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5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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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모방범이후 9. 르포라이터로서의 삶을 접고 조용히 살아가던 마에하타 시게코는 중년부인 도시코의 방문 이후 또 다시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12살에 사고로 죽은 아들 히토시가 사이코메트리였다고 짐작하는 도시코는 시게코에게 그가 그렸던 그림들을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부모가 딸을 살해한 뒤 암매장했던 도이자키사건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있었지만 시게코는 단지 우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히토시의 그림 가운데 모방범사건이 벌어진 산장의 그림과 기표들을 발견한 시게코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어쩌면 히토시는 진짜 사이코메트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시게코는 히토시의 사연과 함께 그가 그림으로 남긴 도이자키사건에 대해서도 알아보기로 결심합니다.

 

읽은 지 15년도 훌쩍 넘어서 줄거리가 전혀 생각나지 않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반부를 읽다가 “‘낙원이 초능력자 이야기였다고?”라며 꽤나 놀랐습니다. 그러다가 도이자키사건이 설명되는 순간 어렴풋이나마 기억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는데, ‘낙원역시 모방범못잖게 씁쓸하고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는 점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르포라이터로서의 시게코의 경력은 9년 전 모방범으로 인해 막을 내렸습니다. 당시 범인의 정체를 직접 폭로하여 세간의 엄청난 관심을 받았지만 자괴감과 자책감에 사로잡혔던 시게코는 자신이 취재한 것들을 책으로 내기를 거부했습니다. 30대 초였던 시게코는 이제 불혹의 나이가 되었고 작은 규모의 무가지 업체에서 일하고 있지만 세상에는 지금도 시게코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당시 시게코가 책을 내지 않은 사실에 놀라고, 그녀가 더는 르포라이터로서 일하지 않고 있음에 더 크게 놀랍니다. 그런 시게코가 사건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건 그만큼 죽은 소년 히토시가 남긴 그림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도이자키 부부는 16년 전 중학생 딸 아카네를 살해한 뒤 마루 밑에 매장을 했고, 최근 화재로 집이 불타버리자 경찰에 찾아가 자수했습니다. 하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부부는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종적을 감췄고, 아카네의 동생 세이코는 이혼이라는 후폭풍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시게코는 죽은 소년 히토시가 아카네의 죽음에 연루된 누군가와 접촉한 탓에 사이코메트리 능력이 발휘됐고 그것을 그림으로 남겼다는 가정 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들은 히토시와 도이자키의 접점을 설명하는 정보제공자 역할 외에도 사건의 비극성과 그 이면의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조연을 맡습니다.

 

1~2권을 합쳐 8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낙원은 주인공 시게코에게나 독자에게나 대단한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지독한 탐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토시와 도이자키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정보까지 낱낱이 파고드는 시게코의 탐문은 나름 기승전결의 구도를 갖추고 있긴 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방대한 수사일지처럼 읽히기도 해서 모방범을 통해 시게코의 전력을 이해하고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꽤나 곤혹스러울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불행한 사건에는 360도 어디서 보아도 완벽한 진실은 있을 수 없어요.”라는 한 등장인물의 말처럼 같은 상황을 놓고 서로 다른 입장과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들이 많아서 시게코는 물론 독자 역시 그 지독하고 방대한 탐문의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낙원은 참 역설적인 제목입니다. 타고난 사이코메트리 재능 때문에 괴로워했던 12살 소년 히토시도, 딸 아카네의 목을 졸라 죽이고 16년 동안 마루 밑에 방치했던 도이자키 부부도, 부모가 언니를 죽였다는 진상을 알게 된 뒤 격심한 혼란에 빠진 동생 세이코도 낙원이라는 안락하고 따뜻한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그 누구의 낙원이든 그것은 여러 가지 것들을 망각한 후에,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하고 나서야 겨우 성립되는 거라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통해 일반적인 의미의 낙원과는 다른, 그러니까 (인터넷서점의 한 서평처럼) “연인에게는 둘만의 공간이 낙원이지만, 연쇄살인마에게는 살인의 무대가 낙원이다.”라는 식의 좀더 심오한 의미의 낙원을 그려냈습니다. 말하자면 누구나 자신만의 낙원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오롯이 그 사람만의 역사와 감정으로 이뤄진 것이어서 그 자신 외에는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그리고 나의 낙원은 누군가의 악몽일 수 있으며, 반대로 나의 비극은 누군가의 낙원의 터전이 될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를 암시한다고 할까요?

