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 개정판
마타요시 나오키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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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제153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인 불꽃은 작가가 개그맨 - 유명한 콤비 개그 피스의 멤버인 마타요시 나오키 - 이란 점 때문에 당시 장안에 화제를 몰고 왔다고 합니다. 오랜 무명 시절을 견디는 동안 책에 파묻혔던 그의 독특한 이력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는데, 그래선지 그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이 20대의 10년을 지난하게 살아낸 이야기를 그린 불꽃은 여느 성장 스토리보다 사실적이고 절절하게 읽혔습니다. (본문에는 코미디언과 개그맨이 혼용되고 있는데, 서평에서는 개그맨으로 통일하겠습니다.)

 

20살의 무명 개그맨 도쿠나가는 한 불꽃축제장에서 만난 네 살 위의 선배 개그맨 가미야에게 사제지간이 되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각자 콤비 개그 파트너가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은 가끔씩 만나 개그에 대해, 인생에 대해, 미래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도쿠나가는 가미야에게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경외심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미래를 그리고 있는 듯한 이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지독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개그에 대한 열정 하나로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지만 10년이란 시간은 결국 두 사람에게 크고 작은 변화를 피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콤비 개그란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만담’, 즉 스탠드마이크 앞에 선 두 개그맨이 각각 바보 역할과 똑똑이 역할을 맡아 속사포 같은 개그로 관객들을 웃게 만드는 장르입니다. 웃음에 대한 센스는 물론 엄청난 순발력과 임기응변이 필요하며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좀처럼 관객에게 호응을 얻기 쉽지 않습니다.

청소년기부터 이미 개그맨이 되기로 결심했지만 도쿠나가는 재능 자체가 여러 모로 부족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한 불꽃축제장에서 자신과는 차원이 달라 보이는 개그맨 가미야에게 한눈에 반한 나머지 사제지간을 부탁한 건 그만큼 정열적이라는 뜻이기도, 또한 절박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미야는 도쿠나가와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입니다. 타인의 평가 따윈 신경 쓰지 않으며 자신만의 개그에 대한 신념에 투철한 가미야는 쉽게 말하면 주류 개그를 거부하는 4차원 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중적으로 성공한 개그맨이라는 평범하고도 상식적인 목표를 가진 도쿠나가와는 전혀 상반된 가치관을 지닌 셈입니다. 마치 물과 기름과도 같은, 섞이기 어려운 차이라고 할까요?

도쿠나가가 가미야와 함께 보낸 10년은 바로 그 차이 때문에 고민하고, 그 차이를 따라잡으려 애쓰다가 결국 그 차이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개그맨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훌쩍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통 리스크뿐인 무대에 서서 상식을 뒤엎는 것에 전력을 다해 도전하는 자만이 코미디언이 될 수 있다. 긴 세월을 들인 이 무모한 도전으로 나는 내 인생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p204)

 

개그맨이 쓴, 개그맨에 관한 소설이라고 해서 다소 가벼운 서사에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힐링 코드가 담긴 이야기가 아닐까, 지레 편견 섞인 짐작을 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마치 개그맨은 삶 자체도 개그 같을 것이라는, 지독한 폄하와 다를 바 없는 부끄러운 짐작이었습니다. ‘불꽃은 남들을 웃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연습과 좌절이 필요한지, 가난이라는 현실과 손에 닿지 않는 이상 사이에서 얼마나 깊은 절망을 숱하게 겪어야 하는지, 그리고 관객들의 덧없는 반응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도 허무한 일인지를 진지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부족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열정을 놓치지 않는 도쿠나가와 주류 개그에 어울리지 않는 고독한 천재 가미야는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어울리는 엔딩을 맞이하게 됩니다.

