을 향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사실 초반만 해도 무슨 이야기로 4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채우려나?”라는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진범을 찾아내 얼굴을 공개하겠다!”는 피해자 모임의 목표도 단선적으로 보였고, 이야기를 풍성하게 채울 재료들도 딱히 충분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같은 이름을 가진 여러 인물이라는 점을 잘 활용하여 예상치 못한 트릭과 반전을 수시로 끌어냅니다. 또한 피해자 모임 내부에도 시한폭탄 같은 장치를 심어놓아 서로를 100% 믿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막판에 이르러 거듭된 반전을 통해 독자를 이리저리 뒤흔들면서 앞선 페이지들을 다시 들춰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앞서 한국에 소개된 시모무라 아쓰시의 전작 시체 찾는 아이들생환자를 모두 읽었지만 이만한 트릭과 반전을 맛본 적이 없어서 무척 의외였고 놀라웠습니다. 아이디어와 서사 모두 기발하고 탄탄해서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검색해보니 일본에서 모두 23편의 작품을 출간한 걸로 나오는데 어쩌면 아직 한국에 그 진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작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머잖아 그의 또 다른 작품이 한국 독자들을 찾아오기를 기대해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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