 

모방범역시 사건 못잖게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감정을 파고든 작품이지만 낙원은 후자의 비중이 훨씬 더 묵직하고 강렬하게 그려진 작품입니다. 편하게 읽히지도 않고,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도 않지만 그만큼 남는 여운은 깊고 무겁습니다. 신문에 연재됐던 작품인데다 지독한 탐문기에 가까워서 다소 늘어지고 지루한 대목들이 적지 않지만 그것들을 견뎌낸다면 미야베 미유키가 그린 낙원이 어떤 모양새를 지녔는지,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깊이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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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1 - 개정판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5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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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공원 쓰레기통에서 젊은 여성의 오른팔이 발견된 사건으로 일본 전역이 충격에 빠집니다. 더구나 범인은 언론사는 물론 피해자의 유족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희롱하듯 자신의 범죄를 폭로합니다. 연이어 동일범에게 살해당한 시신들이 발견되지만 경찰은 단서 하나 잡지 못한 채 궁지에 몰립니다. 연속 유괴살인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르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 가족이 무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으로 인해 죄책감에 빠져있던 중 공원에서 잘린 오른팔을 발견한 고교생 쓰카다 신이치, 범인에게 손녀를 잃은 70대 노인 아리마 요시오 등 사건 관련자들은 제각각의 희망과 절망 속에서 어떻게든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합니다.


일본에서 무려 5년에 걸쳐 연재됐으며 (2006년 번역판 기준으로) 1,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론 2007년 가을쯤 일본 미스터리에 입문하게 만든 작품이라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올해의 독서목표인 명품재독을 계획하면서 거의 17년 만에 모방범과 그 후속작인 낙원을 다시 읽을 생각에 무척 설렜는데, 사흘에 걸쳐 다시 읽은 모방범은 역시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이라 부를 만큼 서사와 여운 모두 압도적이었습니다.


전대미문의 연속 유괴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지만 모방범은 초반부터 진범은 물론 누명을 쓰게 되는 인물까지 공개하는데다 서사의 중심 자체가 추리나 반전보다는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들을 그리는 데 있기 때문에 단순한 미스터리 이상의 거대한 휴먼 드라마로 읽히는 작품입니다. 경찰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 역시 수사의 주체라기보다는 사건에 휩쓸린 대다수의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을 헤매는 조연 역할에 더 충실합니다.


이야기를 견인하는 건 크게 세 그룹입니다. 하나는 유괴와 살인은 오로지 부차적인 수단일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를 던져줌으로써 을 체현(體現)하고자 하는 사이코패스와 그를 추종하면서 오로지 쾌락을 위해 피해자들을 유린하고 살해하는 잔혹한 살인마이고, 또 하나는 르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와 경찰로 대표되는 사건의 기록자들이자 방관자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그룹은 연속 유괴살인사건의 첫 목격자인 쓰카다 신이치와 범인에게 손녀를 잃은 70대 노인 아리마 요시오, 그리고 범인으로 지목된 오빠의 무죄를 주장하는 다카이 유미코 등 범죄에 직접적으로 휘말린 일반인들입니다.


이미 범인이 누군지 아는 상태에서 독자는 수시로 몰입의 대상과 애증이 뒤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결코 흥미나 인기에 영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결국엔 불확실한 정보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만들뿐인 르포라이터 시게코에게는 응원과 비아냥을 번갈이 보내게 되고, 살아있는 게 지옥이나 마찬가지인 피해자의 유족이나 범인은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용의자의 가족에게도 챕터가 바뀔 때마다 미묘하게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말하자면 누구를 편들어야 할지, 누구를 비난해야 할지, 누구를 동정해야 할지 그 구분 자체가 미묘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바로 이런 점 -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이야기 - 모방범의 가장 큰 미덕이자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워낙 방대한 이야기인데다 등장인물도 많아서 상세한 내용이 없는 인상비평이 되고 말았지만, ‘모방범은 축약한 줄거리만으로는 그 진가를 1/100도 설명할 수 없는 작품이라 직접 읽어보라는 것 외에는 달리 마땅한 추천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엄청난 분량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일단 1권만 읽어보자.”라는 심정으로 도전한다면 어느새 3권 막판까지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미야베 미유키의 현대물에 실망했던 독자라도 출간된 지 20년이 넘은 모방범만큼은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손꼽게 될 것입니다.