 

개그와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가미야의 난해한 궤변(?)과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다소 어려운 문장들 때문에 간혹 같은 페이지를 여러 번 되읽을 때도 있지만 불꽃은 한나절이면 충분히 완독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스토리가 아니라 사람을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 그저 한 번의 독서로는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두 사람의 10년이 워낙 지난하고 굴곡이 많은 탓에 어쩌면 읽을 때마다 그 맛이 조금씩 달라질 것 같기도 합니다. 언젠가 두 사람의 개그가 생각날 때면 한나절 정도 그들의 10년을 다시 한 번 맛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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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체조 닥터 이라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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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더 풀’, ‘공중그네’, ‘면장선거에 이은 닥터 이라부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일본 출간 기준으로 면장선거이후 17년 만인 2023년에 출간됐는데, 세월이 적잖이 흘렀지만 정신과 의사 이라부 이치로와 간호사 마유미 콤비는 여전히 17년 전 그 나이를 살아가는 중입니다. 물론 괴짜와 마녀라는 캐릭터도 여전합니다. “괜찮아, 괜찮아.”를 남발하며 환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이라부는 누구에게든 뒤룩뒤룩 살찐, 다리 짧은 중년 아저씨라는 첫인상을 남기고, 표정 없는 얼굴에 미니 원피스 간호복을 입고 특대형 비타민 주사를 들이미는 마유미 역시 예전의 그 카리스마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라부의 17년 만의 복귀 이유에 대해 오쿠다 히데오는 코로나를 언급합니다. 팬데믹의 공포 속에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황폐해진 현대인들을 지켜보며 정신과 의사 이라부라면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절 외출 자제, 재택근무, 원격수업 등 사람들로 하여금 고립된 상황에서 불안과 혼란을 느끼게 만든 시스템들이 만들어졌고, 그 결과는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지겹도록 들은 바 있습니다. 우울증을 비롯하여 많은 정신적 질병들이 급증했고, 사람들은 낯설고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라디오 체조속 다섯 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환자들이 모두 팬데믹의 희생자들로 설정된 건 아니지만 요즘 세상에선 더는 낯설지 않은 정신적 상처들을 지니고 있어서 다만 일부 인물이라도 나도 조금은 그런 것 같은데...”라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시청률에 목을 맨 나머지 의존증과 주의력 결핍에 걸린 뉴스쇼 PD, 부당한 일에 화가 나지만 제대로 화를 낼 줄 몰라 공황장애와 과호흡을 겪는 세일즈맨, 데이트레이더가 된 후 100억이란 큰돈을 벌었지만 히키코모리처럼 삶이 황폐해진 남자, 어느 날 갑자기 광장공포증에 빠져 대혼란을 겪게 된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 그리고 자의식이 강한 나머지 팬데믹이 끝난 후에도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된 대학생 등 누구나 조금씩은 갖고 있지만 유독 그 증세가 심각하게 나타난 인물들이 이라부의 진료실을 찾습니다.

 

망했다. 이 의사는 완전 미쳤다. 이라부는 원래부터 사고 회로가 이상한 것이다.” (p343)

 

