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피리 꽃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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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제목이 바뀐 개정판(‘비둘기피리꽃’)이 나온 걸 보고 예전에 중고로 구매했던 게 기억나서 , 읽어야겠구나.”라고 생각한 게 벌써 8년 전의 일입니다. 2024년에는 책장에 오래 방치해놓은 책들을 일부라도 소화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첫 번째 대상이 미야베 미유키의 구적초입니다.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괴담 시리즈 미야베 월드 2을 두 번씩 읽을 정도로 미미 여사의 광팬이긴 하지만 실은 현대물 중에는 안 읽은 작품이 훨씬 더 많기도 하고 심지어 읽다가 포기한 경우도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구적초라는 어딘가 고색창연한 제목에 끌려서 현대물이란 것도 모르고 구매했고, 읽기 전에도 앞뒤 표지의 소개글을 일부러 보지 않았는데 예상치도 못한 초능력 이야기가 펼쳐져서 잠시 당황한 게 사실입니다. 다 읽고 앞뒤 표지를 보니 초능력을 지닌 세 명의 여성을 둘러싼 세 가지 이야기라는 소개글이 눈에 띄었는데, 아마 이 소개글을 먼저 봤다면 구매는 물론이거니와 읽는 것도 꺼려했을 게 분명합니다. 아무리 미미 여사라도 초능력이나 SF물은 사양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록된 세 개의 단편은 무지한 상태에서 이 작품을 구매하고 읽은 게 정말 다행이라고 여기게 할 만큼 매력적이고 애틋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능력이라도 편리함이나 즐거움 뒷면에는 반드시 혹독함이며 괴로움을 감추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SF라는 형태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미스터리나 연애소설 속에서 이 주제를 다룰 수 없을까 하는 고민 속에서 이 책이 태어났습니다.” (미야베 미유키)

 

예지몽을 꿀 수 있는 도모코, 불을 일으키고 조종할 수 있는 염화(念火) 능력을 가진 준코, 타인의 몸이나 소지품에 손을 대면 그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다카코 등 세 편의 주인공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제대로 통제하고 조절하려면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전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능력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자랑할 수도 없는 것은 물론 절대 들켜서도 안 되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선지 흔히들 초능력 서사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과는 전혀 결이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스러질 때까지

21살 도모코는 함께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집을 정리하다가 뜻밖의 유품을 발견합니다. 그건 8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부모가 남긴 비디오테이프들입니다. 당시 사고로 그 전의 기억들을 모두 잃어버렸던 도모코는 비디오테이프들을 보다가 큰 충격에 빠집니다.

 

번제(燔祭)

여동생 유키에를 살해한 유력한 용의자를 포착하고도 경찰이 증거와 단서 부족으로 머뭇거리자 가즈키는 반드시 자기 손으로 범인을 죽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때 가즈키를 돕겠다는 한 여성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녀는 가즈키의 눈앞에서 직접 염화 능력을 선보입니다.

 

구적초(개정판에선 비둘기피리꽃’)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경찰이 됐고 이제 형사과의 어엿한 일원까지 된 다카코는 최근 들어 자신의 능력이 점차 소멸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크게 당황합니다. 능력 없이도 자신이 과연 형사로서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과 함께 말입니다.

 