이제 모방범이후 9년의 시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한 낙원을 읽으려고 합니다. 희미한 기억이긴 하지만 모방범보다는 다소 인상과 여운이 깊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원역시 충분히 매력적인 책읽기의 시간을 제공해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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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유희
이가라시 리쓰토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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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간 사법시험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했지만 호토대학교 로스쿨에는 뛰어난 세 명의 인재가 있습니다. 이미 사법시험에 합격하고도 로스쿨에 들어온 괴짜 천재 유키 가오루, 사법시험 합격이 유력해 보이는 구가 기요요시와 오리모토 미레이가 그들입니다. 실제로 기요요시와 미레이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가오루는 예상과 달리 법조인 대신 학자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살인사건의 피해자, 가해자, 변호인의 처지로 재회합니다. 가오루가 칼에 찔린 시신으로 발견된 가운데 미레이가 현장에서 범인으로 체포됐고 기요요시는 미레이의 변호인이 되어 재판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0.1%도 되지 않는 승산에 기요요시는 애가 타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구치소에 갇힌 미레이는 좀처럼 기요요시에게 협조하지 않습니다.

 

현직 변호사인 이가라시 리쓰토는 2023뒤틀린 시간의 법정으로 한국 독자와 처음 만났습니다. 법정 미스터리를 좋아하지만 타임 슬립 코드가 깔려 있어서 구매목록에서 뺐던 작품인데, ‘법정유희를 읽고 나니 조만간 다시 장바구니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작 제목도 法廷遊戯인데 유희(네이버 사전을 그대로 인용하면) ‘즐겁게 놀며 장난함. 또는 그런 행위’. 영어로는 ‘play’, ‘game’을 뜻합니다. 실제로 이 작품 속엔 법의 테두리 안에서, 또 법정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갖가지 유희가 등장합니다. 다만 즐거운 놀이나 장난과는 거리가 먼 어둡고 길고 고통스러운 한 판의 게임이 벌어집니다.

 

죄와 벌, 제재와 구제, 무고와 원죄(冤罪) 등 법을 둘러싼 묵직하고 심오한 주제들이 이야기 전반에 흐르고 있고,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분투하는 미스터리의 매력도 잘 살아있어서 진지한 법정 미스터리이면서도 모든 복선이 하나로 연결되는 본격 미스터리 특유의 쾌감을 선사한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작품입니다. 동시에 오래 전부터 여러 겹의 악연으로 얽혀온 세 주인공이 법정 안팎에서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는 비극도 미스터리 못잖게 눈길을 끌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과 비슷한 암담하고도 먹먹한 분위기까지 더해져 마지막 장까지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어버립니다.

 

법률 전문용어가 꽤 많이 등장하기도 하고, 인물들의 심리나 속내를 에둘러 표현한 부분도 종종 있어서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는 작품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런 느린 책읽기 덕분에 세 주인공의 비밀과 거짓말, 숨은그림찾기처럼 정교하게 설치된 복선들, 0.1%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법정 안팎의 긴장감 등에 좀더 몰입할 수 있었고, 또 그런 몰입 덕분에 막판에 연이어 터지는 불꽃놀이 같은 반전의 참맛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정당한 죗값은 누가 정해야 하는 걸까?”라는 심오한 주제와 함께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아들이는 길벌을 거부하고 죄와 마주하는 길을 선택하는 인물들의 고뇌와 갈등 역시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좀 복잡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스포일러가 될 여지들이 너무 많아서 세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도, 법정에서 벌어지는 공방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가 조심스러운 작품입니다. 달리 말하면 소개글이나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접하지 말고 바로 본편을 읽어야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정 궁금하다면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출판사의 소개글 정도만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가라시 리쓰토는 한국에 소개된 두 작품 외에도 일본에서 꽤 여러 편의 법정 미스터리를 출간한 걸로 검색되는데, 조만간 그의 세 번째 작품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필명을 律人으로 정할 정도로 법룰의 매력을 전하기 위하여 꾸준히 소설을 발표해 왔다는 이가라시 리쓰토의 진심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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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싸리 정사 화장 시리즈 2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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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싸리 정사회귀천 정사와 함께 화장(花葬) 시리즈로 불리는 단편집입니다. 화장(花葬)꽃으로 장사 지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두 작품 제목에 공통적으로 들어간 정사(情死)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연인들이 내세에서의 인연을 기약하며 죽음을 선택하는 일을 뜻합니다. 시리즈 명과 제목만 보면 무척이나 애틋하고 슬픈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하게 되지만 실은 두 작품집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은 겉으로 드러난 애틋함이나 슬픔과는 거리가 먼, 무척이나 잔혹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발표된 회귀천 정사에 다섯 편이 실렸고, ‘저녁싸리 정사에는 나머지 세 편과 함께 전혀 결이 다른 유머 미스터리 한 편이 수록돼있습니다.

