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 - 금은방 강도 사건부터 도깨비집 사건까지, 기이하고 괴상한 현대사
곽재식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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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을 읽어가면서 느낀 점은 와 나 한문 공부 다시 시작해야겠네였다. 갑자기? 뜬금없이?는 아니고 대한민국의 기이한 사건을 신문 기사를 통해 정리해 주는 방식이라 인용된 신문 지면은 조사 빼고는 전부 한문이었다. 더듬더듬 기억을 떠올리며 문맥에 맞춰 읽어가려 했지만 포기. 그렇다고 한 글자씩 찾는 정성은 부족해서 신문 기사는 얼렁뚱땅 읽었다.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은 미스터리 잡지 『미스테리아』에 기고된 대한민국에서 오래전 일어난 기이한 사건을 다룬 연재물 중에 열다섯 편을 추려 모은 책이다. 일제강점기에서 1970년대 사이에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사건 중에서 당시에는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건을 다룬다. 서문에서 곽재식은 실화이므로 사건을 호기심 측면에서만 다루지 않겠다고 밝힌다. 


지금이야 언론, 방송, 유튜브 채널이 활성화되어 사건이 일어나면 전후사정이나 사건 정보도 쉽게 알 수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다. 가령 「어린이를 죽인 괴물」편을 보면 마을에서 백주대낮에 어린이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한마을에서 연달아 세 명의 아이가 사라진 것이다. 두 명의 아이는 끔찍한 주검으로 돌아왔고 한 아이는 끝내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CCTV. 현대 사회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바로 확보해야 하는 물증 중에 하나이다.


당시에 그런 게 어디 있겠는가. 마을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호랑이가 잡아갔다더라. 소문이 퍼져 굿을 하기에 이른다. 끝내 범인을 밝혀내지 못한 채 사건은 종결된다.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에 실린 사건 중에는 범인이 밝혀진 사건 보다 미제로 끝난 사건이 더 많다. 범인이라고 확신했지만 범인이 아니었고 신문 기사의 자료만으로는 그 사건의 끝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는 사건도 있다. 시대적 상황과 배경이 그러했다. 


가장 황당했던 사건은 「남대문 금은방 권총 강도와 영어 학원」편이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 없는 점 이해 부탁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다 다시 내려오기에 알 수 있는 점은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 점차 잔혹하고 끔찍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범죄의 동기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는 지점이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범인을 잡아 범행 동기를 물어보면 동기가 명확했다. 황당하지만 서글픈 동기라도. 바로 「남대문 금은방 권총 강도와 영어 학원」의 범인처럼. 


한자가 없는 지금의 신문을 읽는다. 사건의 개요부터 종결 과정까지 한글로 자세히 나와있다. 방송에서도 한국말로 알려준다. 그런데도 과거 한자로 범벅된 신문 기사를 읽는 것만큼 이해가 쉽지 않다. 도대체 왜 범행을 저지른 것일까. 설명이 되지 않는 동기들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의 사건은 미스터리가 되어 버렸다. 범인이 잡혀 형을 살고 있는 사건임에도 말이다.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에 실린 사건에 숨겨진 가슴 아픈 시대적 배경처럼 오늘날의 사건도 대한민국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노동소득으로는 집을 사지 못하고 아예 취업을 포기해버리는 젊은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끝내 생을 버리고 일터에서 갑질과 부당한 대우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염원이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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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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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초자연적인 현상은 차에서 자다 깨 멀리서 본 하얀 형상이 전부이다. 가로등도 없는 산길을 가고 있었다. 분명 아무도 없어야 했는데 멀리 하얀 물체가 아른거렸다. 꽤 어린 시절의 기억인데 아직도 궁금하다. 뭐였을까.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의 혼령이었을까. 다시 생각해 보면 어렸고 자다 일어났고 그때까지 들었던 괴담의 영향이 정신에 미쳤을 거였다. 


그 후로는 없다. 가위눌림이 몇 번 있었지만 공부하면서 받은 스트레스가 뇌에 이상을 일으킨 거라 기이한 일에 해당하지 않는다. 요즘엔 일하는 가위를 눌린다. 몸은 이곳에 있는데 정신이 사무실에 가서 일을 하고 있다. 짜증 나서 빨리 깨고 싶은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러다 다시 잔다. 피곤이 가위를 이긴다. 바위가 아니고.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가 다가노 가즈아키의 『건널목의 유령』은 제목 그대로 유령을 다룬다. 전작과는 다른 결이라 제목만 이러겠지 했는데 본격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가답게 본격 유령 서스펜스 추리소설을 오랜만에 발표했다. 무려 11년 만이다.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추가되었다. 과작을 하는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는 것. 아쉽게도 하라 료의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는 더 이상 못 읽는다. 다음 편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건널목의 유령』은 시모기타자와역에서 찍힌 사진과 동영상의 실체를 추적한다. 인명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역에서 기차가 몇 번이나 급정거를 했다. 기관사는 건널목에서 철로로 들어오는 형체를 보기도 한다. 프리랜서 잡지 기자 마쓰다는 독자 제보로 들어온 촬영된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의문과 호기심을 느낀다. 곧장 취재를 시작하고 자신도 이상한 체험을 하기에 이르는데. 


