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문학동네 청소년 66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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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여름이 있었다. 장마 끝난 뒤 무더운 날이 연속으로 이어지고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연락은 드물기보다 아예 없었다. 길갓집이라 문을 열어 놓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문 앞에 바람이 불었다. 목욕탕 의자를 가져다 놓고 책을 읽었다. 중고 텔레비전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한 삼십 분을 틀어 놓아야 화면이 보였다. 


친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그때는 하지 않았다. 그저 여름이 하루빨리 지나가 문을 닫아 놓고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도 기억은 남았다. 라디오에서 들려주던 유행가, 시보, 매미 소리, 동네 아이들이 공을 차는 소리. 소리와 함께 장면이 남는다. 꽁꽁 얼려둔 보리차가 서서히 녹고 나는 땀을 닦으며 책장을 넘긴다. 


이꽃님의 소설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의 표지를 보며 그때의 여름이 소환되었다. 문 앞에 앉아 있던 내가 그토록 가보고 싶어 했던 상상의 장소가 그려져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회색 벽의 배경이 아닌 푸른 나무와 바람 안에서 앉아 있고 싶다는 그 어느 하루의 소망이 담겨 있었다. 다만 표지에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있다. 


책을 읽기 전에 하는 의식. 후루룩 책 넘기기를 하자 또 한 번 탄성이 일었다. 표지 그림의 엽서가 있었다. 뒤 편에는 소설가 이꽃님의 손글씨 편지가 있었다. 자신에게도 고달팠던 여름의 기억이 있었다고. 그날들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다른 이들의 마음 덕분이었다고. 각자의 여름을 보내고 있을 나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편지였다. 그림에 대해 알지는 못하지만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듯한 두 아이가 앉아 있는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의 표지와 이야기는 지금의 여름을 푸르고 싱그럽게 기억되게 해줄 것 같은 예감이다. 


이꽃님의 이야기 세계를 좋아한다. 관계와 마음에 지쳤을 때 이꽃님의 소설을 펼치면 저항 없이 나는 이야기 안으로 들어간다. 페이지 터너로서의 훌륭한 자격을 갖췄다. 어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가는 걸까. 죽이고 싶은 아이의 정체는 무엇일까.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역시 만지는 것만으로도 어떤 한 시절의 여름이 내게로 찾아올 것 같은 책이었다. 


아침밥을 먹다가 전학을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아이가 있다. 전학을 갈래도 아닌 전학 가서 잘할 수 있지라는 말을 듣는 그 아이의 이름은 하지오. 나이는 열일곱이고 유도를 한다. 그날 처음으로 아빠의 존재에 대해 듣는다. 아빠 없는 사람은 없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도 깨닫는다. 엄마는 아프다. 지오의 세계가 기울어진다. 


듣고 싶지 않아도 다른 이의 속마음을 들어야 하는 아이가 있다. 지금은 파출소 경찰 남경사의 속마음을 듣고 있다. 유찬은 그런 아이다. 오 년 전의 사고 이후 타인의 속마음이 들린다. 엄마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의 속마음이 들렸다. 할머니만이 유일하게 찬이를 기다려주었다. 남경사의 속마음을 듣는 동안 짧은 단발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찬이 앞에 나타난다. 그날부터 기울어진 찬의 세계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간다. 


지오와 찬이 만나는 순간 세계는 조금씩 변화한다. 세계는 나의 세계이다. 유일무이한 나는 세계의 중심이다. 내가 사라지면 세계는 없다. 누군가의 마음을 듣는 아이와 누군가의 마음이 되는 아이는 여름을 지낸다. 오해하면서 여름을 걷고 이해하면서 여름을 살아낸다.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다. 서로의 여름 안으로 들어가기. 


나의 여름 안에서만 살았다. 무덥고 외롭고 가난해서 닫아두었던 여름이었다.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를 읽으며 청량하고 활기차고 여유로운 기억으로 여름을 업데이트했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들의 답으로 살아가지만 살아야 된다, 살아야 된다는 간절한 마음을 받아들이는 일로 오답 정리를 하는 삶이어야 한다고 소설은 말한다. 이 여름에 읽은 시 한 편을 답장으로 보냅니다.


여름잠


-안미옥


아주 열린 문. 도무지 닫히지 않는 문.

