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의 살인자
시모무라 아쓰시 지음, 이수은 옮김 / 창심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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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화장실에서 6세 소녀를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이 고교생으로 밝혀지자 일본 전역은 경악합니다. 이후 소년A라는 익명으로만 보도되던 범인의 이름 오오야마 마사노리가 한 주간지를 통해 공개됩니다. SNS에서는 범인 본인은 물론 그의 가족과 주거지를 추적하는 광기 서린 폭주가 이어집니다. 그런 와중에 상상치도 못한 피해를 입은 자들이 나타납니다. 바로 범인과 이름이 똑같은 여러 명의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입니다. 단지 이름이 같을 뿐이라고, 기분이 좀 나쁠 뿐이라고만 여겼던 그들은 실제로 자신에게 크고 작은 피해가 벌어지자 격분합니다. 그리고 불과 7년 후 범인이 만기출소하면서 그 이름이 다시 언론에 회자되자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은 동성동명 피해자 모임을 결성하고 진범의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기로 결심합니다.

 

대부분의 이름이 세 글자뿐인 한국에는 워낙 동성동명인 경우가 많아 이 작품의 설정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실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유명한 사람과 같은 이름을 가진 경우 보통사람은 알 수 없는 불편함을 안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 유명 드라마의 주인공과 (성은 달랐지만) 이름 두 글자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난감한 상황에 처한 적이 종종 있었는데, 만일 연쇄살인범이나 온 국민의 지탄을 받는 인물과 이름 석 자가 모두 같다면 그 난감함과 불편함은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프로축구 선수를 꿈꾸는 유망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야간고등학생, 건실한 영업사원, 개인 과외교사, 만화와 게임에 빠진 오타쿠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오오야마 마사노리들6세 소녀 살인사건의 범인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크고 작은 좌절을 겪게 됩니다. 주위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은 말할 것도 없고, 인생의 진로가 완전히 틀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저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잊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후 범인이 만기출소하면서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의 인생은 또다시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제안으로 동성동명 피해자 모임을 결성하기에 이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는 살인범과 이름이 똑같다는 이유로 현실과 SNS에서 놀림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동성동명 등장인물들이 겪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그려나간다.”라고 돼있는데, 작품 속 여러 명의 오오야마 마사노리들이 겪는 건 단지 놀림과 조롱이 아니며 이야기 역시 결코 흥미롭거나 가볍지 않습니다. 진범을 찾아내 얼굴을 공개함으로써 자신들이 살인마 오오야마 마사노리가 아님을 입증하고 싶을 정도로 그들의 삶은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SNS의 마녀사냥은 그칠 줄 모르는데다 부정확한 정보로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는 일까지 반복되면서 그들은 마녀사냥이 언제든 자신을 향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사실 초반만 해도 무슨 이야기로 4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채우려나?”라는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진범을 찾아내 얼굴을 공개하겠다!”는 피해자 모임의 목표도 단선적으로 보였고, 이야기를 풍성하게 채울 재료들도 딱히 충분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같은 이름을 가진 여러 인물이라는 점을 잘 활용하여 예상치 못한 트릭과 반전을 수시로 끌어냅니다. 또한 피해자 모임 내부에도 시한폭탄 같은 장치를 심어놓아 서로를 100% 믿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막판에 이르러 거듭된 반전을 통해 독자를 이리저리 뒤흔들면서 앞선 페이지들을 다시 들춰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앞서 한국에 소개된 시모무라 아쓰시의 전작 시체 찾는 아이들생환자를 모두 읽었지만 이만한 트릭과 반전을 맛본 적이 없어서 무척 의외였고 놀라웠습니다. 아이디어와 서사 모두 기발하고 탄탄해서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검색해보니 일본에서 모두 23편의 작품을 출간한 걸로 나오는데 어쩌면 아직 한국에 그 진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작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머잖아 그의 또 다른 작품이 한국 독자들을 찾아오기를 기대해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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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 마을에서