창고 같은 진료실에 괴짜 같은 외모도 놀랍지만 이라부의 기이한 처방은 환자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피하고 싶은 상황과 직접 대면하게 만들기도 하고, 도저히 치료라고 볼 수 없는 황당하고 비상식적인 지시를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한 적당히 힘을 빼라고, 너무 힘주고 살지 말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말하며 부지불식간에 환자의 마음을 풀어주곤 합니다. 반신반의하던 환자들은 어느 샌가 이라부의 황당한 처방이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편하게 만들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실은 이라부의 처방은 의사가 환자에게 가하는 치료라기보다는 환자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스스로의 힘으로 딛고 일어설 수 있게 거드는 일종의 위약(플라시보)이나 다름없습니다. 지시하는대로 따라오라는 권위적인 의사가 아니라 환자에게 거울을 내밀고 스스로를 지켜봐라.”라고 권하는 마음씨 좋은 이웃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선지 이라부의 캐릭터도, 그가 내리는 처방도 모두 현실에선 절대 만나볼 수 없는 판타지라는 걸 잘 알면서도 독자는 어딘가 그런 의사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기행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괴짜 콤비 이라부와 마유미를 통해 웃음과 온기를 전파하는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유머와 힐링 메시지는 오래 전에 읽은 시리즈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어서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전작들을 순서대로 한 편씩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세상이 답답하고 마음이 팍팍해질 때, 황당한 처방을 남발하는 이라부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명의는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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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야가의 밤 - 각성하는 시스터후드 첩혈쌍녀
오타니 아키라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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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흉기라고 할 만큼 순수한 폭력의 화신인 22살의 신도 요리코. 어느 날 자신을 성추행한 양아치 일당을 무자비하게 때려눕히던 중 야쿠자 회장의 저택으로 끌려간 그녀는 회장의 딸인 18살 쇼코의 운전기사이자 보디가드가 되라는 어이없는 협박성 제안을 받습니다. 개죽음만은 피하고 싶었던 요리코는 이후 저택에 머물며 마치 인형처럼 감정도, 표정도 없어 보이는 쇼코의 시중을 들게 됩니다. 어색하고 냉랭하기만 했던 둘의 관계는 사소한 일탈을 계기로 조금씩 녹기 시작했고 가슴에 담아뒀던 이야기까지 꺼내는 단계에 이릅니다. 하지만 야쿠자 저택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태로 인해 두 사람의 운명은 예기치 못한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윈저 노트, 여왕의 비밀 수사 일지’(소피아 베넷), ‘세상 끝의 살인’(아라키 아카네)과 함께 북스피어의 첩혈쌍녀 시리즈로 출간된 작품입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시리즈 명칭에 진심으로 걸맞은 작품으로, 순수한 폭력을 갈구하는 싸움의 신신도 유리코와 야쿠자 회장의 금지옥엽나이키 쇼코가 벌이는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와도 같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편집자인 삼송 김사장 님의 평을 조합해서 정리하면 이 작품의 장르는 심장 떨리는 하드보일드 바이올런스 액션 스릴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훗카이도의 외진 마을에서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에 의해 고문에 가까운 훈련을 받은 요리코는 몸과 마음 모두 폭력이 주는 희열에 빠진 채 성장했습니다. 18살이 되어 도쿄에 온 요리코는 싸움꾼이 되진 않았지만 누군가 시비를 걸어오면 반드시 두 배로 갚아주며 폭력의 쾌감을 만끽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폭력 재능에 반한 야쿠자가 숱한 희생을 치러가면서 그녀를 회장 딸 쇼코의 보디가드로 삼기 위해 끌고 간 것입니다.

