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념 - 다무라 도시코 작품선 에디션F 9
다무라 도시코 지음, 유윤한 옮김 / 궁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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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념당차게 세상을 움직여온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한 출판사 궁리의 에디션F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다무라 도시코(1884~1945)는 일본 근대 여성소설과 페미니즘 소설의 개척자로 불리는 작가로 그 자신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소설가로서도 파격적인 행보를 남겨서 지금도 일본문학 전공자들이 연구대상으로 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미스터리와 스릴러에 대한 편식이 심한 편이지만, 근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면 국적과 장르를 불문하고 무척 좋아해서 한눈에 단념을 발견하곤 곧바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단편인 구기자 열매의 유혹’(1914), ‘태워 죽여줄게’(1914)와 중편 단념’(1910)이 수록됐는데, 성폭력, 가정폭력, 불륜, 여성과 일, 동성애 등 당시의 여성작가가 선택하기 힘든 민감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100여 년이라는 시간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록작 속 여성들의 현실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여러 장면에서 공감과 공분을 느낄 수 있었는데, 성폭력 피해자가 오히려 비난받는 세태라든가 여성의 사회진출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회, 경제적 자립능력이 없어서 부당한 처지를 감내하며 남성의 그늘 아래 머물러야만 하는 여성의 현실, 동성애에 대한 빗나간 호기심과 편견 등이 그것입니다.

여성의 권리와 지위가 철저히 무시되던 공고한 남성 중심사회에서 이런 민감한 주제들이, 그것도 여성작가에 의해서 집필됐을 때 어떤 반향을 일으켰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성적 특권과 보잘 것 없는 완력을 휘두르는 남성들을 향해 자신의 의지와 미래를 주장하는 주인공 여성들의 모습이 당시의 남성 독자들을 얼마나 당황하게 만들었을지도 익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다무라 도시코에게 일본 근대 여성소설과 페미니즘 소설의 개척자라는 타이틀이 붙은 건 아마도 이런 이유들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문학사적인 가치와 의미에 비해 소설적 재미는 좀 떨어지는 편입니다. 다무라 도시코 특유의 글쓰기 스타일 때문인지 번역의 문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불친절한 전개와 모호한 문장들 때문에 쉽고 편하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묵직한 주제 속에 색채와 풍경에 대한 집요한 묘사와 탐미적인 정서가 농밀하게 녹아든 건 매력적이었지만, 정작 인물들의 말과 행동과 감정에 대해선 지나치게 생략되거나 거꾸로 갑자기 비약하는 경우가 많아서 여러 번 당혹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또한 가장 기대가 됐던 표제작 단념의 경우 분량에 비해 너무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만큼 많은 주제를 동시에 다루고 있어서 좀처럼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굳이 평점으로 총평하자면 소설 외적인 가치와 의미에 별 5, 소설적 재미에 별 3개 정도라고 할까요?

 

에디션F 시리즈 가운데 역시 일본 근대소설의 개척자로 불리는 히구치 이치요의 해질녘 보랏빛이 있는데, 재미있게 읽었던 아사이 마카테의 연가에 간접적으로 등장한 작가이기도 해서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단념에서 느낀 아쉬움 때문에 읽을지 말지 주저하게 된 게 사실입니다. 도서관에서든 서점에서든 첫 수록작만이라도 읽어보고 마음을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족이지만, 에도시대~근대를 배경으로 한 일본소설 가운데 장르를 불문하고 베스트로 꼽은 작품들이 있는데, 그쪽으로 관심 있는 독자라면 아래 포스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memories226/22264203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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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나이프 밀리언셀러 클럽 98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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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커피숍 점주인 히야마 다카시는 4년 전 3인조 강도에게 아내 쇼코를 잃은 상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채 지금은 4살이 된 딸 마나미와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시 범인들은 금세 체포됐지만 13세라는 나이 때문에 제대로 된 처벌 없이 보호시설로 옮겨졌고, 히야마는 이 부당한 조치에 격분하여 국가가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제 손으로 직접 범인을 죽이고 싶습니다.”라는 인터뷰까지 한 바 있지만 결국 아무 보상도, 사과도 받지 못한 채 4년이란 시간을 허망하게 보내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3인조 중 한 명이 히야마의 커피숍 인근에서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4년 전 쇼코의 죽음을 수사했던 형사가 찾아와 자신의 알리바이를 묻자 겨우 억눌렀던 히야마의 분노와 증오는 다시 폭발합니다.