사노 히로미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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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이와타의 조사원인 마사키는 보육원에서 갓 독립한 소녀 마키와 함께 하토하 지구라는 부유한 마을로 향합니다. 19년 전 하토하 지구에서 살다가 자신을 보육원에 맡기곤 갑자기 실종돼버린 가족을 찾아달라는 마키의 요구 때문입니다. 얼마 전 보육원을 나오자마자 가족 찾기에 나섰던 마키는 가까스로 어머니 료코와 절친이던 변호사 이와타를 찾아냈고, 이와타는 왠지 껄끄러워 하면서도 마사키에게 마키를 도우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사키와 마키가 찾아간 하토하 지구는 외부인에게 지독히도 폐쇄적인 것은 물론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마을에서 실종사건 같은 건 없었다고 잡아뗍니다. 즉 마키의 가족은 19년 전 자발적으로 마을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사키와 마키가 당시 이웃이던 기모토 지하루와 접촉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하고, 그때부터 두 사람을 향한 마을 전체의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됩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의 세부 장르는 동조 압력 미스터리입니다. 즉 그것이 잘못된 일이나 생각임을 알면서도 동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집단 심리에 휘둘린 끝에 심각한 오판을 저지른 자들을 다룬 미스터리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다니던 자동차 회사의 결함 은폐를 알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눈감아버렸던 마사키, 학폭 피해자가 되기 싫어서 가해자 편에 섰다가 참혹한 비극을 맞이하고 만 마사키의 딸 에리, 업계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진실 찾기를 포기했던 변호사 이와타, 그리고 죽은 아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에서 계속 살기 위해 이웃의 비극에 눈감았던 기모토 지하루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대부분이 이른바 동조 압력의 피해자들이자 동시에 공범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현재의 이야기로, 19년 전 벌어진 마키 가족의 실종을 조사하는 마사키의 행보이고, 또 하나는 과거의 이야기로, 22년 전 유치원생 아들 다카유키가 납치 살해된 시점부터 19년 전 마키의 가족이 옆집으로 이사 온 뒤 실종되기까지의 사건들을 1인칭 시점으로 설명하는 기모토 지하루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현재 시점의 하토하 지구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22년 전의 유치원생 납치살해, 19년 전의 일가족 실종, 현재의 사건 등 모두 세 개의 사건이 등장하는데, 이 사건들은 하토하 마을에서 벌어졌다는 공간적 공통점뿐 아니라 실은 모두 동조 압력이라는 집단 심리에 의한 것이라는, 즉 크게 보면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는 비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작품 속 하토하 지구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기이한 마을입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남편, 전업주부이자 현모양처인 아내, 자녀는 둘 이상!”이라는 입주조건은 말할 것도 없고, 방범대를 조직하고 외부인에게 철저히 배타적인 것은 물론 마치 집단 세뇌에 걸린 사람들처럼 획일적인 사고와 행동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기 때문입니다. 마을의 지향점에 동조하지 않는 자에겐 노골적인 왕따를 퍼부어 굴복시키거나 떠나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로든 이 마을에 남아 살아가는 자들은 이런 기이함을 당연한 일인 듯 받아들이며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마을에서의 삶을 긍정적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맹신과 동조가 마을 내부에서 벌어진 잘못된 일마저 오판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을에 납치살해범이 있을 리 없다!” “우리 마을에서 실종사건 같은 건 절대 벌어질 리 없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20여 년에 걸친 끔찍한 비극들이 양산된 것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무척 좋아해서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왔지만, 동조 압력이라는 쉽지 않은 소재를 여러 가지 사건과 잘 엮어냈다는 점에서 누군가 이 마을에서는 오래 기억에 남을 개성 넘치는 작품입니다. 서론이 다소 길어 보였고, 하토하 마을의 비현실성이 자꾸만 발목을 잡은 점 때문에 별 1개를 빼긴 했지만,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긴 점도 이 작품의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만약 내가 하토하 마을에 살았더라면, 또 만약 내가 동조 압력의 부담을 이겨내지 못한 여러 인물들의 처지에 있었더라면 과연 나는 어떤 선택과 행동을 했을까?”라는 자문이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계속 뇌리에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노 히로미는 한국에는 처음 소개된 작가지만 후속작이 출간된다면 꼭 찾아서 읽어보려고 합니다. 이왕이면 마사키-이와타 콤비가 다시 한 번 활약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라면 좋겠지만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더라도 나름 기대되는 바가 큰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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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여름
소메이 다메히토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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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마모루는 지방도시의 사회복지사로 근무 중인 26세의 공무원입니다. 생활보호대상자를 선정하고 부정수급자를 가려내는 고된 업무를 근근이 이어나가던 마모루는 어느 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선배 사회복지사 다카노가 약점을 지닌 여성 생활보호대상자를 협박하여 육체관계는 물론 돈까지 뜯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한편 도쿄에서 사고를 치고 지방도시로 쫓겨난 야쿠자 가네모토 역시 다카노의 비리를 알게 되는데, 그는 다카노를 이용하여 큰돈을 벌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면서 가네모토의 계획은 어그러질 상황에 처하고 마모루의 운명 역시 급격한 혼란에 휩싸이고 맙니다.