피지컬도 멘탈도 강한 여성, 게다가 싸우기 위한 동기가 내면에서 솟아나는 여성을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 오타니 아키라는 영웅적인 여주인공에게 반드시 필요한 싸워야 할 이유’, 즉 가족이나 연인이나 친구를 위한 복수심 같은 것 없이도 순수하게 폭력을 갈망하고 희열을 느끼는 요리코를 창조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멋있으면서도 폭력적인 남성 영웅 중에는 굳이 아무 이유 없이도 매력적으로 그려진 경우가 적지 않으니 오타니 아키라의 일성은 충분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보디가드요리코와 아가씨쇼코의 관계가 조금씩 풀어지며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는 지점까지만 해도 오락성이 풍부한 재미 만점의 해피엔딩 액션 스릴러라고 단정하고 있다가 중반부쯤의 예기치 못한 전개에 꽤 세게 뒤통수를 맞은 순간엔 말 그대로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오고 말았습니다. 무자비한 야쿠자의 세계에서 요리코와 쇼코가 말랑말랑한 해피엔딩을 맞이할 거라고 예상하진 않았지만, 극적인 반전과 함께 이야기의 톤 자체가 처절함과 처연함으로 급변하는 대목에선 단순한 놀람 이상의 충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다 읽은 뒤 인터넷서점 출판사 소개글에서 발견한 이 지옥 같은 세계에서 등을 맡기고 싸우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라는 일본 아나운서 우가키 미사토의 한 줄 평은 그 반전을 읽은 순간의 제 심정을 100%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삼송 김사장 님은 아주 깜찍한 반전이라고 표현하셨지만 저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묵직한 반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바야가의 밤2021년 제7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장편부문에서 최종 후보에 올랐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론 신초샤(新潮社)가 주관하는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에 어울리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심장 떨리는 하드보일드 바이올런스 액션 스릴러지만 동시에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치열하고 리얼한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요리코와 쇼코는 연인도, 친구도 아니지만 그 이상의 연대로 묶인 시스터후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슬라브 신화에 등장하는 마귀할멈 바바야가처럼 엄청 강하고, 마을사람들이 무서워하지만 착하고 친절한 여자애가 간절히 부탁하면 어려운 일을 도와주기도 하는사람이 되고 싶다는 두 여자가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남성 야쿠자의 세계를 벗어나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과정은 무척이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사족 1. 요리코가 순수한 폭력의 화신이며 이야기의 주 무대가 야쿠자의 저택인 만큼 꽤 높은 수위의 폭력적인 묘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사족 2. 오타니 아키라의 또 다른 한국 출간작 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진심으로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소설 같은데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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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나기라 유 지음, 오민혜 옮김 / 직선과곡선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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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5층 맨션 옥상에 절연의 신을 모셔놓은 신사와 정갈하게 꾸며진 정원이 있습니다. 프리랜서 번역가이자 신사의 신관인 구니미 도리는 이혼한 아내가 재혼한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모네라는 10살 소녀와 5년째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아내와 재혼남 모두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동식 노천 바를 운영하며 맨션에 살고 있는 이노우에 로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고 사는 게이입니다. 그리고 22년 전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을 사고로 잃고 여전히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39살의 다카다 모모코는 맨션에 살진 않지만 오래 전부터 마음의 안식처로 여겨온 옥상의 절연신사를 드나들며 도리, , 모네와 특별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2022년에 출간됐지만 이런저런 바쁜 일로 뒤늦게 읽게 된 나기라 유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19BL소설을 제외하고 한국에 출간된 그녀의 작품들(‘유랑의 달’,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을 인상 깊게 읽은 덕분에 늘 신작 소식이 기다려지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게 됐는데,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라 좀더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맨션 옥상에 신사가 있다는 설정도 재미있지만 그곳에 모셔진 신이 인연을 끊어주는 절연의 신이란 점이 초반부터 눈길을 끌었습니다. 가타시로(かたしろ, 액막이나 기도를 할 때 사람 대신 죄나 부정을 짊어지는 종이인형)에 자신이 인연을 끊고 싶은 대상을 적어 부적함에 넣으면 되는데, 끊어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적는 이도 있고, ‘지는 경기’, ‘괜한 배려처럼 마음속 바람을 적는 이도 있습니다. 왠지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 같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기도 하고, 옥상에 꾸며진 정갈한 분위기의 정원은 동네사람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기도 해서 절연이라는 어감과는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지곤 합니다.

 

다섯 명의 화자가 번갈아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그들은 제각각 사람과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멋대로 헤집고 긁어대는 타인의 시선과 해석 때문에 불편함을 느낀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습니다.

이혼한 아내가 재혼해서 낳은 아이를 키우는 홀아비도리, 5살에 부모를 잃고 피한방울 안 섞인 도리와 5년째 살고 있는 의붓자식모네, 22년 전 죽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노처녀모모코, 여자에게 동성 애인을 빼앗겨버린 게이, 우울증에 걸려 직장까지 그만둔 뒤 부모에게 빌붙어 살며 연인과도 불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백수모토이.

 

이들 중 누군가는 자신의 상처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평생 그 상처를 끌어안은 채 살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람들은 의심스러운 홀아비’, ‘남자를 거부하는 노처녀’,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게이’, ‘우울증에 걸린 백수’, ‘불쌍한 의붓자식등 제멋대로의 시선과 해석을 공공연하게 던지곤 합니다.