앞선 두 편의 주인공 도모코와 준코가 자신의 능력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또는 그 능력을 저주하는 캐릭터라면, 표제작의 주인공 다카코는 그 능력의 소멸 가능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인물입니다. 미미 여사는 서로 처지는 달라도 결국 특별한 능력이란 것이 마냥 편리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 특히 그것을 신기하고 부러운 눈으로만 지켜보는 제3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특유의 애틋하고 안쓰러운 문장들을 통해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SF라는 형태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미스터리나 연애소설 속에서 이 주제를 다룰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의 깊이와 절실함에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미미 여사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SF나 판타지 쪽은 꺼려지는 게 사실이지만, 이 작품을 읽고 보니 일단 무슨 이야기인지 정도는 파악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설정이라면 힘들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의외의 재미와 여운을 맛볼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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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는 천하를 잡으러 간다
미야지마 미나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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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에서 단박에 느껴지는, 어딘가 4차원스러운 10대 소녀가 주인공인 청춘물은 실은 제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먼 장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가진 이유는 이 연작단편집의 첫 수록작 고마웠어! 오쓰 세이부백화점!’이 제20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대상 수상작이기 때문입니다.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구보 미스미)화소도중’(미야기 아야코)장르물 일본소설 가운데 베스트로 꼽을 만큼 매력적인 작품들인데 이 두 작품 모두 ‘R-18 문학상수상작이라 같은 상을 수상한 나루세는 천하를 잡으러 간다를 조금의 고민도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던 것입니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주인공 나루세 아카리는 각 수록작을 통해 중학교 2학년부터 고교 3학년까지의 성장과정을 보여줍니다. 주위의 시선이나 평가 따윈 신경 쓰지도 않으며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이 바라는 꿈만을 위해 돌직구처럼 살아가는 나루세의 삶은 그저 괴짜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4차원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루세가 민폐녀 혹은 반골녀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누구도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길을 걸을 뿐입니다. 44년의 역사를 지닌 백화점이 문을 닫게 되자 그 마지막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나는 올여름을 세이부에 바칠까 한다.”라는 말과 함께 여름방학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곳을 찾는다든가, “나는 개그의 정점을 찍을까 한다.”라는 뜬금없는 목표를 세우곤 전국적인 만담 대회에 출전하는가 하면, 지금껏 누구도 이루지 못한 200살의 수명에 도달하기 위해 규칙적인 운동과 올바른 생활습관을 견지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문득 뭔가 하고 싶어지면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직진하는 순도 100%의 노력파라고 할까요?

그런 나루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 거의 대부분 다나까로 처리된 어미입니다. 애어른이 하는 말 같기도 하고, 전국시대의 무장이나 미래의 로봇의 말투 같기도 한 나루세의 화법은 그녀만의 독특한 캐릭터와 절묘하게 조합이 돼서 읽는 내내 웃음을 자아냅니다.

 

평범하지 않은 성격 때문에 또래들에게 배척당하기도 하지만 나루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딘가 감각 하나가 망가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신을 향한 비난이나 공격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화이트 사이코패스처럼 보일 때도 있는데, 그런 나루세도 성장과 함께 특별한 경험들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는다든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마음의 상처와 후회에 사로잡힌다든가, 누군가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낀다든가 - 을 하나둘 겪으면서 조금씩 자신 외의 존재들과 소통하며 그 또래에 어울리는 삶과 사고방식에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익숙함은 결코 부정적인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루세가 좀더 크고 드넓은 세상으로 나가게 만드는 통과의례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소망대로 200살까지 살더라도 나루세는 여전히 나루세로 살아갈 게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수록작 중엔 나루세가 완전 조연으로만 등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그런 작품들은 나루세의 친구들이나 소도시(나루세의 고향이자 이 작품의 주 무대인 시가현오쓰시)의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소박한 일상과 인간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간혹 울컥하게 만들기도 하는 그들의 이야기엔 일본소설 특유의 정갈하면서도 따뜻한 행복감이 잘 배어있어서 나루세의 성장담과 함께 깊은 여운을 맛보게 해줍니다.

 