사건의 진실을 알아갈수록 놀라움과 안타까움의 연속이다. 단순히 잘못 본 것이라고 여기기에는 현상이 명확했다. 철로 주변을 확인하다가 한 여성의 형체와 마주하고 새벽 1시 3분에 여성의 신음 소리만이 들리는 전화를 받는다. 처음에는 자신이 과거의 기억을 안고 살고 있는 탓에 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건널목에 유령은 건널목의 사건이 된다.


추리소설과 유령이라니. 이 조합은 대체 무엇인가. 대체로 사회가 어둡고 망가져 가는 때에 기담과 괴담이 성행한다고 한다. 지금이, 그렇다. 90년대 중후반에도 그랬다. 방송사마다 귀신을 소재로 다큐와 드라마를 내보냈다. 어린 나는 그걸 보면서 무서워했고. 문을 열었는데 검은 한복을 입은 여자 귀신은 역대급으로 무서웠다. 한동안 방문을 열지 못할 정도. 


그러고 보니 괴담의 주인공은 여성이 많다. 약하고 차별받는 주체였지 않은가. 오래전부터. 『건널목의 유령』 역시 고전적인 서사를 따라간다. 기차를 급정거하게 만드는 유령의 실체는 여성이었다. 마쓰다는 끈질긴 취재를 통해 사건의 진실에 가닿는다. 죽어서까지 유령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서사는 서글펐다. 죽음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다른 세계로 무사히 가기 위해 살아 있는 자의 노력이 필요하다면 나타나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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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살해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9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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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은 한 번에 단숨에 읽어가야 한다. 흐름이 깨지지 않도록 말이다. 중간에 일이 치고 들어와도 무심하게 넘기는 여유까지 있다면 더 좋다. 그러한 온전한 하루가 있어야 한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하루에. 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던져주고 싶다. 1권부터 9권까지. 주중에 하루씩 총 9주에 걸친 건조하고 생기 없는 스웨덴의 풍경 속에서 살게 해주고 싶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 9권인 『경찰 살해자』는 초반부터 사건 안으로 독자를 밀고 들어간다. 등 뒤에서 떠민다. 1970년대의 스웨덴으로 시간 이동을 한 우리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사건을 조망한다. 팔짱을 낀 채 범행이 일어난 곳에서. 그 차를 타지 말아야 한다. 『경찰 살해자』의 처음과 함께하면 이 생각부터 든다. 하지만 여기는 소설의 세계.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 필연성의 세계. 


한 여자가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가 오기까지는 삼십분. 눈치 좋은 독자라면 여기에서 여자에게 차를 태워주겠다는 누군가 등장하겠지 생각할 것이다. 맞다. 여자 앞에 차가 선다.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차를 타지 않았겠지. 여자와 남자는 안면이 있다. 여자가 차에 오르고 여자의 집과는 다른 방향으로 차는 움직인다.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으로 그들은 간다. 여자가 마지막에 한 생각이란 나뭇더미에 눌린 뒤통수. 머리카락 걱정이었다. 


그렇게 여자는 사라진다. 여기서 마르틴 베크가 등장한다. 그는 동료 콜베리와 경찰 제복을 차려 입고 순찰차에서 잠복 중이다. 린드베리라는 도둑의 절도 증거를 찾기 위해서. 이 사건이 나중에 어떤 역할을 할지. 아직 독자는 궁금하다. 실종된 여자는 어쩌고. 워워워. 조금만 기다리시라. 린드베리는 덜미를 잡힐 것이다. 다음 장면에서 마르틴 베크는 사건이 일어난 곳에 서 있다. 


답답하고 느린 수사의 정수를 보여주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독특하게 그 점으로 긴장감을 선사한다. 여자는 죽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시체가 있다. 어떻게 찾아야 할까. 자발적 실종인가. 사건에 관계된 건가. 마르틴 베크는 자신의 이름으로 농담을 건네는 경찰 뇌이드와 함께 사건을 조사해 나간다. 혹시 놓친 부분이 없을까. 마르틴 베크는 특유의 꼼꼼함과 직관력으로 증거를 찾아 나간다. 