 

천사의 나이프는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야쿠마루 가쿠의 데뷔작이자 그의 이름을 한국에 처음 알린(2009) 작품이기도 합니다. 일본 미스터리에 입문하고 3년쯤 지났을 때라 기성과 신인을 구분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던 시절인데, 생소한 이름이긴 해도 황금가지의 밀리언셀러 클럽작품이라 무작정 장바구니에 담았었고, 지금까지도 대략의 줄거리가 생각날 정도로 무척 인상 깊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 야쿠마루 가쿠의 찐팬이 됐는데, 지금까지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 19편 중 15편을 읽게 된 건 천사의 나이프가 남긴 첫 인상이 진심으로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미스터리 가운데 촉법소년 문제를 다룬 작품은 무척 많습니다. 최근까지도 그 기세가 이어지는 걸 보면 일본 내 촉법소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법을 조롱하듯 고의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촉법소년이 급증하고 있어서 엄벌만이 효과적인 억지력라는 주장과 갱생과 보호가 우선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부딪히고 있는데, ‘천사의 나이프2005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지금도 충분히 논쟁거리가 될 수 있는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아내를 살해한 3인조 중 한 명이 살해당하고 자신이 용의자로 취급되자 히야마는 나머지 두 명의 범인을 직접 만나보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아내를 살해하고도 기껏 보호시설에서 몇 년을 지내다 사회로 돌아온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갱생이란 게 가능하긴 한 건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히야마는 엄벌파보호파로 갈린 여러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한때 범인들을 직접 죽이고 싶다고 공표했던 그 자신 역시 이제는 무엇이 옳은 길인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맙니다. 복수가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 와서 범인들에게 억지 사과를 받아도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도 히야마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3인조 중 남은 두 명마저 습격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뜻밖에도 아내 쇼코가 숨겨온 비밀까지 알게 되자 히야마는 3인조를 공격하는 진범을 알아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야 쇼코의 죽음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적잖은 부분은 가해자인 촉법소년에게 한없이 자비롭기만 한 사법 시스템에 대한 히야마의 분노를 그리고 있으며 가해자의 참회만이 유족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으며, 피해자의 용서만이 가해자의 진정한 갱생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주제의식을 거듭 강조합니다. 하지만 야쿠마루 가쿠는 아내를 죽인 3인조가 4년이 지난 현재 누군가에게 차례로 습격 받는 사건을 설정하고 그 진상을 알아내는 역할에 히야마를 배치함으로써 그의 분노와 작품의 주제의식을 더욱 강렬하게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매특허나 마찬가지인 막판의 불꽃 튀는 연속 반전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여 독자의 혼을 쏙 빼놓는 것은 물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여운을 더욱 깊고 묵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받은 대로 갚아 주는 복수의 쾌감을 좋아해서 고백이나 그리고 숙청의 문을처럼 복수의 대상이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낀 작품들도 있지만, 촉법소년의 처벌과 갱생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정교한 미스터리 속에 풀어낸 야쿠마루 가쿠의 방식은 돌직구 스타일의 복수극과는 또 다른 차원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듭니다.

개인적으론 엄벌파이자 복수파에 가깝지만 오랜만에 다시 읽은 천사의 나이프덕분에 결론 없는 화두를 놓고 잠시나마 고민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정통 미스터리에 촉법소년이라는 사회파 서사를 제대로 녹여 넣은 참맛을 만끽하고 싶은 독자라면 야쿠마루 가쿠의 데뷔작인 천사의 나이프를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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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라이프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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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데프 보이스로 처음 만났던 마루야마 마사키의 신작입니다. ‘데프 보이스는 농인(聾人)과 청인(聽人), 즉 들리지 않는 사람과 들리는 사람이 등장하는 미스터리로 주인공 아라이 나오토는 부모와 형이 모두 농인이지만 본인만 청인인 가혹한 운명을 안고 태어났고, 경찰 사무직을 거쳐 수화 통역사가 되어 살인사건 수사에 합류하는 인물입니다. 이후 마루야마 마사키는 용의 귀를 너에게’,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로 이어진 시리즈를 통해 장애를 테마로 한 미스터리라는 독특한 영역으로 독자의 관심과 호응을 받아왔는데, ‘원더풀 라이프는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좀더 광범위하고 다양한 차원의 장애를 다루는 것은 물론 차별과 편견으로 가득 찬 현실을 비극적인 사건들을 통해 통렬하게 고발한 작품입니다.