 

회귀천 정사의 서평에 살인이나 죽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꽃들의 향연이 주는 묘한 위화감과 끈적거림, 그리고 밝혀진 진실 속에 담긴 어이없음, 망연함, 안타까움 등 복잡한 감정들 때문에 이야미스(イヤミス)’와는 다른 성격의 불편함과 불쾌함을 맛봤다.”라고 쓴 적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편함과 불쾌함이 다시 그리워질 때까지 저녁싸리 정사를 읽는 걸 미뤄두겠다는 다짐도 남겼는데, 그게 꼭 3년 반 전의 일입니다. 올해 초, 책장에 방치한 책들 가운데 일부라도 소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우자마자 저녁싸리 정사가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제는 그 불편함과 불쾌함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다는 욕심이 불쑥 솟아올랐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수록작인 유머 미스터리 양지바른과() 사건부는 제외하고) 세 편의 단편 모두 다이쇼 시대(1921~1926)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일본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척 혼란을 겪었던 것으로 기록돼있는데, 그런 분위기는 각 수록작에서 다루는 처연하고 비극적인 죽음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5년 만에 재회한 여동생에 대한 애정이 너무 깊은 나머지 그녀를 희롱하려는 절친한 친구에게 증오심을 품는 오빠('붉은 꽃 글자‘), 유력한 권력자의 아내지만 버림받은 처지가 된 여자와 여덟 살 연하 대학생의 비극적인 정사('저녁싸리 정사‘), 메이지 유신으로 몰락한 왕실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자결을 선택한 전직 군인과 그 아내의 이야기('국화의 먼지‘) 등 세 단편 속의 죽음은 적어도 언론을 통해 또는 경찰 조사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자살 혹은 자결입니다. 하지만 화자의 고백 또는 제3자의 조사를 통해 드러난 죽음 이면의 진실은 전혀 다릅니다. 거기엔 지독한 시기심과 질투심, 타인의 마음을 철저히 기만하고 이용하는 이기심,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그 어떤 지독한 업보도 감내하겠다는 집착 등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갖가지 악의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화장 시리즈가 여느 미스터리와 차별되는 건 바로 이런 인간의 악의를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으로 그려낸 점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막론하고 심금을 울릴 정도로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는가 하면, 그들 주변에선 색과 향을 뿜어내는 갖가지 꽃들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혼란과 어둠에 잠식된 시대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행복과 미래를 놓치지 않으려는 간절함도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악마파 화가가 그린 순수하고 맑은 풍경화처럼 묘한 이질감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흠뻑 빠져들게 되는 농밀한 아름다움이 뒤섞인 느낌이라고 할까요? “비정한 범죄 트릭과 서정적인 사랑의 드라마. 언뜻 보면 섞일 수 없어 보이는 양자가 함께 하면서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라는 평론가 센가이 아키유키의 평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간혹 트릭 자체가 과유불급으로 보인 이야기도 있고, 서사의 심도와 무게를 위해 지나치게 시대성을 강조한 경우도 있으며, 내용보다는 형식만 눈에 띄는 작품도 있습니다. 첫 수록작인 '붉은 꽃 글자화장 시리즈라는 타이틀에 잘 어울려 보인 반면 나머지 두 작품은 발단은 매력적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다소 억지스럽거나 결과론처럼 읽힌 게 사실입니다. 전체적으로 평하자면 회귀천 정사의 수록작들에 비해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화장 시리즈는 절대 급하게 페이지를 넘겨선 안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읽었을 때는 그 맛의 깊이와 농도가 전혀 달라지는 작품입니다. 렌조 미키히코의 독특하고 개성 강한 미스터리에 호감을 가진 독자라면 언젠가 화장 시리즈에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에 수록된 양지바른과() 사건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렌조 미키히코의 유머 미스터리인데, 재미있긴 하지만 앞선 세 편의 화장 시리즈와 너무 결이 달라서 한 번에 이어 읽으면 좀처럼 빠져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 편의 단편의 여운이 다 가시고 난 후에 따로 읽어야 그 재미를 제대로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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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상회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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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도쿄. 법의학 분야의 권위자인 무라야마 고도 박사가 자택 정원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사체의 상태와 사건 현장은 범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흉기 역시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정황에서 발견된 탓에 경찰은 당황합니다. 한편 고도 박사의 먼 친척이자 유일한 유족인 미나카미 도시코는 3년 전 저택에 침입하여 큰돈을 훔쳐갔던 도둑 하스노라는 남자를 찾아가 탐정이 되어 고도 박사의 죽음을 조사해줄 것을 의뢰합니다. 하스노 본인은 물론 그의 절친인 화가 이구치는 도시코의 의뢰를 이해할 수 없지만 결국 하스노는 탐정 역할을 맡습니다. 얼마 후 하스노는 저택에서 발견한 몇몇 편지를 통해 국제적인 무정부주의자 비밀결사 교수상회가 고도 박사의 죽음에 연관됐음을 알아냅니다.