추리 소설의 구성이 그러하듯 도둑 린드베리는 그냥 나오지 않는다. 뜬금없는 인물과 사건은 없다. 린드베리는 후에 사건을 풀어가는데 얼렁뚱땅의 역할을 한다. 여기서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다. 물건과 차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된 2인조가 등장한다. 총격 사건이 터지고 경찰관 한 명이 죽는다. 범인도 한 명 죽는다. 달아난 도둑은 경찰 살해자로 수배된다. 


세 개의 사건이 맞물리면서 사건은 해결된다. 직업적인 허무함과 인간성의 상실감 앞에서 인물은 방황하고 갈등한다. 범인을 잡는 이야기 안에 고독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단 하루의 날. 어떠한 일에도 방해받지 않은 채 『경찰 살해자』를 읽어가기를 바란다. 쓸쓸하고 서글픈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무사히 춥고 막막한 스웨덴에서 탈출구를 찾아 나오기를. 아직 시리즈 한 권 더 남았다.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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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1~2 세트 - 전2권 사계절 만화가 열전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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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사는지 모를 일이다,라고 쓰고 싶지만 안다. 정확히 언제부터 독서에 빠지게 되었는지. 동네의 한 작은 서점에서 첫 책을 구매한 시점부터이다. 엄마한테 돈을 받아 책을 샀다. 정확한 제목은 모르겠다. 귀신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앗. 쓰다 보니까 기억났다. 『한밤의 귀신축제』. 그 이후로도 공포와 괴담 책을 사서 모으기에 이른다. 아실랑가 몰라. 책을 사면 빨간색 입체 안경이 들어 있던 책도 있었다. 


『한밤의 귀신축제』 이후에는 위인전으로 갔다. 『유관순』을 읽고 울었다. 만세 운동을 하기 전 산에 올라 결의를 다지던 장면에서. 책을 많이 사주는 집안 분위기는 아니었고 자급자족해야 했기에 학급 문고나 도서관을 이용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학급 문고.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도서관. 그 시절 시리즈는 그렇게 끝도 없다. 책이란 좋은 거구나. 느꼈던 건 집에 혼자 있을 때였다. 늘 혼자가 아니지 않았던 적은 없지만 방학 동안 혼자서 오후를 보낼 때 읽을 책이 있으면 슬프지 않았다. 


책 이야기를 하자면 이 밤이 끝나도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사람을 책덕후라고 한다지. 독서를 소재로 한 웹툰(독서를 소재로 한 웹툰도 있구나. 이걸 누가 볼까 하지만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생겨났겠지.)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읽고 헛웃음과 그냥 웃음, 공감의 웃음들을 지을 수 있었다. 그렇지. 나만 이상한 거 아니었지. 세계 여러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누군가 어떤 나라를 말하면 내가 아 거긴 이러이러해서 별로라는 식의 상대를 화나게 하는 화법으로 대화를 주도했다. 


자꾸 별로라고 하니까 상대가 거기 가봤냐고 해서 당당히 아니요, 책에서 읽었지요 하고 대화는 끝이 났다. 나는 책으로 여행을 배웠다. 한때 여행기만 읽었던 시절이 가져다준 지식이었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에서도 그런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독서 클럽 회원들이 자신들이 뽑은 세계의 근사한 도서관을 추천한다. 거기 가보셨냐는 질문에 얼어붙은 표정이 된다. 다 책에서 읽은 거라는 말씀.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독서 클럽에서 만난 독서 중독자들의 책의 애호를 병맛 코드로 그려낸다.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며 책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한 척 논의한다. 사자, 고슬링, 경찰, 예티, 슈, 선생, 로렌스는 모였다 하면 책부심을 드러내기에 바쁘다. 책의 저자와 목차를 보고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 베스트셀러와 자기개발서는 간단히 무시해 주는 센스. 신입 회원을 받을 때에도 조금 까다롭게 군다. 


1권의 끝에서는 이야기가 난데없이 스파이 첩보 액션물로 튀지만 2권의 첫 페이지를 읽고 나서는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빈칸에 자신의 이름을 넣고 읽어보라고 하는데 나 웃기고 위로받아서 뒤지는 줄. '누구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했다'니. 완전 내 이야기잖아. 책을 좋아한다는 건 화려한 취미의 세계에서는 발도 내밀 수 없고 어휘력은 풍부한 것 같은데 실무적인 부분에서는 도움이 되지는 않는. 


