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붕어 룰렛
오윤희 지음 / 팩토리나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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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문회사 간판을 걸곤 일반인을 상대로 거액의 코인사기를 치던 정상구가 길거리에서 살해당하자 경찰은 사기 피해자의 복수로 여기고 수사에 나섭니다. 하지만 사기 피해자 대부분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사건을 맡은 강력반 팀장 이준현과 신참 김도윤의 탐문은 별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인물이 유력한 용의자로 대두되지만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서 수사는 또다시 막다른 벽에 부딪힙니다. 더구나 사건 관련자 중 한 명이 살해당하고 그 역시 정상구처럼 사기 행각을 벌였던 사실이 밝혀지자 이준현은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 가능성을 떠올리며 사기 피해자들을 더욱 집요하게 탐문하기 시작합니다.

 

사기를 친 자사기를 당한 자가운데 누가 더 나쁜 사람일까요? 누가 더 돈에 대한 욕망이 강렬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본문 속 배가 터져 죽는 줄도 모르고 주는 대로 계속 먹이를 받아먹는 금붕어라는 표현은 사기를 친 자사기를 당한 자가운데 누구에게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일까요?

 

금붕어 룰렛은 돈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거기에서 비롯된 지독한 악의와 증오를 그린 살인사건 미스터리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뼈대는 팩트를 기반으로 한 르포에 더 가깝습니다. 사기를 당한 자가 더 멍청하고 사악하다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사기꾼들, 간절해서든 탐욕스러워서든 공짜로 일확천금을 노리다가 사기꾼의 덫에 걸린 걸 깨달은 뒤에야 자탄에 빠지는 피해자들, 그리고 이들의 진술을 들으며 도대체 누가 더 나쁘고 탐욕스러운 건지 판단하는 것조차 어려워진 수사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사실적이어서 소설이 아니라 르포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듭니다.

 

작가는 선한 피해자악한 가해자라는 이분법 대신 실은 그들이 품고 있는 욕망이란 게 알고 보면 데칼코마니처럼 꼭 닮은꼴이란 점을 강조합니다. 즉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든 사기 피해자들이든 달콤한 말로 상대를 속여 피 같은 돈을 갈취하고도 조금도 죄의식을 못 느끼는 사기꾼이든 노력 없이 돈을 벌고 싶어 한 죄는 마찬가지란 뜻입니다. 말하자면 양쪽 모두 배가 터져 죽는 줄도 모르고 주는 대로 계속 먹이를 받아먹는 금붕어라는 비난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게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느껴진 점입니다.

 

삼개주막 기담회 시리즈등 여러 작품을 내놓은 작가답게 문장과 구성은 무척 안정적이지만, 코인사기를 소재로 한 반전 충만한 사회파 미스터리를 기대했던 탓인지 정직한 돌직구에 가까운 르포 스타일의 서사는 다소 아쉽게 읽혔습니다. 상당한 분량이 피해자들이 얼마나 절박한 사연을 갖고 있었는지, 그래서 어떻게 사기꾼의 꾐에 그리 쉽게 넘어가게 됐던 건지에 할애됐는데, 실은 그리 새로울 것도 없고 뉴스를 통해 수없이 들어온 익숙한 사연들이라 긴장감을 고조시키진 못했습니다. 미스터리를 위해 꼭 필요한 재료들이긴 했지만 조금은 과해 보였다고 할까요? 수사를 맡은 이현준과 김도윤 콤비의 역할이 비슷비슷한 탐문의 반복에 그치고 만 건 르포 스타일이라는 구조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역시 아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나 사기 관련 뉴스를 보며 어떻게 저런 거에 속아 넘어가?”라며 혀를 끌끌 찬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금붕어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탐욕은 언제라도 마음속 어딘가에 위험천만한 균열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며 그 균열은 언제든 한 인간을 뉴스 속 멍청한 피해자로 돌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금붕어 룰렛의 가장 큰 미덕은 그런 상황에 대한 강력한 경고장이자 명확한 지침서라는 데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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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 1928, 부산
무경 지음 / 나비클럽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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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경성에서 작은 다방 흑조를 경영하는 천연주는 손님들이 가져오는 온갖 기이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깁니다. 때론 그 답례로 자신이 추리한 이야기 이면의 진상을 들려줘서 손님들을 놀라게 만들곤 했는데, 그 일이 소문이 나면서 요즘은 커피보다 다른 볼일로 흑조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탐정으로 여기진 않습니다. 그저 관심이 가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흥미롭습니다.”라는 한마디와 함께 그 이면의 진상을 나름대로 짐작해볼 뿐입니다. 그런 그녀가 부산 동래온천에서의 요양을 위해 수행원 두 명을 데리고 경부선 열차에 올라탑니다. 그리고 그 여정 중에 구포, 동래, 부산에서 마치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만 같은 기이한 이야기들과 마주칩니다.