 

무력의 왕’, ‘한낮의 달’, ‘불초의 자식’, ‘가면의 사랑등 네 가지 이야기가 수록돼있는데, 경수 손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증 장애인 아내와 그녀를 8년째 간병해왔지만 더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남편의 이야기, 입양아를 직접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장애가 있는 아이를 입양하게 될까봐 걱정하는 사람의 이야기, 무슨 이유에선지 장애가 있는 가족들을 죽이거나 동반자살을 선택한 자들의 기사를 스크랩하는 여자의 이야기, 선천성 뇌성마비로 오른발밖에 쓸 수 없지만 깊고 다양한 지식과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 등 현실에서 부딪힐 수 있는 장애에 관한 다양한 상황과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미스터리로 분류돼있긴 하지만 살인은 물론 특별히 사건이라 부를 만한 것들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작가는 교묘하게 설치해놓은 트릭을 통해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네 가지 이야기를 조금씩 수렴시키는 구성을 사용했는데, 적잖은 힌트를 제공하고 있어서 웬만한 독자라면 중반부쯤이면 트릭의 윤곽을 대략 파악할 수는 있지만 결정적 퍼즐은 막판에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트릭과 퍼즐은 독자의 뒤통수를 치기 위한 오락적 장치가 아니라 작가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무게감과 강도를 최대치로 증폭시키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심어놓았다는 인상을 진하게 풍깁니다. 장애와 비정상은 절대 같은 뜻이 아니고, 장애는 지원하고 도와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같은 시공간에서 공존하면서 익숙해져야 하는 대상이며, 장애는 누구나 꿈꾸는 멋진 인생에 조금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작가는 트릭으로 얽힌 네 가지 이야기를 통해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더풀 라이프의 가장 큰 매력은 뻔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장애의 현실을 피부에 와 닿게 그렸다는 점입니다. 특히 네 가지 이야기 모두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재미를 놓치지 않고 있어서 무겁고 어려운 소재의 부담감을 조금도 느낄 수 없습니다. “이야기 속 현실의 무게감과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의 가치가 양립하는 작품이라는 일본 독자의 평 역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네 가지 이야기가 하나로 수렴되는 장면에선 먹먹함을 피할 수 없습니다. 동정심도 측은지심도 아닌 그 먹먹함은 어쩌면 마지막 한 줄까지 냉정한 입장을 잃지 않은 작가의 태도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하나 멋지지 않은 인생이란 없다!”라는 의미에서 원더풀 라이프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거 없는 해피엔딩이나 막연한 희망을 제시하는 오픈된 결말을 선택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작가가 지극히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마무리를 선택한 것은 아마도 실제로 경수 손상 장애를 가진 아내와 30년 동안 살아오면서 그가 겪었던 숱한 희로애락의 경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 경험들이 아니었다면 독자들은 원더풀 라이프의 지독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리얼리티와 쉽게 잊히지 않을 여운을 결코 만나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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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
시가 아키라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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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어린 딸과 함께 도쿄로 도망친 다카요는 코앞으로 다가온 연립주택 강제 퇴거 때문에 전전긍긍합니다. 밀린 임대료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가 결국 퇴거 직전 개인 사채업자 미나미를 통해 급전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미나미라는 사채업자는 연체에도 관대하고 다카요의 갖가지 고충에 대해 상담도 해주는 등 사채업자의 포악함이나 잔인함 따윈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느 새 미나미에게 많은 걸 의지하며 야금야금 돈을 빌리다가 대출금이 위험수위를 넘어버린 다카요는 끝내 성매매까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연락처를 알아낸 남편이 연락을 해오자 다카요는 사색이 되고 맙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채업자는 뉴스나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고객들을 모으고 관리합니다. 이른바 소프트 사채업이라 불리는데, 여윳돈이 있는 개인이 SNS를 통해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소액의 돈을 빌려주곤 나름 적절한 - 그래도 연 100%에 가깝지만 - 수준의 이자를 받아내는 것입니다. 이들은 협박조의 추심은커녕 위험도가 낮은 연체는 관대하게 눈감아주기도 하고, 고객의 고민에 공감하며 카운슬링도 해주는 등 말랑말랑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러다 보면 고객은 사채업자가 내 편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물론 언제라도 마음 편히 돈을 빌릴 수 있는 상대라고 여기곤 부담 없이 소액을 빌리다가 어느 새 큰돈을 빚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사채업자라고 할 수 있는데, 아이러니한 건 이들의 고객들은 냄비 속 개구리처럼 자기도 모르게 파멸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 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는 바로 이 아이러니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전반부 소제목이 속는 사람’, 후반부 소제목이 속이는 사람으로 구성돼있는데, 전반부가 사채를 쓰다가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져드는 다카요의 사정을, 후반부가 다카요를 비롯하여 여러 고객들을 상대하는 개인 사채업자의 술수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채를 쓸 수밖에 없는 사정도 다양하고, 업자가 고객을 관리하는 전략도 제각각이라 경각심을 품은 채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지만, 꽤 야박한 평점을 준 결정적인 이유는 이 작품이 소설이라기보다는 피해자의 고백업자의 수법을 나열해놓은 장문의 기사 혹은 정직한 르포처럼 읽혔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다카요가 점차 늪으로 빠져드는 과정이나 업자가 고객들을 상대로 장난치는 일 모두 너무나도 익숙한 이야기라서 작가의 전작인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와 같은 궁금증과 긴장감을 전혀 유발하지 못했습니다. 