나는  자꾸 녹이 슬고 뒤틀려 맞추려 해도 맞춰지지 않았던 내 방 문틀을 생각하게 돼. 아무리 닫아도 안이 훤히 보이는 방. 작은 조각의 침묵도 허락되지 않던 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주 사적인 시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아서.

네 문을 닫아보려고 했어. 가까이 가면 닫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비틀어진 틈으로 얼굴을 밀어넣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게 되었어.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네가 가진 것은 모두 문밖에 나와 있었고, 나는 그게 믿어지지 않아서 믿지 않으려 했다.

춥고 서러울 때. 꿀 병에 담긴 벌집 조각을 입안에 넣었을 때. 달콤하고 따듯했어. 꿀이 다 녹고 벌집도 녹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 녹아도 더는 녹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는 거야. 하얗고 끈끈한 껌 같은 것이. 그런 밀랍으로 만든 문. 네가 가진 문은 그런 것 같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검은 돌. 네가 준 돌을 볼 때마다 단 것이 떠올라. 돌은 겹겹이 쌓인 문이고, 돌 안에 켜질 초를 생각한다. 내내 초를 켜려는 사람이 있었다. 초를 켜면 문이 다 녹는데, 자꾸만 그것을 하려는 너에게. 나는 조언을 해. 그건 다 내게 하는 말이야. 모두 나 자신에게 하는 말들뿐이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

잠시 죽었다가 깨어나는 삶과 죽었다가 잠시 깨어나는 삶. 둘 중 무엇을 선택하겠냐고 물었다. 나는 죽었다가 잠시 깨어나 있는 것이면 좋겠다. 어디서부터 시작이고 어디까지가 끝인지 알 수 없어서 자꾸 깨어나는 것 같아. 마지막 인사는 마지막에 하는 인사가 아니라 마지막이 올 때까지 하는 인사일까.

따뜻한 물로 손을 씻을 때마다 네 생각이 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일들은 마음에 노래 남는다고 하더라.


안녕, 잘 지내. 여름을 잘 보내.


서로를 머뭇거리지만 용기를 내어 다가가는 지오와 찬의 여름 이야기와 시 한 편이 말하고 싶은 건 같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름을 잘 보내달라는 애틋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문학은 그렇게 세계에 존재합니다. 사라지지도 망하지도 않은 채 말이지요. 보내주신 마음을 소중하게 담아 여름 안에 잘 넣어 놓을게요. 이로써 우리의 여름이 이제는 괜찮아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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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이곳이 좋아집니다 - 낯선 곳에서 나 혼자 쌓아올린 괜찮은 하루하루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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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며 스물여섯에 도쿄로 상경한 마스다 미리의 일상 이야기가 담긴 『매일 이곳이 좋아집니다』를 읽으며 어느 한 시절을 떠올렸다. 마스다 미리는 오사카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도쿄로 왔다. 되도록이면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자립한다는 의지를 가지고서 말이다. 살 곳을 구해야 한다. 직업이 마땅치 않아 집을 구하기 힘들었다. 가는 곳마다 거절을 당했다. 


빨리 집을 구해야 하는데. 낙담한 채 길을 걷다가 오래된 중개업소를 발견했다. 다행히 사람 좋아 보이는 사장님을 만나 역과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낡았지만 햇빛이 잘 드는 곳이었다. 집을 구하러 다니다 보면 알게 된다. 나의 어제와 오늘이 얼마나 한심한지. 분명히 돈을 벌러 일을 다녔는데 왜 나의 잔고는 이 모양인지. 좀 더 분발해야겠다 와 이렇게 살아서 뭐해 사이에서 갈등. 그러다 그냥 이 집으로 할게요. 


마스다 미리는 집을 구하고 호기롭게 월세를 깎기도 한다. 한곳에서 사면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엄마의 조언을 듣고 전자제품도 싸게 구입한다. 당장 일을 구할 수는 없어 저금한 돈을 가지고 생활한다. 밥은 해 먹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낮잠을 자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느긋한 생활을 한다. 원래 걱정이 많은 성격이었는데 그때만큼은 마음을 놓고 저금한 돈이 있는데 하는 생각으로 지냈다고 한다. 