무경은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난 작가인데, 출판사의 가제본 서평단 공지를 보고 인터넷서점에서 검색해보니 계간 미스터리(2023 가을호) 신인상을 수상했고 ‘1929년 은일당 사건 기록으로 호평을 받은 작가라 급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또한 기이한 이야기를 듣고 그 진상을 추리한다는 설정이 제 최애작 중 하나인 미야베 미유키의 미시야마 변조괴담 시리즈와 닮은꼴이란 점도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부산이라는 무대가 먼저 눈길을 끌었지만 역시 이 작품에서 가장 기대가 된 건 주인공의 캐릭터입니다. 어마어마한 부자인 친일파 아버지 때문에 천연주와 센다 아카네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된 그녀는 여고시절부터 다른 사람들이 들려주는 기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으며, 특유의 촉을 발휘하여 그 이야기 이면의 진상을 추리하곤 했습니다. 밝고 쾌활하며 행동력까지 갖춘 천연주의 삶을 요동치게 만든 건 2년 전 온몸에 심각한 화상을 입힌 화마였습니다. 수행원의 부축 없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된 그녀는 약간의 충격에도 솟구쳐 오르는 고통에 절망했고, 그렇게 피폐해진 몸은 그녀에게서 표정과 감정마저 앗아갔습니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즐거움은 흑조를 찾은 손님들에게서 기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이상해야 할 이유가 있기에 이상해 보이는 것이다.”라는 옛 친구의 말을 가슴에 품은 채 그 이상함의 이면을 짐작하는 일에 몰두하곤 합니다. 셜록 홈즈처럼 눈에 보이는 단서만으로 상대의 신분이나 처지를 간파해내는 그녀를 사람들은 요괴 사토리’(사람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읽어내는 요괴)라고 부르기도 하고, 화상을 가리기 위한 검은 옷과 그에 대조되는 창백한 피부의 조합 때문에 인간이 아닌, 그저 인간을 닮았을 뿐인 다른 존재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연도 많고 캐릭터도 독특한 천연주가 아버지의 지시로 동래온천에서의 요양을 위해 경부선에 올라타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마담 흑조는 매구의 이야기를 듣는다

죽은 개를 여우가 물고 갔다.”라는 소문이 퍼지자 개의 주인인 일본인 지주는 여우 소탕령을 내립니다. 부산을 코앞에 두고 우연히 구포에 머물게 된 천연주는 그 소문에 의심을 품곤 개의 죽음과 그 이면의 진상을 파헤치기로 결심합니다.

 

마담 흑조는 감춰진 마음의 이야기를 듣는다

동래온천 스미레장()에 투숙한 천연주는 예기치 못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됩니다. 자칫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은 천연주의 추리로 가까스로 해결됩니다.

 

마담 흑조는 지나간 흔적의 이야기를 듣는다

부산에서 고교 선배 채상미를 2년 만에 만난 천연주는 그녀가 무척 곤란한 상황에 빠졌음을 감지합니다. 누군가에게 미행당하는 게 분명하다고 호소하는 채상미를 위해 천연주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기발한 계획을 세웁니다.