작가는 책머리의 서문을 통해 나루세처럼 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주변에 많습니다. 그런 소망을 투영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면...”이라는 바람을 밝히고 있습니다. 비록 기대했던 ‘R-18 문학상수상작의 특별한 맛을 즐기진 못했지만(앞서 언급한 두 작품은 모두 19금인데다 이야기가 무척 세고 독합니다), 심각한 장르물 편식 와중에 나루세 덕분에 잠시나마 웃음과 휴식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후속편인 나루세는 믿었던 길을 간다20241월에 출간됐다고 하는데, 좀더 큰 세상으로 나와 대학생 혹은 사회 초년생이 됐을 나루세가 어떻게 자신의 고집과 꿈을 더 단단하게 키워나가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나루세의 두 번째 이야기를 읽을 기회가 꼭 찾아오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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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의 창자 명탐정 시리즈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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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에는 출판사가 공개하지 않은 초반 내용이 약간 포함돼있습니다.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라와타(はらわた, 창자)라는 별명을 가진 21세의 하라다 와타루는 명탐정 우라노 큐의 조수입니다. 전국 경찰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우라노는 오카야마 현의 작은 마을 기지타니의 절 간노지에서 일어난 방화 및 집단사망사건 조사를 부탁받습니다. 하지만 우라노가 급히 오사카로 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와타루는 홀로 사건을 조사하는 처지가 됩니다. 며칠간 추리와 탐문을 거듭한 와타루는 나름 살인사건이라는 확신을 갖고 범인을 지목하지만 오사카에서 돌아온 우라노에 의해 그의 추리는 부정당합니다. 문제는 우라노의 관심이 범인의 정체보다 그가 벌인 전대미문의 행위와 그것이 야기할 끔찍한 사건들이란 점입니다. 우라노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되고 일본 전역에서 엄청난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알겠지만 이 작품의 줄거리에 관해선 극히 일부만, 그것도 무슨 얘긴지 짐작하기 힘들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반 설정을 언급하지 않으면 두루뭉술하고 모호한 인상비평밖에 할 수 없는데, 문제는 독자에 따라 그 부분을 스포일러로 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스포일러가 되지 않게, 그러면서 이 작품에 대해 구미가 당길 정도로만 초반 설정을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인공 와타루가 다루는 네 개의 사건이 단편 형식으로 수록돼있는데, 위에 정리한 줄거리는 그중 첫 번째 작품인 간노지 사건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믿기 힘든 상황과 연이은 대량 살인사건들을 해결하는 게 나머지 세 작품의 내용입니다. 무엇보다 와타루를 충격에 빠지게 한 건 그 사건들이 과거 20세기의 일본을 충격에 빠뜨렸던 최악의 사건들과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도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다는 점, 그리고 범인들 역시 짧게는 20년 전, 길게는 80년 전에 사건을 일으켰던 바로 그 범인들이란 점입니다. 믿을 수 없지만 결국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와타루 앞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합니다.

 

본격 미스터리로 출발했다가 순식간에 (출판사의 소개글대로) ‘기괴하기 짝이 없는 호러 판타지로 급변하지만 그 해법과 마무리는 다시 본격 미스터리를 통해 이뤄지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를 통해 이미 시라이 도모유키의 특수설정 미스터리를 충분히 맛봤지만 명탐정의 창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특수설정 하에 본격과 호러가 기괴하게 얽힌 복합 미스터리라는 흥미로운 서사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현실 속 최고의 명탐정이 비현실 속 최악의 살인마와 대결하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기괴하기 짝이 없는 호러 판타지도 흥미롭지만 명탐정과 조수가 벌이는 추리 대결은 본격 미스터리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직 미숙하긴 해도 명탐정의 조수 3년차인 와타루는 번번이 추리를 부정당하면서도 꿋꿋이 자신의 갈 길을 갑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진짜 명탐정으로 거듭나는 희열을 맛보기도 합니다.