모두들 그랬겠지만 코로나로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얼레벌레 어찌어찌 살아도 좋았을 시간이었다. 걱정은 넣어두고 불안은 밀어두고서 말이다. 걱정과 불안과 슬픔의 함량을 빼면 시체라 그러질 못했다. 허둥지둥 부랴부랴 다음 직업을 갖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괜찮아, 몇 달은 넷플릭스 보면서 누워 있어라고 말해주면 정말 정말 좋을 텐데. 


『매일 이곳이 좋아집니다』는 괜찮은 하루를 차곡차곡 쌓아서 보여준다. 일을 하지 않아도 걱정은 없다. 일을 할 예정이니까. 본격적으로 일을 찾는다. 그래도 불안하지 않다. 나만의 필살기를 활용해 영업을 하면 되니까. 연고도 없는 도쿄에서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시작할 때 마스다 미리는 출판사에 찾아가 포트폴리오를 건넨다. 자신이 만든 필기도구와 함께. 


요즘에는 집꾸에 빠졌다. 집 꾸미기. 이사 온 지 5년째. 아직도 집의 구조를 바꾸고 있다. 필요 제품이 아닌 불필요 제품이지만 소유하고 싶은 제품들이 많다.  분리수거장에서 괜찮은 물건이 있으면 가져오고 색깔과 분위기를 고려하지 못하고 단순히 갖고 싶다고 해서 사버린 가구들이 한가득이라 집은 임시 거처의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이곳이 좋다. 매일 좋아지고 있다. 나의 집. 정말 정말 집에 가고 싶을 땐 찍어둔 나의 방 사진을 본다. 조금만 기다려. 곧 가서 누워 줄 테니까. 춘식이로 꾸민 나의 방아. 걱정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 같으면 세상은 평화로 가득 찼을 것이고 허둥지둥한다고 해서 불안이 사라질 것 같으면 세계는 행복으로 충만해졌을 것이다.  『매일 이곳이 좋아집니다』는 걱정, 불안 없이 지금 여기 이곳이 좋아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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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망뤂세이 - 데굴데굴 얼레벌레 어떻게든 굴러가는 잔망루피 이야기
정지음 지음 / 유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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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망뤂.


어쩌자고 널 알게 돼버렸을까. 나 역시 분홍색을 좋아해. 사실 노란색도 좋아해. 노란색과 분홍색이 있으면 둘 다 사고 싶어 심장이 벌렁거려. 책상과 방에는 노란색 반 분홍색 반. 반반 무 많이 같은 인테리어 즉 센스와 일관성 없는 혼종의 색채를 띠고 있지. 그래도 좋아. 좋아하는 것들로 꾸밀 수 있어서. 그러려면 너의 말처럼 열심히 일해야겠지. 


너 요즘 인기 많더라. 얼마 전에 마트에 갔는데 에너지 음료가 너였어. 네 얼굴만 병에 스티커로 있었으면 안 사려고 했는데 네 몸 자체를 병으로 형상화했더라고. 이 집 마케팅 잘하네. 그러면서 너를 사버렸지 뭐야. 사무실 냉장고에 채워 넣을 거라서 보고 있으면 너의 귀여움으로 힘이 나지 않을까 일하다가 힘들면 치트키로 사용하려고. 내일 월요일이니까 가자마자 널 꺼낼게. 조금만 기다려. 


내가 좋아하는 정지음 작가가 너를 주제로 에세이를 썼다고 하길래. 고민도 하지 않고 『잔망뤂세이』를 샀어. 나 이 정도는 벌어. 걱정 마. 잔망뤂아. 


곰돌이 푸와 카카오 친구들이 귀여움을 앞세워 먼저 이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나는 잔망뤂 네가 곧 이 세계를 평정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어. 『잔망뤂세이』를 내 돈 내산 했거든. 그 좋아하는 라이언 에세이도 사지 않은 내가 말이야. 『잔망뤂세이』를 발견한 건 오후 네 시가 넘어갈 때였어. 잔망뤂 너는 알지? 그 시간이 어떤지. 시계를 봤는데 아직 네 시? 이거 실화임? 와 환장하겠네 하는 시간이잖아. 