그래 하자 없고 건강하고 예쁜 이들에게는 독서 취미가 없, 나. 없겠지. 없을 거야. 책을 읽지 않아도 그들에겐 세상이 꽃밭이고 꽃길이잖아. 매력 발산으로 추앙받으며 살아가겠지. 오로지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니. 누워서 앉아서 책만 읽어대는 휴일에 나는 피곤하고 병든 사람임이 증명되었다. 2권에서는 자신을 다크섹시라고 불러달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귀여운 설인 인간도. 책이 있어 다행이야.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읽고 나면 안도한다. 


정말 정말 다행이야. 어두움, 공포, 고독, 불안, 고통, 슬픔, 분노, 낭패, 허무들을 책이 감당해 주니까 말이야. 독서 클럽이라면 일방적이고도 지독한 책사랑을 마음껏 늘어놓을 수 있겠지. 그렇지만 사람 만나는 에너지를 모으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추천한다. 종이를 뚫고 나오는 이상한 망신스러움만 극복하면 되거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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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MBTI가 같네요! MBTI 테마소설집 3
김홍 외 지음 / 읻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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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에 한 발 뒤처지는 정도가 아니라 유행이 뭔지도 모르는 채로 살고 있는지라. 그러다 뒤늦게 눈치 없는 애처럼 뭐야, 뭐야 그게 뭐야 한다. 나도 좀 알자 이러면서. 열풍인 MBTI도 그랬다. 유행일 땐 관심도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지겨우니까 MBTI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럴 땐 난 MBTI에 과몰입해 있다.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신난다. 나도 잘 모르는 나를 알파벳 네 개로 알려준다니. 혈액형 한 글자로는 부족했지. 암 그렇고말고. 좀 더 많이 알려줘야지. 종이 검사지로 해본 나의 MBTI는 ISFP이다. 침대와 한 몸. 계획은 세우기만 할 뿐. 귀찮아라는 말을 수시로 하고 상대의 말에 아 진짜?와 그렇구나로 돌려 막는다. 선택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다. 특히 물건 살 때. 얼마간의 고민 끝에 두 개를 다 사고 후회하는 타입.


MBTI 테마소설집 『우리 MBTI가 같네요』는 귀찮음의 대명사 그렇지만 미워할 수 없는 ISFP 이야기가 있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이주란이 썼다. 이주란도 ISFP란다. 어쩐지. 소설을 읽어갈수록 극공감 되어 나중에는 울고 있더라니. 성향이 비슷해서 그런 거였다. 신기방기 동방신기.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감정형 F들을 그린다. 


첫 번째 소설 「여기서 울지 마세요」는 제목부터 나를 울린다. 나이 때문도 아니고 원래부터 나는 눈물이 많았다. 소심하고 예민해서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나는 내가 ISFP라는 걸 아니까 괜찮아졌다. 너의 그런 모습을 MBTI로 책임을 돌리지 말라고 혹자는 말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너는 이렇다고 세상 친절하게 알려주는데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울지 말라고 했지만 「여기서 울지 마세요」를 읽고 울고 다음 편 「9」를 읽으며 대책 없는 계획에 또 한 번 눈물바람. 드디어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ISFP 소설 「안경」 차례. 성향이 비슷한 두 친구의 일상 이야기는 나의 모습 그 잡채. 귀찮아와 다음에 할까를 연발하며 그럭저럭 하루를 얼렁뚱땅 넘기는 나를 사찰하여 쓴 소설이다. 「양지바른 곳」은 독특한 인물이 나온다. 흡혈인 조황주의 내일이 궁금하다. 


나랑 딱 하나만 다른 ISFJ 이야기 「수호자」는 목에 올라탄 귀신과 함께 할 수밖에 없을 주인공 때문에 웃프다. 현실에서 이 말을 꼭 해보고 싶다. 우리 MBTI가 같네요. 같은 ISFP인들을 만나서 맞아, 맞아, 그래, 그래, 아 진짜를 연발해 보고 싶다. 침대와 이불, 베개 정보를 묻고 어떤 자세로 누워 있을 때가 편한지 조언도 좀 듣고 말이다. 


여행 이야기는 금물. 내일 뭐 할까 묻는 것도 금물. 아무 이야기 안 해도 괜찮고 뭐 먹고 싶어요라고 계속 질문하는 ISFP인들의 만남을 호응해 주시라. 원래도 누워서 읽지만 『우리 MBTI가 같네요』는 시작부터 끝까지 누워서 읽었다. 잠깐 앉아 있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귀찮지만 타인의 곤란함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지 않고 어떻게든 도우려고 한다. 다른 성격학 검사도 있다고 하지만 당분간 MBTI로 나를 위로할래. 칭찬만 해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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