시라이 도모유키의 전작들이 특수설정은 빛나지만 다소 작위적이고 개연성이 부족하다.”라는 느낌을 줬다면 명탐정의 창자는 와타루의 성장과 활약, 그리고 복잡하긴 해도 정교하게 짜인 본격 미스터리의 서사 때문에 별 거부감 없이 술술 읽힌 작품입니다. 물론 기괴하기 짝이 없는 호러 판타지야말로 이 작품의 특수설정의 백미지만 말입니다.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를 읽은 뒤 특수설정 자체도 그리 끌리지 않았고 저와는 합이 잘 안 맞는 작가라고 생각해서 직전 작품인 명탐정의 제물은 출간소식을 듣고도 독서목록에서 제외시켰는데, 이 작품을 읽고 나니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볼까, 싶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여전히 시라이 도모유키가 제 취향과 조금은 거리가 있는 작가이긴 하지만 명탐정의 창자같은 작품이라면 특별한 간식처럼 가끔은 읽어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족이지만, 최애 작가 중 한 명인 요코미조 세이시와 그가 창조한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그리고 본격 추리가 가미된 일본 공포의 원점이라는 평을 들은 팔묘촌이 자주 언급된 건 무척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아직 팔묘촌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명탐정의 창자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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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 살인사건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박진범 북디자이너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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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락객들로 붐비는 긴자 거리에 난데없이 나비 떼가 나타난 직후 성경 구절을 새긴 팔찌를 찬 청년이 독극물로 자살한 채 발견됩니다. 청년의 신원을 알 수 없어 답답해하던 경찰은 1주일 후 또 다른 자살 사체와 마주치는데 이번에는 1주일 후의 자살을 예고하는 메시지 - “우리 동지가 항의하기 위해 분신자살을 할 것이다.” - 가 남겨져있어 초긴장상태에 빠집니다. 서로를 동지라 부르는 자들의 정체는 물론 누구에게 무엇을 항의하겠다는 건지도 알 수 없어 경시청 수사1과의 도쓰가와 경부를 포함한 경찰은 당혹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던 중 자살한 자들의 동료로 보이는 한 남자를 찾아내면서 수사는 급진전되지만 그들 배후에 사이비 종교단체가 자리하고 있는 걸 알게 된 도쓰가와 경부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묵시록 살인사건202292세의 나이로 타계하기 전까지 무려 70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겨 일본의 국민 미스터리 작가로 불렸던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으로 1980년에 출간됐습니다. 한국에선 80~90년대에 소개된 작품까지 포함해도 출간작 자체가 10편도 되지 않아 미지의 작가나 다름없었는데, 요 몇 년 사이 살인의 쌍곡선’, ‘화려한 유괴에 이어 묵시록 살인사건까지 출간되면서 한국 독자들에게도 더는 낯선 이름의 작가로 여겨지진 않는 것 같습니다.

 

연이은 자살 사체가 발견되는 와중에 도쓰가와 경부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 중 하나는 죽은 자들이 남긴 미소입니다. 독극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어떻게 웃으며 숨을 거둘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타살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건가? 이런 의문에 사로잡혀 고민을 거듭하던 도쓰가와 경부는 세 번째 자살 사체에서부터 사건성을 감지하기 시작했고, 운 좋게 포착한 자살자들의 동료 한 명을 조사하면서 조금씩 사건의 실체에 다가갑니다. 유일한 심증은 자살한 자들의 팔찌에 새겨진 여러 가지 성경 구절들입니다. 분명 특정 종교단체가 개입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들이 무슨 이유로 자살하는지, 누구에게 항의하는 것인지는 좀처럼 밝혀지지 않습니다.

 

사이비 종교단체를 다룬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여러 편 읽었지만 묵시록 살인사건처럼 거의 돌직구 스타일로 서사를 전개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의 정신을 장악하고 자신의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서슴지 않고 죽음을 조종하는 사이비 교주의 행태라든지 교주와 교리에 세뇌된 채 세상의 상식과 등을 저버린, 그래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자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겁니까?”라는 말을 태연히 내뱉는 신도들의 언행은 그야말로 사이비 종교 서사의 교과서처럼 읽힐 정도입니다. 성경을 인용한 대목이나 교리를 설파하는 장면이 적지 않아서 가끔 머리가 무거워지곤 했지만 큰 무리 없이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단서 하나 없는 막막한 상태에서 사소한 조각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수사를 벌이는 도쓰가와 경부와 그의 동료들 역시 아날로그 시대의 경찰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막다른 벽에 수없이 부딪히면서도 그들의 탐문은 거듭되고, 상상에 불과한 추리라도 기어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밤낮없이 매진합니다. 물론 이런 수사 과정은 요즘의 독자에겐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1980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며 읽다보면 각종 문명의 이기에 의지하며 수사를 벌이는 현대의 경찰이나 탐정에게선 느낄 수 없는 제대로 된 진정성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클래식 미스터리만의 정수라고 할까요?