하지만 상처투성이 주인공들은 절연신사와 옥상 정원에서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따뜻한 교류를 나누는 가운데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해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되찾아갑니다. 그리고 신사의 부적함에 자신이 진정으로 끊어내고 싶었던 것들을 적은 가타시로를 집어넣곤 자신을 위한 절실한 기도를 올립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불쌍해 보일 수도 있지만, 편하고 좋을 때도 있어. 너도 갖고 있는 무언가 때문에 힘들면 끊어 버리는 건 어때?” (p261)

 

우릴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그 사람들 해석이고, 너랑 내가 무엇일지는 너랑 내가 결정하면 돼.” (p274)

 

따뜻하고 밝은 스타일의 전형적인 일본소설이지만 억지스런 해피엔딩으로 이끌지도, 부자연스러운 감정의 해소를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내 인생은 내 거니까 내가 알아서 설계할 거야. 그러니 누구도 함부로 끼어들지 마!”라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여운을 남깁니다. 그런 면에서 절연신사를 매개로 인연을 맺은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나름의 출구를 찾아가는 이야기이자 동시에 무엇을 지킬 것인가,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밝은 분위기의 작품이지만 나기라 유 특유의 감성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어서 무척 좋았습니다. 아직 소개되지 않은 그녀의 작품들이 한국에 좀더 많이, 자주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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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료시카의 밤
아쓰카와 다쓰미 지음, 이재원 옮김 / 리드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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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한국에 처음 소개돼 호평을 받은 단편집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는 읽지 못했지만 샤센도 유키와 함께 집필한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이후 두 번째로 만난 아쓰카와 다쓰미의 단편집입니다.

 

코로나 시국을 배경으로 소재도 서사도 독특하기 이를 데 없는 네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습니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본격 미스터리로 주요 무대가 헌책방인 위험한 도박-사립탐정 와카쓰키 하루미’, 한 대학이 입시 논술시험을 미스터리 지문을 읽고 범인 맞히기로 치르기로 하면서 벌어진 갖가지 소동을 그린 ‘2021년도 입시라는 제목의 추리소설‘, 연이어 상황이 바뀌고 반전이 거듭되는 양파 같은 미스터리 마트료시카의 밤‘, 그리고 한 대학 레슬러가 살해당한 살벌한 사건을 다루면서도 코믹한 전개와 캐릭터들 덕분에 웰메이드 B급 영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던 ’6명의 격앙된 마스크맨등입니다.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마지막 장을 덮고 남은 인상은 이 작가의 천재성을 따라가기엔 내가 너무 역부족이다.”입니다. 읽는 동안 몸과 마음이 피로감을 느낄 정도로 몰입해야만 했는데, 한순간만 방심하면 미스터리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눈앞의 활자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대혼란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거꾸로 말하면 그만큼 복잡하고 현란하지만 정교하게 설계된 미스터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이 작품에서 그 내용이 소개되거나 오마주의 대상이거나 인용의 출처로 거론된 수많은 명작 미스터리의 목록은 아쓰카와 다쓰미의 해박하고 방대한 지식과 독서이력을 잘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큰 부담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뭐랄까, 살짝 짓눌린다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아무래도 본 내용과 관련 있는 텍스트들이라 더 신경 쓰면서 읽어야만 했는데, 읽어본 작품이거나 낯익은 작가가 아닌 경우에는 꽤나 난감해지곤 했습니다.

 

내용보다는 작가에 대한 비평같은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다만 이런 느낌을 받은 이유는 작품 자체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아쓰카와 다쓰미의 미스터리를 감당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독자라면 앞으로도 내내 찐팬이 되어 그의 천재성을 만끽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론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를 담은 첫 번째 수록작 위험한 도박-사립탐정 와카쓰키 하루미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캐릭터, 무대, 미스터리 그리고 짜릿한 반전까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인데, 비록 아쓰카와 다쓰미가 제 취향과 살짝 거리가 있는 작가라는 걸 알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스타일의 작품이 나온다면 꼭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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