 

잔인하거나 복잡한 사건들은 아니지만 천연주의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매 수록작마다 크고 작은 반전의 묘미도 맛볼 수 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상을 사건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 넣은 대목들이나 당시 부산과 그 일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낸 장면들도 읽는 내내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덕분에 작가의 전작에도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또한 (후속작에서 그 정체가 밝혀질 것으로 보이는) 천연주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두 사람 - 천연주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과외선생, 천연주와 비슷한 감성을 지녔던 여고시절 친구 선화 - 의 과거와 현재도 궁금해졌는데, 그들이 등장할 사건은 무게감이나 밀도가 남달라서 천연주의 현재의 삶을 크게 뒤흔들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게 읽고도 별 4개에 그친 건 임팩트 있는 한 방이 부족해보였기 때문인데, 천연주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사건이든 감정이든 조금은 더 세고 독한 전개가 펼쳐지기를 기대해봅니다. 이런 기대를 하는 이유는 모처럼 롱런 시리즈를 이끌 만한 매력적인 주인공을 발견한 반가움 때문입니다. 사심 가득한 바람이지만 마담 흑조천연주의 이야기가 미시마야 변조괴담 시리즈만큼 오래도록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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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 (출간 40주년 기념 특별판)
윤흥길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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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리(현재 전북 익산시 일부) 외곽의 이곡리. 벼락졸부인 최사장은 저수지 사용권을 따낸 뒤 그 관리를 동네건달 임종술에게 맡깁니다. 애초 일이란 걸 할 마음이 없던 임종술이었지만 완장을 차게 해준다는 말에 솔깃해선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스스로 감독이라고 적힌 완장을 만들어 찬 임종술은 그날 이후 저수지 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동네 안팎에서 완장의 위용을 거들먹거리며 유세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어느 새 완장의 권력에 푹 빠져든 임종술은 저수지가 자신의 것이라도 된 양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기 시작하고, 가뭄으로 인해 저수지의 물을 빼기로 한 마을의 결정조차 거부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완장의 위용은 균열을 일으키며 파국을 향하고 있었지만 임종술의 욕망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책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그 제목만은 한두 번쯤 들어본 적 있는 윤흥길의 완장1983년 첫 출간된 이후 5판인 출간 40주년 기념 특별판으로 다시금 독자를 찾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언젠가는 꼭 한 번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던 작품인데, 뒤늦게나마 40주년 특별판으로 읽게 돼서 마치 오랫동안 밀린 숙제를 마친 듯한 개운함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단 두 글자의 제목이지만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완장은 그 자체로 강렬한 이미지를 품은 단어입니다. 공포와 굴복을 강요하는 가공할 폭력성을 상징하기도 하고 완장이라도 찼냐?”라는 흔한 비아냥처럼 한줌도 안 되는 권력에 대한 냉소를 은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 차보고 싶은 욕망을 누구에게나 불러일으키는 요망한 물건이기도 합니다.

건달에 한량인 임종술은 잠시지만 서울에서 험난한 생활을 하는 동안 그 완장의 힘에 수차례 짓눌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쥐꼬리만한 월급의 저수지 관리인이라는 제안에 격분하다가도 완장이란 말을 듣는 순간 앞으로 자신이 거머쥐게 될 권력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자비를 들여 만든 완장을 찬 그 순간부터 임종술의 세상은 그 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신세계로 급변했고, 하루하루 커져가는 권력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며 도취하는 것은 물론 광대한 저수지가 마치 자기 소유의 땅이라도 되는 양 열광하게 된 것입니다.

 

완장의 진짜 이야기는 임종술의 권력이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는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본분을 망각한 탐욕, 스스로 초래한 위기, 빼앗기지 않으려는 발버둥,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선택한 위험천만한 정면 돌파, 그리고 예정된 파국에 이르기까지 임종술의 짧은 연대기는 허망한 권력을 탐하다가 몰락해간 유명한 인물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완장의 진짜 미덕은 임종술의 비극이라는 줄거리 자체보다 그 과정을 그려낸 풍자와 해학의 서사에 있습니다. “권력을 희화화하고, 희화화된 권력을 취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주인공을 내세워 권력을 더욱 풍자하는 격이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완장은 정색하고 주제를 강요하는 고발물이 아니라 과거 종이신문의 4단 만화처럼 독자로 하여금 폭소와 냉소를 번갈아 만끽하게 하는 풍자극이자 해학극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이 풍자와 해학은 훨씬 더 예리하고 날카로운 비판의 칼을 지니고 있어서 작가가 임종술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주제를 좀더 생생하게 맛볼 수 있게 해줍니다.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아 마구 꼬집고 할퀴고 옆구리와 발바닥을 간질임으로써 우스꽝스런 꼬락서니로 짓뭉개놓았노라고 생각했을 때의 그 쾌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3판 작가의 말’)

 

주인공 임종술은 악당이 아닙니다. 물론 평범한 인물도 아니긴 하지만 완장과 권력을 향한 그의 욕망은 누구라도 품을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고 손에 넣은 것들을 지키려는 발버둥 역시 자연스러운 대응일 뿐입니다. 누구도 그의 욕망과 발버둥을 비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완장을 채워주겠다고 했을 때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바꿔 말하면 누구라도 임종술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작가가 완장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역시 임종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당신도 언제든 완장을 찰 기회가 온다면 임종술이 될 수 있다.”가 아닐까요?