난 좀 융통성이 없고 정석대로 해야 하는 타입이라 요령이 없어. 시키는 건 물론이고 시키지 않을 일까지 하지. 그래서 가끔 소리를 듣기도 해. 집에 갈 시간까지 두 시간이나 남았다니. 몰래 한숨을 쉬고 인터넷 서점 사이트로 들어갔어. 몰라 어쩌다 널 발견했는지. 정신없이 클릭클릭하다가 『잔망뤂세이』가 나온 걸 보고 바로 질렀어. 질러라 질러 소리 질러 예!


토요일인데도 왜 나는 일찍 일어났을까. 휴. 


괜찮아. 내 옆에는 어제 도착한 비닐만 뜯은 『잔망뤂세이』가 있잖아. 초판이라고 뤂BTI 포토카드도 넣어줬네. 역시 일찍 지른 새가 사은품도 먼저 받는다고. 고마워. 너의 둥둥 한 핑크빛 몸은 정말 사랑스럽구나. 그런 네가 알려주는 인생의 지혜까지는 아니고 인생의 잔망스러운 조언은 웃기고 공감 되고 귀엽다. 뽀로로가 유명해졌을 때 크게 축하해 주지는 못한 걸 후회하는 잔망뤂. 회사에서 무엇이라고 불리든 넵이라고 예의 있게 대답하는 잔망뤂. 다 덤비라고 허세 있게 말했지만 겁이 나서 한 명씩만 덤비라고 정정하는 잔망뤂. 


맞아.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늦었어.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부자가 되기만 해도 좋지. 당당하게 놀자고 말해줘서 감동이야. 귀여운 내가 참는다는 말은 거지 같은 일을 당할 때마다 생각할겡. 『잔망뤂세이』를 마구마구 추천할게. 친구가 많지 않아서 많지 않다기보다 아예 없어서 『잔망뤂세이』 영업에 차질이 있겠지만 누군갈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잔망뤂세이』 재미있다고 꼭 사서 보시라고 잔망뤂무새처럼 떠벌리고 다닐게.


잔망뤂. 


자꾸 불러서 미안. 


주말에 나는 방바닥과 물아일체로 지냈어. 그래도 괜찮은 건 『잔망뤂세이』에서 네가 말해준 이야기들 덕분이야. 항상 건강하고 너의 귀여움으로 세상을 구해줘. 나는 네가 구해준 귀여운 세상에서 춤을 추며 날로 귀여워지고 있을게. 단 절망이랑은 싸우지 않을게. 그냥 요리조리 잘 피하면서. 잔망뤂 행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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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사람
홍은전 지음 / 봄날의책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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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아는 가장 안전한 방식은 독서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위험한 방식은 현장으로 들어가는 일. 박종필은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전자의 앎이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라면 박종필의 앎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일 것이다. 전자의 앎이 폭넓음을 지향한다면 박종필의 앎은 정확함을 지향할 것이다. 

(홍은전, 『그냥, 사람』中에서)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앎'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다시 앎은 '앎음'이라고. 홍은전의 산문집 『그냥, 사람』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알고 앓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거꾸로 말하면 알지 못하고 아프지 않으면 아름답지 않은 일이 된다. 아름다운 일이 되려면 알아야 할 것도 그로 인해 아플 일도 많아야 하는데 모르는 채로 건강하게 살고 싶기만 하다. 이기적인 생각이다.


내가 책을 왜 읽을까에 대한 답을 『그냥, 사람』을 통해 구할 수 있었다. 안전한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싶어서. 독서는 그게 된다. 현장의 일로 사람의 일로 뛰어들지 않아도 책을 펼치면 세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비겁하다고 하지 않는다. 이해하고 싶고 폭넓음을 지향하고 싶은 거라고 말해준다. 노들야학에서 오랜 시간 교사로 일한 홍은전은 자신이 겪은 세계를 섬세하고 정확한 언어로 세상에 내보인다. 


『그냥, 사람』을 읽으면서 여러 번 마음이 먹먹해졌다. 내가 아는 것이란 얼마나 빈약하고 허약한 것이었던가. 반성과 슬픔이 몰려왔다. 대체 내가 무얼 알고 있었단 말인가. 아는 것은 모르는 것이 되어버렸다. 우물 안 개구리. 홍은전은 노들야학 교사를 그만두고 도서관에서 특강을 듣는다. 그동안 자신이 알던 세계의 지식과는 다른 현실의 이야기와 마주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우물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개구리라는 걸 받아들인다. 따듯하고 건강한 시선이었다. 