 

일가족을 살해한 18세 살인범의 도주극을 그린 정체’(한국 출간 2021)를 통해 한국 독자와 처음 만났던 소메이 다메히토가 37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우수상 수상작이자 자신의 데뷔작인 나쁜 여름으로 다시 한국 독자를 찾았습니다.

정체를 읽고 쓴 서평에 정갈하고 정성이 깃든 문장들과 인물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 작가의 진심이란 표현을 썼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던 터라 그의 데뷔작을 꼭 읽고 싶었는데, 역시 이번에도 기대한 만큼의 만족스러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다소 극단적인 사례 같기는 해도 사회복지, 특히 생활보조금을 둘러싼 갖가지 사건과 사고를 다루고 있어서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로 분류되겠지만, 소메이 다메히토는 거기에다 소네 케이스케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을 연상시키는, 웃을 수도 찌푸릴 수도 없는 희비극이자 폭주에 가까운 군상극의 미덕을 섞음으로써 독특한 장르물을 완성시켰습니다.

 

생활보호대상자를 선정하고 부정수급자를 가려내는 사회복지사, 말도 안 되는 변명과 핑계를 대며 부정하게 생활보조금을 타내면서도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간망종들, 그리고 사회복지시스템의 작은 균열을 이용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야쿠자 등 나쁜 여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생활보조금의 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동시에 실제로 복지의 혜택이 필요한 사람들이 정작 사각지대로 밀려나는 모습이라든가 정책 자체는 훌륭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묘사한 대목들은 그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적 없는 독자에게 꽤 큰 경종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매력은 사회복지라는 거창한 주제가 아니라 서로 속고 속이는 것을 넘어 이기심을 위해서라면 최악의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망종들의 먹고 먹히는 쇼에 있습니다. 아마 영화로 만들면 숨 쉴 틈조차 없을 정도로 폭주하면서도 흥미진진한 B급 영화의 미덕을 만끽할 수 있는 명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일본 영화감독 소노 시온의 지옥이 뭐가 나빠를 아는 독자라면 어떤 느낌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막판 클라이맥스는 피와 흉기가 난무하는 끔찍한 비극의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웃는 것까지는 어렵더라도) 왠지 희극의 냄새가 더 강하게 풍기는 묘한 감정을 느끼게 만듭니다.

 

정체나쁜 여름모두 적잖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이지만 소메이 다메히토는 비중이 적은 단역이나 조연조차 독자에게 그 존재의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이야기 속에 확실히 녹여냅니다. 자칫 우왕좌왕할 수 있는 복잡한 구도를 개성 넘치고 명확한 캐릭터를 지닌 인물들을 통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컨트롤한다고 할까요? 그래선지 다음에 만날 그의 작품 역시 희극이자 비극이면서 통렬한 군상극이기를 바라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모두 8편의 작품을 출간했는데, 그의 나머지 작품들도 머잖아 한국에 모두 소개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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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마물의 탑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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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모토로이 하야타는 1945년 패전 후 국가 재건을 위한 노동의 최전선에 몸담기로 결심합니다. 처음 향했던 곳은 탄광이었지만 노동의 보람을 느끼기도 전에 끔찍하고 기괴한 연쇄살인사건을 겪은 탓에 이내 행로를 바꿉니다. 그의 선택은 항로표식 직원, 즉 등대지기입니다.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등대정신을 실천하던 하야타의 두 번째 부임지는 험준하기로 소문난 고가사키 등대. 그런데 도착과 동시에 하야타는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길함을 감지합니다. 등대 앞의 바다에 솟아오른 거대하고 날카로운 바위, 하얀 마물을 닮은 듯한 등대, 그 등대 앞에 배를 대기 두려워하는 어부, 그리고 등대 위에 서있던 사람을 닮은 기이한 존재 등 모든 것이 불온해보였기 때문입니다.