 

얼마 후면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코미디에 가깝지만 정치인들이 상대방을 비난할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가 완장입니다. 완장 같은 거엔 관심도 욕심도 없다는 뻔한 거짓말을 하면서도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완장을 찬 채 권력을 누리고 탐하는 게 자신들이라는 걸 망각한 듯 말입니다. 문득 그들이 윤흥길의 완장을 읽는다면 어떤 독후감이나 서평을 내놓을지 궁금해집니다. 대부분 나는 임종술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겠지만, 적어도 활자로 인쇄된, 그래서 안 보려야 안 볼 수 없는 당연한 교훈만큼은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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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록
프리키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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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국적 불명의 필명을 쓰는 한국 장르물 작가들이 부쩍 늘었는데 좀 비뚤어진 편견이긴 하지만 그런 작가의 작품은 무슨 이야기인지 관심은커녕 아예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읽게 된 건 우연히 발견한 홍보카피의 한 줄 - “브릿G에서 100편이 넘는 단편소설을 공개하고 있는 필명 프리키” - 때문입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저의 편견을 어느 정도는 불식시킬 만큼 충분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카피였고, 그래서 첫 수록작만이라도 일단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기생록의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장르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집이라는 출판사 소개대로 수록된 여섯 편은 미스터리, 스릴러, SF, 호러, 판타지 등 각기 다른 장르의 서사를 선보입니다. 100% 현실에 충실한 이야기는 단 한 작품뿐이고 그 외엔 캐릭터든 소재든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빚어낸 독특한 설정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아주 간략하게 수록작들을 소개하면...

 

국가생명연구소

상대를 죽여야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처지에 처한 두 남녀, 그리고 이들을 협박하며 살상극을 벌이는 정체불명의 복면남 등 긴박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 진동하는 살육극.

 

이웃을 놀라게 하는 법

자신을 무시하는 이웃을 놀라게 하려던 가벼운 장난이 돌이킬 수 없는 악몽으로 변하고 마는 미스터리 소동극.

 

이 안에 원귀가 있다

부모와 함께 살해당한 뒤 원귀가 된 남자가 게임을 통해 복수를 도모하는 호러물.

 

소녀 사형집행관

살인을 저지른 촉법소년이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비밀기관에 갇힌 채 사형집행관이라는 임무를 맡아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는 처벌을 받는다는 이야기.

 

괴물 사냥꾼

인체실험의 실패로 탄생한 돌연변이 괴물과 그 괴물들을 퇴치하기 위해 파견된 요원의 이야기를 그린 SF 스릴러.

 

기생록

혐오스런 외모와 왜소한 몸집 때문에 평생을 왕따로 살아온 한 남자가 정체불명의 존재와 만난 뒤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호러 판타지.

 

개인적으론 잔인한 살육극을 마지막까지 긴장감 있게 그린 국가생명연구소’, 기노시타 한타의 악몽의 엘리베이터를 떠올리게 한 미스터리 소동극 이웃을 놀라게 하는 법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아무래도 현실감 있는 캐릭터와 스토리를 좋아하다 보니 이 두 작품이 가장 눈에 띄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괴물 사냥꾼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대놓고 대중적인 이야기로 만들었다면 훨씬 더 알찬 작품이 됐을 것 같았고, 촉법소년을 등장시켜 기대가 컸던 소녀 사형집행관은 마무리가 다소 맥이 빠져서 아쉬웠습니다. 그 외에 호러와 SF 작품들은 소재 자체는 흥미로웠지만 구성과 전개가 선명하지 않거나 살짝 억지스럽게 느껴져서 좀처럼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과도한 멋부림과 사족 때문에 스토리가 손해를 본 느낌이라고 할까요?