 

사이비 종교문제를 다룬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이자 진한 땀 냄새가 진동하는 경찰소설이면서 동시에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까지 품고 있는 묵시록 살인사건은 자주는 아니더라도 간혹 고전만의 독특한 맛을 맛보려는 독자에게 잘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소재 자체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달리게 만드는 서사의 힘이 워낙 묵직해서 일단 읽기 시작하면 소재에 대한 우려나 비호감은 금세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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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치백 - 2023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이치카와 사오 지음, 양윤옥 옮김 / 허블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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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 기관절개 호스를 꽂고 등뼈는 S자로 심하게 휜 미오튜뷸러 미오퍼시(근세관성 근병증)’, 흔히들 꼽추라 부르는 중증 척추 장애인으로 살아온 지 30년이 된 40대의 이자와 샤카. 부모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과 함께 중증 장애인 그룹홈 건물을 보유하고 있는 그녀는 남들 앞에선 성실하며 과묵한 장애여성으로 지내지만 동시에 필명으로 포르노에 가까운 소설과 기사를 쓰는 익명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간절한 두 가지 소망은 다시 태어나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임신과 중절을 하고 싶다.”입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혐오하는 간병인 다나카에게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내가 임신하고 중절하는 걸 도와주면 1억 엔을 줄게요.”

 

2023년 상반기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인 헌치백은 두 가지 면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하나는 최초로 일반적인 글쓰기가 불가능한 중증 장애인 수상자가 나온 점이고 또 하나는 작품 자체의 파격성입니다. 1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장애인 당사자가 쓴 충격적이고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장애인 서사의 묵직함과 애틋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이 쓴 장애인 서사라고 하면 대부분의 독자는 차별을 비판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지레짐작하겠지만, ‘헌치백은 그와는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 물론 작가가 어째서 2023년에 이르러서야 중증 장애인이 최초로 수상하게 됐는지 모두가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라는 수상소감과 함께 종이책 중심의 출판계를 비판하면서 전자책과 오디오북 추가 보급 등 독서 배리어 프리를 호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장애인 차별을 고발하는 사회소설 혹은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성이 짙은 작품으로 읽히진 않았습니다.

 

고급 창부가 되고 싶고 임신과 중절을 해보고 싶다는 건 장애인인 자신의 처지를 자학하거나 비관해서도 아니고 일부러 꾸며낸 위악도 아니며, 오히려 평범한 여자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샤카가 당연히 꿈꿀 수 있는 바람으로 보였습니다. 임신, 중절, 매춘 등 자신의 몸이 절대 이뤄낼 수 없는 일들에 집중된 주인공 샤카의 욕망은 부도덕하거나 음탕하다는 식의 잣대로 판단해선 안 되며 오히려 평생 인공호흡기와 담을 빼내는 흡인기를 끼고 살아야 하고 식사와 목욕도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며 섹스 자체는 아예 불가능한 그녀만의 소중하고 절실한 욕망으로 봐야합니다. 간병인에게 내가 임신하고 중절하는 걸 도와주면 1억 엔을 줄게요.”라고 제안하는 장면에선 누구나 놀랄 수밖에 없겠지만 그와 함께 한없는 애잔함을,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절실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쉽지 않은 혼자만의 내밀한 욕망,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그런 욕망을 작가 역시 오랫동안 품어왔던 게 분명하고, 그것들을 파격적인 설정과 문장, 그리고 샤카라는 인물을 통해 풀어낸 것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책머리에 실린 이 작은 목소리, 삐딱한 주인공에 부디 큭큭큭 웃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공개석상에서라면 듣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게 분명한 작가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일 겁니다. 이 작품이 장애인 차별을 고발하는 사회소설로 읽히진 않은 건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독자에 따라 헌치백은 무척이나 파괴적이고 공격적이며 상대의 마음에 확실히 꽂히기를 바라고 쏘아댄 작가의 화살처럼 읽힐 수도 있겠지만 그건 지금까지 비장애인이 창조했던 장애인 서사에만 익숙했던 탓에 정작 장애인인 당사자가 지나치게 솔직할 정도로 털어놓은 고백에 깜짝 놀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당사자성이야말로 헌치백이 품은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면서 중증 장애여성의 임신과 중절을 다룬 작품이라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된 작품이지만 지금껏 만나보지 못한 특별한 이야기를 읽은 것 같아 그 여운이 꽤 오래 갈 것 같습니다. 사실 한 번 읽는 것만으로는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언젠가 지금 느끼고 있는 여운이 희미해질 때쯤 다시 한 번 읽는다면 조금은 더 샤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치카와 사오가 비슷한 아류작을 낼 리는 없겠지만 언젠가 당사자성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는 작품을 내놓는다면 꼭 찾아서 읽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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