 

검은 얼굴의 여우이후 3년 반 만에 출간된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편이 탄광을 무대로 괴담이 가미된 미스터리를 다뤘다면 하얀 마물의 탑은 등대와 그 일대를 무대로 한 정통 호러물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호러와 미스터리가 적절히 조합된 경우를 좋아해서 도조 겐야 시리즈노조키메같은 작품을 손에 꼽는 편인데, 전작인 검은 얼굴의 여우가 다소 밋밋한 호러 설정 때문에 아쉬움을 남긴 반면 하얀 마물의 탑은 미쓰다 신조의 장기가 제대로 배어있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거친 파도와 짙은 안개와 험준한 지형 때문에 더 위압적으로 보이는 고가사키 등대가 주 무대지만, 초반 1/3은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하야타가 겪는 기이하고 믿을 수 없는 괴현상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등대 앞에 내려주기를 거부하는 어부, 등대까지의 길안내를 약속해놓고 사라져버린 마을사람, 밀림을 방불케 하는 숲을 지나는 동안 하야타의 뒤를 따라오는 듯한 하얀 마물, 그리고 인적 하나 없는 숲속에 자리한 기괴한 분위기의 오두막 등 하야타는 등대에 도착하기도 전에 숱한 괴현상들을 체험합니다. 가까스로 등대에 도착하지만 하야타는 숲에서 목격한 하얀 마물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하야타를 더욱 놀라게 한 건 고가사키 등대를 책임지고 있는 등대장 이사카 고조가 20년 전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굳이 비율로 따지자면 호러가 80%, 미스터리가 20% 정도로 배합돼있습니다. 20년의 시차를 두고 하야타와 이사카가 겪은,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똑같은 경험들의 실체를 파악하는 미스터리가 깔려있긴 하지만, 서사의 중심은 제목 그대로 하얀 마물이며 마지막 반전에 이르기까지 호러의 미덕에 충실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해운산업의 부흥을 위한 근대적 시설인 등대와 아직도 전근대적인 기운이 만연해있는 등대 주변 지역의 분위기가 충돌하면서 호러의 농도가 더욱 짙어지는데, 그런 면에서 1950년대 초반이라는 시대적 배경 자체가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대적 배경에 아날로그 감성과 호러의 매력이 철철 넘쳤던 도조 겐야 시리즈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혹시 검은 얼굴의 여우에 아쉬워했더라도) 그 이상의 감흥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2021년에 시리즈 세 번째 작품 赫衣’(붉은 옷의 어둠)까지 출간된 상태입니다.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이후 10년째 소식이 없는 도조 겐야 시리즈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모토로이 하야타의 새로운 이야기라면 그 미련을 조금은 접어둘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2024년에 도조 겐야와 모토로이 하야타를 모두 만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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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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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도쿄. 2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신문사를 그만뒀던 54세의 마쓰다 노리오는 현재 여성잡지 계약직 기자로 일하는 중입니다. 계약 만료 두 달을 앞둔 어느 날, 편집장의 지시로 심령 소재 취재를 시작한 마쓰다는 한 건널목에서 찍힌 긴 머리 여자의 사진과 영상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조작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다 여자의 모습은 분명 유령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여자가 1년 전 그 건널목에서 피살됐음을 알아낸 마쓰다는 큰 충격과 함께 그녀의 정체를 파악하기로 결심합니다. 사건 당시 그녀의 본명이나 주소는 물론 가족조차 경찰이 전혀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마쓰다는 그녀에 관한 놀라운 정보를 하나둘씩 알게 되면서 특종 이상의 흥분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제목도 그렇고 출판사의 소개글도 그렇고, 아마도 작가가 다카노 가즈아키가 아니었다면 읽을까 말까 한참을 주저했을 게 분명한 작품입니다. 물론 미쓰다 신조의 도조겐야 시리즈작가 시리즈였다면 체할 정도로 급하게 찾아 읽었겠지만, 기본적으론 현대를 배경으로 한 유령 호러물은 제 취향 중 좀 아래쪽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 중 한국에 처음 소개된 유령인명구조대의 개정판인 줄 알았는데, 검색해보니 제노사이드이후 11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었고, 그래서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당장 읽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구매신청을 해버렸습니다.