 

2023방주를 통해 한국 미스터리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린 유키 하루오의 데뷔작이자 제60회 메피스토상 수상작입니다. 워낙 인상 깊게 방주를 읽은 덕분에 그의 데뷔작이 무척 궁금하기도 했고, 1920년의 도쿄를 배경으로 한 본격 미스터리라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한 대목입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비롯하여 20세기 초중반이 배경인 미스터리를 좋아하다 보니 시대물의 향기를 진하게 맛볼 수 있을 거라 기대됐기 때문입니다.

 

絞首商會라는 원작 제목을 보곤 교수형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집단의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막연한 상상을 했었는데, 실은 교수상회는 국제적인 무정부주의자 비밀 결사로, 일본 정부와 경찰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위험한 단체입니다. 살인사건 직후 저택에서 발견된 몇 통의 편지에 따르면 교수상회는 자신들을 고발하려는 고도 박사를 대리인을 통해 살해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대리인은 고도 박사 주위의 인물이 분명해보였고, 그로 인해 순식간에 몇몇 인물이 용의선상에 오릅니다.

 

탐정 역할을 맡은 하스노는 무척 특이한 인물입니다. 명문대 졸업 후 은행원이 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지만 사람을 대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금세 사표를 내버렸고, 그 후로 기행에 가까운 삶을 살면서 3년 전엔 도둑으로 체포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하스노와 콤비 플레이를 펼치는 건 화가 이구치입니다. 하스노가 두뇌라면 이구치는 팔과 다리 역할인 셈인데, 홈즈&왓슨 콤비와는 또 다른 이색적인 버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마지막까지 독자의 궁금증을 일으키는 점 중 하나는 왜 유일한 유족인 도시코가 하필 3년 전 저택에 침입했던 도둑인 하스노에게 탐정 역할을 의뢰했는가?”입니다. 그가 분명 뛰어난 인재인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어떻게든 경찰이나 하스노보다 먼저 진범을 알아내기 위해 애를 쓴다는 점입니다. 정의감도 아니고 교수상회에 대한 적개심이나 단순한 호기심도 아닌 그들의 진범 체포에 대한 열의는 오히려 하스노와 이구치의 의심을 살 뿐이고 조사가 거듭될수록 수상한 점만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범인의 정체 못잖게 이 두 가지 미스터리가 독자의 촉각을 자극하는데, 유키 하루오는 막판에 이르러 뜻밖의 해답을 내놓음으로써 독자는 물론 등장인물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듭니다. 물론 범인의 정체와 살해의도 역시 유키 하루오다운 반전을 선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가장 아쉬운 점은 미스터리 규모에 맞지 않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500페이지가 훌쩍 넘지만 개인적으론 길어야 400페이지에 어울리는 이야기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옮긴이의 말“‘방주가 초고속열차라면 교수상회는 시대성이 가득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여유롭게 나아가는 관광열차라는 설명이 있긴 하지만, 굳이 지적하자면 볼거리여유를 너무 많이 제공한 탓에 속도가 과하게 느려진 느낌입니다. 기대했던 시대물의 향기는 원 없이 만끽했지만 방주의 전광석화 같은 서사가 수시로 떠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불어 간혹 현학적인 냄새가 풍긴 무정부주의에 대한 설명이라든가, 지나친 비약적 추리 때문에 명탐정 하스노의 천재성이 현실감을 잃은 점 등이 별 1개를 빼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일본에선 하스노가 이번 사건 이전에 맡았던 사건들을 다룬 단편집 시계 도둑과 악인들이 출간됐다고 합니다. ‘교수상회와 비슷한 스타일이라면 좀 고민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래선지 방주처럼 현대를 배경으로 한 십계의 출간소식이 더 기다려집니다. 유키 하루오 특유의 속도감과 반전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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