소프트 사채업이라는 신종 사채의 특이함 외에는 딱히 눈길이 끌리는 대목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반전은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조차 애매해서 맥이 풀렸고(이미 앞에서 다 공개된 정보들인데 막판에 마치 반전인 양 서술됐기 때문입니다), 교훈도 여운도 어중간했던 엔딩 역시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의 재미를 기대하고 읽었다가 전작의 후광만 바란 티를 역력하게 느꼈던 후속작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나름 흥미로운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는 소재를 너무 안이하게 활용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5년 만에 한국에 출간된 시가 아키라의 작품이라 꽤 기대를 했지만 아쉬움만 잔뜩 느끼게 돼서 그저 유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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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계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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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늘의 계절은 개인적으로 일본 미스터리 최애 작가 중 한 명으로 꼽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첫 번째 소설집(1998년 일본 출간)이자 ‘D현경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최애 작가로 꼽으면서도 그의 첫 소설집을 이제야 읽은 건 좀 이상한이유 때문입니다. 2년 전쯤인가,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을 거의 다 읽은 마당에 신간 소식은 너무나도 뜸하다 보니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을 두고두고 아껴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데, 그렇게 아껴둔 작품들이 그늘의 계절’, ‘동기’, ‘루팡의 소식입니다. 이제 그늘의 계절을 읽어버렸으니 신간이 나오지 않는 이상 제 손에는 두 편밖에 남지 않게 됐고, 그마저 다 읽고 나면 예전에 읽었던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읽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D현경 시리즈’(일본출간연도)그늘의 계절’(1998) - ‘동기’(2000) - ‘얼굴’(2002) - ‘64’(2012)로 구성돼있습니다. 장편인 ‘64’를 제외하곤 모두 D현경을 무대로 한 단편집인데, 기자 출신인 요코야마 히데오가 세밀하고도 냉정한 시각으로 경찰 조직을 바라보며 직조한 독특한 미스터리를 맛볼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엄격한 조직의 룰이 적용될 것만 같은 경찰 조직이지만, 그 안에서도 개인의 욕망은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욕망이 뿜어내는 부조리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요 동력이 된다.” (‘옮긴이의 말, p272)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된 그늘의 계절의 주인공들은 경무부 소속입니다. 인사담당 조사관 후타와타리 신지, 감찰관 신도 다카요시, 여경 담당계장 나나오 도모코, 비서과의 쓰게 마사키 등 현장에서 수사를 담당하는 형사부가 아니라 조직 관리가 주 업무인 경무부의 인물들이 주인공이라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이 기존의 경찰 미스터리와 확실히 다른 서사를 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주인공들의 공통점이라면 내부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문제를 은밀하고 조용히 처리함으로써 어떻게든 조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주력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쟁자나 경쟁부서를 가차 없이 짓누르거나 치밀한 계획 하에 자신의 공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말하자면 개인적인 욕망과 정치적 야망에 무척이나 솔직한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옮긴이의 말의 부제처럼 전형적인 호모 폴리티쿠스라고 할까요? 탐정 역할을 맡아 조직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그걸 기회 삼아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현실적인 속물들이란 뜻입니다.

이들의 욕망과 야망은 대부분 예상치 못한 반전과 함께 씁쓸한 엔딩을 맞이하지만, 때론 누군가의 지나친 욕망과 야망을 보기 좋게 꺾어놓으며 권선징악의 여운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미스터리 자체보다도 바로 이런 민낯 그대로의 인간들이 풍기는 다양한 욕망과 야망의 냄새가 독자의 구미를 더욱 자극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편집이지만 수록작에 대한 소개 없이 거의 총평에 가까운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족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표지만 보고 코믹하거나 가벼운 미스터리로 오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작품을 비롯하여 요코야마 히데오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던 즈음 랜덤하우스코리아에서 출간된 작품들('종신검시관', '동기’) 모두 표지 때문에 오해받기 쉬운 작품들인데, 실은 그 어느 경찰 미스터리보다 묵직하고 깊은 여운을 남겨주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니 그쪽으로 관심 있는 독자라면 중고로라도 구해서 읽어 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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