 

장르의 종합선물세트로서의 매력을 갖춘 건 분명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만족감보다 아쉬움이 더 많이 느껴져서 좀 야박한 평점을 주고 말았습니다. 이 작품은 독자에 따라 수록작마다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입니다. 호러 판타지나 SF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저와는 정반대의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독자들의 의견이 무척 궁금해진 작품인데, 서평을 마치는대로 인터넷서점과 SNS에서 기생록을 다시 한 번 검색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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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무녀전 조선의 여탐정들
김이삭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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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궁녀였지만 절친의 참혹한 죽음에 충격을 받고 궁을 나와 무당골에 은신한 뒤 탐관오리에게 사기를 치며 살아가는 신기 없는 무녀무산, 서자라는 처지에 신내림까지 받아 남들이 듣거나 보지 못하는 것을 듣고 보는 능력을 갖게 된 설랑, 앞 못 보는 무당이지만 특유의 친화력으로 여러 가지 정보를 손에 넣는 돌멩 등 범상치 않은 세 사람이 이끌어가는 역사추리소설입니다. 도성과 경기 일대에서 발생한 괴력난신, 즉 복수와 저주를 대신해준다는 두박신의 정체를 알아내라는 밀명을 받은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진실에 다가갈 기회를 잡지만 그때부터 사람들이 연이어 죽어나가는 등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합니다.

 

야박한 평점을 주긴 했지만 우선 이 작품의 미덕부터 소개해보겠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인물들의 캐릭터입니다. 신기 없는 무녀, 신내림 받은 서자, 앞 못 보는 무당 등 세 명의 주인공은 과거의 이력은 물론 현재의 처지나 성격, 그리고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는 재능 등 모든 면에서 매력적으로 설정된 인물들입니다. 특히 감찰궁녀였다가 자진해서 궁을 나온 뒤 사이비 무녀가 된 무산은 시리즈물 주인공에 어울리는 매력과 카리스마로 중무장하고 하고 있어서 반강제로 떠맡게 된 두박신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지 사뭇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인공들을 돕는 조연들 역시 다양한 계층과 신분을 갖고 있는데다 개성도 강해서 흥미를 유발하는데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여러 번 놀랄 만큼 꼼꼼하고 세세했던 고증도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입니다. 무당 혹은 무격에 관한 폭넓고 깊은 자료조사의 흔적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고, 방대한 지식 없이는 불가능한 조선시대 초기 여러 공간에 대한 묘사 역시 감탄을 자아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와 디테일한 고증 등 화려한 재료들에도 불구하고 야박한 평점을 준 가장 큰 이유는 이야기 자체가 그 재료들의 맛을 살려내지 못할 만큼 산만하고 모호했기 때문입니다. 470여 페이지의 적지 않은 분량 속에서 무산 일행은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 조사를 벌이고, 때론 살인사건과 마주치기도 하고, 심지어 살해될 위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우여곡절 중 선명하게 읽힌 대목은 별로 없습니다. 두박신 조사가 살인사건 수사로 비화하더니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다가 맥이 툭 끊어지고 맙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무산과 그 일행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애초 그들의 목표가 무엇이었던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는 활인원 한증소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활인원은 이 작품에서 꽤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하는데, 저는 활인원에서 벌어진 일들 가운데 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곳의 인물들은 너무 단편적으로만 소개됐고 정체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퇴장하거나 죽어버리곤 합니다. 사건 역시 뜬금없이 벌어졌다가 흐지부지됐고 범행동기도 방법도 불분명하게 마무리됩니다. 그 와중에 무산 일행은 그저 이리저리 휩쓸려만 다닐 뿐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뭘 얻어낸 건지, 뭘 해결한 건지도 알 수 없으니 사건이 마무리 된 후 무산 일행이 품은 짙은 회한과 분노에 공감하기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평을 보니 대체로 호평 일색이었는데, 그렇다면 제가 오독의 우를 범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서평을 쓴 뒤 별도로 대략의 줄거리를 정리해놓곤 하는 제가 무산의 행보만이라도 정리해보려다가 포기한 걸 보면 100% 오독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독의 우를 확인하기 위해 감찰무녀전을 다시 읽는 건 어려울 것 같지만,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저의 야박한 평점보다는 다른 분들의 호평에 귀를 기울여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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