다름에 분노하지 않는다. 홍은전은. 『그냥, 사람』에 쓰인 글들은 그래서 아프고 활기찼다. 언뜻 앞뒤가 안 맞는 말이지만 읽어보면 안다. 아프지만 왜 활기찰 수밖에 없는지. 모르고 있었던 현실에 그렇지만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분명 한국 사회는 이상하다. 잘못되었다. 바로잡아야 함에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외면한다. 


시설에서 나와 자립하며 한 달에 이십만 원을 모아 이천만 원을 만들어 노들야학에 기부한 사람. 활동보조인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장애 등급을 받지 못해 홀로 죽어간 사람. 노숙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시설에 들어갔지만 이내 술 냄새가 난다고 쫓겨난 사람. 그런 그이가 걱정 되어 기다린 사람. 추모 공원을 짓기 위해 이웃집 사람들에게 떡을 돌리는 사람. 살아 있는 어머니에게 임대 아파트를 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떠난 사람. 


그들은 그냥, 사람이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나누는 건 뭉특한 셈법이다. 정교하지도 분석적이지도 않다. 빈자와 부자. 임차인과 임대인. 정상과 비정상. 생존자와 희생자. 철거민과 용역 깡패. 서로를 반대편에 세워 놓고 싸워야 하는 이곳에서 『그냥, 사람』은 깨닫게 해준다. 우리 모두는 그냥, 사람이라는 것을. 일을 하다가 힘이 들면 이런 생각을 했다. 너나 나나 그냥, 사람, 똑같은 인간 아니냐. 


나로서 살아가게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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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몬스터
이두온 지음 / 창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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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사랑이다. 그리고 괴물. 이두온의 장편소설 『러브 몬스터』는 그야말로 사랑에 미친 괴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은은하게 돌아 있는 광인이 아닌 제대로 돌아버린 광인들이 한 무더기로 등장한다. 영화 《드림》에서소민은 홍대의 "정상이 아니야."라는 말에 이렇게 받아친다.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친년으로 살면 그게 정상 아닌가." 그 말에 홍대는 그대로 설득되고 만다. 


지금으로선 근로소득만이 유일한 소득원이라 정상인인 척 연기하면서 일을 한다. 그러다 가끔씩 정체가 드러나고야 만다. 한여름인데도 긴팔 못 잃어 정신으로 출근한다든지, 경조사 안 챙기기, 사회가 정해 놓은 규범 무시하면서 나이 먹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럴 때 속으로는 돌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서 다행인 건가. 하지만 그대의 생각을 간파하고 말았는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이런 상투적인 비유 쓰기 싫지만 갈수록 줄어드는 에너지가 창의력이라 그냥 갖다 쓴다.) 사랑의 서사는 끝이 없다. 사랑의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의 사람은 사랑 없이 살수 있나요에 대한 질문의 답은 놉이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무조건 필요하고 원하는 것이다. 


파괴, 혼돈, 불안, 광기의 무드로 소설을 물들이는 이두온이 빚어내는 사랑의 형태와 빛깔은 어떠할까. 아니나 다를까 제목마저도 이두온스럽다. 『러브 몬스터』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라고 부르는 사랑의 형식을 거부한다. 이것마저도 사랑일까. 소설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거야. 소설은 쉬지 않고 강조한다. 


엄지민, 염보라, 구인회, 주우경, 오진홍, 고미선. 이들의 환장할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어어 하는 순간에 발을 잘못 디뎌 지뢰를 밟고야 만다. 터진 지뢰에서는 네가 정의하는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폭발한다. 도시의 작은 수영장을 배경으로 엄마의 실종이라는 사건으로 직업도 나이도 다양한 인물이 펼치는 『러브 몬스터』는 전부 미쳐 있음의 세계이다. 


미친 세상에서 미친 건 정상이니까. 


그들 모두는 정상인이다. 사랑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다의 선언을 몸소 실천한다. 파괴의 끝은 시작이다는 낙관을 주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이 끝나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 단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여기가 아닌 그곳에서 끝을 맞이하는 것. 이두온의 소설은 작가의 말까지 읽어야 완성된다. 긴 소설을 읽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데 읽어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한다. 


긴 소설을 쓰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데 써주어서 이 세계의 독자는 고마움을 표합니다. 괴물들. 부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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