 

주인공인 마쓰다 노리오는 54세의 월간지 계약직 기자입니다. 가정을 내팽개칠 정도로 사회부 기자로 평생을 일해 온 마쓰다는 2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절망감에 사로잡혀 신문사까지 그만둔 바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계약직 기자가 된 그가 계약 만료를 앞두고 취재하게 된 건 심령 소재입니다. 먼저 간 아내를 유령 형태로라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흘리곤 했던 마쓰다지만 정작 심령 소재 취재를 맡게 되자 심한 거부감과 함께 기자로서 막장에 이르고 말았다는 자조적인 태도까지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 마쓰다가 취재를 시작한 이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직접 겪으며 혼란에 빠집니다. 심령사진 속의 여자가 1년 전 끔찍하게 살해된 장본인이라는 걸 안 뒤로 마쓰다는 여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과거 사회부 기자처럼 열정적으로 취재에 나섭니다. 그런데 동시에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리 없는 기이한 현상들도 경험하게 됩니다. 심령현상이 일어나기 직전의 전조라는 나무줄기 쪼개지는 소리를 자주 듣기도 하고, 여자가 살해된 새벽 13분만 되면 울리는 전화기 속에서 희미한 비명 소릴 듣기도 하고, 심지어 사건현장인 건널목에서 유령임에 분명한 존재를 발견하곤 기차가 달려오는 줄도 모른 채 건널목 안으로 달려들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한편에선 살해된 여자의 정체와 사건 이면의 진상을 알아내려는 열정적인 기자 마쓰다의 취재 미스터리가 전개되고, 다른 한편에선 명백히 비현실적인 유령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이 든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사실적인 나머지 (마치 영화 사랑과 영혼처럼) 마쓰다가 유령과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고, 막판에는 마쓰다가 유령의 원통함을 통쾌하게 풀어주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카노 가즈아키가 절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작가는 아니기에 헛된 바람이란 건 너무나도 잘 알았지만 말입니다.

 

취재를 거듭할수록 마쓰다의 마음은 점점 어둡게 물듭니다. 그녀의 정체는 여전히 요원했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해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당한 여자.”, “늘 음울하게 웃으며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성격 나쁜 여자.”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 평판을 얻기까지의 사연을 하나둘씩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한지를 알게 되면서 마쓰다는 특종을 노리는 기자의 마음가짐 대신 쉽게 꺼지지 않을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마쓰다가 바라는 건 그녀의 유령을 안식에 들게 하는 것뿐이고, 실제로 마쓰다는 그렇게 되게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합니다.

 

정서는 전혀 다르지만 영화 사랑과 영혼에 등장한 유령 샘도 생각이 많이 났고, 비참함으로 점철된 한 여자의 삶이란 점에서 일본 드라마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많이 생각났습니다. 다카노 가즈아키 특유의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성실하고 열정적인 기자 마쓰다를 통해 저널리즘 미스터리의 진한 맛을 만끽할 수도 있었습니다. 무겁고 어둡지만 길고 오래 갈 여운도 함께 말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11년 동안 신작을 내지 않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해서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들을 자주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봐도 이후 신작 소식은 나오지 않는데, 머잖아 그가 새로운 작품을 냈다는 소식이 들려오길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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